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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77화 (77/96)
  • 77화.

    센터 수업을 마치고 파라다이스로 온 연은 설우의 집무실에 딸린 개인 공간 안에 누워 있었다.

    “2시 5분 전이야. 이제 눈 좀 감지?”

    “내 말 들은 거 맞죠? 키 크고 날씬한 여자 골프 선생님이 이든을 좋아하는 거 같다니까요? 계속 이든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데 가끔 날 째려보는 거 같아요.”

    “4분.”

    “첸이 저녁에 해물찜을 해준다고 했어요, 조금만 맵게. 오빠 내가 무슨 해물 제일 좋아하는 줄 알아요?”

    “새우, 3분 남았어.”

    “아니, 3분 30초. 새우는 맞췄어요. 나 잠들면 10분만 보다가 가요.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너무 빨리 가지도 말고.”

    머리맡에 앉은 설우의 손가락을 쥔 연이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이상하다, 눈은 분명 졸린데.

    설마.

    무거운 눈꺼풀을 뒤로한 채 끈질기게 말을 붙이는 이유를 뒤늦게 깨달은 설우가 이불 위를 토닥였다.

    “오늘 무서웠구나.”

    납치된 이후 첫 골프 수업, 그 사실을 간과했다.

    이든과 함께 있었어도 탈의실 앞은 두려웠겠지.

    “그, 그런 거 아닌데. 이제 자야겠어요!”

    속마음을 들키고 당황한 연이 이불을 코끝까지 올리며 눈을 감았다.

    저를 잘 알고 맞춰주는 설우가 좋다가도 아무것도 숨길 수 없어 민망했다.

    그렇게 티가 나나.

    “골프 수업 있는 날엔 오빠랑 같이 가자.”

    “정말요?”

    바스락거리던 이불자락이 다시 연의 목 아래로 내려가자 설우가 설핏, 미소를 지었다.

    단순하긴.

    “그날 일 생각 안 날 때까지 같이 가줄게. 탈의실 앞에서 지키고 서 있을 거야.”

    “고마워요. 뽀뽀해주세요, 진짜 잘래요.”

    반쯤 눈을 감은 연이 두 팔을 뻗었다.

    그 속으로 들어가 입술을 맞대어 주자 오물거리는 작은 입이 설우의 아랫입술을 쪽, 쪽, 빨아들였다.

    혀끝을 맴도는 말캉함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연은 금세 잠이 들었다.

    1분도 채 안 될 입맞춤에도 후끈해진 귓불을 식힌 설우가 실소했다.

    이쯤 되면 적응이 될 법도 한데.

    시도 때도 없이 저를 찾는 입술과 제 살결을 탐하는 손길에 꾸준히 정욕이 인다.

    원하는 만큼 안을 수나 있으면.

    “왜 매번 나만 안달 나게 만들어.”

    네가 조금 더 자라면 이 갈증을 온전히 메울 수 있을까.

    도대체 15살, 20살 어린 아내는 어떻게 데리고 사는 거지. 여린 몸이 상할까 안을 때마다 겁이 나는데.

    식지 않는 욕정 때문에 눈썹을 들썩이던 설우의 시선이 쌕, 쌕, 듣기 좋게 흐르는 숨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10분만 보다 가라는 연의 당부는 들어줄 수 없었다.

    이렇게 예쁜 걸 어떻게 10분만 보겠느냐고.

    결국 집무실로 나가 태블릿을 챙겨온 설우는 연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소파를 옮겨 놓고 앉아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

    도르르, 도르르. 큰 눈이 사방으로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연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아직 해가 짧아 어두워진 밤거리를 빼곡히 채운 간판들이 다양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침 플리마켓이 열리는 날이라 좁은 골목이 사람들로 붐볐지만,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

    “제주도에 있던 나는 15살이었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화려한 골목은 본 적이 없어요. 신세계야.”

    “안 힘들어? 꽤 많이 걸었어.”

    “전혀! 너무 좋아요.”

    “너무 좋은 건 알겠는데 간간이 남편 얼굴도 봐주지? 나 지금 살짝 외로운 거 같은데.”

    차에서 내린 후로 둥근 뒤통수만 봐야 했던 설우가 작은 손을 잡아 제 코트 주머니 속에 넣으며 투정을 부렸다.

    “미안해요, 오빠. 하지만 볼 게 진짜 많아요. 잠깐만 날 양보해 주세요.”

    “알았어. 이 길 끝까지만 양보해줄게.”

    신이 나 발걸음이 통통 튀는 연을 보니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서운함보다 뿌듯함이 앞서는 순간이다.

    “오빠, 이거 봐요. 엄청 작은 블록이에요. 귀여운 애들이 많다.”

    “얘넨 네 발끝도 못 쫓아와.”

    “어머, 나노 블록 안 해보셨어요? 한 번 해보세요. 시간 때우기 정말 좋아요.”

    좌판 위에 나노 블록과 퍼즐을 올려놓은 판매자가 이때다 싶어 말을 붙였다.

    “어려워요?”

    “아뇨! 쉽고 재미있어요. 캐릭터 다양하게 있으니까 천천히 구경하세요. 포켓몬도 인기가 좋고, 디즈니 캐릭터랑 마블 영웅들도 잘나가요. 상자가 클수록 난이도가 높고요.”

    판매자의 친절한 설명을 경청하던 연이 블록엔 별다른 관심이 없는 설우를 흘깃거렸다.

    “나 돈 안 가지고 왔어요. 오늘 나와서 놀 줄 몰라서.”

    “몇 개.”

    “몇 개?”

    “전부 다? 그건 안 돼. 이거 맞추느라 나랑 안 놀아줄 거 다 알아.”

    “아니거든요. 그리고 전부 다 갖고 싶다고 안 했어요. 세 개만 살게요, 맞춰서 하나씩 줘야겠다. 오빠는 파이리, 첸은 꼬부기, 이든은 이상해씨.”

    “그렇게 세 개 드릴까요?”

    “이거 두 개까지 같이요.”

    “피카츄랑 잠만보네요.”

    “응, 네 거야.”

    잠자는 금빛 다람쥐와 찰떡인 캐릭터를 고른 설우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지갑을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뒤따르고 있을 수행원에게 전할까 고민하던 설우는 직접 드는 걸 택하고 다시 연의 손을 잡았다.

    거리의 평범한 연인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연이 제법 오래 일정한 낮잠 시간을 유지하니 누릴 수 있는 평화였다.

    “이제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첸이 해물찜 해놓고 기다릴 텐데.”

    “아직 괜찮아. 모자나 몇 개 골라봐.”

    펠리체 밖으로 나갈 땐 버킷햇을 골라 쓰는 게 습관이 되었다. 사람들의 시선도 부담이었고, 설우의 예민한 반응도 문제였다.

    설우는 연의 예쁜 눈동자를 남에게 보이는 것을 몸서리치게 싫어했다.

    “이건 꼬깔콘같이 생겼다.”

    우뚝 서 있는 롱 비니를 가리킨 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니는 안 돼, 제대로 못 가려.”

    “안 써요. 꼬깔콘 낀 손가락이 될 마음은 없어요.”

    “좋은 마음가짐이야, 빨간색은 어때? 빨간색 없잖아.”

    “내 머리에 빨간색을 얹으면 어떨 거 같은데요? 달걀찜 위를 고춧가루로 덮은 거 같을 거라고요.”

    “그런가.”

    “푸흡! 큽, 흠, 흠!”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린 모자 판매대 주인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손님이 설우와 연 뿐인 탓에 둘의 대화가 귀에 쏙쏙, 박혀 들었다.

    장난 같지만, 전혀 장난기가 없는 이상한 대화.

    아주 진지한 얼굴로 생각지도 못한 말만 골라 하는 여자도 웃겼지만, 한층 더 진지하게 답하는 남자도 웃겼다.

    “이거 색깔 별로 주세요, 빨간색 빼고.”

    연의 어투에 적응한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태연한 반응이었다.

    ***

    무엇이 문제였을까, 어디서 놓친 걸까, 어떻게 막아야 했던 걸까.

    설우와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연은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덕분에 사랑스러움을 뿜어대니 설우 역시 들뜬 밤이었다.

    해물이 탑처럼 쌓인 해물찜을 가운데 두고 먹음직스러운 밑반찬을 깔아 화려한 저녁 식사를 차려 놓으니 소주 여러 병이 순식간에 비워졌다.

    알딸딸한 세 남자와 볼록 나온 배를 자랑하던 연은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흥에 취해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주방이 문제였고, 연이 스치듯 보았던 깨진 유리 조각을 놓쳤으며, 술 때문에 무뎌진 감각 때문에 막을 수 없었다.

    방심한 순간, 한 번은 벌어질 일이었다.

    “크흑, 젠장.”

    어느 집보다 화목한 펠리체 1동에, 사랑이 넘치는 설우와 연의 침실에 어울리지 않는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어스름한 달빛이 새어든 침실엔 침대와 TV 한 대가 전부였고, 프레임 없이 덩그러니 놓인 매트리스는 방의 한쪽 벽을 전부 채웠다.

    연을 위해 꽤 여러 번 바꾼 인테리어였다.

    그 넓은 매트리스의 한 가운데. 물결치는 실크잠옷을 입은 연이 설우의 허리 위에 올라 그를 거세게 누르고 있었다.

    “아, 으윽….”

    연이 무슨 짓을 해도 버텨낸 그였지만, 이번엔 속수무책이었다. 억지로 다문 잇새로 연신 신음이 흘렀다.

    제게 올라탄 연을 느끼고 눈을 뜨자마자 목을 향해 오는 유리 조각을 잡은 건 생존본능이었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살갗을 파고들자 힘줄이 불거진 팔을 타고 핏방울이 툭툭, 흘러내렸다.

    손을 뗐다가는 곧장 제 목을 찌를 만큼 위협적인 상황이었다.

    젠장, 젠장!

    난도질당하고 있는 손바닥보다 깨어나 무너질 연의 걱정이 앞섰다.

    지금까지 노력해온 시간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기 충분한 충격을 받을지 모른다.

    묶어 두라는 여러 사람의 말을 무시하고 억지를 부린 대가인 건가.

    초점이 없는 연의 눈을 마주한 설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 손바닥이 베이는 만큼 이 작은 손에도 상처가 생길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유리 조각이 어떤 변수를 만들지 모르니 쉽사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놓아야 하나? 놓지 않으면 연이가 다치잖아.

    아니면 깨워야 할까? 깨우는 동안 안전할 수 있을까? 소리를 지르면 연이가 깰까? 깨면 무슨 말을 해줘야 하지.

    환장하겠네, 진짜.

    이대로 더는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설우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첸, 이든! 첸!”

    복도를 울린 커다란 목소리가 전해졌는지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두 명의 남자가 달려들었다.

    “연이 다치지 않게 조심, 조심해. 첸, 유리 조각부터 치워.”

    “이든, 수건 좀! 너 미쳤어? 죽으려고 환장한 거야? 진작에 불렀어야 할 거 아냐! 어떻게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참아, 이 또라이 같은 자식아!”

    “조용히 해, 연이 아직 안 깼어. 연이 손은 어때?”

    “깊게 베이진 않았어, 괜찮아.”

    날 선 유리 조각을 멀찍이 치운 첸이 무식한 친구의 행동에 역정을 냈다.

    이든에게 안겨 옆으로 옮겨진 연은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신음을 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문 설우가 이든이 건넨 수건을 쥐었다.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얼굴과 벌벌 떨리는 손이 고통의 정도를 말해주고 있었다.

    “장 박사님한테 연락 넣고 올게.”

    “차설우, 일어나. 일단 거실로 나가자.”

    안타까운 숨을 내쉰 이든이 의사를 부르기 위해 침실을 나섰다.

    다행히 잠에서 깨지 않은 연을 흘깃 바라본 설우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오빠?”

    이런.

    손을 쓸 수 없어 무릎으로 기어 나오던 설우의 움직임이 멈췄다.

    잠에서 깨어난 연이 붉게 물든 시트와 설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상황 파악은 어렵지 않았다. 제 짓일 게 뻔했으니.

    빛으로 가득 찼던 연의 금안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뒤덮였다

    “무슨 일이에요? 설마 또… 어, 어디 다친 거예요? 많이 다쳤어요? 뒤돌아봐요.”

    “괜찮아.”

    “거짓말. 돌아보기 싫어요? 그럼 내가 앞으로 갈게요.”

    벌떡 일어난 연이 침대를 돌아 설우의 정면에 섰다.

    손에 감겨 있는 하얀 수건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수건은 또 왜 하필 하얀색인지.

    설우는 손에 감긴 수건을 만지작거리며 연의 시선을 피했다.

    무언가를 찾는 듯 침실을 한 바퀴 둘러본 연이 첸을 올려보았다.

    “첸. 뭐였어요?”

    “말하지 마, 첸!”

    “연아, 그게….”

    “말해주세요.”

    “유리 조각. 네 손도 치료해야 해.”

    첸은 순순히 답을 내어주었다.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은 설우와 같았지만, 끝까지 숨길 수 없을 사실이었다.

    “하하하, 유리? 이제 하다 하다 내가 오빨 죽이려고 한 거예요? 나 진짜 왜 이래. 미치려면 곱게 미치던지, 대체 왜!”

    낮잠을 자기 전을 끝으로 무섭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는데, 머릿속에 박힌 기억은 멋대로 꿈을 만들어냈다.

    “연아, 진정해. 오빠 멀쩡해. 정말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안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아! 내가 오빠를, 내가 오빠한테…. 어떻게 괜찮아요? 뭐가 괜찮아!”

    발악하듯 소리치며 바닥에 주저앉은 연은 설우를 죽일 뻔했다는 사실이 두려워 무릎을 감싸 안았다.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턱 끝을 타고 툭툭 흘러내렸다.

    “병원으로 보내주세요, 차라리 병원에 있을래요.”

    “연아.”

    “갈래, 보내줘요. 이러다 내가 진짜 오빨 죽이기라도 할까 봐 무서워요.”

    “그만해.”

    설우가 몸을 앞으로 끌어 연에게 다가왔다. 잠시 둘을 지켜보던 첸이 고개를 내저으며 밖으로 나갔다.

    “벌써 몇 번째예요? 이렇겐 못 살겠어, 살기 싫어. 사는 게 지옥이라고!”

    그동안 참고 또 참아 왔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너 죽으면 나도 죽어. 살아도, 죽어도 결국 네가 날 죽이게 될 거라면 같이 조금 더 살자. 너 많이 좋아졌잖아. 오늘은 내 잘못이야, 잘못했어.”

    이 남자는 아프지도 않은 걸까.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은 뒷전이었다. 펑펑 우는 연을 달래기 위해 설우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탐스러운 금발을 쓰다듬어 줄 수 없는 게 아쉬웠다.

    빨간 입술을 꾹 깨문 연이 다친 설우의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자신이 혐오스러워 온몸을 쥐어뜯고 싶었다.

    아무리 정신이 온전하지 않아도 그렇지, 사랑하는 남자를 다치게 하면서도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다니.

    끔찍하다, 선우연.

    “아프겠다…. 장 박사님은요?”

    저도 모르게 발음이 어눌하게 뭉개졌다.

    연의 눈이 나른하게 풀리기 시작하자 설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오래 자게 될지라도 기다릴 테니, 지금은 자는 편이 나았다.

    “차라리 잘 됐다.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아져 있을 거야.”

    “오빠, 꼭….”

    “걱정하지 말고 푹 자.”

    멋대로 무거워지는 눈꺼풀이 또 한 번 타이밍을 잘못 잡고 내려앉는다.

    오빠가 치료받는 걸 봐야 하는데,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봐야 하는데.

    졸음이 쏟아지니 설우의 얼굴이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흐릿했다. 완전히 눈을 감으며 연은 바랐다.

    설우를 죽일 뻔한 이 순간조차 제발 꿈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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