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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62화 (62/96)
  • 62화.

    연보다 빨리 준비를 마친 설우가 쭉 뻗은 기럭지를 자랑하며 텅 빈 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앞머리를 말끔하게 넘겨 놓으니 정갈하게 정리된 진한 눈썹이 드러나 곧게 찢어진 눈매가 부각되었다.

    남성적인 선을 살린 과하지 않은 메이크업은 미간과 직각을 이루는 콧대조차 사나워 보이는 효과를 주었다.

    연에게 보이는 다정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얼굴은 흡사 도베르만을 떠오르게 할 만큼 날이 서 있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성큼성큼 단상까지 걸어간 설우가 입을 풀고 있는 사회자를 찾았다.

    “식순 좀 보죠.”

    “예? 아, 안녕하십니까. 오늘 사회를 맡은….”

    “식순 먼저 봅시다. 변경될 부분이 많으니 연습은 나중에 하고.”

    “아, 네!”

    갑자기 나타난 신랑을 두고 어벙하게 눈을 깜빡이던 사회자가 빼곡히 적힌 식순을 건네주었다.

    본식에서 애프터 파티까지 이어지는 부담스러운 순서를 차근차근 읽어 내리던 설우가 실소를 뱉었다.

    주인공은 원하지도 않을 순서들이 가득했다.

    “체크 잘하세요. 사진 촬영은 직계가족만 합니다. 일가친척, 친구, 직장동료 전부 필요 없어요.”

    “예?”

    하객이 없는 신부가 겉돌지 않게 하기 위해 사진 촬영은 생략하는 편이 좋았다.

    이든과 첸은 연의 직계가족으로 포함해 사진을 찍을 예정이었다.

    “입장 후 축사, 맞절, 혼인서약서, 케이크 커팅, 반지 교환, 퇴장을 제외한 나머지는 생략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미리 전해 받은 식순을 반으로 줄이라는 요구였다. 사회자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들여 쓴 대본 역시 쓸모가 없어졌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신랑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 그리고 어떻게 전해졌나 모르겠지만 입장은 신부와 함께 할 겁니다.”

    손을 잡아줄 아빠, 혼주석에서 눈물을 훔칠 엄마, 제 일처럼 기뻐할 형제자매는 물론 그 흔한 지인조차 없는 연을 위한 일이었다.

    무엇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된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어도 서글플 일인데, 기억까지 돌아왔으니 가족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지겠지.

    식순을 조율하고 나오던 설우가 얼빠진 얼굴로 신부 대기실을 바라보는 무리를 발견했다.

    “오셨어요.”

    한 발, 한 발. 느긋한 발걸음이 가까워질 때마다 차 회장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었다.

    손에 지팡이를 들고 있었더라면 손자의 잘난 얼굴을 후려치고도 남았을 정도로 화가 난 그였다.

    “하객들 도착하기 전에 저 깡패 새끼들 당장 치워!”

    “싫습니다.”

    “이 개망나니 같은 자식이! 대체 뭐 하자는 거야, 결혼식에서 누가 해코지라도 할까 세워놓은 게야?”

    “할아버지께서 초대한 하객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어 구경할 게 뻔한데, 제가 그 꼴을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청첩장은 멋대로 뿌리셨으니 이 정도는 해야 공평하죠.”

    “어차피 예식 중에 보여야 할 텐데 이게 무슨 의미 없는 짓이야.”

    잠자코 서 있던 현준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설우를 타박했다.

    굳이 관여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 일은 도가 지나친 듯싶었다.

    “식 중에 보는 거랑 가만히 앉아있는 애를 둘러싸고 수군거리는 거랑 비교가 되나요. 이름도 모르는 하객 맞이하느라 저도 자리를 비워야 하는데, 이렇게 세워두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를 않아서요.”

    “우린 들어가도 되는 거지?”

    으르렁거리는 이들 사이로 성진이 장난 섞인 물음을 던졌다.

    “네, 조금 이따가요. 준비가 오래 걸려서 저도 아직 못 봤거든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조직폭력배 보스가 결혼하는 줄 알겠다, 얘. 덩치는 또 왜 저렇게 좋아?”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차 회장을 보며 피식, 웃은 화진의 말에 현진가 사람들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차 회장을 따라 굳어진 설우의 친가와 다르게 화진의 뒤에 선 외사촌들은 놀라운 해프닝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확연히 다른 두 집안의 분위기였다.

    “형!”

    싸하게 가라앉은 웨딩홀에 우렁찬 이든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첸을 조르고 졸라 휠체어를 타고 나온 이든은 신나게 손을 휘저었다.

    “어, 왔어?”

    “이든, 너 꼴이 왜 이러니?”

    거추장스러운 한복 치맛단을 대충 말아 쥔 화진이 어울리지 않는 휠체어에 앉아있는 이든을 내려다봤다.

    “차에 치였어요.”

    “뭐? 어쩌다가?”

    “소식 못 들으셨어요? 형 전 약혼녀가 연이를 차로 치려고 했거든요. 제가 대신 치였죠, 뭐.”

    “사실이야?”

    “네.”

    “와, 걔 완전 미친 애였구나?”

    짤막한 설우의 대답에 오버스럽게 목소리를 높인 화진이 일부러 차 회장을 바라보았다.

    설우의 짝으로 고르고 고른 게 고작 그런 여자였다니.

    화진의 눈길에 담긴 의미를 단번에 알아챈 성태는 한층 구겨진 얼굴을 반대로 돌려버렸다.

    “연이는?”

    답답한 몸을 일으키려는 이든의 어깨를 잡아 누른 첸이 연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안에 있어, 이제 들어가 보려고. 연이 볼 거면 10분 후에 들어오세요, 너희도.”

    연을 먼저 보기 위해 뒤돌아선 설우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제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손자에게 더는 열을 낼 가치를 느끼지 못한 차 회장은 하객을 맞을 준비를 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오빠!”

    신부 대기실로 들어서자마자 한껏 들뜬 음색이 귀를 울렸다.

    준비를 마치고 널찍한 벨벳 소파에 중앙에 자리 잡은 연이 분홍색 장미로 만든 부케를 들고 앉아 설우를 반겼다.

    우뚝 얼어붙은 설우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어깨와 목덜미를 훤히 드러낸 오프숄더 드레스는 대리석 바닥까지 화려하게 펼쳐져 연을 빛내고 있었다.

    작은 다이아몬드가 엮인 머리핀과 이어진 드롭 귀걸이가 가는 목을 타고 반짝거렸다.

    “내가 미쳤었나 봐.”

    하얀 피부에 보란 듯이 돋아 나온 쇄골은 여리여리한 어깨와 일직선을 이루어 시선을 사로잡는다.

    “네?”

    “왜 이 드레스를 고른 거지?”

    나만 보는 게 아닌데.

    하트탑 위를 장식한 레이스에 부딪혀 분홍색으로 변한 살결이 보이니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왜, 이상해요?”

    “아니, 천사가 앉아있는 줄 알았어.”

    “뭐예요, 창피하게.”

    “진짜 싫다.”

    “뭐가요?”

    분명 입어보고, 제가 손수 골라 준 드레스인데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선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주기 싫어, 짜증 나.”

    괜스레 울컥한 설우가 연에게 가까이 다가와 투정을 부렸다.

    “다행이다, 예뻐서.”

    “예쁜 정도가 아니라고. 아무도 못 보게 숨겨두고 싶잖아.”

    “아무도 못 보게 앞에 아저씨들 세워둔 거 아니에요?”

    “그건 맞는데, 아예 안 보여줄 수가 없으니까.”

    “오빠랑 붙어 있고 싶은데. 이렇게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있어야 한 대요.”

    설우와 연이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스냅 사진을 위한 플래시가 연달아 터졌다.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연의 잔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설우의 손이 평소 하지 않는 눈화장 사이로 돋보이는 금안에 머물렀다.

    구석에 서 있는 직원들은 메이크업이 지워질까 움찔거렸지만, 감히 끼어들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스륵, 스륵.

    반사적으로 감긴 연의 눈꺼풀 위를 문지르는 손길이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설우의 손가락 아래 갇힌 금안이 일렁였다.

    “이 눈은 내 건데, 너무 많은 사람한테 보여줘야 해.”

    “눈을 감고 걸을 수는 없으니까요.”

    “웨딩드레스를 입어서 그런가.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더 밝아 보여, 환장하겠다.”

    “오늘 딱 한 번이잖아요.”

    환하게 웃는 연과 콧방울을 맞대고 투명한 금안을 빤히 바라보던 설우가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반질거리는 입술이 탐스러웠다.

    “결혼식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신혼여행이나 갈까?”

    “오빠가 원한다면요.”

    “내가 좋아하는 말만 쏙쏙 골라 하지.”

    “오빠도 오늘 엄청나게 멋있어요, 볼 때마다 반하는 중이에요.”

    찡긋거리는 콧등을 톡, 건드린 설우가 참지 못하고 짧게 입을 맞췄다.

    “컨디션은.”

    “좋아요, 잠도 안 오고.”

    “조금만 버텨, 사랑해.”

    “나도 사랑해요.”

    “어휴, 시도 때도 없이 저런다니까요.”

    좋은 각도를 잡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진 기사는 안중에도 없이 다시 입을 맞추려던 설우가 불청객의 등장에 미간을 좁혔다.

    첸과 이든, 화진과 성진이 우르르 신부 대기실로 들어섰다.

    “이든!”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설우와 다르게 연이 해맑게 이든을 불렀다.

    늘 애타는 건 나뿐이지.

    허탈하게 미소 지은 설우가 자리를 내어주었다.

    “와, 우리 집 꼬맹이 맞아? 너무 예쁘다.”

    “어떡해. 아픈데 온 거 아니에요?”

    환자복을 벗으니 살이 쏙 빠진 게 확연히 드러난 이든 때문에 연이 눈물을 글썽였다.

    신랑과 신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직원이 눈물 자국이 생기기 전에 후다닥 달려와 화장을 고쳐주었다.

    “나 괜찮다니까, 울지 마.”

    “네, 안 울어요. 고마워요, 첸. 이든 데리고 와줘서.”

    “병원에 가둬둘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데려왔어. 내가 안 된다고 했어도 뛰쳐나왔을걸.”

    “내 새끼 결혼하는데 당연히 와야지. 오빤 아직도 널 저 무서운 인간한테 보낼 수가 없어. 몸만 멀쩡했어도 데리고 도망쳤을 거야.”

    “연이가 왜 네 새끼야. 갈비뼈 두 개론 부족한가 보지?”

    “이거 봐! 어머니, 형 좀 보세요. 다친 동생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요.”

    능글맞은 이든의 장난에 신부 대기실 안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어머니. 삼촌도요.”

    “지금껏 본 신부 중에 네가 제일이야. 그렇지, 누나?”

    “그러네, 결혼 축하한다. 설우 하는 꼴을 보니 행복하게 잘 살겠어.”

    “감사합니다. 어머님도 너무 예쁘세요.”

    “예쁘긴. 설우 할아버지랑 싸우기 싫어서 입었는데 불편해 죽겠어. 나랑 우리 집안사람들은 신부 측 혼주석에 앉을 거니까 편하게 생각해.”

    “나랑 첸도! 아, 꼬맹이 또 울려고 한다. 자꾸 울면 행진하다 잠들어, 너.”

    “좋아서 그래요, 다들 너무 좋아서.”

    꾹꾹 눈물을 눌러 참은 연이 저를 둘러싼 이들을 하나하나 가슴에 담았다.

    먼저 떠난 가족들의 빈자리를 메워주는 고마운 사람들.

    부족한 저를 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감싸는 화진에게 특히 더 감사했다.

    “그럼 가족분들 오신 김에 사진 한 장 찍을게요. 두 분은 신부님 옆에 앉으시고 나머지 분들은 뒤에 서세요.”

    사진 기사의 요구에 설우가 제일 먼저 연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팔불출 같은 아들을 흘긴 화진이 반대쪽 옆에 앉자 성진이 웃으며 소파 뒤로 향했다.

    휠체어를 탄 이든과 첸까지 자리를 잡자 사진 기사가 흡족한 얼굴로 셔터를 눌렀다.

    신부 대기실을 막은 가드들을 빼면 평범한 결혼식과 다르지 않았다.

    “우린 이제 하객 맞으러 가야겠네. 식 시작하면 보자, 연아.”

    “네! 고생하세요.”

    화진과 성진이 먼저 대기실을 나서고 설우가 연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첸이랑 이든이랑 놀고 있어, 오빠도 다녀올게. 괜찮지?”

    “그럼요, 걱정하지 말고 가요.”

    “일 생기면 바로 이야기할게.”

    쉽사리 떠나지 못하고 연신 뒤돌아보던 설우는 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밖으로 나갔다.

    “첸, 나 물 좀 주세요.”

    “긴장돼?”

    “실감이 나니까 조금. 할아버지랑 아버님은 안 들어오실까요?”

    “또 험한 말이나 할 텐데 뭐하러 찾아. 매번 못되게 구는데 호칭은 왜 이렇게 친근하고. 한남동 가서 너무 순하게 굴지 마, 사람들이 무시해.”

    휠체어 바퀴를 굴려 앞뒤로 산만하게 움직이던 이든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자, 연아. 물 마셔.”

    물컵에 빨대를 꽂아주는 센스를 잊지 않은 첸은 연의 옆자리에 앉아 세심하게 그녀를 챙겼다.

    “저기 서 있는 게 나여야 했는데.”

    “이렇게라도 옆에 있으니까 됐어요.”

    점점 타들어 가는 목을 축인 연이 눈꼬리를 늘어뜨리는 이든을 위로했다.

    몸을 마음껏 쓰지 못하는 처지가 되니 신부 대기실 안쪽에 상주하고 있는 가드들이 부러웠다.

    하객들이 들어올 시간이 되자 웨딩홀을 울리는 잔잔한 배경음악이 신부 대기실까지 흘러들었다.

    예식이 가까워질수록 웅성거림이 커졌지만, 연이 있는 곳으로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신랑 지인이에요, 신부 좀 보려고 왔는데.’

    ‘직계가족이 아니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입구 앞에서 간간이 말소리가 들려왔지만 늘어선 가드들은 똑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어딜 들어오려고.”

    “오빠가 날 정말 꼭꼭 숨겨뒀네요.”

    텅 빈 대기실이 허전하지 않도록 이든이 한 마디 거들 때마다 연은 해사하게 웃어 주었다.

    흰 눈이 세상을 물들이는 계절.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외로운 겨울의 신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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