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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61화 (61/96)
  • 61화.

    이른 아침, 제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작은 바람에 눈을 뜬 설우가 실소를 뱉었다.

    이젠 하다 하다 나를 침대로 여기는 건가.

    성인 여럿이 누워도 부족함이 없을 매트리스를 두고 설우의 몸 위에 엎드린 연은 평온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위로 올라타는 것도 모르고 잠을 자다니.

    함께 잠드는 날엔 그녀를 끌어안고 자는 버릇을 들인 탓에 감각이 무뎌졌나 싶다.

    잠귀가 예민해야 그녀의 안전에 도움이 될 테니 그다지 좋은 증조는 아니었다.

    배 위에 있는 연을 보니 캥거루처럼 주머니가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다 나을 때까지 주머니 속에 넣어 꼭꼭 숨겨두면 좋을 텐데.

    “…으으.”

    불편한 자세에 몸이 뻐근한 연이 눈을 감고 낑낑거리자 연을 한참 지켜보던 설우가 미소를 지었다.

    “이러고 자니까 당연히 아프지.”

    “나 왜 오빠 위에 있어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난 몰라요.”

    “어쨌거나 좋은 아침이야, 잠버릇 고약한 내 다람쥐.”

    연에게만 허락되는 근사한 미소가 오늘도 그녀를 반겨주었다.

    약 기운 때문에 멍하게 풀려있던 눈동자에 서서히 잘생긴 얼굴이 담겼다.

    익숙한 현기증을 뒤로한 연이 설우의 가슴팍을 짚어 상체를 세웠다.

    “좋은 아침이긴 하지만, 목에 마비가 온 거 같아요.”

    “어지러우면 좀 더 누워있어.”

    직접 겪는 그녀만큼이나 약의 부작용을 잘 알고 있는 설우였다.

    “괜찮아요.”

    “오늘 아로마테라피랑 신부 마사지 받을 거야. 그때 목이랑 어깨도 잘 풀어주라고 할게.”

    “그런 것도 해요?”

    “재미 삼아 하라고.”

    “오빠는요?”

    “나는 구경.”

    “왜요? 같이하지.”

    “아로마 테라피스트는 대부분 여자더라고. 오빠 몸에 다른 여자 손 닿아도 돼?”

    “혼자 할게요, 구경만 해요.”

    어울리지 않는 정색과 함께 빠른 대답이 돌아오자 설우가 큭큭거렸다.

    “질투는 많아서.”

    물론, 내 질투엔 반도 따라오지 못하겠지만.

    “오빠, 잠깐 눈 좀 감아 봐요.”

    “왜.”

    “아침 인사하게요, 빨리!”

    “알았어.”

    연의 재촉에 설우가 눈을 감았다.

    “하나.”

    “하나?”

    쪽.

    귀여운 뽀뽀와 함께 연이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둘.”

    쪽.

    설우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두 번째 뽀뽀.

    “셋.”

    쪽.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딱따구리처럼 반복적으로 입을 가져다 댄 연이 뿌듯한 표정을 짓곤 다시 설우의 가슴팍으로 내려가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아침부터 뭐 하시는 건지.”

    “오빠랑 마주 보고 있는 아쉬운 시간을 즐기는 거죠.”

    사르륵, 사르륵. 가는 금발이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가슴 깊은 곳이 간질거린다.

    “애교 좀 줄이지.”

    “왜요?”

    “안 그래도 너한테 살살 녹잖아, 나. 더 심해지면 답이 없어.”

    네가 이러면 아침부터 너무 설레잖아, 반칙이라고.

    “오빠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결혼식 때 난 뭘 어떻게 하면 돼요? 실수하지 않고, 잘하고 싶어요.”

    중요한 순간에 잠들기라도 하면, 남들에게 우습게 보일 행동이라도 하면 어쩌지. 설우에게 해가 되고 싶진 않은데.

    결혼식이 이틀 앞으로 훌쩍 다가오니 마음속에 품고만 있었던 걱정들이 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눈 감고 귀 닫으면 돼.”

    “네?”

    “남들 시선, 수군거림. 보지도 듣지도 말고 나만 보고 내 말만 들으면 된다고.”

    “그건 쉽죠. 잘 할 수 있어요, 다른 건요?”

    “입장할 때 내 손 잘 잡고, 졸리거나 아프면 첸한테 꼭 이야기하고. 하객 받는 동안 오빠 옆에 없다고 서운해하지 말고. 이 정도?”

    “겨우?”

    “응.”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정말 괜찮을까요?”

    “괜찮지 않은 것도 내가 다 괜찮게 만들 거야. 너는 이렇게 오빠 품속에 안겨있기만 해.”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멋있네요. 내가 어렸을 때 오빠를 만나는 바람에 중학생 때까지 남자친구를 못 만들었어요, 눈이 높아져서. 다른 여자애들은 남자친구랑 막 손잡고 다니고 그랬거든요.”

    언제 들어도 귀가 즐거운 종알거림을 듣던 설우가 상체를 세워 침대 헤드에 기대었다. 그와 겹쳐져 있던 연도 자연스레 따라 위로 올랐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린데. 날 때부터 지금까지 너한테 남자는 나 하나라는 거잖아.”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도 오빠 하나뿐이죠, 난.”

    “으, 예뻐 죽겠네.”

    연을 꼭 끌어안은 설우가 몸을 비틀었다.

    연이 제게 주는 즐거움의 크기는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도였다.

    “이제 그만 일어날까요?”

    “그래, 아침 먹고 약 먹어야지. 조금 있다가 윤 교수도 올 거야.”

    “왜요?”

    “그냥 기본적인 상담. 우리 연이 오늘 바쁘겠네.”

    “할 거 많아요?”

    “상담하고, 마사지 받고, 나랑 조금 놀다가 낮잠 자고. 드레스도 가져오라고 했어. 잘 맞게 줄여졌나 마지막으로 입어 봐야지.”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일들을 모두 집안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조율해두었다.

    사고가 나고 기억이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결혼식 전까진 집안에서 안정적인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오늘 하루도 금방 가겠어요.”

    “하루하루 너무 아쉬워하지 마. 잠든 동안 가는 시간도 안타까워하지 말고. 괜히 스트레스 받으면 더 안 좋아져, 알았지?”

    “응, 그럴게요.”

    함께하는 짧은 하루가 아쉬운 건 설우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마음과 반대로 연을 타일렀다.

    더는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게, 부정적인 생각은 최대한 하지 않도록 보듬어야 했다.

    설우와 연이 함께 쓰는 바디워시 때문에 늘 은은한 장미 향으로 가득 차 있는 침실에 낯선 라벤더 향이 스며들었다.

    의사를 마주하는 게 여전히 불편해 잔뜩 긴장한 채로 상담을 마친 연은 테라피스트의 말을 따라 베드 타월을 덮은 채 엎드려 있었다.

    미끄러운 오일 위에 전문가의 손길이 닿으니 굳어있던 어깨가 나른하게 풀렸다.

    “혹시 불면증 있으신가요?”

    “자는 데 문제가 있긴 해요.”

    “라벤더 향은 신경을 안정시켜 줘서 스트레스나 긴장에 효과가 좋아요. 그리고 숙면을 하는 데 도움이 되고 두통 같은 통증을 완화해주기도 해요. 욕조에 오일 한 방울을 넣고 목욕을 하거나 베개에 묻혀 자면 아주 좋을 거예요.”

    “그쪽 통해서 구할 수 있습니까?”

    “예?”

    “라벤더 오일 말입니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테라피스트의 손을 지켜보던 설우가 관심을 보였다.

    비타민부터 시작해 수면의 질을 높이기 위한 온도, 습도, 음악, 캔들. 나름대로 이것저것 손을 대었지만, 아로마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첸의 추천을 받아 연의 기분전환을 위해 준비한 것일 뿐이었는데. 테라피스트의 설명을 듣고 있으니 마음이 혹했다.

    “아, 물론입니다. 연락해주시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테라피도 주기적으로 받고 싶은데요. 일주일에 두세 번씩 이곳으로 방문해서요, 가능합니까?”

    “네, 불러주신다면 저야 감사하죠.”

    테라피스트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펠리체 방문 테라피, 그것도 차설우 사장의 아내를 전담하고 있다는 필모그래피가 추가된다면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집단에서 일인자가 되는 것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연아 어때, 괜찮지?”

    “그럼요. 향도 너무 좋고, 편안해요.”

    “진작해줄 걸 그랬네. 계속하세요.”

    “네, 신부 마사지도 한꺼번에 진행하는 거라 이제부턴 조금 힘이 들어갈 거예요. 아프시면 말씀하세요.”

    “그럴게요.”

    연은 흔쾌히 답을 했지만 설우의 눈썹 끝이 불편하게 들썩였다.

    말을 할 정도로 아프게 하겠다는 소린가? 타이 마사지도 아니고 아로마를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혹시 경락도 하실 건가요? 제가 그 얘긴 듣지 못해서.”

    “아뇨, 경락은 됐습니다. 보다시피 얼굴이 워낙 작아서.”

    “아, 예.”

    연이 입을 떼기도 전에 설우가 선수를 쳤다.

    마사지 받는 걸 굳이 지켜보겠다는 이유가 이런 거였나.

    설우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테라피스트는 다시 연의 어깨를 주무르는 데 집중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하려면 힘드시겠어요.”

    “주로 숍에서 해요, 방문은 특별한 경우에만 합니다.”

    “특별한 경우요?”

    “예, 사장님께서 가격을 세게 부르셨거든요. 사모님 같은 분은 맡지 않는 게 손해죠.”

    2시간이 넘는 코스로 이어지는 마사지였기 때문에 초반엔 고객이 지루하지 않게 적당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주된 업무였다.

    장난 섞인 테라피스트의 말을 들은 연이 설우를 흘깃거렸다.

    “오빠 돈 많아.”

    “안 물어봤어요! 저렇게 지키고 앉아 있는 사람은 없죠? 이해해 주세요, 제가 아파서 그래요.”

    “네, 처음이지만 괜찮습니다. 보통 신부님들은 드레스 때문에 등이랑 팔뚝, 승모근에 신경을 많이 쓰세요.”

    “아!”

    설우의 뜬금없는 돈 자랑에 훅, 붉어진 얼굴로 굳이 아프다는 고백을 하던 연이 굳은 어깨를 찌르는 통증을 느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좀 약하게 해드릴까요? 근육이 뭉쳐있으면 더 아파하시더라고요.”

    “아뇨, 참을만해요.”

    “아프지 않게 하세요. 워낙 피부 결이 여려서 멍이 금방 들어요, 벌써 다 빨개졌잖아. 힘을 얼마나 준 겁니까?”

    “오빠!”

    어느새 성큼 다가온 설우가 붉은 반점이 생긴 어깨를 발견하고 인상을 썼다.

    “아, 아니 이건 원래. 신부 마사지가 드레스 라인을 살리기 위해서 하는 거라 통증이 생기는 게 일반적인….”

    “일반적인?”

    “거지만, 원하신다면 보통 아로마테라피 수준으로 하겠습니다.”

    “나 괜찮은데요.”

    “넌 라인을 살리고 뭐고 할 게 없어, 애초에. 신부 마사지가 이런 건지 몰랐어. 안 아픈 것만 받자?”

    “알았으니까 다시 가서 앉아요. 선생님이 얼마나 당황스럽겠어요.”

    “잠깐 통화하고 올 거야, 잘 받고 있어.”

    연이 알았다는 듯 눈을 깜빡이자 설우가 침실을 나섰다.

    “죄송해요, 선생님. 오빠가 원래 저렇지 않은데 제가 요즘 많이 다쳐서 걱정돼서 그래요.”

    “하하하, 저한테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으셔도 돼요. 사모님 보니까 이해가 가는데요? 제가 남자였어도 지키고 앉아 있었겠어요.”

    귀여운 사과에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린 테라피스트가 한결 부드러워진 손길로 연의 날개뼈 부근을 지분거렸다.

    불쑥 끼어들어 트집을 잡는 설우 때문에 민망했지만, 막상 그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허전한 연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예, 보스.

    “권상철은 어때.”

    -짐승처럼 굴러다닙니다. 계속해서 자기 부인만 찾는군요. 장세희와 성진물산 주식에 관련된 뉴스는 빠짐없이 보여 주었습니다.

    “평창동 김 전무 애들이 장세희 주변에 맴도는 사진 몇 장 찍어다 던져줘. 제 아내가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느끼게 해줘야지.”

    -알겠습니다.

    “장세희는?”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김 전무와 다른 대부 업체 한 곳은 다음 달부터 수금 압박을 할 거 같습니다. 건물이 압류되고 경매로 넘어가는 데는 시간이 걸릴 거고요.

    그건 좀 아쉽네. 집도 절도 없어야 괴롭히는 재미가 쏠쏠할 텐데.

    “김 전무도 잘 지켜봐. 백창석 말고 다른 곳에 팔아넘기면 찾기 힘들지도 모르니까.”

    -예.

    “애들은.”

    -골라 뒀습니다.

    “결혼식이니까 깔끔하게, 진짜 경호원들처럼 하라고. 첸, 이든, 내 직계가족 빼고는 전부 출입금지야. 할아버지가 끼고 들어가는 것도 안 돼.”

    -다시 한번 일러두겠습니다.

    제이의 책임자이자 상철을 맡은 주안과 통화를 마친 설우가 입꼬리를 좌우로 움직이며 힘을 풀었다.

    한껏 눈치가 빨라진 다람쥐한테 굳은 얼굴을 들킬 수는 없지.

    주안에게 해둔 지시는 성태를 기함하게 만들기 충분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사실 조부에게 하는 경고에 가까웠다.

    나는 지금 이 정도로 눈에 뵈는 게 없으니 아무것도 하지 마시라는 경고.

    “어떻게 나오시려나.”

    손자의 사랑을 응원하는 다정한 할아버지 행세도 어렵지 않게 해내신 분이니, 하객들에겐 알아서 잘 둘러대시겠지.

    이틀 후 제 옆에 예쁘게 서 있을 연을 상상하며 가볍게 목덜미를 문지른 설우가 다시 침실로 향했다.

    ***

    결혼식 당일.

    신랑, 신부만큼 바쁠 가족들이 설우와 연 다음으로 호텔에 도착했다.

    화진과 성진을 포함한 현진가의 이들은 우르르 몰려 로비를 지나는 성태와 차씨 집안의 일원들을 마주했다.

    “일찍 오셨네요? 메이크업 받으시려고요?”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결혼식이니 괜한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 취향에 맞지 않는 한복을 차려입은 화진이 먼저 성태에게 알은척을 했다.

    허울뿐인 사돈지간에서 이제 서열을 다투는 남이 된 다른 가족들 역시 떨떠름한 얼굴로 악수를 했다.

    “메이크업은 무슨. 그래도 어미라고 얼추 차림은 갖췄구나.”

    단정한 맏며느리 유정과는 다른 화려한 한복이 성에 차진 않았지만 어쨌든 입었으니 됐다는 말투였다.

    “좋은 날인데 아버님이랑 입씨름하고 싶지 않아서요. 손님들 오기 전에 들어가시죠. 애들 먼저 보셔야죠?”

    화진과 성태가 앞장을 서자 다른 가족들이 그 뒤를 따랐다.

    하객들이 도착하기 전. 웨딩홀 입구를 빼곡히 메운 화환들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던 차 회장이 우뚝 멈춰섰다.

    고급스럽고 말끔한 꽃과 장식들로 채워진 웨딩홀에 어울리지 않은 검은 인영들이 제 눈을 의심하게 했다.

    “이, 이것들은 다 뭐야!”

    ‘나름대로 즐거우실 거예요.’

    결혼 준비가 잘 되어가냐는 말에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답하던 손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말을 뜻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미친 자식을 봤나.

    경악스러운 광경을 맞이하고 얼굴이 시뻘게진 성태가 순간 치솟는 혈압을 이기지 못하고 좌우로 비틀거렸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장남 현수가 먼저 그를 부축했다.

    “세상에.”

    “와, 또라이 새….”

    설우를 비하하려던 사촌 관우가 매서운 화진의 눈초리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놀란 건 화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드넓은 웨딩홀에서 가장 이목이 쏠릴 신부대기실 앞에 도착한 가족들의 턱이 일제히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좁은 간격을 유지한 체격 좋은 가드들이 신부대기실의 커다란 입구를 포함한 한쪽 벽을 물 샐 틈도 없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어떤 결혼식에서도 볼 수 없을 장관 혹은 가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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