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작은 사이즈의 캐리어를 끌고 공항을 나선 연이 반가운 얼굴을 보고 달려 나갔다.
“첸!”
캐리어는 물론이고 뒤따르던 설우까지 버려둔 채 후다닥 사라진 연이 펄쩍 뛰어 첸에게 안겼다.
“재미있게 놀다 왔어?”
“너무너무너무. 돌고래도 보고, 낚시도 했어요. 수산 시장에서 팔딱거리는 물고기도 봤는데 내가 결국 그걸 먹었어요. 어릴 땐 제주도에 살아도 절대 안 먹었거든요.”
“나랑 이든은 일주일이 너무너무너무 길었는데.”
“하루는 바다 위에서 잤고요, 하루는 내가 예전에 살았던 펜션에서 잤어요. 오빠가 새로 지었대요. 나머지는 파라다이스에서 지냈어요. 스파도 하고, 첸이랑 이든 선물도 사 왔어요. 나중에 보여줄게요.”
“으,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나도요.”
“고작 일주일이었거든? 인사가 지나치다. 누가 보면 둘이 부부인 줄 알겠네.”
격한 포옹을 서슴지 않는 둘의 사이로 파고 들어간 설우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일주일 동안 품에 끼고 있었으면 양보 좀 하지? 사진 좀 보내달라니까 겨우 한 장이 뭐냐? 이든은 우울증 걸리기 직전이야. 애가 맛이 갔다고.”
“이든 아직도 병원에 있어요?”
“퇴원은 어제 했는데 아직 무리하면 안 돼. 떼어놓고 오느라 진이 다 빠졌어.”
“빨리 이든한테 가요.”
“한남동엔 언제 가?”
눈치를 살피며 첸과 설우의 손을 하나씩 잡은 연이 방글거렸다.
갈 때는 제대로 보지 못했던 구름 위를 마음껏 구경한 연은 아침에 했던 걱정은 모두 잊은 듯 금세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저녁에.”
“뭐야, 같이 저녁도 못 먹어? 연이 주려고 소 갈비찜 했는데.”
“그건 간식으로 먹을게요!”
“그럴래?”
“네, 얼른 가요.”
“발발거리지 말고 차에 타 있어.”
짐이 쌓인 카트를 트렁크 앞에 세워 둔 설우는 뒷좌석에 연을 태우고 문을 닫았다.
“얼굴이 왜 그래?”
“연이가 휘두른 주먹에 맞았어.”
“저 솜방망이에 맞고 멍이 들었단 말이야? 차설우도 늙나 보다.”
“너도 맞아보든지. 어깨도 물렸어, 저 작은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괜찮아?”
“뭐가.”
“몸? 마음?”
“몸은 괜찮고 마음은 안 괜찮아. 날 자꾸 다치게 하니까 연이가 이제 병을 무서워해. 내가 더 조심했어야 하는데.”
트렁크 속으로 짐가방을 넣은 속도가 느릿했다.
연이 듣고 있지 않은 틈을 타 가감 없이 착잡한 심정을 드러낸 설우가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일주일 동안 잠을 안 잘 수도 없는데 어떻게 더 조심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약을 그만 먹이려고 해.”
“연이 같은 희귀난치성 수면장애는 여기보단 미국에서 연구가 활발하대. 내가 그쪽으로 알아볼게.”
탕, 트렁크가 닫히는 소리에 연이 차창을 돌아보자 설우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주안한테 연락해서 장세희 제이로 데려다 놓으라고 해. 권상철이랑 다른 방으로.”
“김 전무가 장세희한테 사람 붙여 뒀어. 장세희 데려오면 권상철도 제이에 있다고 생각할 거야.”
“상관없어. 어차피 제이에서 못 데리고 나가.”
“데리고 오면?”
“뻔뻔한 낯짝부터 봐야지.”
“그래, 일단 타자. 저러다 목 빠지겠어.”
설우와 첸이 차에 타지 않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는 연을 가리킨 첸이 설우의 어깨를 툭 건드리고 운전석으로 향했다.
「1층입니다.」
지하 차고에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손꼽아 기다리던 이든이 문이 열리고 나타난 금빛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꼬맹이!”
“이든!”
쪼르르 다가선 연은 이든의 몸을 상하게 할까 봐 포옹 대신 두 손을 잡아 흔들었다.
“볼살이 포동포동 오른 거 보니까 잘 놀다 왔나 본데?”
“오빠가 맛있는 걸 왕창 사줬어요. 많이 먹어도 된다고 해서 배가 터지도록 먹었죠. 이든은 어때요?”
“재잘대는 병아리가 없어서 심심해 죽는 줄 알았지.”
“그거 말고, 몸이요, 몸!”
“아, 몸 보여달라고? 역시 형보단 내 몸이 낫지? 아악!”
정말 벗을 기세로 티셔츠를 올리는 이든의 뒤통수로 설우의 손바닥이 가차 없이 날아들었다.
“오빠! 이든 아직 아프잖아요.”
“머리가 다친 건 아니니까 괜찮아.”
“내 머리는 이미 오래전에 다쳤어. 형 손바닥 덕분에.”
“맞을 짓을 하지 마. 왜 연이한테 네 몸을 들이대.”
“짱짱한 근육 구경 좀 시켜주려고 그런다.”
“너 좋다는 여자한테나 보여줘. 연이는 내 몸을 제일 좋아하니까.”
이든과 설우가 만난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틱틱거리자 쯧, 하고 혀를 찬 첸이 연의 귀를 살포시 막아주었다.
“저런 유치한 말싸움 들으면 정서에 안 좋아. 우린 갈비찜이나 먹으러 가자.”
“네! 많아요?”
“당연하지. 살 오른 김에 더 많이 먹어. 아기 돼지처럼 토실토실해지면 좋을 텐데.”
“뭐예요, 그게.”
“지금보다 더 귀여울걸? 가서 앉아, 가져다줄게.”
갈비찜을 데우기 위해 인덕션을 켠 첸은 그녀가 즐겨 사용하는 노란 접시와 포크를 꺼내주었다.
“젓가락 주세요, 첸.”
“교정 젓가락?”
“아뇨, 그냥 젓가락. 이제 곧잘 해요. 그리고 한남동에서 밥 먹어야 하잖아요, 포크 쓰면 혼날 거예요. 할아버지 화내시면 설우 오빠만큼 무서워요.”
설우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줄이고 웅얼거린 연이 여전히 낯선 쇠젓가락을 집었다.
기억이 돌아왔는데도 왜 쉽지가 않은 걸까.
머릿속엔 방법이 그려지는데 손가락이 따라주질 않는다.
엉성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을 안타깝게 바라본 첸이 거추장스러운 연의 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듯했으나 차 회장에게 싫은 소리를 들을 것이 분명했다.
“너 이제 설우 안 무서워하잖아.”
“남편이 무서우면 안 되지. 안 그래, 여보?”
“네, 안 무서워요. 여보.”
“잘 따라 하네.”
만족스러운 답을 들은 설우가 말랑한 볼에 입을 맞췄다.
“헐, 미친.”
그를 뒤따라온 이든이 제 귀를 의심하며 입을 벌렸다.
남편으로 모자라 여보라니.
식을 올렸으니 틀린 호칭은 아니었지만, 발끝부터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천천히 좀 가르쳐라. 결혼하자마자 여보, 당신 하는 부부가 얼마나 된다고.”
“한남동 들어가면 꼬박꼬박 여보라고 해.”
“왜요?”
“할아버지 사사건건 트집 잡을 거야. 잔소리 못 하게 선수 치는 거지.”
“아아, 난 좋아요.”
“첸이랑 이든이랑 맛있게 먹고 있어. 오빠 서재에 좀 있을게.”
“네!”
들썩이는 연의 어깨를 꾹 한 번 누른 설우가 휴대 전화를 꺼내 들고 서재로 향했다.
둘이 여행을 다니는 것도 물론 좋았지만, 첸과 이든이 있는 펠리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안정감을 주었다.
“와, 진짜 맛있겠다. 나 밥도 주세요, 첸!”
달짝지근한 냄새가 풍기자 꼴깍, 침을 삼킨 연이 양손에 쥔 수저로 원목 탁자를 두드렸다.
오랜만에 격한 리액션을 받은 첸은 짠하게 피어나는 뿌듯함을 만끽했다.
“괜찮겠어? 한남동 가서 또 먹어야 할 텐데.”
“나 엄청나게 잘 먹는 거 몰라요? 지금 먹는다고 이따가 못 먹을 만큼 나약하지 않아요.”
“불편한 자리에서 먹다가 체하지나 마. 꼬맹이 오늘부터 한남동에서 자는 건가?”
“아마도.”
포슬포슬한 쌀밥 위로 육즙이 들어찬 소갈비를 얹어준 첸이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일주일 만에 봤는데. 남은 시간은 고작 2시간 남짓이라니.
“짐 하나도 안 빼갔잖아!”
“빼갈 게 뭐 있겠냐. 그쪽에서 전부 새로 들였겠지.”
“안 돼, 우리 꼬맹이를 이렇게 보낼 순 없어. 내 게임기라도 가져갈래?”
“왜 영영 안 올 사람 취급해요? 내일 아침이면 또 올 건데.”
“매일 같이 있다가 떨어지는 거잖아. 형이랑 둘이 뭐 하고 노냐고.”
서운한 기색이 역력한 이든이 식탁 위로 널브러졌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자식을 집 밖으로 내놓아야 하는 심정이란.
당장 펠리체를 떠난다는 아쉬움이 커 그녀가 아침에 다시 올 거라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내 울상을 짓는 두 남자는 안중에도 없는 연은 쪽쪽, 갈빗대를 빠는 데 집중했다.
“연이 없을 땐 뭐 하고 놀았냐, 우리.”
“죽자고 술이나 마셨지.”
“아침 일찍부터 나랑 놀려면 술 마시지 말고 기다려요.”
“알았어, 꼭 와야 해. 아니면 한남동으로 쳐들어간다.”
흐느적거리던 이든이 벌떡 상체를 세우고 으르렁거렸다.
한남동에 사는 누구든 연에게 해를 입히면 일단 들이받고 생각할 작정이었다.
“와서 이든 간호해 줄게요.”
“진짜?”
“응, 진짜.”
“완전 일찍 일어나서 기다릴 거야.”
“네네, 그만하고 이든이랑 첸도 좀 먹어요. 내가 다 먹겠다.”
첸과 이든은 그제야 젓가락을 들었다.
배시시 올라가는 입꼬리에 어김없이 사르르 녹는 둘이었다.
-요즘 전화가 잦다?
“저녁에 바쁘세요?”
-나야 늘 바쁘지, 왜.
서재 가죽 소파에 편히 기대앉은 설우가 화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퉁명스러운 말과 다르게 화색이 도는 목소리였다.
“오늘 한남동 들어가요. 가서 저녁 먹을 예정인데 바쁜 일 없으면 오시라고요.”
-얘, 난 네 할아버지랑 겸상하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거 같아. 안 그래도 자주 부딪혀 짜증 나는데 또 거길 오라고?
“네, 연이 컨디션이 별로예요.”
-어디가 많이 안 좋니?
“약도 잘 안 듣고 최근에 우울감도 많이 느끼는 거 같아요. 와서 할아버지 상대 좀 해주세요.”
-너도 잘하잖아.
“싸우면서 챙기기 힘들잖아요.”
-그래, 알았다.
잘생긴 얼굴에 상처 나는 것보단 내가 가는 게 낫겠지.
“6시까지요.”
-필요한 건 없고?
“외가 쪽에 있는 파라다이스 지분 모아주실 수 있죠?”
-어렵지 않지. 거진 나랑 네 외삼촌이 가졌으니까.
“모아 주세요.”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
“네.”
사나운 지원군을 부른 설우가 뻣뻣하게 굳은 목을 문질렀다.
연의 잠이 늘수록 설우의 잠은 줄었다.
아무리 건장한 성인 남자라도 피로감을 떨쳐낼 순 없었다.
‘조금 무서워요.’
잘게 떨리던 목소리가 귓가를 돌아다닌다.
아파도 괜찮다고, 묶여도 괜찮다고. 오빠만 있으면 전부 괜찮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너인데.
얼마나 겁이 났으면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아무도 모르게 그동안 몇 번이나 되뇌었을까.
무겁게만 느껴지는 고개를 떨군 설우가 마음을 다잡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빌어먹을.”
결국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뼛속 깊이 사무칠 때마다 아무리 커도 부질없는 그깟 사랑을 욕하게 되는 그였다.
***
한남동 본가에 처음 발을 들인 연은 펠리체와 닮은 대문을 지난 후에도 끝없이 달리는 차 안에서 연신 감탄을 뿜어냈다.
“밖에 있는 도로 같아요. 신호등이 있어야 할 거 같아.”
매끈하게 닦인 길을 따라 오르면 도심 속 공원을 닮은 정원이 드넓게 펼쳐졌다.
펠리체가 귀족들이 모여 사는 성이라면 한남동 저택은 왕이 사는 궁전과 같았다.
“쓸데없이 넓은 것뿐이야.”
피붙이들을 끼고 살기 위해 값비싼 부지를 모아 지었으니 거대할 수밖에.
설우의 차가 들어서자 본관 앞에 늘어선 입주 직원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삐딱한 미소를 입에 건 설우가 먼저 내려 연을 챙겼다. 차에 대고 인사하는 모습이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오셨어요.”
차 회장의 최측근인 정 집사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흰머리 한 올 보이지 않게 깔끔한 행색을 유지하는 여자는 산만하게 고개를 돌리는 연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단단히 붙잡고 교육하라는 차 회장의 전언이 있었으니 제 나름의 견적을 내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정혜선입니다. 편하게 정 집사라고 불러주세요.”
“네, 정 집사님.”
“님, 자는 빼고 정 집사입니다. 식구가 되셨으니 앞으로는 이곳의 방식에 따라 주셔야 해요. 사모님께서 이 집안에 잘 적응하시도록 제가 신경을….”
“들어가, 추워.”
“네?”
“전부 들어줄 필요 없어.”
구구절절 불필요한 말을 쏟아내는 정 집사를 등진 설우가 곧장 연의 손을 잡아 집안으로 들어섰다.
완벽한 무시였지만 정 집사는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