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몇 시간째 같은 자세로 앉아 연이 깨기를 기다리던 설우가 뻐근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깜빡, 깜빡. 의미 없이 감았다 뜨는 눈엔 푸른 하늘이 붉게, 다시 검게 물드는 순간이 고스란히 담겼다.
찌뿌둥한 어깨를 돌리는 설우의 니트 끝자락이 별안간 주욱 늘어났다.
“오빠, 어디에요?”
“잘 잤어?”
다정한 손길이 흐트러진 금발을 쓸어넘겼다.
“얼마나 잔 거예요?”
“2시간?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어.”
“거짓말, 밖이 저렇게 캄캄한데.”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연의 앞으로 쪼그려 앉은 설우가 가지런히 모인 무릎 위로 얼굴을 비볐다.
“너 자는 모습 보고 있는 것도 좋아, 새로 생긴 취미거든.”
“오빠 그거 알아요?”
“뭐?”
“완전 애교쟁이 된 거.”
“너한테 배워서 그래.”
“처음엔 분명 무서웠는데.”
“가면서 얘기할까? 더 어두워지기 전에.”
잠기운이 남아 무거운 눈꺼풀을 두어 번 문지른 연이 설우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여행의 시작이 조금 늦었지만, 기분이 좋은 건 여전한지 연이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얼마 전에 TV에서 봤는데, 강아지들은 주인이 안 보면 사고를 많이 친대요. 그래서 강아지가 안 보이면 무조건 안 돼! 이렇게 외친다는 거예요.”
“강아지 키우고 싶어?”
“아니요. 그냥 그걸 보니까 처음 만났을 때 오빠가 나한테 그랬던 거 같아서 웃겼어요.”
“걱정돼서 그런 거였어. 표현이 좀 거칠 게 됐을 뿐이지.”
“응, 알아요. 그래서 조금만 서운했어요.”
“서운하긴 했네?”
“당연하죠! 거의 매일 혼났잖아요.”
내가 그 정도였나.
괜스레 이마를 긁적인 설우가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이것저것 잔소리를 많이 하긴 했었지.
“앞으론 화 안 낼게.”
“내가 잘못을 안 할게요.”
“너 잘못 안 해, 한남동 가서 너무 눈치 보지 마.”
“그건 습관이라서. 너무 오랫동안 버릇이 돼서 바로 고치긴 힘들 거예요.”
“오빠가 많이 신경 쓸게.”
“괜찮아요, 나 잘 할 수 있어요. 믿어 보세요, 괜히 하나하나 다 신경 쓰면 오빠 엄청 속상해요.”
제 코가 석 자인데 누구 속을 걱정하는 거야.
한남동에 사는 괴물들이 우리 순둥이를 작정하고 괴롭히지 않아야 할 텐데.
“배 안 고파? 밥 먹고 들어가야겠다.”
“우리 짐은요?”
“사람 시켜서 미리 보내놨어.”
“그럼 몸만 가면 되겠네요, 살랑살랑.”
“살랑살랑은 아닌데? 꼬리를 흔들고 있는 거야?”
“꼬리 없거든요. 뭐 먹을 거예요?”
“흑돼지 삼겹살 어때. 매번 소만 먹었잖아.”
공항에서 나오니 제법 바람이 쌀쌀했다. 연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하얀 폴리스 점퍼를 꼼꼼히 여며준 설우가 가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좋아요, 고기는 다 좋아.”
“조심해, 넘어져.”
어깨에 둘린 팔만으로 부족한지 연은 설우의 허리에 양손을 둘러 폭 안겼다.
몸을 반쯤 돌린 채 꽃게처럼 옆으로 걷는 폼이 영 불안한 설우가 보폭을 좁혔다.
“떨어져요?”
“아니, 그냥 조심하라고.”
“결혼식 내내 이렇게 안기고 싶었어요.”
자꾸 붙어있으니 버릇이 되어 큰일이다. 신혼여행이 끝나면 오빠는 전처럼 바빠질 텐데.
매일 회사에 데려가 달라고 조를 수도 없고.
“너 스킨십 중독이야. 시도 때도 없이 덥석, 덥석. 첸이랑 이든도 아직 안아주지?”
나 안 볼 때만 골라서.
“그, 그래도 하루에 두 번 이상은 안 해요. 안고 있는 느낌이 너무 좋은걸요.”
“첸이랑 이든까지만 봐줄게, 다른 사람은 절대 안 돼.”
“네!”
혼자 고립된 시간이 길었던 연은 사람의 온기를 좋아했다.
종일 같이 있어 줄 수도 없는데. 질투에 눈이 멀어 결핍이 많은 아이의 몇 안 되는 유희까지 빼앗을 수는 없지.
“그래도 오빠랑 제일 많이 해야 해.”
“당연하죠, 그리고 오빠랑은 포옹 말고 다른 것도 많이 하잖아요.”
“응, 오늘도 기대해. 푹 잘 수 있을 거야.”
“으앗! 오빠!”
미리 준비해둔 차 앞에 도착해 야릇하게 속삭이던 설우가 연의 말랑한 귓불을 물고 잘근거렸다.
“타, 원한다면 차에서 더해주고.”
그저 장난이었는데,
“귀는 말고.”
“귀는 말고?”
“입술. 아프게 말고 살살요.”
소스라치게 놀라 귀를 마구 문지르던 연이 금세 방글거리며 붉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니야, 오빠가 잘못했어. 밥 먹어야 하니까 이따가 호텔 가서 해.”
그렇게 당하고도 또 내 발등을 찍었구나. 매번 지는 건 난데.
반짝이는 눈을 외면한 채 연을 조수석 안으로 밀어 넣은 설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운전석에 올랐다.
“오빠, 30초 만요.”
“밥 먹기 싫어?”
“아니, 배고파요.”
“한번 시작하면 밥 못 먹어, 특히 오늘 같이 특별한 날은.”
“우리 결혼한 날!”
“그래. 그러니까 밥 먹고 호텔 가서 해. 네가 원하는 만큼.”
“진짜요?”
“응, 내 몸 다 너 줄게.”
“오오! 좋아요, 좋아.”
신이 난 연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전벨트를 당겼다.
“이럴 때 보면 네가 나보다 더 밝히는 거 같아.”
“밝혀요? 뭘?”
“음.”
설명할 단어를 찾지 못한 설우가 한참 고민을 거듭했다.
“음?”
“사랑의 몸짓?”
“사랑의 몸짓?”
“우리가 밤마다 하는 거.”
동그란 눈을 보며 적나라한 표현을 뱉을 수 없어 돌려 돌려 나온 답에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밝히는 건 아니고요, 좋긴 좋아요. 근데 난 오빠 입술이랑 오빠 살이랑, 오빠 몸이 더 좋아요. 만지는 게 좋아.”
“네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데. 그렇게 만지기만 하면 고문이나 다름없다고.”
그 고문 내가 참 많이 당했지.
여전히 만지는 게 더 좋다니, 갈 길이 멀었네.
“사실 오빠랑 하는 건 다 좋아요.”
“나도. 너랑 하는 건 전부 좋아.”
“손가락 주세요.”
설우가 내민 기다란 검지를 재빨리 말아쥔 연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창밖을 구경했다.
지나치듯 보았던 서울의 밤거리와는 확연히 다른 곳.
그리운 추억들이 눈앞에 선연한 곳에 오니 결혼식 내내 경직되어 있던 심장이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내일은 여기저기 구경 다니자. 어릴 때 보는 거랑은 느낌이 다를 테니까.”
“괜찮을까요?”
“그럼. 오빠가 알아서 챙길 테니까 걱정하지 마. 비행기에서도 데리고 내리는데 못할게 뭐 있어.”
“고마워요.”
어두운 밤거리를 비추는 불빛보다 환한 미소에 순간 넋을 놓았던 설우가 눈가를 문질렀다.
작은 표정 변화에도 무섭도록 반응하는 자신이 아직도 낯설었다.
“사랑해.”
해사한 미소를 볼 때마다 목 끝을 맴도는 말을 곱씹어 꺼내놓으면 늘,
“나도 사랑해요.”
더 밝아진 미소가 돌아오곤 했다.
너를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숨이 막힐 거야.
내 눈앞의 세상은 온통 암흑일 거야.
이런 날 위해서라도 있는 힘껏 견뎌줘, 아픈 내 사랑.
결혼 후 첫날밤을 보낼 제주 파라다이스의 펜트하우스.
“하윽!”
예사롭지 않은 설우의 더운 숨소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장 부부를 맞이하기 위해 깍듯하게 뒤를 따르는 직원들 앞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남자는 호기심 많은 제 어린 신부 아래에 깔려 뱉은 말을 지키는 중이었다.
쪽, 쪼옥. 연이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살결을 머금을 때마다 설우의 몸에 자리 잡은 힘줄이 요동쳤다.
“오빠 몸이 따뜻해요, 너무 좋다.”
“따뜻한 게 아니고 뜨거운 거야, 누구 덕분에.”
샤워를 마치고 나와 얇은 슬립을 걸친 연과 다르게 설우의 샤워가운은 오래전에 침대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저번에 오빠가 날 잔뜩 괴롭혔잖아요, 오늘은 내 차례예요.”
“넌 가만히 있어도 날 괴롭히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계속하고 싶어요. 안 돼요?”
어느새 가슴 아래 갈비뼈까지 향한 입술이었다. 목과 쇄골은 이미 연의 흔적으로 범벅이 되었다.
초롱초롱한 금안을 이겨내지 못한 설우가 체념 섞인 허락을 내어 주었다.
“알았어. 조금만 더 해.”
“감사합니다!”
참기 힘든 쾌락에 발버둥을 치다가도 귀여운 인사에 웃음이 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연이 갈라진 복근 사이를 핥듯이 혀를 뭉개기 시작하자 힘없이 일그러진 설우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져 갔다.
그렇지 않아도 견디기 힘든 흥분인데.
“너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오빠한테 배웠죠!”
“아.”
맞네.
천진하게 웃으며 고개를 든 연이 아래로 내려가던 움직임을 멈추고 잠시 설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첸이 그러는데 난 뭐든 잘 따라 배운대요. 그래서 이든한테 내 앞에서 나쁜 거 하지 말라고 했어요. 오빠도 그렇게 생각해요?”
“응, 탁월한 학습 능력이야. 공부도 잘하겠어.”
“어릴 때 잘했잖아요. 중학교 입학식 때 신입생 대표였다고요.”
“맞아. 준이가 신이 나서 메일을 보냈었지.”
“응, 맞아요. 그때 옆에 있었거든요.”
제 할 말을 마친 연은 다시 쭉, 내려가 설우의 아랫배를 입술로 지분거렸다.
“으윽, 연아, 잠깐!”
진작에 형태를 갖춘 채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부분에서 겨우 두 뼘 정도 위, 거침없는 연의 입술이 살결을 빨아들이자 숨이 턱턱 막혀올 지경이었다.
“왜요?”
여전히 아랫배에서 입술을 떼지 않은 연이 빼꼼히 눈을 굴리자 참을성이 바닥난 설우가 허리를 세웠다.
준의 애틋한 동생, 재호 아저씨가 애지중지해 온 막내딸, 때 묻지 않은 어린 천사, 작은 내 다람쥐.
여러 이유로 생겨났던 99의 죄책감과 1의 색욕이 99의 색욕과 1의 죄책감이 되는 순간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제 다시 내 몸도 내 거, 네 몸도 내 거야.”
“나쁘다.”
“나빠?”
“아니요, 안 나빠요.”
아쉬운 입맛을 다시던 연이 한 음 낮아진 설우의 목소리에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달라진 눈빛 하나, 목소리 하나에도 놀라 반응하는 연에게 그러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면서도 중요한 순간엔 늘 그것을 이용하는 제가 한심하지만 어쩔 수 없다.
태생이 이기적인걸.
연을 제 다리 위로 앉힌 설우가 얇은 슬립 끈을 어깨 아래로 내려 주었다.
연의 가는 팔을 잡은 설우는 손끝부터 시작해 어깨 위까지 촘촘히 입을 맞췄다.
누가 어떤 마음을 품고 너를 바라보았든지 내 입맞춤으로 모두 씻겨 내리길.
“예쁘다, 내 아내.”
널 탐내는 눈은 전부 내가 도려낼 테니 걱정하지 마.
“…흐읏!”
부드러운 만큼 민감한 살결에 설우의 혀끝이 맴돌았다.
기다란 손가락이 축축한 통로로 들어설 때마다 꼿꼿이 세운 허리가 끊임없이 뒤틀렸다.
“연아.”
“아읏…. 네.”
“오빠랑 평생 이렇게 행복하게 살자?”
“…….”
확신에 찬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설우는 별다른 말없이 연의 입술을 머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늘어가는 잠, 효과 없는 약을 놓지 못해 생겨나는 부작용. 떨어지는 기력.
기억이 돌아오고 전보다 생각이 많아지니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병 앞에서 무엇도 장담할 수가 없어졌다.
직접 체감하는 입장에선 더더욱 그렇겠지.
“그럼 연이가 버틸 수 있는 만큼 이렇게 행복하게 살자, 어때?”
“네, 좋아요!”
바뀐 질문이 제법 마음에 드는지 연의 눈꼬리가 한껏 휘어졌다.
버틸 수 있는 만큼.
한 편으론 참 슬픈 말이지만, 한 편으론 평생과 그리 다를 것도 없는 말이다.
평생 버티면, 평생 버틸 수 있게 도와주면 그만이다.
잠시 붉어졌던 설우의 눈가가 금세 제 색을 되찾고 허리를 움직여 연의 다리 사이로 밀착시켰다.
설우의 헐떡임으로 시작된 밤은 남녀의 열띤 신음으로 채워졌다
***
암막 커튼이 있어 정오의 햇살을 피한 리조트 침실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선명히 떠오르는 악몽에 눈을 번쩍 뜬 연이 텅 빈 옆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 좀 내버려 둬요, 제발!’
다시 가두려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절규했고, 제 몸에 손을 데려는 남자의 어깨를 물었다.
피가 새어 나오도록, 살점을 떨어뜨릴 기세로 악문 살결이 떠오르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빠.”
연이 다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설우를 찾아 나섰다.
“오빠!”
“연아, 오빠 여기.”
연에게 먹이기 위해 가벼운 브런치를 준비하고 있던 설우가 다이닝룸과 거실을 막은 벽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놀랐잖아요.”
“금방 가려고 했는데, 미안.”
인덕션 앞에 선 설우는 먼저 씻고 준비를 마친 듯 말끔한 모습이었다.
내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씻자고 했을 사람인데.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에도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꿈을 꿨어요.”
“그랬어?”
“누군가를 물었어요. 정말 세게 문 거 같아요.”
“꿈이잖아, 뭐 어때.”
노릇노릇하게 익은 소시지를 접시로 옮기던 설우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오빠, 잠깐만 뒤돌아봐요.”
집게를 잡은 손이 순간 굳어졌다. 연을 돌아보는 움직임에도 머뭇거림이 묻어났다.
“왜, 아침 인사하려고?”
설우가 돌아보자마자 까치발을 든 연이 라운드 티 옷깃을 잡아 늘어뜨렸다.
버릇처럼 자세를 낮춰준 설우는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통감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아… 어떡해.”
이른 아침 리조트 의무실에 다녀와 붙인 커다란 밴드엔 동그랗게 피가 묻어 있었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밴드 주변으로도 살결이 붉게 물들었다.
“네가 물어봐야 얼마나 아프다고. 상처만 난 것뿐이야, 안 아파.”
“죄송해요.”
잠결에 설우를 다치게 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끔찍했다.
저번에 얼굴을 긁었던 일을 포함해 벌써 두 번째였다.
“괜찮아, 연아.”
“밴드 떼 봐도 돼요?”
“아니. 의사 선생님이 절대, 절대, 절대 떼지 말래.”
“거짓말.”
“응, 네가 속아줘야 할 거짓말이야. 네가 남긴 흔적은 전부 좋다니까. 조금 아파도 좋아.”
저 밴드 아래로 잇자국이 선명할 텐데.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긴 설우가 집게를 내려두고 연을 끌어안았다.
얼마나 힘들고 마음이 아플까.
먼저 잠에서 깬 설우는 품에 안은 연이 힘껏 무는 순간에도 신음 한 번 지르지 않았다.
네가 이틀을 내리 자는 것에 비하면 이 정도의 고통은 정말 아무렇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