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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74화 (74/96)
  • 74화.

    툭, 피가 배어든 투박한 화병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왔네.”

    시뻘게진 눈을 보고 이를 악문 설우가 벌벌 떨고 있는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잔뜩 긴장해 빳빳해져 있던 몸이 스르르, 녹아 허물어졌다.

    “무서웠지. 오빠가 정말, 미안해.”

    “올 줄 알았어요. 그래서 조금만 무서웠어.”

    “거짓말. 조금 무서운데 이런 짓을 해?”

    “많이 무서웠다고 하면 오빠 마음 아프니까.”

    “이미 아파서 괜찮아, 여기서 더 아플 수도 없어. 그러니까 참을 필요도 없어.”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꽉꽉 들어차 있던 눈물이 그제야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으…. 우윽, 흐윽. 샤, 샤워실로 가는데, 우으… 아저씨가 갑자기 나한테, 복도에 아줌마들이 없어서, 우흑. 나, 나 혼자 있어서. 너무 무서웠어. 아무것도, 으윽….”

    끅끅거리며 말을 이어가던 연이 결국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오래전 현태에게 끌려갈 때와 차원이 다른 두려움이었다.

    차라리 약에 취해 잠든 그때가 나았다.

    목에 칼이 들어오고, 온전한 정신으로 밀폐된 트렁크에 갇히는 건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공포를 가져왔다.

    “더 울어, 울고 다 잊자. 그냥 무서운 꿈이었어, 연아. 너무 많이 떠올리고, 너무 많이 생각하면 안 돼. 힘들 거 아는데 그래도 이겨내야 해. 그래야 안 아파.”

    “우윽, 끅…. 그럴게요.”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는 그녀의 병에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했다.

    연이 이대로 눈을 감으면 일주일은 우습게 넘길 깊은 잠에 빠질 것 같아 불안해진 설우가 부드러운 손길로 연의 등허리를 쓰다듬었다.

    눈앞에서 경찰과 언쟁을 벌이는 백창석을 상대하는 것보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우는 연을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무능한 새끼, 등신 같은 새끼.

    눈시울이 붉어진 설우가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했다.

    눈만 뜨고 있어도 감사한 아이의 어깨에 자꾸만 버거운 짐을 얹어주는 기분이다.

    “놔, 놔! 저 새끼 죽여 버릴 거야!”

    “저희가 연행할 테니까, 진정 좀 하세요!”

    “이리 와, 안 와? 이것 좀 놓으라고!”

    “어휴, 무슨 사람 힘이 이렇게 세! 김 순경, 여기 와서 붙어 봐!”

    “이미 팰 만큼 팼어요. 더하면 같이 서에 가셔야 한다고!”

    연을 잡으려다 제 발에 차인 남자가 펠리체 CCTV 찍힌 인상착의와 같다는 것을 깨달은 이든은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다.

    장정 둘을 양쪽에 달고도 나아가는 이든을 보고 식겁한 형사가 개중에 가장 덩치가 큰 순경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든이 경찰들에게 잡히기 전에 피떡이 된 형택은 자진해서 두 손을 내밀었다.

    맞아 죽기 전에 체포되는 편이 나았다.

    “이 봐, 빨리 채워! 경찰차는 어디 있어? 거기로 데려가. 차라리 먼저 가서 타고 있겠다고!”

    “웃기는 양반이네.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당신이 처맞을 짓을 했잖아! 어? 당신 이거 단순 납치 아니야. 저 인간한테 돈 받은 정황 있으면 인신매매 혐의까지 붙는다고!”

    “납치든 인신매매든 상관없으니까 여기 데리고 나가달라잖아!”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형사가 언성을 높여도 형택의 시선은 지치지도 않고 날뛰는 이든에게 박혀있었다.

    “야, 김 순경! 똑바로 안 잡을 거야? 힘을 써야 할 거 아냐! 어, 어어어!”

    “박 형사님!”

    이든의 팔에 붙어있던 형사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자 놀란 순경이 손을 뗀 순간 다리에 매달린 나머지 한 사람은 종이 인형이나 다름없었다.

    “와, 와, 온다고, 오잖아! 저 미친 새끼 좀 잡으라고! 으아악, 살려줘…!”

    뻐억?

    “크헉!”

    얼굴 전체가 뭉개지는 것 같은 요란한 타격음과 함께 넘어간 형택은 그대로 정신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성질머리하고는.”

    “저 자식이 연이를 트렁크에 넣었다고! 애가 그 안에서 혼자 얼마나 울었을 거야. 우리 꼬맹이 어두운 거 싫어하는데, 천둥만 쳐도 깜짝 놀라는데…. 우윽.”

    “사람 패다가 우냐?”

    첸이 얼빠진 얼굴로 이든을 훑었다.

    “아니, 울 때가 아니지. 저 뻔뻔한 노인네도 묵사발을 만들고 와야겠어.”

    아씨, 저걸 또 잡아야 해?

    형택을 기절시킨 남자가 눈물을 훔치자 이제 다 끝났구나, 하고 마음을 놓던 경찰들이 목표를 바꿔 잡는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흉악한 범죄자를 쫓는 일만큼이나 진이 빠졌다.

    “이든, 그만해요.”

    “연아.”

    “나 이제 괜찮아요. 이러다 이든 잡혀가면 어떡해요.”

    어느새 울음을 그친 연이 다가와 이든의 옷깃을 잡았다.

    “정말 괜찮아?”

    “네, 이렇게 다들 왔잖아요.”

    가는 목에 붙여진 드레싱 밴드를 발견한 이든의 눈이 다시 촉촉이 젖어 들었다.

    화병에 베인 상처가 제법 길었다.

    “미안해,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이나 붙잡고 앉아있었어.”

    “미안하다는 말도 이제 그만해요. 자기들이 잘못한 것도 아니면서.”

    “우리가 잘못한 거 맞아.”

    여전히 연의 옆에 붙어있는 설우가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쁜 사람들이 날 데려가는 거지 오빠가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고요. 미안하단 말이 제일 싫어요. 미안해, 말고 사랑해, 해요.”

    “사랑은 당연히 하지. 빨리 정리할 테니까 펠리체 가서 쉬자.”

    “나도 사랑해, 꼬맹이.”

    “나도 연이 사랑해. 예쁜 내 동생.”

    “나도 셋 다 사랑해요.”

    “아니, 넌 나만 사랑해야지.”

    “쯧.”

    감동을 파괴하는 설우에게 혀를 찬 첸이 백창석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책임자에게 다가갔다.

    “저쪽에 있는 별채들도 들어가 보시죠.”

    “누구 마음대로 내 집을 뒤져!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내 전화 한 통이면 네놈들 다 옷 벗어야 돼, 밥줄 끊기고 싶어? 뒤지고 싶거든 영장 들고 와!”

    “형사소송법 216조.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은 제200조의 2, 제200조의 3, 제201조 또는 제212조의 규정에 의하여 피의자를 체포 또는 구속하는 경우에 필요한 때에는 영, 장, 없, 이 타인의 주거나 타인이 간수하는 가옥 등을 수사할 수 있다. 맞죠, 형사님?”

    “예? 아, 예. 맞습니다. 수색 후 범죄 관련 증거가 나오면 사후 영장 발부될 테니 영장 들고 와, 는 안 먹힙니다.”

    자신도 잊고 있던 법 항을 줄줄이 읊는 첸을 보고 눈이 커졌던 형사가 뻔뻔함의 극치를 보이는 창석을 흘겼다.

    “하! 그런다고 날 잡아넣을 수 있을 거 같나? 젊은 형사들이 위아래 없이 나대는구먼.”

    “이 봐. 백창석 씨, 당신 현행범이야. 우리 연이, 아니 어린 여자애 납치하려다 딱 걸렸다고. 그것도 당신 집구석에서. 저 별채 하나만 털어도 연이 나이 또래 애들 수두룩할 텐데, 정말 자신 있어?”

    “우리 집에서 일하는 가솔일 뿐이야.”

    “그래, 열심히 우겨 봐. 검찰 특수부에서도 곧 수사 들어갈 거야. 당신 비리 자료 다 털어서 넘겼거든.”

    “뭐, 뭐? 지금 무슨 소리를….”

    “조사는 조사고. 내 아내를 데려간 대가는 치러야지.”

    이든에게 연을 맡긴 설우가 셔츠 소매를 접으며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건 네 할아비가!”

    짜악-

    주먹이 아니고 손바닥이었다.

    손자뻘의 사내에게 따귀를 맞은 창석이 어안이 벙벙해 입을 벙긋거렸다.

    “크흠, 전 별채 수색 먼저 하겠습니다.”

    속이 다 시원해지는 마찰음에 삐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린 형사는 못 본 척 뒤를 돌아 사라졌다.

    “연이를 탐낸 게 벌써 세 번째지. 안 되는 걸 알았으면 조용히 찌그러져 있을 것이지, 왜 또.”

    짜악-

    첫 번째 보다 더 강하고 큰 소리가 울리자 수색을 하기 위해 떠난 형사들을 빼고 많은 이들의 이목이 쏠렸다.

    그중 반은 백창석의 하수인이었다. 창석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죽을 만큼 아프진 않지만, 혀를 깨물고 싶을 만큼 치욕스러웠다.

    물론 그것을 위해 치는 뺨이었다.

    “자네 지금….”

    짜악-

    거침없는 세 번째 따귀에 결국 입술이 터져 피가 고였다.

    “주먹을 쓰면 상처가 크게 나잖아? 다 늙은 몸이니 뼈가 부러지기도 쉽고 이가 부러질지도 모르고. 그럼 귀찮아지니까 뺨이 좋을 거 같더라고. 어때요, 맞을만하죠?”

    삐뚜름하게 눈썹을 들썩이던 설우가 씩, 웃으며 창석을 놀렸다.

    “이, 이 상도덕도 없는 후레… 헉!”

    짜악-!

    “아, 이런. 이번엔 힘이 좀 실렸네.”

    얼얼한 손바닥을 탁탁, 털어낸 설우는 혹시 연이 보고 있을까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이든의 큰 손이 연의 눈을 가리고, 연의 작은 손은 제 귀를 꼭 막고 있었다.

    좀 더 하라는 듯, 이든이 고개를 까딱였다.

    몸을 휘청인 창석의 주름진 눈가에 물기가 서렸다.

    누구의 아래에도 있어 본 적 없는 그가 느껴야 할 수모는 고통 그 이상이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넓은 마당을 울렸다.

    CH의 차설우 사장이 제 아내를 납치한 백창석 대표에게 선사한 따귀 능욕은 상류층 사교 모임에서 아주 오랜 시간 회자되었다.

    ***

    설우와 연은 곧장 펠리체로 돌아왔다. 애초에 들고나간 것이 없었기에 굳이 한남동에 들러 가져올 것도 없었다.

    “우리 그럼 다시 펠리체에서 사는 거예요?”

    “응, 이제 평생 여기서 이든이랑 첸이랑 넷이 살자.”

    “너무 좋다.”

    “센터는 갈 수 있겠어? 무섭겠지?”

    제 품속에 쏙, 들어와 있는 연의 머리를 쓰다듬던 설우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연이 유일하게 나가 놀 수 있는 센터에서 일이 났다는 게 더욱더 안타까웠다.

    “며칠 쉬었다가 갈게요.”

    “그래, 상태가 나빠지는지 지켜보고 괜찮으면 이제 혼자 밖에 나가는 연습도 해야지.”

    낮잠을 자는 시간이 일정해진 후부터 생각했던 일이었다.

    아직 살날이 많이 남은 아이가 평생 한정된 동선 안에서 지내야 한다는 건 지나치게 가혹했다.

    “언제 마지막으로 혼자 걸었는지 이제 기억도 잘 안 나는 걸요. 아, 도망쳐 나올 때 혼자 뛰어다니긴 했네요.”

    하하, 쑥스럽게 웃으며 제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는 연을 조금 떨어뜨려 놓은 설우가 말간 눈동자에 입을 맞췄다.

    “안 졸려?”

    “네! 그러고 보니까 오늘 안 잤어요, 신기하다. 원래 같았으면 트렁크 안에 있을 때 잠들었을 텐데.”

    “그러게. 무서우면 꿈속으로 쏙, 숨어버리는 겁쟁이 다람쥐가 웬일이야? 기특해 죽겠네.”

    “오빠한테 칭찬받으려고?”

    “나한테 칭찬받아 뭐 하려고.”

    “예쁜 짓 하면 뽀뽀 많이 해주잖아요.”

    “안 해도 많이 해주는데?”

    “조금 달라요. 내가 예쁜 짓을 하면 이리 와, 내 다람쥐. 쪽쪽쪽쪽쪽, 이렇게 막 하는데 평소엔 쪽, 쪽, 쪽, 이거라고요.”

    “하하하! 알았어, 이리 와. 질릴 때까지 해줄게.”

    펠리체로 돌아와 내내 안겨 있어 홍조 띤 양 볼을 감싼 설우가 눈, 코, 입, 이마를 가리지 않고 뽀뽀 세례를 쏟아냈다.

    쉬지 않고 다가오는 말캉한 입술이 간지러운 연이 눈가를 움찔거리다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어쩜 이렇게 예쁘게 웃는지.

    불행이 1의 크기로 다가온다면 행복은 100의 크기로 오는 모양이다.

    똑똑.

    둔탁한 노크 소리에 계속되던 입맞춤이 멈췄다.

    “꼬맹이, 안 잘 거면 야식 먹자. 치킨 콜?”

    “콜! 몇 마리 시킬 건데요?”

    벌떡 일어난 연이 침대에서 내려가자 허전해진 품이 아쉬운 설우가 설핏, 인상을 썼다.

    “당연히.”

    “당연히?”

    “네가 먹고 싶은 만큼. 맛별로 다 시켜! 형 돈 많은 거 알지? 사달라면 치킨집도 사줄걸.”

    “내 돈으로 왜 네가 유세를 부려.”

    “형 돈이 내 돈이고, 내 돈이 형 돈이고! 우리 돈은 전부 얘 돈이지.”

    와우. 마지막 말을 듣고 눈이 커진 연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럼 나도 부자네요?”

    “우리 셋 중에 네가 제일 부자야. 우리가 다 네 거니까.”

    연을 다시 품에 넣은 설우가 반질거리는 이마를 툭, 건드렸다.

    “참고로 넌 내 거고.”

    맥락 없이 돌고 돌던 말이 끝나자 하나같이 킥킥, 거리며 침실을 나섰다.

    배불리 야식을 먹고 자정이 지나서야 잠이 들었던 설우가 별안간 번쩍, 눈을 떴다.

    머리든, 얼굴이든, 손이든. 제 팔에 부근에 있어야 할 연이 느껴지지 않자 돌아볼 필요도 없이 밖으로 나간 그가 온 집안의 불을 밝히고 뛰어다녔다.

    고개를 휙, 휙 돌리며 연을 찾던 설우의 눈에 힘없이 뜯어진 계단 앞 벽매트가 보이고 곧이어 계단을 올라 앞뒤로 휘청이는 연을 찾아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

    재빠르게 달려들어 뒤로 넘어가기 직전에 연을 받아낸 설우가 그대로 계단에 주저앉았다.

    “…으.”

    곤히 잠든 연을 확인한 설우는 너무 놀라 아픈 심장 부근을 손으로 눌렀다.

    “오빠 심장 하나라니까.”

    한껏 쪼그라들었던 가슴을 쓸어내린 설우가 그 자리에서 연의 등을 토닥였다.

    아직도 펄쩍펄쩍 뛰어대는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온 대도 괜찮았다.

    방심은 금물이지만, 이렇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밖에 없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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