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59화 (59/96)
  • 59화.

    업혔다가, 안겼다가.

    납골당에서 돌아와 끊임없이 제게 엉겨 붙는 연이 그저 애틋한 설우는 꿀이 그득한 눈빛을 뽐냈다.

    “오늘 컨셉이 코알라야?”

    “나는 왜 맨날 동물일까요? 아기염소였다가 다람쥐였다가 이젠 코알라까지.”

    “염소는 네가 하겠다고 한 거고.”

    소파의 넓디넓은 공간을 두고 설우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아 마주 본 연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아, 맞다. 근데 어떡해요, 계속 붙어있고 싶은데. 오빠랑 이렇게 집에 오래 있는 날이 별로 없으니까 떨어지기가 싫어요. 귀찮아요?”

    “그럴 리가.”

    “다행이다.”

    “볼에 멍이 아직도 남았어. 대체 얼마나 세게 때렸던 거야.”

    조그맣게 남은 보라색 멍 자국 때문에 설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연이 주름진 미간에 입을 맞췄다.

    이제야 좀 살맛이 나는지. 전과 같이 예쁜 짓을 일삼는 연은 끝내 설우를 웃게 했다.

    “오빤 웃는 게 왜 이렇게 근사해요? 누가 보고 반할까 봐 무섭다.”

    “괜찮아, 너밖에 못 봐. 그러니까 말 돌리지 마.”

    “혼자 있다가 잠들어서 크게 다치면 안 되잖아요. 사람 없는 곳에서 잠들어서 나쁜 사람한테 잡혀도 안 되고.”

    “펠리체 가드나 구급 대원, 병원에 도착해서는 간호사 아니면 의사. 누구라도 붙잡고 네 상태에 관해 설명하고 도와 달라고 하는 게 맞는 거야. 널 때리는 게 아니라.”

    “그중에도 나쁜 사람이 있으면요? 그럼 오빠가 사랑하는 다람쥐를 영영 못 보는 거예요.”

    해맑은 물음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나치게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남을 돕는 일을 가졌다고 전부 좋은 사람은 아닐 테니. 하지만 뒷말은 너무했잖아.

    “그거 오빠 마음 아프라고 하는 말이야?”

    “아니, 아니에요. 잘못 말했어요. 취소!”

    “조심해. 두 번 다시 그런 사고는 없을 거지만, 자해는 절대 하면 안 돼. 알았지?”

    “네, 안 그럴게요. 마음 아프게 해서 미안해요.”

    “아프게 한 김에 좀 더 하자.”

    “응?”

    “사고 후에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해줘.”

    자세히 알아야 내가 그에 걸맞은 복수를 하지.

    준비는 모두 끝났다.

    권상철은 이미 잡아뒀고, 장세희 역시 독 안에 든 쥐였다.

    장세희를 평창동 김 전무 손에 놀아나게 두고 데려올 것이냐, 먼저 데려와 내가 가지고 놀 것이냐 정도의 선택만이 남아있었다.

    둘 중 어느 것이든 그들에겐 지옥일 테지만.

    “알아서 좋은 거 없는데.”

    “그래도 알려줘. 너에 대한 건 빠짐없이 알고 싶어.”

    “음, 병원에서 눈을 떴고, 아빠랑 재혼한 그 여자가 있었어요. 머릿속이 하얬으니 당시엔 그냥 엄마인 줄만 알았고요. 곧바로 퇴원했고, 언덕이 엄청 높고 계단이 많은 곳에 살았어요.”

    “네가 도망쳐 나오던 날, 이든이랑 첸이 거기에 갔었어. 사진 한 장 들고 3년을 수소문해서 간신히 찾았지. 물론 알아낸 건 없었고.”

    초옥, 설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이 입술을 맞댔다.

    “나 안 잊어버리고 찾아다녀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또?”

    “나는 계속 아팠어요, 그 아줌마는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요. 그때부터 잘 못 먹어서 작은가 봐요.”

    “선우 아저씨의 재산이 탐나서 널 숨겼던 거야.”

    “멋대로 밖에 나갔다가 쓰러지는 날엔 많이 혼났던 거 같아요.”

    “때렸어?”

    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 눈에 띄지 말라고 했거든요. 도망칠 생각은 못 했어요. 아는 게 없으니까 무서웠고, 많이 아파서. 뭐가 맞고 뭐가 틀렸는지조차 몰랐거든요.”

    묵혀둔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연은 오히려 담담했고, 감정이 요동치는 건 설우였다.

    역시. 손톱만큼의 자비도 베풀 가치가 없는 인간이다.

    “이젠 기억이 돌아왔는데, 화 안 나?”

    “화낸다고 달라질 게 없는걸요. 거기서 조금 살다가 다른 곳으로 갔어요. 근데 어디로 갔는지 잘 기억이 안 나요, 계속 잤던 거 같아.”

    “어디로 갔었는지도 몰랐다고?”

    “밖으로 나간 적이 없으니까. 핫케이크랑 라면을 진짜 많이 먹었었는데! 병원에 갇히고 나서는 너무 먹고 싶더라고요.”

    “너는 나쁜 일을 신나게 말하는 버릇이 있어.”

    “그냥 오빠한테 이야기하는 게 신나는 거예요.”

    방글방글 웃는 얼굴 때문에 차곡차곡 쌓이던 분노가 가라앉았다.

    누가 보면 즐거운 추억이라도 되뇌는 줄 알겠네.

    “거기서도 묶여 있었어?”

    “처음 빼곤 이사하는 곳마다 계속요. 자세히는 말 안 할래요, 창피한 부분이 많아서. 언젠가부터 권상철이랑 같이 집에 왔고 그 아저씨랑 재혼을 해서 내 이름은 이제 권다미라고 했어요.”

    “그전에 이름은 뭐라고 했는데? 선우연 이라고 했을 때 몰랐잖아, 그 이름.”

    “모르겠어요, 상태가 안 좋을 때라. 엄청 멍했거든요. 아무튼, 그때 등본도 처음 봤고, 아줌마 딸인 연주도 같이 살게 됐고, 그러다가 병원으로 갔죠.”

    “이름만 알았어도 널 쉽게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이렇게 같이 있잖아요, 꼭 안겨서!”

    “병원에선 어땠어?”

    “뭐, 그냥. 반항을 좀 했는데 밥을 안 줘서 나중엔 말을 잘 들었어요. 묶여 있었고, 계속 잤고, 어지러웠고. 깨어있을 땐 돌봐주던 아줌마가 해주는 바깥 이야기를 듣고, 나가는 상상을 했죠. 아줌마가 알려준 게 정말 많았어요. 나름대로 공부도 해서 이 정도라고요.”

    나 너무 잘 견뎌서 대단하죠?

    속내를 천진하게 드러내는 올곧은 눈에 입을 맞춘 설우가 연의 등을 차분히 쓸어주었다.

    “응, 대단해.”

    “밥을 마구 퍼먹는 건 아줌마랑 살고, 병원에서 살면서 생긴 버릇이니까 고치는 게 느려도 나 미워하지 마세요.”

    “절대 안 미워해, 좋지 않은 습관을 고칠 수 있게 천천히 도와줄 거야. 예전처럼 무섭게 혼내지도, 다그치지도 않을게. 그동안 오빠가 잘못했어. 나도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어.”

    결혼이 얼마 남지 않아서일까.

    연과 함께 보냈던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 영상을 틀어 놓은 것처럼 눈앞을 아른거렸다.

    행복한 시간도 많았지만, 심장이 요동칠 만큼 아찔했던 순간들은 기억 속에 문신처럼 새겨졌다.

    “그러지 말아요. 난 오빠가 이러는 게 더 아파요. 다 이겨내고, 다 할 수 있어요. 오빠가 나 사랑만 해주면 맨날 웃을 수 있다고요.”

    “뭐야, 이 기특한 다람쥐는.”

    연을 감싸 안은 팔에 평소보다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스트레스가 극심할수록 과수면이 심해지네요. 원하신다면 약 처방을 늘리겠지만, 추천하진 않습니다.’

    ‘이틀 이상도 잘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20시간 이상을 4주 동안 자는 환자도 본 적 있어요. 지금 선우연 환자처럼 기본적인 생리현상을 위해 스스로 깨어나는 것 빼곤 계속해서 수면을 취합니다. 이런 경우 약은 전혀 효과가 없죠.’

    ‘그렇군요.’

    ‘선우연 환자의 문제는 잠이라기보단 퇴행성 뇌질환의 위험성이죠. 이미 한번 뇌손상이 있었던지라 추적검사와 예방이 절실하고요. 만일 또다시 기억장애가 생긴다면 예후가 좋지 않을 겁니다. 알츠하이머, 굳이 설명 안 해도 잘 아시죠?’

    그런데 연아, 사실 나 너무 무서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사랑이 짙어질수록 거대해지는 두려움이 설우를 몰아붙였다.

    조금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는 위협적인 병은 시간이 갈수록 저를 겁쟁이로 만들고 있었다.

    “이든 생일 선물은 어쩌죠. 내가 만든 꽃을 주고 싶었는데.”

    “자고 일어나서 천천히 생각해.”

    나른하게 풀리는 눈동자를 안쓰럽게 보던 설우가 그녀를 안아 소파에서 일어났다.

    “오빠 근데 눈이 왜 빨개요?”

    “나도 졸려서 그래.”

    “그럼 나랑 같이 자면 되겠다.”

    “참지 말고 어깨에 기대.”

    작게 고개를 끄덕인 연이 설우의 어깨로 얼굴을 묻었다.

    대낮부터 볼썽사납게 붉어진 눈가를 숨기고 싶었다.

    연에게 든든한 산이 되어줘야 하는데, 이렇게 나약해서야.

    단단하게 얼려놓아도 아이스크림처럼 금세 녹아 버리는 제 모습이 우스웠다.

    “오빠 나 일어나면 이든 보러 가요.”

    “그래, 그러자. 대신 일찍 일어나야 해, 약속.”

    “약속.”

    침대에 편히 누운 연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새끼손가락을 올렸다.

    재잘거리는 너를 조금 더 오래 보고 싶은데. 예쁘게 웃는 너와 더 오래 놀고 싶은데.

    야속하게 떨어지는 하얀 손에 아쉬운 설우의 눈길이 묻었다.

    “또 이틀이나 잘 건 아니지?”

    평소와 같은 연의 낮잠 시간일 뿐인데, 설우에게 와닿는 감정은 평소와 달랐다.

    한바탕 폭풍우가 치고 간 자리는 유독 고요하게 느껴졌다.

    곱게 잠든 연을 바라보다 먹먹해지는 가슴을 막지 못한 설우의 눈에 흔치 않은 눈물이 고여 들었다.

    제가 뒤처리를 하지 못한 탓에 벌어진 사고였다. 하마터면 연이 크게 다칠 뻔했고, 대신 차에 치인 이든은 수술이 불가피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이틀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설상가상으로 돌아온 기억 때문에 슬퍼하는 모습까지 지켜봐야 했다.

    다른 이들의 앞에선 태연한 척했지만, 그녀가 더욱 오래 잘 수 있다는 말까지 듣고 나니 이번엔 정말, 무너지는 것밖엔 도리가 없다.

    “우윽….”

    가슴이 벅차오를수록 일그러지는 설우의 얼굴이 바닥을 향했다.

    두 눈을 가린 커다란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너무 오래 자지 마, 제발.”

    절절한 저음이 지나고 숨죽인 흐느낌이 침실을 채우기 시작했다.

    연은 꿈에서도 볼 수 없을 설우의 서글픈 눈물이었다.

    멀뚱멀뚱, 번쩍 뜨인 눈을 굴리던 연이 허전한 옆자리를 느끼고 눈을 비볐다.

    손발이 자유로운 것을 보니 멀리 가진 않은 거 같은데.

    푹신한 이불을 걷어낸 그녀는 설우를 찾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오빠.”

    드레스룸 안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봤지만 빽빽하기 채워진 옷들만 보일 뿐 그는 없었다.

    어딜 간 거야, 보고 싶은데.

    애꿎은 잠옷 자락을 만지작거리던 연의 귓가로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가 들려왔다.

    환한 낯빛으로 총총 욕실로 걸어간 연이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훅 밀려드는 더운 수증기가 얇은 잠옷에 척척하게 달라붙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뚝, 물소리가 그침과 동시에 샤워부스로 들어간 그녀가 이제 막 샴푸를 씻어낸 설우의 맨몸으로 돌진했다.

    “뭐야, 언제 왔어.”

    “같이 잔다고 해놓고 혼자 씻기 있어요? 보고 싶었잖아요.”

    잠옷과 머리카락이 물에 흠뻑 젖거나 말거나.

    제게 폭 안겨 황당한 잠투정을 부리는 연을 못 말린다는 듯 받아주던 설우가 문득 떠오른 시간을 되짚었다.

    “너 왜 일어났어?”

    “왜라뇨, 다 잤으니까 일어났지.”

    “잠들고 한 시간도 안 돼서 씻으러 온 건데.”

    당연히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진짜요? 나 오랜만에 일찍 일어났네. 오빠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랬나 봐요.”

    “또 잠들 거 아니고? 아니면 자고 있다거나.”

    “아뇨, 멀쩡해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준다더니, 우는 어른이 불쌍해 선심이라도 쓴 건가.

    “그렇다고 욕실로 뛰어 들어오는 건 무슨 경우야. 다 젖었잖아.”

    “이든도 보러 가야 하니까 젖은 김에 씻어야겠어요. 옷을 벗어야겠다.”

    설우의 품에서 떨어진 연이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어쩌라고.”

    “만세 했잖아요, 벗겨 주세요.”

    “벗겨 주면?”

    “벗은 김에 하죠, 뭐.”

    젖은 김에 벗고, 벗은 김에 하고. 참 단순한 의식의 흐름이다.

    그늘졌던 설우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맴돌았다.

    “하는 김에 두 번.”

    “콜!”

    “하하하! 진짜 미치겠다.”

    속이 문드러져 애달픈 울음을 토해낸 남자의 입에서 어울리지 않는 시원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왜요?”

    “나 너한테 사육당하는 거야? 당근과 채찍?”

    “당근도 싫고, 채찍도 싫은데요. 옷이나 벗겨 달라니까.”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설우를 샐쭉하게 바라보던 연이 웅얼거리며 손수 잠옷을 벗기 시작했다.

    바르작거리는 작은 움직임을 감상하던 설우가 대뜸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귀여워.”

    “이게 왜 귀여워요, 나 지금 옷 벗었는데.”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건데. 나 말려 죽이려고?”

    “나 오빠 안 말려 죽여요.”

    “너 때문에 너무 행복해.”

    “나도 오빠 덕분에 행복해요.”

    샤워부스 유리 벽으로 연의 등을 붙인 설우가 다급하게 붉은 입술을 빨아들였다.

    내 행복과 불행을 모두 손에 쥔 작은 천사, 나의 신부.

    “사랑해.”

    잠에 취한 네가 내 목을 조르는 날이 와도 아마 나는 너를 사랑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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