79화.
겨울의 끝자락.
두툼한 점퍼를 집어넣을 만큼 높아지던 기온이 뜬금없이 영하로 떨어지더니 이틀 내내 펑펑, 함박눈이 쏟아졌다.
유독 포근했던 올겨울의 작별 인사인 듯싶었다.
어두컴컴한 조사실에 난 작은 창가에 서 하얗게 물드는 거리를 내려다보던 차 회장이 문가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최근 급격히 쇠약해진 몸을 지탱하는 지팡이가 따각, 따각,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설우는 어쩌고 혼자야.”
“조사받다 말고 왜 찾으세요. 더는 볼일 없을 줄 알았는데.”
성태가 원하는 대답을 미룬 채 인상을 쓰고 들어온 화진은 앉자마자 전자담배부터 꺼내 들었다.
부른 이유가 궁금해 검찰청으로 왔지만, 달갑지 않은 얼굴을 마주하니 니코틴이 당긴다.
“설우는 어디 있냐니까.”
“설우가 여길 올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꿈도 크셔라.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저한테 하세요.”
“그만 손 떼.”
“다짜고짜 손을 떼라뇨.”
거리낌 없이 연기를 내뱉은 화진이 입꼬리를 올렸다. 무슨 뜻인지 단번에 이해했지만, 알은 척을 하고 싶진 않았다.
목 끝까지 차오른 욕지기를 참아낸 차 회장이 노기 어린 눈을 치켜떴다.
백 대표는 물론 차 회장과 그에게 돈을 받고 특혜를 준 정계 인사들이 줄줄이 검찰에 소환되었다.
지지율이 바닥까지 떨어진 강일은 언감생심 대선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을뿐더러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장 자리까지 위태로웠다.
화진이 가졌던 자료가 수완 좋은 특수부 검사에게 들어가니 수사엔 막힘이 없었다.
백 대표의 악행과 맞물려 들고일어난 여론 때문에 곧 특검이 꾸려질 예정이었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적폐 세력의 몰락이었다.
“네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수사 압박하고 있다고 들었다. 당장 손 떼!”
“왜요, 구속이 코앞까지 닥쳐오니까 이제 좀 겁이 나세요? 그러게, 제가 뭐랬어요. 말년에 더러운 꼴 보기 싫으면 설우 그냥 두라고 여러 번 경고했잖아요.”
“갑자기 튀어나온 아이가 설우를 쥐고 흔드는 꼴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는 게야? 설우한테 해가 되는 아이라니까.”
“설우한테 해가 된 건 회장님이죠.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면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죠? 어떻게 연이를 평창동에…. 하, 입에 담기도 끔찍하네. 참고 눈감아주니까 제가 허수아비 같아 보이셨어요?”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자 화진이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거리던 설우의 눈동자가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 빠지지 않았다.
홀로 꿇어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아들을 본 엄마의 심정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떨어뜨려 놓는 게 옳은 일이다! 왜 이리 말귀를 못 알아들어. 넌 지금 네 아들 앞길을 막고 있는 게야!”
“조금은 뉘우치지 않을까 그래도 조금은 후회하지 않을까 했는데. 변함이 없으시네요.”
“시간이 지나면 너도 설우도 깨닫게 될 게다. 쯧, 할아비가 탄탄대로를 걷게 해주겠대도 저 모양이니.”
하!
화진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끝까지 제가 옳다고 억지를 부렸다. 아집만 남아 버린 추악한 노인이 측은할 지경이었다.
삶이 끝나기 직전에 필요한 건 가족의 정이란 걸 왜 깨닫지 못하는 걸까.
“아픈 척 열심히 하세요, 교도소보단 병원이 나을 테니. 회장님이 그렇게 좋아하는 거래도, 타협도 없습니다.”
“뭐야?”
더는 대화를 이어나갈 필요가 없다고 느낀 화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회장은 좁은 어깨를 부르르 떨며 주먹을 쥐었다. 구속이 점점 확실시되어갔지만, 그의 자존심은 꺼내 달라 비는 걸 허락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한 짓을 연이가 전부 알고 있다.”
“?”
“할아버지와 두 번 다신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절대 찾지 말라, 고 전해 달라네요.”
“여자에 미쳐 천륜까지 저버리는구나, 얼빠진 놈.”
“누구보다 설우 성격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해요, 빈말 아닐 겁니다. 그럼 잘 지내세요, 회장님. 이제 정말 완벽한 남이네요.”
설우가 차 회장과 절연을 선언했으니 차씨 집안과 얽힐 일이 사라진 화진이 입꼬리를 삐쭉, 올리고 조사실을 나섰다.
그녀에겐 나쁘지 않은 결말이었다.
***
이든과 첸이 자리를 비운 사이, 밤낮으로 연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된 설우는 답지 않은 온화함을 뽐내며 직원들을 당황하게 했다.
연의 꿈이 사라져 밤에 깊게 잠드는 것도 그의 들뜬 기분에 큰 부분을 차지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한 번 더 확인을 했어야 하는데, 현진과 M&A를 조율하느라 미처 살피지 못했습니다. 서 팀장이 워낙 꼼꼼한 친구라 오탈자가 생기리라곤….”
“알겠습니다, 수정해서 다시 올리세요.”
“예?”
사업 기획안의 오탈자를 뒤늦게 확인한 이 부장은 사색이 되어 사장실로 뛰쳐올라왔다.
제발 아직 읽지 않았기를 수없이 기도하며 설우의 앞에 앉은 이 부장은 돌아오는 반응을 믿을 수 없어 눈을 끔벅였다.
“이만 나가보세요.”
“예?”
수정해서 다시 올리라고? 이만 나가라고? 이게 정말 끝이라고?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신사업부는 눈이 없냐는 말부터 시작해 허술한 결재선에 대해 독설이 쏟아져야 하는 입에서 나온 말이 믿기지 않았다.
“나가보시라고요, 이제 곧 점심시간인데.”
빨리 좀 나가라고.
연이 있는 개인 공간을 잠시 돌아본 설우가 인상을 썼다. 마지막 업무를 어서 해치우고 연에게 가고 싶었다.
“예, 알겠습니다.”
설우의 마음이 바뀔세라 결재판을 챙겨 일어난 이 부장이 후다닥, 사장실을 나섰다.
살며시 문을 닫은 이 부장은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정 실장에게 다가갔다.
“사장님 어디 아프신 거 아니야?”
“이번 주 내내 저 상태세요. 사모님이랑 같이 다니셔서 그런가.”
“안 그러던 양반이 저러니까 오싹할 지경이야. 내던져질 서류를 어떻게 주워야 불쌍해 보일지 한참 고민했는데.”
“또 언제 돌변하실지 모르니까 욕먹을 일 있으면 빨리 보고하세요.”
“내려가서 찾아봐야겠다. 수고해, 정 실장.”
“예, 부장님도요.”
호들갑을 떨던 이 부장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사라지자 인터폰이 울렸다.
-정 실장.
“네, 사장님.”
-먹던 대로 중국집에 주문하세요. 지금 12시니까 1시에 도착하도록. 정 실장은 식사하러 가세요. 2시까진 집무실에 아무도 들이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짜장면 정말 좋아하시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둔 중국집 전화번호를 누른 정 실장이 익숙하게 주문을 마치고 겉옷을 챙겼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올 때마다 환한 얼굴로 인사하는 연을 떠올리니 설핏, 웃음이 났다.
순한 아내가 생기니 까칠하고 예민하던 상사도 조금은 유순해질 모양이었다.
업무를 정리하고 개인 공간으로 들어선 설우가 리모컨을 꼭 쥔 채 TV를 보는데 집중한 연의 옆에 앉았다.
커다란 화면 안엔 애절하게 울먹이는 한서준이 있었다.
“너 한서준 언제 끊을래?”
“한서준 씨 때문에 보는 게 아니라 이 드라마가 정말 재밌어요.”
“짜증 나.”
스르륵, 다가온 손이 리모컨을 빼앗아 거침없이 전원 버튼을 눌렀다.
“오, 오빠 오면 원래 그만 보려고 했어요!”
“짜장면은 1시간 후에 올 거야.”
“왜요? 바쁘대요? 나 지금 배고픈데.”
시무룩하게 내려앉는 눈꼬리에 입을 맞춘 설우가 재빠르게 연을 밀어 눕혔다.
“나야말로 널 좀 끊고 싶다.”
헐렁한 원피스는 순식간에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또요?”
욕정 어린 눈동자를 마주한 연이 마른침을 삼켰다.
아침에도 그렇게 괴롭히더니, 또.
“1시간 안에 끝내자.”
속옷 역시 허망하게 사라지자 훤히 드러난 하얀 살결을 눈으로 탐하던 설우가 거친 손길로 넥타이를 풀고 셔츠를 벗어던졌다.
“오빠 진짜 중독이에요.”
“하면 할수록 더하고 싶어. 나름 잘 참는다고 생각했는데.”
입술과 귓가, 목덜미에서 쇄골까지. 뜨끈한 혀가 타액을 남기며 말랑한 살덩이를 물기 시작했다.
“으, 흐읏! 아…. 밖에 들리면 어떡해요.”
“안 들려. 그래도 걱정되면 내 손가락 줄게, 물어.”
“오, 오빠 손이요. 아직 안 나았잖아, 읍!”
“손가락은 멀쩡해, 하아.”
길쭉한 검지가 연의 입속을 파고들었다.
설우의 손바닥에 감긴 붕대가 턱을 스치자 연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움직여 손가락을 물었다.
아릿한 감각에 설우의 눈매가 움찔거렸다.
하면 할수록 더 하고 싶고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다.
끝을 모르고 커지는 갈망이 연을 집어삼킬 기세였다.
“으흣, 으응. 그마, 그만요.”
“더 해줘.”
솜털이 쭈뼛거릴 만큼 자지러지는 부위만 공략하니 자꾸만 고이는 침을 삼키기 위해 연은 어쩔 수 없이 입속에 든 손가락을 빨아야 했다.
말캉한 혀에 뼈마디가 눌릴 때마다 색정적인 숨을 몰아쉬던 설우가 한 손으로 허리띠를 풀며 연을 보았다.
“소, 손가락 으, 이제 없어도, 우읏!”
“나 어떡해, 연아.”
어느새 맞닿은 허벅지가 눌렸다. 날이 갈수록 야해지는 설우의 행위는 따라가기 벅찰 정도였다.
내 인내심은 애초부터 바닥이었는데 지금까지 착각했던 걸까.
너의 상태가 좋아졌단 핑계를 대며 짐승처럼 달려드는 내가 한심하지만 더는 참아지지 않는걸.
“으읏!”
“너무 좋아, 하윽! 정말 미치겠다고.”
“나, 나도 좋아요. 오빠가 좋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요.”
사랑해.
끝으로 치닫는 관계 속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쉬지 않았다.
함께 있어도 늘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꼭 끌어안고 있어도 꿈인 듯 사라질 것 같아서.
날 한없이 나약하게 만드는 네가 미워서.
이렇게 미친 것처럼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싶다.
퇴근 준비를 마친 설우가 집무실 소파에 앉아 꾸벅, 꾸벅 졸고 있는 연의 볼을 감싸 쥐었다.
“우음, 끝났어요?”
“응, 집에 가자.”
“오늘도 밤에 아주 잘 자겠어요, 누가 날 혹사시켜서.”
“이것도 나름 치료야. 자기 전에 녹초를 만드니까 죽은 듯이 자잖아.”
“오빠를 괴롭히지 않는 건 좋아요. 오빠도 밤에 잘 자니까 더 잘생겨졌어요.”
“밤에 잘 자서 그런 게 아니라 널 원하는 만큼 안아서 그런 건데?”
“그래요? 좀 힘들긴 한데 어쩔 수 없겠네요. 앞으로도 원하는 만큼 해요! 오빠가 좋으면 나도 좋으니까.”
설우의 팔에 꼭 붙어서 엘리베이터 앞에선 연이 헤벌쭉 웃으며 눈을 접었다.
이러니 내가 자꾸 괴롭히는 거잖아.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밖에서 먹고 들어가자.”
“스테이크 먹을래요.”
“좋아, 대신 샐러드도 같이.”
“당연하죠! 채소를 많이 먹어야 건강해지니까.”
“앞으로도 쭉 지금 같으면 좋을 텐데.”
“그럴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최근 연은 수면장애 증상이 거의 없었다. 보통 사람처럼 피곤해 졸거나 약한 잠꼬대가 전부였다.
과거엔 선물 같았던 평범한 하루가 일상이 되고 있었다.
“저, 사장님.”
다정한 대화를 언제 끊어야 할까 고민하며 기다리던 정 실장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 직전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입니까?”
“로비에 누가 사장님을 찾는다고 연락이 와서요.”
“누가?”
“서연주라는 여잔데, 꽤 소란을 피우고 있나 봅니다. 행색도 문제가 있어서 일단 보안팀에서 밖으로 내보냈다고 하네요.”
“네, 알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설우가 이만 가보라는 듯 눈짓하자 인사를 마친 정 실장이 비서실로 돌아갔다.
“서연주, 연주가 왜, 아니 어떻게 여길 와요?”
스테이크를 먹을 생각에 빛나던 눈동자에 금세 불안감이 차올랐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지만, 설우의 팔을 잡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글쎄. 내가 널 데리고 있는 걸 알고, 내 회사는 누구든 알 수 있으니까?”
여유로운 대답과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준 설우가 말없이 연의 어깨를 감싸 안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잠시 고민하던 그의 손가락은 전용 주차장이 있는 지하가 아닌 로비가 있는 1층으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