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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70화 (70/96)
  • 70화.

    비쩍 마른 몸, 거뭇거뭇 마구잡이로 자라난 수염. 초췌한 몰골로 지하실 바닥을 뒹구는 상철을 마주한 세희가 경악하며 달려들었다.

    “상철 씨!”

    “세희, 세희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연을 잡아 오겠다고 나가 감감무소식이 되어버렸던 그에겐 제 뒤를 굳건히 받쳐주던 든든한 남편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았다.

    “미안해, 쿨럭! 당신 괜찮아?”

    “지금 내 걱정할 때야? 자기 꼴이, 자기는 괜찮은 거야?”

    “난 괜찮아.”

    설우가 오는 중이란 연락을 받은 주안이 피식, 웃으며 지하실 문을 열어두었다.

    제 보스의 발아래 꿇어야 할 남녀의 애틋한 재회가 가소로웠다.

    “당신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사람이 사람에게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다.

    상철을 짐승만도 못하게 던져둔 이들을 힘껏 노려보던 세희가 어두운 통로를 지나오는 둔탁한 발소리를 듣고 시선을 돌렸다.

    “드디어 보네, 장세희 씨.”

    “누, 누구…!”

    주저앉아있는 세희의 눈에 가장 먼저 닿은 것은 반들거리는 구두였다.

    길게 뻗은 다리를 따라 고개를 드니 높은 콧대와 일자로 찢어진 눈매가 인상적인 남자가 눈썹 사이에 주름을 잡은 채 저를 깔아보고 있었다.

    심플한 검은색 슈트에 검은색 넥타이를 맨 그는 잘 빚어진 배우 같기도 했고, 사회적 위치가 주는 여유가 몸에 밴 재벌 3세 같기도.

    지하실에 있는 남자들을 부리는 범죄조직의 보스 같기도 했다.

    “오셨어요.”

    주안과 함께 가드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설우를 맞이했다.

    딸인 연주가 사진으로 보여준 적 있는 얼굴이었다.

    CH파라다이스의 차설우 사장.

    코앞에서 마주하니 이상하게 낯이 익은 얼굴을 뚫어지게 보던 세희의 턱이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설우 오빠!’

    ‘형!’

    제주도에 함께 살던 시절 재호의 아이들이 누군가와 영상통화를 하던 장면이 불쑥 나타나 머릿속을 채웠다.

    쓸모가 없어 아주 오래전에 잊은 기억이었다.

    지나치듯 보았던 화면 속에 웃고 있던 20대 청년은 세월을 입은 어른이 되어 한층 서늘한 인상을 풍겼다.

    차설우, 우애 좋은 남매가 늘 입에 달고 살던 이름.

    케케묵은 기억이 하나둘 떠오르니 자신이 왜 이곳에 끌려오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걸 이제야 생각해내다니.

    세희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상철을 돌아보았다.

    -잘 지내고 있어?

    ‘그럼! 오빠는? 한국엔 언제 와? 제주도엔? 선물은 뭐 사 올 거야? 우리 안 보고 싶어?’

    ‘연아, 한 가지씩 물어. 형은 입이 한 개라고.’

    -선우연, 키는 좀 컸고?

    ‘얘 하나도 안 컸어. 아직 작아.’

    ‘아냐, 컸거든! 오빠, 우리 방학 끝나기 전에 오면 안 돼?’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과 준이 유난스럽게 자주 하던 영상통화의 상대는 늘 같은 남자였다.

    바로 지금, 제 머리 위에 서 있는 남자.

    “남편이랑 재회는 잘했고?”

    “살려주세요.”

    상황 파악이 끝난 세희가 바짝 엎어져 애원했다.

    처음엔 현태, 그다음엔 상철, 그리고 자신까지. 선우연을 데려간 대가를 치르고 있음을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느긋한 보복이었다.

    물고 있던 담배를 구둣발로 짓이긴 설우가 성큼, 세희에게 가까워졌다.

    “선우 아저씨 재산만 가지고 연이는 나한테 보내주지 그랬어. 남의 이름으로 정신병원에 가두지 말고 차라리 그냥 버리지. 그럼 내가 어떻게든 찾았을 텐데.”

    “나, 나는, 우리는 어쩔 수 없었어요. 들키면 끝이라고 생각해서….”

    “제대로 돌봐주지 않을 거였으면 이름은 그대로 뒀어야지. 적어도 나한테 올 수 있게 했었어야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설우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세희의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바들거렸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덩치 좋은 남자들이 풍기는 고압적인 분위기는 자신이 상철과 함께 이곳에 갇히게 될 거라 말하고 있었다.

    “죽일 생각은 없어, 아직은.”

    울먹이는 세희를 비웃은 설우가 눈짓하자 주안의 뒤에 서 있던 남자 셋이 상철에게 다가가 발길질을 시작했다.

    “커헉!”

    “왜 이러는 거예요! 어차피 전부 당신 손아귀에 있는데 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요. 그만둬요!”

    얻어맞는 상철을 보고 화들짝 놀란 세희가 주먹을 쥔 채 소리쳤지만 이미 겁을 들어먹은 그녀의 눈동자는 끊임없이 요동쳤다.

    “돈 많은 사모님 흉내 내면서 그동안 제법 즐겁게 살았지? 오늘 이후로는 1분 1초가 지옥일 거야.”

    “우릴 어쩔 셈이에요?”

    “크흑, 제발 그만!”

    상철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뒹굴었지만 설우는 거친 폭력을 멈춰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설우의 무정한 시선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세희를 지켜볼 뿐이었다.

    “죽일 생각 없다면서! 저러다 저 사람 죽겠어요!”

    “이 정도로 안 죽어.”

    “하….”

    잔인하다. 세희는 처음 실제로 보게 된 설우를 단 네 글자로 정의할 수 있었다.

    “당신 건물이 경매로 넘어가고 빚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해졌을 때 여기서 내보낼 거야. 아마 반년쯤 후겠지.”

    “뭐, 뭐라고요?”

    “오갈 데 없는 알거지가 되어 나가면 평창동 김 전무는 물론이고 당신한테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겠지? 잘 도망 다니라고. 잡히면 어떻게 될지 뻔하잖아.”

    건조하고 새카만 눈동자가 세희를 천천히 훑어내렸다.

    그 눈길의 의미를 깨달은 세희가 몸을 웅크렸다.

    검은돈을 빌리고 갚지 못한 이들의 최후는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연주, 우리 연주는….”

    “내 알 바가 아니지. 내가 용건이 있는 건 너희 둘이니까. 당신 딸이 밖에서 혼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뭐, 그건 그쪽 사정이고.”

    설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씩, 미소를 짓자 세희의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허공을 휘젓는 손짓 한 번에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남자들의 발길질이 멎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 뼈가 앙상한 몸은 발버둥조차 힘들어 죽은 듯이 신음만 뱉어낼 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너무 없이 살아서… 돈, 재호 씨 돈에 눈이 멀었어요. 깨어난 연이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연이는 미성년자였어요. 난 재혼한 지 1년도 안 된 계모여서 법적 다툼이 생기면 불리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른 사람이 나타나 그 많은 돈을 가져가면 어쩌나 싶어서 나도 모르게 그 애를 데리고 숨었어요. 나는 그저….”

    “그 입 닥쳐.”

    “으윽!”

    할 말을 마치고 지하실을 나서려던 설우가 결국 모두 돈 때문이었다는 얘기를 정성스럽게 늘어놓는 세희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나는 당신들이 죽는 그날까지 죽고 싶게 만들 거야. 명이 다하거나 스스로 삶을 포기할 때까지 계속 너희 목을 조를 거거든.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을 최대한 빨리 선물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

    “…….”

    “그리고 만에 하나 연이가 잘못되는 날엔 가장 고통스럽게, 내가 너를 죽일 거야.”

    눈을 번뜩이며 살기를 뿜어내던 설우가 내던지듯 세희의 멱살을 놓고 지하실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설우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두려워 꾹 다문 입술로 눈물이 스며들었다.

    “으, 흐윽….”

    네 삶은 오늘로 끝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은 세희는 결국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습하고 어두운 지하실 밖으로 조금도 새어나가지 않을 처연한 울음소리였다.

    ***

    타앙, 깔끔한 호를 그린 골프채가 얌전히 기다리는 하얀 공을 밀어냈다.

    하나로 올려 묶은 금발이 힘차게 좌우로 나풀거렸다.

    타고난 선이 예쁜 연이 시원한 스윙을 할 때마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나이스 샷, 좋아요… 어이쿠!”

    “꼬맹이 나이스 샷! 제법인데? 골프에 재능이 있는 거 같아.”

    연의 전담 코치를 밀어낸 이든이 연신 손뼉을 쳤다.

    연은 펠리체 문화센터 수업 중 골프와 꽃꽂이에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

    보통 사람보다 인지가 더딘 그녀가 무언가를 해낼 때마다 뿌듯한 이든은 호들갑스럽게 연을 챙겼다.

    “하다 보니까 되긴 되네요? 처음엔 진짜 못했었는데.”

    “자, 물 한 번 마시고. 힘들진 않아?”

    “응, 안 힘들어요. 근데 조금 배고파요.”

    “거의 끝나가. 날씨 풀리면 넷이 라운딩 가도 되겠다. 설우 형 졸라서 일주일 정도 리조트에서 노는 거지. 골프도 치고, 스파도 하고. 재미있겠지?”

    “완전!”

    “허리 안 아파? 팔, 다리는?”

    “괜찮아요. 이든 요즘 그거 같아요, TV에 나오는 극성 엄마.”

    “비슷하지. 우리 막냉이 아프면 안 되니까 잘 챙겨야 해. 자, 물병 주고 더 쳐.”

    연에게서 생수병을 받은 이든이 대신 들고 있던 골프채를 건넸다.

    살갑게 저를 챙기는 이든을 보며 배시시 웃은 연이 저와 한 마디가 넘게 차이 나는 커다란 손을 잡았다.

    “나는 장난치는 이든도 좋고 다정한 이든도 좋아요.”

    “골프 치다가 고백하는 거야? 다시 말해줘. 녹음했다가 형 들려줘야겠다.”

    “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워요. 이든도 그래요?”

    “응, 네가 안 아파서. 너무 좋아.”

    스윽, 스윽. 이든이 단정하게 묶인 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함께 골프 수업을 듣는 펠리체 사모들은 이젠 익숙해진 모습을 잠시 구경하다 고개를 돌렸다.

    잘난 세 남자와 함께하는 그녀를 질투하기도 했고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연이 설우의 아내가 된 후엔 그 누구도 이전처럼 비난하거나 따돌리지 않았다.

    “자, 연이 씨. 다시 자세 잡을게요. 다리 간격 벌리고, 허리, 무릎, 어깨선은 목표를…?”

    연의 스윙 자세를 체크하던 코치가 이상하게 술렁이는 분위기를 느끼고 허리를 세워 정면을 보았다.

    “저거 차 사장 아니야?”

    “맞네. 모임도 안 나오는 사람이 센터를 다 왔네.”

    “와이프 보러 왔나 봐. 예전에도 한 번 왔었다더라.”

    검은 슈트, 검은 넥타이. 장세희에게 악마의 모습을 보여준 차림 그대로였다.

    흐트러진 앞머리를 가볍게 넘기며 걸어가는 설우를 넋 놓고 구경하던 사모들이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넘겼다.

    지나치게 잘나서 현실성이 없다는 소문까지 돌았던 설우를 처음 마주친 몇몇은 무표정한 얼굴이 풍기는 묘한 분위기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어, 형이다!”

    먼저 설우를 발견한 이든이 외치자 골프채를 던지듯이 놓은 연이 휙, 고개를 들었다.

    연락도 없이 나타난 설우를 보고 점점 커지던 눈이 이내 스르르, 휘어졌다.

    “오빠!”

    곧장 달려간 연이 설우의 허리를 감아 안겼다.

    “재미있게 놀고 있었어?”

    “네, 칭찬도 받았어요. 오빤 왜 여기 있어요? 나랑 점심 먹으려고 왔어요?”

    “우리 연이 보고 싶어서 왔지.”

    하얀 얼굴을 보니 오전 내내 굳어있던 입매가 힘없이 풀려 올라갔다.

    연에게 배운, 연을 닮은 미소였다.

    자비없는 폭력을 일삼고 살의 넘치는 협박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남자의 유일한 예외에게만 허락되는 미소.

    설우의 팔이 연의 어깨와 허리를 두르자 너른 품에 쏙 들어온 작은 몸이 수줍게 바르작거린다.

    “오빠, 여기 사람 되게 많아요.”

    “괜찮아. 오빠 안 보고 싶었어?”

    “당연히 보고 싶었죠. 난 같이 있어도 늘 오빠가 아쉽잖아요. 보고 또 보고 또 봐도 보고 싶을 거라고요.”

    “하하하! 그렇게까지 격한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

    호쾌한 웃음소리가 골프 연습장을 울렸다.

    차설우가 웃는 진귀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 입주민들이 하나같이 입을 벌렸다.

    사납기로 유명한 남자가 아내 앞에서 무장해제되는 모습이 놀라웠다.

    “회사는 일찍 끝난 거예요?”

    “아니, 다시 들어가 봐야 해.”

    “점심은?”

    “선약 있어, 이든이랑 맛있는 거 많이 먹어.”

    “알았어요.”

    정말 얼굴만 보러 온 거구나.

    금방 헤어져야 하는 게 아쉬웠지만 바쁜 설우를 붙잡고 싶지 않은 연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온 김에 얼마나 잘 치는지 볼까?”

    “아, 아니요! 오빠가 보고 있으면 못 칠 거 같아요. 너무 설레서.”

    홍조 띤 연의 볼을 쭉, 늘어뜨린 설우가 사랑스러운 말에 녹아 작은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을 비볐다.

    “죽고 못 사는 건 알겠는데. 적당히 좀 하시죠?”

    이든의 타박은 의미가 없었다.

    “보들보들해, 미치겠다.”

    매끈한 손바닥이 두 볼을 감싸 누르자 귀엽게 내밀어진 연의 입술에 쪽, 쪽, 뽀뽀해 준 설우가 다시 그녀를 품에 넣었다.

    “가야 해요?”

    “응, 저녁에 일찍 올게. 수업 잘 듣고 밥도 잘 챙겨 먹고, 낮잠도 자고, 착하게 기다리고 있어.”

    한 발, 두 발. 멀어지는 설우를 향해 연이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잠깐의 힐링이 필요했다.

    장세희를 만난 것만으로 충분히 피곤한데, 이사들과 오찬에서도 지겨운 입씨름을 해야 했다.

    “조심히 가요, 오빠!”

    예쁘게도 웃지.

    30분도 채 안 되는 짧은 만남이지만 제게 안식을 주는 연을 보고 나니 어깨를 짓누르던 돌덩이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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