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63화 (63/96)
  • 63화.

    호텔 웨딩홀에 들어선 하객들의 반응은 대부분 비슷했다.

    신부 대기실 앞에 늘어선 가드들을 보고 입구에 적힌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하거나 청첩장을 꺼내 보았다.

    식장을 잘못 찾아왔다고 생각할 만큼 당황스러운 광경이었다.

    장소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 이들은 떨떠름한 얼굴을 숨긴 채 설우와 가족들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

    나라의 경제를 쥐고 흔드는 두 기업의 일가가 한자리에 모여있는 것은 신부대기실을 막은 가드들만큼이나 놀라웠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성태, 화진과 차례로 인사를 나눈 후 설우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면 그가 가진 배경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런 남자를 가진 연인은 대체 누구일까.

    CH와 현진이 합심하여 기사를 막은 덕분에 여전히 베일에 싸인 신부를 가까이서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도대체 뭘 감추고 싶은 건지. 그 흔한 웨딩사진 한 장 없는 결혼식이다.

    “청첩장에도 없더니. 여기도 사진이 없네? 결혼을 급하게 해서 안 찍은 건가?”

    “아냐,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다고 들었어.”

    “진짜 머리카락 하나도 안 보이게 숨기네. 회사엔 데리고 다녔다며.”

    “사장실 직원들이랑 다른 몇몇 직원들밖에 못 봤대. 기자들도 쉬쉬하고 있고. 두 그룹 등지고 사진 유포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어? 절대 못 하지.”

    “웃긴다, 진짜. 결국 알려질걸. 가까이 가 보자, 보일 수도 있잖아.”

    “거리 유지 부탁드립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신부 대기실 앞을 기웃거리던 이들은 가드에게 제지를 당하고 나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하객들은 여기까지의 과정을 거친 후 예식이 진행될 화려한 홀 안으로 들어섰다.

    정, 재계와 방송계까지. 각 계층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들만 참석한 곳에서 필요한 인맥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모두가 바쁘게 돌아다니니 홀 안은 소란스러웠다.

    -안내 말씀드립니다. 잠시 후 신랑 차설우 군과 신부 선우연 양의 1부 본식이 시작될 예정이 오니 하객 여러분께서는 지정된 좌석을 찾아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멘트가 넓은 홀을 울리자 끼리끼리 모여있던 하객들이 제자리를 찾아 흩어졌다.

    웃는 낯으로 손님을 맞이하던 가족들도 하나둘 식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가 초대한 이들은 50명도 채 되지 않을 텐데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이렇게 많이 불러 앉힌 건지.

    홀을 빼곡히 채운 차 회장의 하객들을 못마땅하게 훑어본 화진이 신부 측 혼주석으로 향했다.

    신부대기실을 나서기 위해 분주한 직원들의 손길을 받아내고 있는 연을 직접 데리러 온 설우가 팔을 내밀었다.

    “오빠! 이제 시작하는 거예요?”

    “잘 놀고 있었어?”

    “그럼요. 나 오늘 키 좀 커 보이지 않아요?”

    “아니, 도토리만 해.”

    “나한테 다람쥐라고 하면서 도토리만한 건 뭐예요! 먹이랑 비교하는 거예요?”

    “긴장되니까 말 많아지지, 또. 오빠 팔 잡아. 조심히 걸어야 해.”

    귀엽게 재잘대는 연의 볼을 살짝 꼬집자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직원이 또다시 소스라치게 놀라 다가가려 했지만 설우의 저지가 빨랐다.

    안 그래도 예쁜데 뭘 더 찍어 바르려고.

    “잠은?”

    “전혀! 내 눈 초롱초롱한 거 보여요?”

    “이러다가도 금방 잠들면서.”

    “꼬맹이 머리 아프대, 본식만 하고 끝낼 거지?”

    “머리 아파? 어떻게, 얼마나! 아프면 바로 말하랬잖아.”

    우씨, 말하지 말라니까!

    이든을 째려봐도 이미 늦었다. 매번 당하면서 왜 매번 믿는 건지.

    연을 에스코트하며 걷던 설우가 우뚝 멈춰 섰다.

    내내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기던 그가 버럭 목소리를 높이니 직원들은 물론, 가드들까지 움찔거렸다.

    “아까 잠깐요. 이제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결혼식 때문에 신경 쓰여서 그런 거면 지금 당장이라도 취소할 수 있어.”

    “나 오빠한테 거짓말 안 해요. 하나도 안 아파요.”

    설우를 향해 돌아선 연이 굳어진 그의 등을 가볍게 쓸어주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과한 반응이겠지만, 연에겐 익숙했다. 그런 설우를 안심시키는 방법도 나름대로 터득하는 중이었다.

    “이제 곧 입장하셔야 해요.”

    나올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타나지 않는 둘을 찾아 진행 직원이 들어오자 설우가 다시 걸음을 떼었다.

    꼼짝도 하지 않던 대기실의 주인이 나오니 그제야 가드들이 문 앞에서 물러났다.

    “어어! 나온다, 나온다.”

    “대박. 혼혈이라는 소문 돌더니 진짜였네!”

    아직 식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하객들의 시선이 연에게 집중되었다.

    겹겹이 둘린 레이스 위로 밝은 조명이 비치자 웨딩드레스를 장식한 큐빅들이 빛을 냈다.

    “기분 어때?”

    “심장이 튀어나올 거 같아요.”

    “나도. 네가 너무 예뻐서 자꾸 떨려.”

    “매일 보는 얼굴인데요?”

    “볼 때마다 새로워서 탈이지, 오늘은 특히 더.”

    길게 뻗은 버진로드의 끝자락에 선 설우는 제 팔에 얹어진 연의 손을 끊임없이 지분거렸다.

    “눈동자 진짜 신기하다.”

    “이야, 나였어도 정략결혼 집어치웠겠다.”

    설우가 세워둔 가드 때문에 호기심이 극대화된 상황에서 신비로운 외모를 마주하게 되니 웅성거림이 산발적으로 튀어나왔다.

    “자, 그럼 오늘의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의 동시 입장이 있겠습니다. 신부를 소중하게 숨겨 놓은 이유를 알겠네요. 신랑, 신부 입장!”

    “우리 꼬맹이가 진짜 가는구나.”

    “신혼여행 가 있는 동안 못 볼 텐데, 아쉬워서 어쩌냐.”

    출발점에 서 있던 첸과 이든도 감회가 새로운 듯 중얼거렸다.

    함께 살고 있었고, 연을 귀하게 보살피는 설우를 질리게 보았는데.

    버진로드를 걷는 둘의 뒤에 서 있으니 가슴속이 이상하게 몽글거린다.

    “야, 우냐?”

    “형이 우는 거 같은데?”

    느릿한 걸음으로 단상을 향해 나아가는 설우와 연을 멍하니 바라보던 두 남자는 붉은 기가 도는 서로의 눈을 가리키며 웃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날아든 천사 덕분에 여동생을 시집보내는 오빠의 심정을 경험하고 있었다.

    “기억이 돌아왔어도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거 같아. 많이 우울해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지. 꼬맹이는 15살에 멈춰 있는 걸까?”

    “단편적으로는 그렇지. 보통 사람보다 정신 연령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니까. 어떤 부분은 아이 같고, 어떤 부분은 어른 같고.”

    한걸음 씩 내딛는 연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첸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난 그게 좋은데.”

    “기억을 잃고 갇힌 탓에 자라지 못한 건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고쳐질 거야. 문제는 뇌 손상으로 생긴 인지 장애를 고칠 수 있냐는 거지.”

    “심각한 수준은 아니니까 그것도 고칠 수 있을 거야. 단순한 것들은 곧잘 배워.”

    “그래, 어쨌든 무사히 결혼까지 왔으니 서서히 좋아지겠지. 우리도 안쪽으로 들어가자.”

    짧게 한숨을 뱉은 첸이 멀뚱히 선 이든의 어깨를 툭 건드리고 걸음을 옮겼다. 쓸데없는 근심은 이만하면 충분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설마 끝까지 셀 작정이야?”

    “오빤 모르겠지만 지금 다리가 후들거려요. 걷는 데 집중하는 거라고요.”

    “안고 입장할 걸 그랬나?”

    많은 사람의 이목 앞에서도 흔들림 하나 없는 설우와 다르게 연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졌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온몸을 때리는 것 같았다.

    결혼이 이렇게 어려운 거였을 줄이야.

    “두 번은 못 하겠네요.”

    “와, 두 번? 나랑 헤어지고 딴 살림 차릴 생각을 했단 말이야? 오빠 상처받았어.”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요! 헙…!”

    설우의 능글맞은 장난에 목소리를 높였던 연이 제가 서 있는 곳을 떠올리며 입을 꾹 닫았다.

    우렁찬 행진곡과 박수 소리에 묻혔을 테지만 제 귓가엔 한없이 크게 울린 앙칼진 음성이었다.

    “긴장 풀라고 한 장난이야. 매일 같이 웃는 예쁜 내 다람쥐가 너무 얼어있잖아.”

    “사람들이 나만 보고 있는 거 같아요.”

    “그건 맞아, 내가 널 너무 꼭꼭 숨겼더니 다들 궁금했나 봐. 생각지 못한 역효과가 일어나는 중이지.”

    “난 오빠만 열심히 보면 되는 거겠죠?”

    “잘 아네. 다 왔다, 앞에 계단 있으니까 조심하고.”

    한 발, 한 발. 아주 느릿하게 나아가는 둘을 지켜보는 하객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공들여 그린 그림 같은 모습을 부러워하는 이들 반, 설우의 다정한 미소에 놀란 이들 반,

    “쯧! 고작 행진하나 하면서 뭐 저리 유난스러워.”

    노여워하는 이 하나,

    “크흠….”

    아쉬워하는 이 하나.

    하지만 한참 멀리 선 신랑 신부에겐 어떤 말도 닿지 않았다.

    한 몸처럼 찰싹 달라붙은 커플은 단상 앞에 도착해서도 둘만의 세계에 빠져 사랑을 속삭일 뿐이었다.

    “그 아이는 어디에 두고 네놈 혼자 와. 2부 시작 전에 인사는 시켜야 할 것 아니야.”

    “옷 갈아입으러 보냈습니다. 4시간 남았거든요.”

    “무슨 소리냐.”

    “비행기 시간이요, 옷 갈아입고 출발하면 딱 맞습니다. 피곤하겠지만 빨리 떠나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피로연엔 참석지 않겠다는 거군.”

    “애초에 2부까지 진행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한 가지에 눈이 멀면 크게 다치는 법이다. 할아비 말 새겨들어.”

    “충고 감사합니다.”

    “이보게, 차 사장.”

    날 선 도발에도 꿈쩍하지 않은 설우가 자리를 뜨려 하자 차 회장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던 백 대표가 슬며시 일어났다.

    “아, 백 대표도 있었네요.”

    존댓말이 섞였지만 분명한 하대였다.

    주변에 있던 차 회장의 다른 측근들이 경악하며 입을 벌렸다.

    지위 고하를 떠나 제 아비보다도 나이가 많은 사람을 동년배처럼 대하다니.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은 창석이 늘어진 눈을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늦어서 제대로 인사를 못했지, 결혼 축하하네.”

    “오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만.”

    “그럴 리가.”

    “백 대표도 나이가 드니 눈치가 무뎌지나 보네요.”

    “차설우!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차 회장의 호통도 설우의 신랄한 언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뻔뻔하게.”

    연이를 데려가려다 두 번이나 실패해놓고 낯짝을 들이밀다니.

    아래로 떨어져 있는 설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보는 눈이 없었다면 노인의 주름진 얼굴을 후려쳤을지도 몰랐다.

    “하하하,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먼. 그보다 권 실장을 좀 돌려주게. 그이가 없으니 잡일이 끊이지를 않아. 딸을 빼앗긴 억울함에 자네에게 덤벼들었다가 화를 입은 듯싶은데, 너무 오래 데리고 있지 않은가.”

    “백창석 대표.”

    “편히 이야기하게, 차설우 사장.”

    “나는 자비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배우고 자랐거든요, 옆에 계신 차 회장님께. 다음번에 만날 땐 이렇게 고상하고 격식 있는 자리는 아닐 겁니다.”

    “우리가 부딪히면 전쟁이나 다름없어. 안 그렇습니까, 차 회장.”

    “두고 보면 알겠죠, 그럼 이만.”

    더러워진 기분만큼 입매를 삐딱하게 비튼 설우가 가벼운 묵례를 마치고 식장을 빠져나갔다.

    “설우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섣불리 움직이진 않을 테니.”

    “그럼요, 시끄러워지는 건 저도 원치 않아요.”

    다만, 아쉬울 뿐이지. 분명 내가 먼저였는데.

    한 발만 빨랐어도, 조금만 더 세심하게 일을 처리했어도, 저 신비로운 아이가 차 사장 곁에 서는 일은 없었을 텐데.

    드레스 밖으로 드러난 하얀 살결을 마음껏 감상한 창석의 눈동자엔 짙어진 욕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

    “손님, 도와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몇 번을 들었는지 셀 수도 없을 만큼 익숙해진 호의를 거절하고 비행기에서 내린 설우가 공항 라운지로 걸음을 재촉했다.

    잠든 연을 안고 공항을 빠져나가는 건 무리가 있으니 퍼스트클래스 라운지로 들어가 연이 깨어나길 기다릴 생각이었다.

    ‘우리 며칠이나 가는 거예요?’

    ‘일주일. 더 있고 싶어?’

    ‘아니, 충분해요! 많이 달라졌겠죠?’

    ‘건물이 많아진 것 빼곤 비슷해.’

    ‘기대된다.’

    제주도로 떠나기 위해 오른 비행기에서 신나게 어깨를 들썩이던 연은 오렌지 주스 한 잔을 끝으로 결국 잠이 들었다.

    연의 기억이 돌아온 후에 오게 되어서인지 설우는 기대보단 걱정이 앞서 있었다.

    “오늘도 잘 버텼어. 고생했네, 내 다람쥐.”

    투명한 유리 밖으로 제주도의 하늘이 보이는 창가 앞 소파에 연을 누인 설우가 볼록한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조용한 공간에 오니 나른해지는 몸을 소파 깊숙이 기댄 설우도 잠시 눈을 감았다.

    우여곡절 끝에 다가온, 온전한 둘만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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