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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76화 (76/96)

76화.

드르륵, 드륵.

공사장에서 날 법한 소음이 시작되자 연이 눈을 감았다.

갑갑한 공간에 갇히니 두통이 일었지만, 참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어때요?”

“LP, 아니, 요추천자까지 해봐야 알겠지만, MRI 상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매번 그것까지 해야 합니까?”

“예, 이상이 없으면 다음 검사는 6개월 후로 잡을 테니 이번엔 하시죠. 그나저나 얼굴이 말이 아니네요. 괜찮은 겁니까?”

설우를 돌아본 윤 교수가 미간을 좁혔다.

MRI 모니터를 볼 때보다 한층 구겨진 얼굴이었다.

드레싱 밴드로 목을 가렸지만, 뺨을 가로지른 손톱자국은 훤히 드러나 있었다.

묶어 두라고, 따로 재우라고 수없이 말해도 들을 생각이 없는 남자다.

“괜찮습니다. 나한테 집중하면 침실 밖으로 나가지 않아요. 처음부터 이렇게 할 걸 그랬어요, 그럼 화상도 입지 않았을 텐데.”

“허.”

미쳤구만.

설우가 설핏, 미소를 짓자 윤 교수가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일시적인 겁니다, 움직이지 않을 거라 확신하지 마세요. 환자도 문제지만 함께 있는 보호자가 크게 다치는 경우가 많아요.”

주먹에 한 번만 얻어맞아도 기겁을 하며 달아나는 보호자가 태반이었다.

복합적 수면장애가 심각할수록 견디지 못했다.

부모를 요양원에 보내고, 배우자와 이혼하고, 연인과 이별한다.

사랑이 아무리 지극해도 끝내 병원에 입원을 시킨다.

희귀난치성 수면장애를 가진 환자와 보호자들을 질리게 봐왔는데 옆에 앉은 이 남자는 도대체 뭘까.

“척수액 검사는 실력이 좋은 의사로 부탁드려요, 저번에 그 의사도 괜찮고. 바늘을 여러 번 찌를수록 고통이 크다고 들었어요.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물론입니다. 별다른 치료법이 없는 만큼 비약물적인 치료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 없이 안정된 환경도 중요하고요, 지금처럼만 하시면 더 호전될 겁니다.”

“예.”

“신이 있다면 차 사장님 정성에 백기를 들겠죠.”

“윤 교수가 비과학적인 말을 할 줄은 몰랐네요. 신은 저도 종종 찾습니다만 역시나 없더군요.”

설우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인 윤 교수가 모니터 옆에 두었던 두꺼운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의사들도 가끔 찾습니다. 이거 받으세요, 각국에 있는 복합적 수면장애 임상입니다. 선우연 양은 0.1%의 희귀 케이스니 어디에 신청해도 피실험자로 받아줄 거예요. 효과를 본 임상들만 추려 넣었어요.”

“임상이요?”

“보통은 직접 임상센터에 가서 참여하지만, 차 사장님은 가진 게 많으시니, 약만 받아 사용할 방법이 있을 겁니다. 혹시 상태가 나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으시라고.”

의사로서 해줄 수 있는 치료라곤 그저 퇴행성 뇌 질환 예방을 위한 검사뿐이었다.

종국에 권할 것은 임상시험이었고, 지푸라기란 단어와 아주 잘 어울렸다.

“그러죠.”

피식, 웃은 설우가 서류 봉투를 받아 들었다.

에둘러 말하지 않는 점이 여전히 마음에 들었다.

“다 됐습니다. 요추천자는 이틀 후에 진행하도록 하죠.”

“네, 수고하셨습니다.”

“직접 하실 거죠?”

“그럼요.”

가볍게 고개를 숙인 설우가 MRI 검사실로 들어갔다.

거대한 통에서 벗어난 연이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교수님, 이래도 되는 거예요? 규정상….”

“병원 주인한테 규정은 뭔 놈의 규정. 이사장이고 원장이고 병실 찾아가 굽신거리는 거 못 봤냐? 눈치 챙겨, 인마.”

“아, 예.”

뒤통수를 긁적인 펠로우가 다음 환자를 보기 위해 떠나자 통유리 밖으로 연을 안아 나가는 설우가 보였다.

유난이다, 유난이야.

너털웃음을 지은 윤 교수가 휴대 전화를 들었다.

사랑이 넘치는 장면을 보고 나니 괜히 아내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지는 그였다.

검사를 마친 연이 병실로 돌아오자 널브러져 있던 이든과 첸이 벌떡, 일어났다.

“뭐래!”

“어떻대? 나빠졌대? 좋아졌대? 아, 좋아진 건 의사도 알 수가 없구나.”

“다른 검사도 해봐야 알겠지만 괜찮대. 아직 어린데, 뇌 질환이 그렇게 쉽게 오겠어?”

“맞아요, 예전보다 기억도 잘하는걸요. 오빠랑 이든이랑 첸 전화번호도 다 외웠어요.”

“이렇게 예방만 잘하면 괜찮을 거야.”

헝클어진 연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 침대에 내려준 설우가 보호자용 소파에 앉아 몸을 기댔다.

“야, 꼬맹. 넌 형을 다 쥐어뜯은 거야?”

“네, 뜯고 물고 긁고 때리고 아주 난리예요. 오빠 약 좀 발라줘요, 이든.”

“그럴까? 이리 와 형.”

“집어치워라. 소름 끼쳐.”

이든이 두 팔을 뻗자 설우가 질겁하며 몸을 피했다.

“이리 와요, 오빠. 내가 해줄게요.”

설우를 다치게 하고 울적해 하던 연은 거듭된 위로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자책도, 좌절도 이젠 사치였다.

모두가 나를 위해 노력하니 나도 더 노력해야지. 이렇게 함께 버텨내야지.

쓰지만 단 것처럼 유쾌하게 병을 이겨내는 중이었다.

“이제 둘 다 가.”

“왜, 같이 밥 먹자.”

“연이랑 놀 거야.”

“치사하다, 진짜.”

입을 삐죽이던 첸과 이든은 비교적 순순히 병실을 떠났다.

“얼른 올라와요, 오빠.”

탕탕, 연이 푹신한 매트리스를 두들겼다.

“올라가면 뭐해줄 건데.”

“뭐 하고 싶은데요? 아예 벗고 올라오든가요.”

“와.”

“문도 잠가야 해요.”

“엉큼한 다람쥐를 어쩌지, 진짜.”

장난 섞인 도발에 코끝을 찡긋거린 설우가 겉옷만 벗어둔 채 침대 위로 올랐다.

“오빠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줄 수 있다고요.”

“그건 내가 할 말이고. 저번에 옆으로 누워서 했던 검사 또 해야 한대. 할 수 있어?”

“응, 할 수 있어요. 걱정했던 것만큼 아프진 않았어요. 바늘은 좀 위협적이었지만.”

“같이 있을 거야.”

“고마워요.”

“별말씀을.”

당연한 건데.

“오빠.”

가장 애정하는 품속에 안겨 꼬물거리던 연이 다급히 떨어져 설우를 불렀다.

문득 떠오르는 말은 곧장 내뱉고 싶다. 금세 까먹어 전하지 못할 수 있으니까.

“응?”

“보통 할아버지보다 할머니가 더 오래 산대요.”

“그런데?”

“난 오빠보다 10살이나 어리니까 머리가 고장 나지 않는 한 내가 더 오래 살 거예요, 그렇죠?”

“나보다 오래 살고 싶어?”

“네!”

“왜, 나 죽으면 10살 어린 남자 찾아 떠나게?”

짙은 눈썹이 쓱, 이마를 향했다. 귀여운 질투에 웃음을 터뜨린 연이 고개를 저었다.

“오빠는 울보라서 내가 먼저 죽으면 너무 많이 울까 봐. 살면서 오빠가 더 슬퍼했으니까 죽을 땐 내가 더 슬퍼하려고. 그래야 공평하잖아요. 오빠 먼저 편히 보내줄게요.”

“내가 네 앞에서 운 적이 있던가.”

설우가 빠르게 머리를 굴려 과거를 되짚었다.

많이 운 건 사실이다, 꼭꼭 숨어서.

“나 오래 잘 때 울었다고 이든이 그랬고요.”

“죽일까, 진짜.”

“첸이 그런 적도 있어요.”

도대체 쓸데없는 말은 왜 매번 전하는지.

“안 울었어.”

속는 사람이 없는 거짓말이었다.

“엄마한테도 들었어요. 나 없어졌을 땐 무릎 꿇고 엉엉 울었다고.”

“별 얘길 다하는구나.”

지나치게 친하게 지낸다 싶더니.

울보라는 말을 부정할 수 없어 민망해진 설우가 눈가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나보다 일찍 떠나요.”

“알았어. 난 백 살까지 살 테니까 넌 딱 1년만 더 살아.”

“으음, 딱 하루만. 하루는 슬퍼할 수 있는데 오빠 없이 이틀 이상은 무리예요, 못 살아.”

한 마디, 한 마디가 어쩜 이렇게 예쁠까.

헤벌쭉하게 벌어지는 입꼬리를 잡은 설우가 작은 얼굴 곳곳을 입술로 덮었다.

연이 말하는 이리 와, 예쁜 내 다람쥐의 뽀뽀 버전이었다.

***

업무에 지친 직원들이 진한 카페인을 찾아 카페테리아로 내려오는 늦은 오후.

파라다이스 본사 1층에 위치한 휴식 공간 역시 직원들로 가득했다.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든 직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기 바빴다.

“이 팀장, 봤어?”

“한 팀장님도요?”

“팀장급 이상 중에 못 본 사람 없을걸?”

우연히 같은 시간에 내려온 몇몇 부서의 팀장들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목소리를 낮췄다.

직급이 낮은 평사원을 제외하고 직접 보고가 필요해 사장실에 들어갔던 이들은 나올 때마다 모두 같은 표정이었다.

“야, 저 정도면 매 맞는 남편 아니냐? 나 진짜 깜짝 놀랐다.”

“전 처음에 어디서 주먹다짐을 했나, 싶었거든요. 근데 몇 번 더 보니까 아니더라고! 여자 손톱자국에 멍에, 저번엔 잇자국도 봤잖아.”

“밴드를 붙여도 틈틈이 다 보여.”

“아니, 어떻게 그 순한 얼굴로….”

“이 팀장 사모님 본 적 있어?”

“네, 저번에 신사업 보고 때문에 한 번. 난 사장님이 저걸 다 받아주는 게 더 신기해.”

“취향인가?”

논란이 되는 게 당연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번 마주칠 때마다 보이는 곳이 상처투성이니.

사장이 아닌 사원이었더라도 남들 입에 오르내릴 상황이었다.

“제가….”

“됐어, 그냥 둬. 사정 설명할 것도 아닌데 끼어들어 뭐해.”

“알겠습니다.”

설우의 집무실에 올라가기 전, 커피를 사려고 카페테리아에 들른 화진은 사원들을 말리려는 성재를 붙잡았다.

누가 알아보기 전에 이곳을 나서는 게 좋을 듯싶었다.

“아니, 출근이나 하지 말던가. 직원들 수군거릴 거 뻔히 알면서 왜 저러나 몰라. 내 아들이지만 도통 이해가 안 가.”

“남의 눈에 조금도 관심이 없으시잖습니까.”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일부러 관심을 끄는 수준이라니까. 회사 사장씩이나 돼서 매 맞는 남편이 뭐냐고.”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에 오른 화진이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올라가서 괜한 소리 하지 마시고요.”

“네가 회장이고 내가 비서실장이니?”

매번 훈계는.

“검진 결과는 정상이랍니다.”

“안 물어봤거든?”

“궁금해하시는 거 같아서요.”

속마음을 들킨 화진이 샐쭉하게 성재를 노려보았다.

옆에 너무 오래 두었더니 모르는 게 없어 성가시다.

“넌 나이를 먹을수록 얄밉다?”

“다 왔습니다, 내리시죠.”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활짝 열렸다. 대답은 뒤로 한 채 먼저 내린 성재가 팔을 들어 설우의 집무실을 가리켰다.

“간다, 가.”

버튼으로 움직이는 로봇 같은 비서실장을 툭, 미는 것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화진이 집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셨어요.”

업무를 보고 있던 설우가 일어나자 모니터에 가려져 있던 얼굴과 목이 훤히 드러났다.

자주 봤지만, 영 적응이 안 되는 상처가 가득했다.

“꼼꼼히 가릴 생각은 없고?”

목덜미에 덩그러니 붙은 밴드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귀찮아요.”

“연이는 아직도 그러니? 그 일 있고 시간도 꽤 지났는데.”

“이 정도로 지나가면 감사하죠.”

그래, 쇠귀에 경 읽기지.

할 말이 태산 같았지만, 괜한 소리를 하지 말라던 성재의 목소리가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연의 부탁을 받아 설우를 설득하려 했다가 더러운 성질만 건드린 전적도 있었으니 더 해봐야 좋을 게 없었다.

“파라다이스는 계열 분리 승인 났다고?”

“네. 다음 달부터 독립입니다.”

“네 할아버지는 어때.”

“가족들이 등 돌리고 파라다이스까지 결국 빼앗겼으니 허망하시겠죠. 기력이 많이 상하셨다고 큰어머니께 들었습니다. 그래도 찾아뵐 생각은 없고요.”

“곧 검찰 조사 시작될 거야. 정계에 뿌린 돈도 많고 그 돈으로 취한 이득도 많으니 처벌이 가볍진 않을 거고.”

“상관없어요, 연이한테 그런 짓을 한 순간부터 이미 제 가족이 아니에요.”

부모보다 더 가까이에서 저를 키운 조부였지만, 한 치의 연민도 없는 표정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 요란한 사랑을 하는 건 아직도 신기할 따름이다.

“백창석은 혐의 인정돼서 구속 영장 발부됐어. 성매매, 인신매매, 납치 청부, 뇌물수수까지. 온갖 불법을 저질렀으니 살아선 못 나와.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독방도, 병원도 안 됩니다. 신경 써서 압박해 주세요.”

“그래. 할 말 있다며?”

긴 서론이 끝나자 물을 한 모금 마신 화진이 고개를 까딱였다.

느릿하게 일어선 설우가 책상에 놓인 서류철 하나를 들어 화진의 앞에 내려 두었다.

“M&A 계약서예요. 합병 말고 전략적 제휴입니다.”

“굳이? 파라다이스는 독립으로도 충분하잖아?”

“조용한 곳에 집을 지을 생각이에요.”

“귀농이라도 하게?”

“쓸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연이가 안 좋아지면 필요할 거 같아서요. 그때 엄마가 맡아 주세요. 물론 저도 중요 업무는 볼 수 있겠지만, 안정감이 다르잖아요. 그래야 주가도 유지하죠. 현진에도 아주 좋은 제안입니다만?”

건방진 말투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비즈니스를 할 때 오만한 표정은 역시 날 닮았지.

“우리 쪽에 계약서 검토시키고 연락할게. 약은 제대로 바르고 다니는 거야?”

“연이가 꼬박꼬박 발라줘요, 바를 때마다 울먹여서 문제죠.”

“너한테 상처 내고 걔 속이 속이겠니. 전에는 묶어 뒀다며.”

“손목이랑 팔에 살결이 달라요, 너무 오랫동안 묶여 있어서. 그게 느껴질 때마다 숨이 막혀서 더는 못하겠어요.”

애초에 울며 겨자 먹기였다. 묶어두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정도로 하기 싫은 짓이었고.

“어휴, 어지간한 신파 영화도 너희보단 나을 거다.”

하나는 묶어두게 설득해달라고 난리, 하나는 숨이 막힌다고 난리.

사랑 한 번 지독하게 하는구나.

“그래도 나쁜 것보단 좋은 게 더 많아요. 한 번은 해보세요.”

“미쳤니?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만 가야겠다, 네 삼촌이 연이 보고 싶다니까 시간 나면 호텔 들리고.”

“그럴게요.”

화진이 서둘러 집무실을 나서고 책상으로 돌아간 설우가 줄지어 서 있는 액자 중 하나를 들었다.

얘기하니까 또 보고 싶네.

밝게 웃고 있는 연의 사진을 한참 보던 설우는 퇴근을 앞당기기 위해 손을 바삐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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