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67화 (67/96)

67화.

알거지가 되기 직전인 세희는 가게 문도 열지 못한 채 테이블에 엎어졌다.

여기저기서 빌려온 돈의 첫 상환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갚을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에 3금융권과 대부업체도 가리지 않았다.

이자가 몇 퍼센트인지 읽어보지도 않고 사인한 탓에 연체 시 불어날 부채를 예상할 수 없었다.

제게 닥쳐올 비극을 잘 알고 있어 무서웠다.

선우재호를 만나기 전 뒹굴었던 시궁창으로 돌아가겠지.

그를 만난 후로 두 번 다시 돌아갈 일은 없을 거라 여겼던 삶이었다.

재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재호가 사고를 당했지만 상관없었다.

재호의 많은 재산은 고스란히 연에게 남았고, 어렸던 연은 머리를 다쳐 백치가 되었으니 그 돈은 전부 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부잣집 사모님이라도 된 양, 돈을 물 쓰듯 쓰고 없는 사람들을 깔아보며 살아온 시간이 제법 길었다.

“이럴 순 없는 거야.”

돈을 모조리 날린 후로 얼마나 울었는지.

아직도 퉁퉁 부어 있는 눈이 텅 빈 가게를 둘러보았다.

머지않아 이곳은 빨간 압류 딱지로 뒤덮일 테고 벌써 주위를 맴도는 사채업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텐데.

항상 제 뒤를 단단히 지켜주던 상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도망칠 구석 따윈 없었다.

“장세희 씨.”

“누, 누구시죠?”

혼자만의 절망 속에 빠져 넋을 놓고 있던 세희가 걸걸한 목소리를 듣고 놀라 몸을 들썩였다.

검은 양복에 커다란 체격.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했다.

혹시 상철이 보낸 사람일까. 순간 기대했지만, 드문드문 섞여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외국인들은 지나치게 낯설었다.

“선우연 양 아시죠?”

“몰라요, 난 몰라요.”

첸의 명령을 받고 온 주안이 헛웃음을 쳤다.

“그럼 권다미 양은? 딸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왜 이러는 거예요? 당장 나가요! 오픈도 안 했는데 왜 남의 가게에 마음대로 들어와요?”

“같이 가시죠. 그쪽 남편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겨,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알만한 분이 왜 이러실까. 조용히 갑시다. 당신한테 돈 받아야 할 하이에나들 건물 근처에 우글우글하던데. 여기 있어 봐야 산 채로 잡아먹히기 밖에 더하겠어요?”

“같이 가면 상철 씨 볼 수 있어요?”

가장 앞에 선 남자의 말 중 틀린 부분은 없었다.

악명 높은 김 전무의 돈까지 빌렸으니 사형을 목전에 두고 있던 셈이었다.

“볼 수는 있을 겁니다.”

모든 걸 체념한 세희가 순순히 주안을 따랐다.

재호의 재산을 독식하기 위해 처음 연을 빼돌릴 때와는 상반된 처연한 얼굴이었다.

***

차 회장이 내팽개친 사기그릇에서 밥이 쏟아지자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은 맏며느리 유정이 김이 펄펄 오르는 밥을 맨손으로 주워 담았다.

유정의 두 며느리는 깨진 국그릇과 이리저리 튀긴 국을 닦아내고 있었다.

식사에 관련된 일은 직원이 아닌 유정과 그녀의 며느리들이 도맡아 하고 있었으니 치우는 것 역시 그들의 몫이었다.

CH가의 며느리 십계명이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니지.

어지럽히는 사람 따로, 치우는 사람 따로라더니.

차 회장이 더럽힌 다이닝룸 바닥을 며느리들이 기어 다니며 닦는 우스운 광경에 화진이 코웃음을 쳤다.

아들, 손자, 며느리. 누구 하나 빠짐없이 본인 뜻대로 길들이고 싶어 했던 차 회장의 전유물을 보는 느낌이었다.

“부족한 걸 채우려면 배워야 할 거 아니야! 왜 자꾸 삐딱선을 타!”

“부족하지 않으니 채울 게 없습니다.”

화진이 유경에게 언질 해주었던 대로 차 회장과 설우의 싸움은 첫 식사부터 가볍지 않았다.

연을 다른 며느리들처럼 교육하겠다는 차 회장과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설우의 대립이었다.

“다른 아이들 다 똑같이 배운 것들이야! 네 큰어머니도 마찬가지고.”

“하아, 제가 선택을 잘못했네요. 한남동에 들어와 사는 일 없었던 걸로 하겠습니다.”

“나갈 테면 나가고, 어디 한 번 네 놈 재주껏 숨겨 보아라. 내 여생은 그 아이 찾아 네 옆에서 치우는데 바칠 테니.”

이유도 명분도 없는 패악질에 설우의 눈가가 사정없이 구겨졌지만, 차 회장의 말이 너무나도 진심같이 느껴져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한남동에 들어온 이유기도 했다.

합가 요구마저 들어주지 않았다면 너 죽고 나 죽자며 덤벼들 조부의 성미를 알고 있었다.

차 회장은 손자의 거듭된 반항으로 이미 고고한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상태였다.

“오빠, 내가 배울게요. 할 수 있어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분란에 혼란스러워진 연이 설우의 팔을 잡았다.

“절대 안 돼.”

쾅!

“본인이 하겠다는데 대체 왜 네 놈이 난리야!”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는 설우를 노려보던 차 회장이 진작에 밥과 국을 쓸어버려 텅 빈 식탁을 거세게 내려쳤다.

차 회장이 만드는 소음이 익숙한 가족들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그릇을 내던질 때만큼이나 화들짝 놀란 연은 어깨를 들썩였다.

연달아 놀란 연이 걱정스러운 설우가 차 회장을 등졌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화진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물을 한 잔 마셨다.

이런 남편과 살았으니 시어머니가 그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게 아닐까.

한남동에 살던 시절 문득 들었던 생각이었다.

“아픈 애한테 눈칫밥 먹이면 분이 좀 풀리세요? 배울 만큼 배우신 분이 왜 그러세요, 매번. 유치하게. 설우가 좋다잖아요. 연이 하나 들어온다고 CH가 망해요?”

“넌 왜 이제 와 어미 행세야! 그 자리가 갖고 싶어 아들 버리고 집 떠난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끊이지 않는 큰소리에 불안하게 요동치던 연의 눈동자가 점점 빛을 잃어갔다.

“자도 돼, 괜찮아.”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펠리체로. 펠리체에서 다시 한남동으로. 거기다 차 회장이 주는 스트레스까지.

제대로 쉬지 못한 연이 낮에 잠들지 않았던 탓에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덕분에 아버님이랑 저, 지금 같은 높이에 서 있잖아요.”

아킬레스건을 건드려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화진이 서서히 눈을 감는 연을 힐긋거렸다.

연이 깊게 잠들자 곧바로 일어난 설우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

“저것 봐라! 어쩌자고 저런 애랑 살겠다는 거야. 뭐 하나 멀쩡한 구석이 없는데!”

“그간 연이한테 한 독설로 부족하세요? 제발 적당히 좀 하세요!”

이젠 애처롭기까지 한 설우의 목소리에 화진의 눈매가 사납게 올라섰다.

“연이 데리고 가서 재워.”

“누구 마음대로!”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는 듯, 설우는 곧장 다이닝룸을 빠져나갔다.

“지금부턴 저랑 이야기하세요.”

“당신 그만해, 아버지도 그만 하세요. 식구들 다 모인 자리입니다.”

현준이 중재해보려 했지만 둘 다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만하긴 뭘 그만해!”

얼굴이 시뻘게진 차 회장이 역정을 냈다.

이미 오를 대로 오른 혈압 때문에 머리에서 더운 김이 피어날 지경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는 경고예요. 설우 그냥 두세요.”

쉬엄쉬엄, 좋게좋게.

일을 키워봐야 피차 좋은 것이 없기에 유연하게 넘어가 주었더니 내가 만만해 보이는 건가.

과거엔 차이가 제법 났지만, 지금은 CH와 현진의 우위를 가리기 힘들 텐데.

“경고? 지금 경고라고 한 게야?”

“네, 맞아요. 아버님. 아니, 차 회장님. 말년에 더러운 꼴 보고 싶지 않으시잖아요.”

“뭐?”

“재계 2위는커녕 10위권 밖으로 밀리기 전에 마음씨 곱게 쓰시라고.”

그래도 한때는 시아버지였는데.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이 무색할 만큼 신랄한 화진의 언사에 놀란 유정이 탄식했다.

화진은 고분고분하게 명령을 따르는 저와 결이 달랐던 동서였다.

한 번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사사건건 시부와 부딪히던 그녀는 결국 어린 아들을 두고 집을 떠났다.

옳고 그름이 확실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한. 누구보다 저 자신이 가장 먼저였던 여자.

이해할 수 없다가도 가끔은 부러웠다.

거침없이 차 회장을 압박하는 화진을 보고 있으니 나뒹구는 식기와 음식물을 정리하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너, 너! 어디 내 집 식탁에 앉아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무능력한 후계자에 정경유착의 중심에선 명예 회장. 지금까지 저지른 비리가 까도 까도 나오는 양파 속 같을 게 뻔한데 추문 좀 만들어 드릴까? 다른 사람은 못해도 난 해요, 회장님. 우리 서로 좋은 상대잖아.”

제가 이끄는 현진그룹이 폭발적인 성장률을 보이는 시점에 논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지만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아픈 아이를 돌보는 것만으로 속이 문드러질 텐데.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제 말이 곧 법인 줄 아는 고지식한 노인네는 하나뿐인 아들의 피를 말릴 기세였다.

저러다 정말 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속절없이 무너질 설우가 눈에 선했다.

붉게 칠한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린 화진이 드르륵,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방진 것.”

노기 어린 목소리가 한풀 꺾였다.

현진의 수장인 그녀가 마음먹고 움직인다면 분명 위협이 되겠지.

한때 며느리였던 화진이 현재는 저와 동등한 곳에 서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쇠창살 안에 갇혀 남은 생 보내고 싶지 않으시면 내 아들 눈에 피눈물 나게 하지 마세요.”

점점 극단적으로 흐르는 상황에 결국 참전을 선언한 화진이 가벼운 눈인사를 끝으로 사라지자 집안사람만이 남은 다이닝룸엔 무거운 침묵만이 맴돌고 있었다.

***

본가 별관에서 처음 맞는 아침.

익숙하게 넥타이를 둘러매고 진회색 롱코트를 꺼내 입는 것으로 출근 준비를 마친 설우가 두꺼운 이불로 꼭꼭 여민 연을 안고 낯선 공간을 빠져나왔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잠든 연은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설우는 비교적 태연했다.

괜찮다고 말하면 정말 괜찮을 거라고.

뻐근하게 조이는 심장의 통증엔 내성이 생기지 않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견뎌볼 생각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날 보며 너도 아무렇지 않았으면 해서.

“회장님께서 아침 식사하고 출근하시랍니다.”

별관을 나서자마자 나타난 불청객을 보고 인상을 구긴 설우가 우뚝 멈춰 섰다.

“생각 없습니다.”

“사모님은 아침 식사 후 9시부터 식사 예절 교육을 받으셔야 합니다만.”

뭉친 이불 더미 사이로 금발을 발견한 정 집사가 진한 눈썹을 들썩였다.

시댁 식구와 함께 사는 집에서 출근하는 남편에게 안겨 나오는 건 무슨 경우인지.

배운 게 없다더니 예의도 없는 건가.

차 회장이 함구한 탓에 연의 병에 관해서는 전혀 듣지 못한 정 집사는 철없는 어린 신부를 한심해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누가 누구한테 교육을 합니까.”

“주로 저와 큰 사모님께서 맡을 예정입니다. 큰 사모님 댁 며느님들이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실 거고요. 오늘은 식사예절과 집안 행사 관련 교육만 진행하겠습니다.”

“정 집사가 내 아내에게 무언가 가르칠 일은 없을 겁니다. 큰어머니께도 전하세요.”

“다른 사모님들께서는 식사 3시간 전부터 내려와 준비하십니다. 막내 사모님만 예외가 될 순 없습니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할아버지 시중드느라 바쁜 줄 알았더니 시간이 남아도는 모양이네.”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자그마치 40년이었다.

설우가 태어나기 전부터 차 회장의 곁을 지킨 여자답게 전혀 기에 눌리지 않은 정 집사는 또박또박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깍듯하게 허리를 숙인 정 집사를 지그시 노려본 설우가 미리 시동을 걸어둔 차 안에 연을 태웠다.

“편히 자서 다행이다.”

낮이 아닌 밤에 움직이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는 사실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다.

“오늘은 반만 좋은 아침으로 하자.”

조수석을 젖히고 안전벨트까지 잊지 않은 설우는 이불을 걷어 드러난 분홍빛 볼에 가볍게 모닝 키스를 전하고 펠리체로 향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던 어제와 마찬가지로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연을 기다리던 이든이 시무룩해져 입술을 내밀었다.

“간호해 준다더니. 못 일어났네.”

“언제부터 잔 거야?”

혹시 연이 아침을 먹지 않고 왔을까 봐 분주히 손을 놀리던 첸도 앞치마를 입은 채 마중을 나왔다.

“어제 저녁 먹다가.”

“회장님 또 난리 나셨겠다.”

“이쁨받고 싶어서 젓가락질 연습 많이 했는데. 말짱 도루묵이네. 가여운 우리 막냉이.”

“아직 윤 교수 안 만났잖아. 약 안 먹은 거야?”

“먹은 거야. 어제 낮에 잠을 안 잤어.”

설우는 소중히 품에 안은 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인사 없이 헤어지는 아침이 못내 아쉬워 자는 모습이라도 많이 봐두고 싶었다.

“연이 일어나면 전화할게.”

“혹시 움직일지 모르니까 신경 써. 수면 장애보다 약 부작용이 심해. 몽롱한 정신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알았어, 꼬맹이 나한테 줘. 방에 다 재울게.”

“야, 너 아직 안 돼.”

수술 부위가 완벽히 아물지 않은 이든을 저지한 첸이 앞치마를 벗어 넘기고 연을 받았다.

가벼운 몸과 무거운 이불이 동시에 빠져나가 허전해진 팔에 매끄러운 살결이 덥혔다.

힘없는 손으로 설우의 팔목을 잡은 연이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잠에서 깨지 않은 채였다.

“연아, 오빠 다녀올게.”

무의식적인 행동인 듯싶었지만, 환한 미소로 답한 설우가 손바닥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의미 없이 떠졌던 눈꺼풀은 금세 제자리로 돌아갔다.

혼자 하는 짧은 인사와 함께 제 팔목 위에 얹힌 하얀 손을 재차 쓰다듬은 설우는 모래주머니가 달린 듯 무거운 발을 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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