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한 손엔 아이스크림케이크를, 다른 한 손엔 설우의 손을 잡은 연이 이든의 병실로 들어섰다.
“이든!”
“꼬맹이!”
“좀 어때요? 아직도 많이 아파요?”
“아니, 멀쩡해. 금방 다 나을 거야.”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요.”
종일 갇혀 있어 답답한 이든은 첸의 잔소리를 무시한 채 병실 안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때마침 등장한 반가운 얼굴에 기다란 링거대가 방정맞게 미끄러졌다.
“나 이제 안아줘도 돼.”
“붕대는 언제 풀어요?”
활짝 벌린 이든의 팔 속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간 연이 어정쩡한 포즈로 붕대가 감긴 허리를 안았다.
“곧. 너무 걱정하지 마, 넌 어때?”
“난 좋아요.”
“그럼 나도 좋아.”
애틋한 남매의 상봉을 흘기던 설우가 연의 뒷덜미를 끌어당겼다.
“오늘은 여기까지.”
“아픈 동생한테 치사하게 굴 거야?”
“빌려주는 걸 감사히 여겨.”
“와, 꼬맹이가 물건이야? 빌려주게!”
“물건은 아니지만, 내 건 맞아. 연이 누구 거야.”
“오빠 거요!”
“들었지?”
어우. 얄미워 죽겠네, 저 인간.
금세 연을 빼앗긴 이든이 뾰로통하게 소파로 내려앉았다. 첸 역시 이든과 같은 얼굴이었다.
“이든, 촛불 불어요.”
연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아이스크림케이크를 테이블로 꺼내 올렸다.
“안 불어도 돼, 그냥 먹자.”
“노래 부르고 소원도 빌어야 해요. 우리 아빠가 생일은 꼭 축하해줘야 하는 거랬어요. 세상에 태어난 건 대단한 일이니까요.”
우리 아빠? 권상철 그 인간을 저렇게 다정하게 부른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설마.”
이든과 첸이 동시에 설우를 바라보았다.
“맞아, 기억 돌아왔어. 납골당에도 다녀왔고.”
“많이 울었어?”
“아뇨, 나 괜찮아요. 아빠랑 오빠한테 새로 생긴 가족도 자랑했어요. 이든이랑 첸도 나 찾느라 고생했다면서요, 고마워요.”
“이건 내가 할게.”
종알종알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초를 꽂은 연이 꺼내든 성냥을 잽싸게 거둬들인 설우가 대신 불을 붙였다.
“병실 불 꺼주세요, 첸!”
“안 해도 괜찮다니까. 진짜 생일도 아닌데.”
이든이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생일 케이크에 촛불까지 켠 건 처음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 정해준 생일이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나으니 미국에서 몰려다니던 무리와 빵조각이나 나눠 먹던 생일.
첸과 설우와 살면서도 맛있는 걸 먹고 적당히 선물을 주고받는 게 전부였다. 생일을 함께할 만큼 깊은 사이로 만난 여자도 없었다.
촛불, 노래. 전부 생소했다.
“자, 다 같이 부르는 거예요. 시작!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이든의 생일 축하합니다, 와아!”
짝짝짝. 작은 손이 내는 박수 소리가 이든의 가슴을 둥둥 울렸다.
설우와 첸은 옹알이를 하는 수준으로 노래를 불렀지만, 연의 고운 음색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들 고마워. 은근히 기분 좋네, 이거.”
“소원 빌고 촛불 꺼요, 이든.”
“우리 막냉이가 빨리 나을 수 있게 해주세요, 후!”
케이크를 가득 채운 촛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든을 위한 소원을 빌어야죠.”
“다른 소원 없어, 너만 안 아프면 돼.”
“미안해요, 이든. 저번에 만들었던 꽃다발이 이든 선물이었는데.”
“괜찮아, 받은 셈 칠게.”
“다음에 또 만들어 줄게요. 그리고 태어나줘서 고마워요, 이든. 내 가족이 되어준 것도 고맙고요.”
진심 어린 축하를 받고 코끝이 찡해진 이든이 괜스레 눈을 굴렸다.
“나도 고마워. 넌 우리한테 두 번은 없을 축복이야.”
연을 찾는 걸 귀찮아했던 지난날들이 후회되었다.
바보같이, 이렇게 예쁜 여동생이 생길 줄도 모르고.
“연아, 내 생일은 4월이야.”
감동에 취해 훌쩍이는 이든을 부럽다는 듯 바라본 첸이 제 생일을 어필했다.
“오빠 생일은 알지?”
“네. 5월 5일, 어린이날.”
“네 생일은?”
“5월 4일, 오빠 생일 전날. 오빠가 제주도에서 지내는 동안 매년 같이 파티했었잖아요.”
“맞아, 잘 기억하네. 이제 아이스크림 먹자.”
병실의 불을 밝힌 설우가 손에 숟가락을 들려주자 연은 빠르게 아이스크림을 떠먹었다.
“연아.”
“네.”
“한남동 들어가는 거 무서워?”
“아뇨, 안 무서워요.”
“할아버지가 그동안 너한테 심한 말 많이 했잖아.”
“괜찮아요. 어릴 땐 절 예뻐하셨던 거 같은데, 이제 너무 미운가 봐요.”
“가면 낯선 사람들도 많고, 분위기도 버거울 거야. 견딜 수 있어?”
펠리체를 떠날 날이 가까워졌다.
불안한 내색 없이 아이스크림을 오물거리는 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설우가 진지한 물음을 던졌다.
“꼬맹이가 싫다고 하면, 안 들어가도 되는 거야?”
“한주희가 사고를 제대로 쳤잖아. 한강일 시장이 한남동 집에 왔었다는 보고 받았어. 할아버지한테 부탁했을 거야, 묻어달라고.”
“회장님께서 딜을 하시겠네. 한남동 합가를 취소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아싸! 그럼 펠리체에서 계속 같이 살 수 있는 거야?”
“나쁘진 않지만, 최선은 아니지. 연이가 괜찮다고 하면 한남동엔 들어가고 파라다이스 지분을 넘겨받을 생각이야.”
“하긴. 파라다이스로 압박하면 회장님도 쉽게 일을 꾸미진 못하시겠지.”
기대로 부풀었던 이든의 볼에서 실망 가득한 한숨이 세어 나갔다.
“둘 다 들어달라고 하면?”
“욕심이 과하면 전부 틀어지는 거야. 적당히 베팅하고, 적당히 이득 보며 갉아먹는 게 이기는 길이라고.”
함께 살고 싶은 건 첸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게 연이 좀 더 안전해질 수 있는 방법이었다.
차현수 총괄 회장의 경영 능력 부족이 만천하에 드러난 이때 가장 큰 흑자를 주는 설우의 파라다이스까지 잃는다면 아무리 CH그룹이라도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CH그룹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조부가 파라다이스를 인질로 잡은 제게서 굳이 연을 빼앗지는 않겠지.
차 회장의 약점을 하나둘 틀어쥐며 완벽하게 그를 묶어내야 한다.
“나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오빠 가족이랑 사는 거잖아요.”
“무리하지 않아도 돼.”
“무리 안 해요. 한남동보다 무서운 곳에서도 버텼는데, 오빠도 있는 좋은 집에서 못 버틸 이유가 없죠.”
“오, 선우연. 센 척 좀 하는데?”
“센 척이 아니고 진짜거든요!”
연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굳이 호랑이굴로 들어가겠다는 연의 마음을 돌리고 싶은 이든이 짓궂게 이죽거렸다.
“너 한남동 들어가면 매일 혼날걸? 맛있는 반찬만 골라 먹어서 혼나고, 젓가락질 못 해서 혼나고, 발발거리고 뛰어다녀서 혼나고. 잠옷만 입고 돌아다니지도 못해.”
“왜 가기 전부터 겁을 주고 그래.”
첸이 이든을 툭 건드렸다.
“3, 3개월만 있을 거거든요. 우린 별관에서 지낼 거고, 아침엔 오빠랑 같이 나온다고 했어요.”
“솔직히 말해 봐, 꼬맹이. 무섭지?”
“적당히 해, 이든.”
설우의 타박까지 이어졌다.
“내가 생일 축하 노래도 불러줬는데, 자꾸 놀릴 거예요?”
“놀리는 거 아니야. 가지 말고 펠리체에서 살자고 겁주는 거지.”
3일이건, 3개월이건 떨어져 살고 싶지 않았다.
집안사람들은 물론이고 입주 직원들까지 텃세를 부릴 한남동에서 주눅 들어 지낼 것이 뻔한데 좋은 마음으로 보낼 수 있을 리가.
이성적이고 이해타산이 빠른 설우와 첸은 이런저런 변수를 따져 가장 완벽한 답을 염두에 두겠지만 이든은 아니었다.
안 가도 된다는데 왜 가겠다는 건지.
“한남동에서 조금만 참으면 다 같이 편해질 수 있는 거잖아요. 오빠랑, 그리고 첸이랑 이든이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연의 결심은 굳건했다. 설우가 자신을 누구에게서 보호하려고 애쓰는지 알고 있었다.
‘말했잖아, 작정하고 연이를 숨기면 돌이킬 수 없다고. 할아버지가 그런 마음조차 먹을 수 없게 만들어야 해. 그 시작이 파라다이스야.’
할아버지가 나를 오빠한테서 멀리 떨어뜨려 놓을 수도 있겠구나.
저를 하찮게 여기는 차 회장을 여러 번 마주친 탓에 우연히 듣게 된 설우와 첸의 대화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남동에 들어가기 싫다고 어리광을 피울 게 아니라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인정받는 게 옳았다.
“야, 꼬맹. 왜 나보다 더 어른이 되려고 그래.”
“3개월도 안 걸릴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못마땅하다는 듯 눈가를 구긴 이든을 안심시킨 설우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오빠 왜요? 어디 가게요? 나는 안 가요?”
“한남동 들어갔다 올 거야, 여기서 놀고 있어. 이든이랑 첸 있으니까 졸리면 자고.”
“언제 올 건데요?”
“금방 올게, 자고 있어도 데리고 갈 테니까 편히 놀아.”
“이거 봐, 센 척한 거 맞잖아.”
자신만만하게 굴 땐 언제고. 설우의 옷깃을 잡은 연이 다다다, 질문을 내뱉자 이든이 탄식했다.
“난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알아, 다녀올게.”
“네.”
“뽀뽀해주고 갈까?”
“아, 나.”
“우엑.”
설우가 앙증맞게 입술을 내밀자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몸서리치는 첸과 이든을 살핀 연이 절레절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뇨, 이든이랑 첸이 놀려요. 얼른 가요.”
“알았어, 전화할게.”
“안 해줘도 된다니까요.”
“입술 아니고, 이마잖아. 진짜 갈게.”
연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설우가 손을 흔들며 병실을 나섰다.
“좋아?”
“그럼 안 좋아요?”
“그만 비비고 이거나 드셔.”
방글거리며 이마를 문지르는 연에게 틱틱거린 이든이 환자복 주머니에 있던 초코바를 꺼내 던졌다.
“이든이 먹으려고 넣어둔 거 아니에요?”
“너 때문에 생긴 버릇이야, 주머니에 간식 챙겨 넣는 거.”
“차설우보다 네가 더 팔불출인 건 아냐?”
“뭐래, 형도 아까 사탕 챙기는 거 봤거든?”
“아, 맞네.”
하하, 첸이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바지 주머니 속에서 막대 사탕 두 개를 꺼냈다.
“둘 다 정말 큰일이네요. 이제 곧 나 없는데, 괜찮겠어요?”
“난 안 괜찮아.”
“나도.”
첸과 이든의 눈꼬리가 동시에 아래로 향했다.
온 집안을 휘젓고 뛰어다니는 연이 없다면 얼마나 허전할까.
연이 오기 전으로 되돌아갈 고요한 펠리체를 견딜 자신이 없었다.
“사실 잠만 한남동에서 자는 거라고요.”
“아침도 한남동에서 먹잖아.”
“아, 그런가?”
“이리 와, 나란히 앉아서 영화나 보자.”
“좋아요!”
이든과 첸의 사이는 설우가 없을 때 연의 고정석이었다.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장난을 치는 이들에게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대충 골라 튼 영화는 그저 배경음을 깔아줄 뿐이었다.
***
똑똑.
원목 문을 울리는 노크 소리에 주희의 어깨가 들썩였다.
설우를 기다리며 침묵 속에 갇혀 있던 응접실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저 왔어요.”
“앉아라.”
“오랜만이네요, 한 시장님.”
“그, 그래. 오랜만이야, 차 사장.”
연을 찾기 전 스위트룸 모임에서의 만남이 마지막이었다.
수척해진 강일의 얼굴을 보고 비릿하게 웃던 설우의 시선이 주희에게 돌아갔다.
살벌한 눈동자를 차마 마주할 수 없는 주희는 곧바로 고개를 떨궜다.
“길게 늘어놓을 거 없이 본론만 하거라, 어쩔 셈이야.”
“사건 처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무덤덤한 목소리가 돌아오자 땀에 흥건히 젖어있던 강일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대선에 차질이 생길까 끙끙 앓느라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던 그였다.
“원하는 건.”
“한주희 씨는 사과부터 해야지. 갈비뼈가 폐를 찌르는 바람에 처치가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했어. 당신 사람 죽일 뻔했다고.”
“미, 미안해요. 정말 치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그 여자가 자꾸 알짱거리니까 나도 모르게….”
알짱?
우스운 변명을 들은 설우의 눈매가 매섭게 치솟았다.
“한 시장님 딸은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네요.”
“내가 대신 사과할게,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잘 단도리 칠 거야.”
“나한테 하는 사과는 필요 없습니다.”
“…….”
“이든한테 가서 무릎을 꿇든 고개를 조아리든, 뭐든 해. 연이한텐 사과도 필요 없으니까 애 눈앞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마. 그땐 내가 네 손가락을 부러뜨릴지도 모르겠으니까. 좋아하는 피아노 계속 치고 싶으면 조용히 숨만 쉬고 살라고.”
이 자리에 누가 앉아 있건 독기 서린 설우의 입은 거침이 없었다. 차 회장을 쏙 빼닮은 모습이었다.
제 딸이 코앞에서 모욕을 당하니 얼빠진 강일이 성태를 바라보았지만, 그 역시 별다른 저지는 하지 않았다.
말린다고 들을 손자 놈도 아니었고, 이번 일은 딱히 말릴 이유도 없었다.
“무슨 그런 말을 해요!”
“펠리체에선 이미 나갔겠지?”
“안사람이 정리하고 있으니 펠리체 안에서 마주칠 일은 없어.”
강일이 주희를 대변하고 나섰다.
“좋습니다.”
“다른 건.”
입을 다물고 관망하던 차 회장이 허리를 세웠다.
“할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파라다이스 주식 절반, 저한테 넘겨주세요.”
“뭐, 뭐야?”
기껏해야 한남동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말할 줄 알았건만.
생각지도 못한 조건에 뒤통수가 얼얼해진 차 회장이 테이블에 놓은 냉수를 들이켰다.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설우에게 갈 주식이지만, 빼앗기듯 내어주는 모양새가 되니 영 찝찝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한 시장을 살리려면 하나는 내어주어야 한다.
“대선 파트너 버릴 생각 없으시잖아요, 긴말 않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처리 부탁드려요.”
“주식은 받아 뭐 하려고.”
할아버지가 손에 쥔 것들을 야금야금 빼앗아 연이 방패막이로 세워 두려고요.
속내를 감춘 설우가 설핏 미소를 지었다.
“제가 욕심이 많잖아요. 아무리 가져도 더 가지고 싶더라고요.”
“그래, 좋다.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구나, 쯧!”
차 회장이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죄인처럼 움츠러든 강일은 불만과 원망이 덕지덕지 붙은 시선을 억지로 피했다.
“회장님,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눈치를 살핀 강일이 멍하니 앉은 주희를 일으켰다.
제가 제일 잘났다고 떠드는 두 남자 사이에서 더는 굴욕감을 맛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명색이 시장인데. 나이가 많은 차 회장은 그렇다 쳐도 언제나 오만불손한 설우의 태도에 자존심이 상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명예보단 부가 권력에 가까웠다.
“그럼 설우 결혼식 때나 보도록 하지.”
“네, 회장님.”
이 와중에도 결혼식 참석을 강조하는 차 회장에게 힘없이 허리를 숙인 강일은 주희를 데리고 응접실을 나섰다.
“결혼 준비는 차질 없이 되는 게야?”
“제가 준비할 게 있나요.”
“외적인 것들 말고, 너희 둘 말이다.”
“물론입니다, 나름대로 즐거우실 거예요.”
출신도 모르는 신부를 두고 수군거릴 하객들 때문에 벌써 골이 지끈거리는데 즐겁긴 개뿔.
“네 신부 될 아이가 재롱이라도 피운다더냐?”
“누구 좋으라고요. 밖에 내놓기도 아까워 죽겠는데.”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지 말거라.”
네놈이 마음을 놓는 순간 비수가 날아갈 테니.
“할아버지께서도 섣부르게 움직이지 마세요. 우리 둘 다, 잃을 게 너무 많지 않습니까.”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하는 설우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무정한 눈동자로 차 회장을 마주했다.
뭐든 해볼 테면 해보라는 태도였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은 굳건한 설우를 노려보던 차 회장이 입가를 비틀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호락호락하지 않은 막내 손자는 철갑옷을 두른 듯 자신만만하게 제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