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65화 (65/96)

65화.

끼익, 열릴 때마다 귀를 괴롭히는 지하실의 철문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다.

짙은 어둠에 갇혀 있던 눈에 밝은 빛이 비치자 상철이 축 늘어져 있던 눈꼬리를 움찔거렸다.

“차설우?”

빛에 적응하지 못한 상철은 체격이 비슷한 첸을 보고 설우를 찾았다.

“설우는 지금 신혼여행 중이라 여긴 못 옵니다.”

“누, 누구야. 당신.”

“그쪽 사촌 손가락을 부러뜨린 사람이라고 하면 대화가 편할까요?”

싱긋 웃은 첸이 손발이 묶인 채 얌전히 앉은 상철에게 다가섰다.

이든과 설우에 비해선 점잖고 상냥해 보였으나 그저 인상일 뿐이었다.

“그래서, 내 손가락도 부러뜨려보시게?”

“못할 것도 없죠. 내가 이든보다 힘이 약하긴 하지만 조금 더 잔인하거든.”

드르륵, 낡은 의자를 반대로 돌려 앉은 첸이 나무 등받이에 두 팔을 걸었다.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까 세희부터 데려다 달라고 했잖아!”

참 눈물 나는 순정이네.

“이봐,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장세희가 여기 오면 상황이 달라질 거 같아?”

“김 전무 그 자식 손에 잡혀가는 것보단 나을 거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차설우가 김 전무보다 자비로울까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네.”

“뭐, 뭐라는 거야!”

“내가 장담하는데 김 전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예요, 더군다나 요즘 연이 상태가 정말 별로거든. 여긴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라고 열심히 말리고 있긴 한데, 당신 아내 죽일지도 몰라.”

“안 돼, 제발! 철없고 불쌍한 여자야. 차라리 나한테 풀라고.”

먹지 못하고, 제대로 몸을 눕히지도 못해 힘없이 무릎으로 기어 나온 상철이 납작 엎드려 흐느꼈다.

“죽이지 않고, 남자 밑에 깔려 구르지 않게 해줄 수 있어. 우리가 백창석 대표 자금줄을 끊어 보려고 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당신이 알고 있다면.”

“알고 있어! 어르신, 아니 백창석 대표 검은돈 출처에 대해선 들은 게 많아.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심부름꾼들 사이에 소문이 많았다고.”

“좋아요, 자세한 건 주안이랑 이야기해요. 난 병수발을 드는 중이라.”

“세희는 언제 데려다주겠다는 거야!”

“그거 알아요? 연이는 당신들이 밉지도 않대. 지금이 너무 행복해서 누굴 원망하고 싶지가 않다는 거야.”

“으, 으아악!”

“죄책감이란 걸 가져보는 게 어때요.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려 놓고 당신이 원하는 것만 주야장천 외치면 우리가 이 엿 같은 보복을 끝낼 수가 없잖아.”

삐쩍 마른 몰골을 무심하게 내려본 첸이 딱딱한 구둣발로 상철의 손등을 짓이겼다.

세 남자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면서도 상철은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았다.

연을 가둬둔 오랜 시간 동안 죄의식 자체가 없었음을 증명하는 꼴이었다.

권상철을 만나고 온 후 기분이 더럽다며 툴툴거리던 이든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남자의 핏자국이 묻은 구둣발을 짜증스럽게 바닥에 비빈 첸이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어, 말해.

“권상철 만났어. 협조하겠대.”

-김 전무가 관리하는 돈 말고도 점조직 형태로 현금을 끌어모을 거야. 할아버지가 대놓고 줄 수 있는 돈이 많지는 않을 테니까.

“옆에 연이 없어?”

-아쿠아리움이야, 물고기에 정신 팔렸어. 돈줄부터 끊어놔야 압박하기 쉬울 거야.

“그래. 연이는 어때? 거기선 묶어둘 수도 없잖아. 위험하지 않겠어?”

걱정이 담긴 첸의 목소리에 설우가 한동안 답을 하지 못했다.

-좋은 건 아닌데 아직 괜찮아.

“잘 데리고 놀다 와. 서울 오면 피곤할 일만 가득하니까.”

-그래.

바꿔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아직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해사한 미소가 그리워진 첸이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우리 막둥이가 아프지 말고 재미있게 놀다 와야 할 텐데.

[놀면서 연이 사진 좀 찍어 보내.]

짧은 메시지를 끝으로 휴대 전화를 집어넣은 첸이 무료함에 몸부림치고 있을 이든의 병원으로 향했다.

***

제 얼굴만한 돌고래 인형을 옆구리에 낀 연이 설우가 내민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었다.

“추운데 꼭 아이스크림을 먹어야겠어?”

“하나도 안 추워요.”

“볼도 빨갛고 귀도 빨개.”

“이건 돌고래쇼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런 거예요.”

“그렇게 좋았어? 구경하는 내내 오빤 관심 밖이던데.”

설우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집에만 있어도 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그녀였지만, 바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의 얼굴은 지나치게 밝았다.

“아빠랑 왔을 땐 이렇게 화려하지 않았는데. 확실히 다르네요.”

“자, 한 입만 더 먹고 그만. 너 감기 걸리면 안 돼. 다른 약 먹기 힘들어.”

“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연이 입안 가득 아이스크림을 집어넣었다.

마지막이란 말에 욕심을 부려 연의 입술 주위로 묻어난 하얀 크림은 설우의 몫이었다.

차가운 입술을 전부 빨아들인 설우가 콧등을 맞대고 씨익, 미소를 짓자 연이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어.”

“오늘이 겨우 이틀째라는 거? 아직 오빠랑 5일이나 여기서 놀 수 있어요.”

“더 오래 있을까?”

“아뇨, 딱 좋아요. 이제 리조트로 가요.”

“벌써? 또 보고 싶은 거 없어?”

“밖에서 하는 건 하루에 하나면 충분해요.”

“괜찮다니까.”

“가서 같이 따뜻한 물에서 수영해요.”

불만스럽게 눈썹을 꿈틀거리는 설우의 허리를 둘러 안은 연이 애교를 부렸다.

“그건 집에 가서도 할 수 있잖아.”

“아쿠아리움에 오래 있어서 잘 시간 지났어요. 밖에서 잠드는 거 말고, 오빠랑 둘이 이야기하다가 자는 게 좋아요.”

“알았어.”

나지막이 대답한 설우가 대충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선글라스를 꺼내 연에게 끼웠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 선글라스는 코에 간신히 걸린 채 덜렁거렸다.

“왜요? 불편한데.”

“사람들이 자꾸 네 눈만 봐, 싫어.”

외국인 관광객도 늘어나는 추세이고 예능 프로그램에서 혼혈 아이들의 출현도 잦았지만, 막상 눈앞에 금빛을 띠는 여자가 돌아다니니 어딜 가든 흘깃거리는 시선이 몰려들었다.

따뜻한 귀마개가 달린 버킷햇을 깊이 눌러 씌워도 가려지지 않는 외모가 영 신경 쓰인 설우가 결국 그녀의 눈까지 가려버렸다.

“어렸을 땐 이 눈이 정말 싫었어요.”

“지금은 좋아?”

“오빠가 좋아하니까.”

“난 그냥 네가 좋은 거고.”

설우의 담백한 고백에 연이 두 팔을 벌렸다.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자 애정이 담긴 눈이 같은 높이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반쯤 돌아간 초승달처럼 헤벌쭉 찢어진 입매가 쏙 빼닮은 연인이었다.

“안 졸려?”

“네!”

“목욕하다 잠들 줄 알았더니.”

“오빠가 못 자게 했잖아요.”

가는 목부터 시작된 붉은 자국이 헐렁한 샤워가운 속까지 이어져 길을 만들었다.

물속에서 끈질기게 달라 붙어놓고 잠들 줄 알았다니.

“졸릴 땐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자거든. 이리 와, 앉아. 머리 말려 줄게.”

“오빠 먼저요, 내가 해줄게요.”

“안 돼. 너 피곤해서 곧 잠들 거야, 말리고 자야 해.”

아쿠아리움을 뛰어다니고 뜨끈하게 반신욕까지 마쳤으니 나른해지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오빠 머린 금방 마를 거예요.”

“그럼 반만 말려주세요.”

“네.”

결국 연에게 드라이기를 쥐여준 설우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 화장대 위에 앉혀 주었다.

“저는 뜨거운 바람 싫어요.”

“까다로우시네요.”

여느 신혼부부처럼 유치한 장난이 이어지고 설우의 머리카락을 말리기 위해 힘차게 흔들리던 손목이 점점 방향을 잃어갔다.

미지근한 바람에 맞춰 요리조리 제 머리를 움직여주던 설우가 피식, 웃으며 연의 손에 아슬아슬하게 들린 드라이기를 잡아 내려놓았다.

“이것 봐. 먼저 말렸어야 한다니까.”

“감기는 안 걸릴 거예요, 나 튼튼해….”

“팔이나 뻗어.”

높은 화장대 위에서 기우뚱거리는 연을 어렵지 않게 받아내고 침대에 눕힌 설우가 두꺼운 이불을 하나 더 꺼내와 꼼꼼히 덮어 주었다.

“저녁 먹기 전에 일어날게요.”

“응, 기다릴게. 잘자.”

달콤한 인사를 듣고 옅은 미소를 지은 연의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앉았다.

아쉽지만 익숙한, 짧은 이별이었다.

야속하리만큼 빠르게 흘러간 시간은 신혼여행의 마지막 아침을 밝혔다.

처음으로 설우보다 먼저 잠에서 깬 연이 저와 같은 자세로 엎드려 자는 그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매끈한 턱선 위로 자리 잡은 푸른 멍 자국이 마음을 시리게 만들었다.

신혼여행 내내 고약했던 잠버릇이 설우를 괴롭힌 흔적 중 하나였다.

그에게 상처를 낼 때마다 심장 깊숙이 유리 조각이 박혀 들었다.

내가 가진 병인데, 나만 아파야 하는데.

왜 자꾸 오빠를 다치게 하는 건지.

이른 아침부터 상념에 빠진 연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나쁜 꿈 꿨어?”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은 연이 바스락거리기 무섭게 쩍쩍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벌써 깼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무거워요.”

얇은 시트 바깥으로 반쯤 드러난 등허리 위로 탄탄한 설우의 가슴팍이 겹쳐졌다.

작은 체구는 어렵지 않게 설우의 몸 아래로 파묻혔다.

두꺼운 이불이라도 된 양 연을 덮은 설우는 바람직한 체격 차이에 만족하며 가는 다리를 제 무릎 사이로 몰아넣었다.

“두꺼운 이불 덮고 자랬잖아. 몸이 왜 이렇게 차.”

“오빠가 매트를 너무 뜨겁게 틀어서 익을 뻔했다고요.”

“울었어?”

“안 울었어요.”

“거짓말.”

“으읏!”

연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여기저기 가볍게 입을 맞추던 설우가 순간 강하게 어깨살을 빨아들였다.

“기억이 돌아오더니 생각이 너무 많아졌어, 그러지 마.”

매트리스 위로 밀착된 옆구리 아래로 밀어 넣은 손바닥에 말랑한 살결이 잡혔다.

설우의 손이 쥐었다 펴지길 반복하자 곧게 모인 연의 다리가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아, 아침부터 이럴 거예요? 그만 내려와요.”

달라붙은 허벅지 사이에서 뜨겁게 요동치는 무언가를 느낀 연이 그에게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역시 무리였다.

“하아, 그건 안 되겠는데.”

맞닿은 살결이 예민한 감각을 일깨우자 설우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오빠, 흐응, 그래도 이건 좀…!”

“가만히 있어. 배우는 거 좋아하잖아.”

등 뒤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에 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아으….”

“아침부터 운 벌이야. 앞으론 오빠 자는 모습 보면서 이런 생각만 해.”

연의 머릿속에 들어찬 것이 무엇인지 뻔했다.

물고, 발버둥 치다 때리고. 내게 연이어 상처를 냈으니 속이 말이 아니겠지.

“이런 건 안 배울래요!”

몰아치는 힘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요동치던 연이 침대 시트를 한가득 말아 쥐었다.

그럴수록 설우는 더욱 집요하게 여린 몸을 탐했다.

아무 생각 못 하도록. 나쁜 상념은 모조리 지우도록.

“오늘도 좋은 아침이야, 내 다람쥐.”

다정한 아침인사와 동시에 연의 발버둥이 거세졌다.

설우의 몸짓에 따라 허리가 들려지면 저도 모르게 커다란 신음이 튀어나왔다.

함께 맞은 아침 중 가장 야한 아침이었다.

테라스 벤치에 앉아 서서히 오르는 해를 감상하는 연은 솜이불에 돌돌 감긴 채였다.

밤보다 격렬했던 아침의 여파가 가시지 않아 멍한 얼굴을 보며 킥킥 거린 설우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입을 어디까지 내민 거야.”

“오빠가 나빴잖아요.”

“뭐가 나빴는데.”

“난 오빠보다 체력이 한참 아래라고요! 적당히 괴롭혀요, 힘들어.”

“네가 만질 땐 재미있고 내가 만질 땐 힘들고?”

퉁명스러운 물음이 돌아오자 입을 삐죽거린 연이 이불 끝을 지분거렸다.

“아니에요, 안 힘들어요.”

“하하하, 장난이야. 조금 있으면 비행기도 타야 하는데 아침부터 무리했어, 인정해.”

“일주일이 이렇게 빨리 지나갈 줄은 몰랐어요.”

“아쉬워?”

“네, 다음에 다시 올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왜 시한부 환자가 할법한 말을 해. 다음에 올 땐 첸이랑 이든이랑 같이 오자.”

시한부는 아닐지라도 시한폭탄은 맞으니까.

서늘한 바닷바람을 맡는 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그녀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행복한 시절만 남은 곳에 오니 마음이 뒤숭숭한 모양이다.

“나 저번에 입원했을 때, 좋아지고 있다고 했던 말 거짓말이었죠?”

“아니야, 좋아지고 있어.”

“안 좋아요, 오빠.”

“연아.”

“시간이 지날수록 더 오래 자잖아요. 약 때문에 자꾸 어지러워요, 머리도 아프고.”

병원에 갇혀 있을 때만큼이나 잠이 늘었다.

그들이 억지로 잠을 재웠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금방 괜찮아질 거야.”

“괜찮지 않은 게 느껴져요, 꿈이랑 현실도 구분 못 하고 오빠까지 다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도 가끔 그래.”

“솔직히 말해도 돼요?”

“응. 혼자 끙끙 앓을 바엔 나한테 말해, 괜찮아.”

이불 무더기와 함께 연을 제 어깨 속으로 품은 설우가 연을 위로했다.

“조금 무서워요, 자고 일어났는데 오빠를 잊지는 않을까. 자는 동안 크게 다치지는 않을까. 이대로 내가 바보가 되는 건 아닐까. 결국 머리가 고장나 영영 눈을 뜨지 못하진 않을까.”

설우가 이겨내고 지나온 두려움이었다.

너는 끝내 깨닫지 않기를 바랐던 것들.

“연아.”

“네.”

“약 그만 먹을까?”

“그래도 돼요?”

“서울 가서 윤 교수랑 이야기해보자. 그만 먹어도 될 거 같아.”

초반엔 분명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정말 부작용만 남아 연의 우울감을 부추기고 있었다.

먹으나 먹지 않으나 증세가 같다면, 먹지 않는 편이 좋겠지.

“네, 된다고 하면 그만 먹을래요.”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을 잡은 설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첸이랑 이든이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있으니까.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니 이전처럼 돌보면 그만이다.

우리 셋으로도 안 되면 사람을 더 붙여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약은 더는 의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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