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민무늬의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연이 제 손에 든 조그만 안개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차림만큼이나 설우의 눈앞도 캄캄했다.
이른 아침 출발해 재호와 준의 납골당으로 걸어가는 동안 서글픈 침묵만이 맴돌았다.
“연아.”
“…….”
“연아?”
“아, 네. 왜요?”
“이거.”
“어? 사진 나온 거예요?”
몇 주 전 찍었던 웨딩사진 중 한 장을 인화한 것이었다.
그늘에 삼켜졌던 작은 얼굴에 잠시 햇볕이 드리웠다.
순백의 미니드레스를 입은 연과 그 옆을 든든히 지키고 선 세 남자. 웃음꽃이 만연한 사진 속엔 오롯이 행복뿐이었다.
“한 장만 미리 챙겨왔어. 나머지는 오늘 중으로 보내줄 거야. 아저씨랑 준이한테 선물로 주고 와.”
“너무 예쁘다. 아빠랑 준이 오빠가 엄청 고마워할 거예요, 날 너무 잘 돌봐줘서.”
“글쎄. 잘, 은 빼야 할 거 같은데. 벌써 여러 번 다쳤잖아.”
“그건 오빠 탓이 아니고요.”
차 안에서부터 지금까지.
연은 툭 건들면 울음을 터뜨릴 거 같은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독하게 눈물을 참아냈다.
재호와 준을 만나기 전부터 울고 싶지 않았다.
“다 왔어. 중앙 세 번째 칸이야. 난 뒤에 서 있을 테니까 가서 인사해.”
걸어오는 내내 꼭 쥐고 있던 손을 놓아준 설우가 연의 이마에 짧은 키스를 남기고 멈춰 섰다.
“다녀올게요.”
“오래 걸려도 괜찮으니까 돌아오기만 해.”
슬픔에 갇히지 말고, 과거의 기억에 무너지지 말고.
우리 집 사랑둥이로, 잔망스러운 내 다람쥐로 돌아오기만 해.
“당연하죠.”
무거운 걸음을 떼는 뒷모습을 초조하게 따르던 설우가 마른침을 삼켰다.
신은 역시 없는 건가. 아니면 내가 비는 것들만 부러 무시하는 건가.
이기적인 바람인 걸 알면서도 연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는데.
살면서 배우지 못한 두려움이란 감정을 최대치로 제게 밀어 넣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끝내 비극을 마주하기 위해 걸어 나가고 있었다.
사고 소식을 접한 후로 제가 직접 관리해 온 유골함 앞에 다다르자 화끈거리는 눈가를 문지른 설우가 고개를 떨궜다.
사랑, 이깟 사랑. 너의 참혹한 삶 앞에선 언제나 우스운 감정일 뿐이구나.
“안녕, 아빠. 안녕, 오빠. 나 되게 많이 컸지? 그러고 보니 이제 오빠 나이랑 같아졌네.”
첫인사는 환하게. 오빠랑 아빠가 보고 싶어 했을 얼굴로.
“설우 오빠랑 같이 왔어. 오빤 날 아직도 막 안고 다녀, 내가 여전히 작대. 오빠랑 아빠도 나 자라는 것 좀 보고 가지 그랬어.”
있는 힘껏 끌어올렸던 입꼬리가 금세 아래로 떨어졌다.
꾸역꾸역 참아온 눈물이 차오르자 눈앞이 뿌옇게 일렁였다.
나란히 안치된 두 개의 유골함을 보고 있으니 조여드는 심장 때문에 숨을 내쉬기가 버거웠다.
어릴 적 사진이 담긴 유리창 밖으로 손가락을 가져다 댄 연이 결국 눈물을 쏟았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사고가 꼭 며칠 전에 벌어진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왜.”
쥐어짜듯 나온 울먹임이 설우의 귓가에 박혀 들었다.
“왜 나만 두고 갔어, 차라리 나도 데려가지… 우흑, 왜 둘만, 왜 그렇게 아픈 모습만 남기고 갔어. 난 어떻게 살라고….”
둘밖에 없는 넓은 공간엔 고통에 찬 흐느낌이 메아리쳤다.
너무 늦은 작별 인사였고, 너무 늦은 원망이었다.
“우윽…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
한 번이라도 다시 볼 수 있었다면, 단 한마디라도 전할 시간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닥친 이별은 지나치게 가혹했다.
여린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한참 동안 울던 연이 긴 소매를 잡아당겨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퉁퉁 부은 눈꺼풀에 순간 경련이 일었다. 설우는 여전히 연의 뒤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만, 그만 울어야지.
물기 어린 눈 아래로 엷은 미소가 피어났다.
“이건 오빠랑 아빠가 좋아하는 안개꽃. 이건 내 새로운 가족사진이야. 사고 나고 오랫동안 좀 힘들게 지냈는데 다행히 설우 오빠를 만나서 지금은 행복해. 이든도 첸도 다 좋은 사람들이야.”
기억이 돌아온 순간부터 꾸준히 다짐했다.
조금만 울고, 예쁘게 이별하겠다고.
되돌릴 수 없는 사고를 부여잡고 발버둥 치기엔 제가 가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언제 잠들지 모르고, 또 언제 일어날지 모르니 보통 사람들보다 두 배쯤 빠르게 흐르는 하루였다.
웃고 사랑하기도 부족한 시간에 슬픔에 파묻혀 떠난 이들만 그리워할 순 없었다.
문득 생각나면 울고, 문득 그리워지면 아프겠지만 그래도 나아가야 했다.
“서운해도 어쩔 수 없어. 대신 자주 보러 올게.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는데… 나 조금만 덜 아프게 해줘요. 의사 선생님 말도 잘 듣고, 약도 잘 먹고 있으니까 나 꼭 나을 수 있게 아빠랑 오빠가 도와줘.”
그곳에선 엄마랑 셋이 행복할 테니 나도 제대로 살 수 있게 해줘.
“언제 이렇게 씩씩해졌어.”
모래성처럼 부서질 줄 알았는데.
설우가 옆으로 다가오자 빨개진 코끝을 찡긋거린 연이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많이 울면 오빠가 너덜너덜해지잖아요.”
“잘 아네.”
사실 지금도 너덜너덜하지만.
“나가요, 오빠. 나 속이 안 좋아요, 토할 거 같아.”
“그래, 가자.”
제 의지로 의연하게 굴고 있어도 몸이 기억하는 트라우마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우욱…!”
“시원해질 때까지 해.”
“우으, 욱!”
화장실까지 가지 못하고 일단 밖으로 나온 연은 하수구에 대고 속을 게워냈다.
아침을 걸러 속이 빈 탓에 노란 위액이 딸려 나왔다.
토닥토닥, 가볍게 연의 등을 쓸어주던 설우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다했어?”
“네, 이제 괜찮아요.”
“죽 포장해서 집에 가자.”
“좋아요.”
“센터는 여행 다녀올 때까지만 쉬는 걸로 해둘게.”
“나 정말 밖에 안 나가도 돼요. 이든이랑 안에서도 잘 놀 수 있어요.”
센터 이야기가 나오자 연이 손사래를 쳤다.
제가 외출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다른 이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병이 나으면, 지금보다 좋아지면 그때 가서 돌아다녀도 괜찮으니까.
“안 돼. 센터도 다니고 같이 외출도 자주 할 거야. 집에만 있으면 마음까지 병들어.”
“그치만.”
“씩씩해졌다는 말 취소. 아직 반만 씩씩해, 너.”
“알았어요, 오빠 말 들을게요.”
“결혼식 날까진 집에만 있어도 돼. 마사지도 받고, 컨디션 관리도 하고.”
“근데 이든이 없잖아요, 나 누구랑 있어요?”
“나랑.”
“오빠 회사는요?”
맞잡은 손을 흔들며 차로 돌아가는 둘의 분위기가 훨씬 밝아져 있었다.
기억과 사고, 큰 산을 어느 정도 넘었으니 이전보다 홀가분했다.
“나 새신랑이잖아, 여행 다녀올 때까지 쉬어야지.”
“와. 그럼 오빠랑 일주일 넘게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어요?”
“응, 좋지?”
“너무 좋죠! 진짜 조금만 자야겠다.”
“그래, 약 먹고 잘 참아 봐.”
“네네.”
금세 주차장에 도착하자 붉은 기가 도는 볼을 두 손으로 감싼 설우가 쪽쪽, 입을 맞추고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머리 위의 매너 손과 안전벨트까지 잊지 않은 설우는 완벽한 에스코트를 마치고 운전석에 올랐다.
결혼식과 신혼여행까지는 연으로 시작해 연으로 끝나는 하루에 충실할 생각이었다.
***
중요한 일정까지 모조리 밀어두고 차 회장의 본가로 찾아온 강일이 초조하게 눈을 굴렸다.
테이블 위로 과일을 얹는 유정의 느긋한 행동이 마음을 갑갑하게 만들었다.
“관우 어미야.”
“네, 아버님.”
“곧 설우 들어오는 거 알고 있지.”
“그럼요.”
“설우가 데려올 아이가 많이 부족하니 정 집사랑 네가 끼고 가르쳐야 한다. 1년을 살지, 2년을 살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안사람으로 있는 동안 모자라단 이야기 나오지 않게 엄히 가르쳐야 해.”
뒤돌아 나가려는 큰 며느리 유정을 세운 차 회장의 입에서 연의 이름이 나오자 괜스레 흠칫 놀란 강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 딸이 대책 없이 벌인 일을 어떻게 설명하고 수습해야 할지 막막했다.
“설우 때문에, 괜찮을까요?”
“안 괜찮으면. 사리 분별도 못하는 놈 눈치 보느라 내 말에 토를 달 셈이냐?”
언제나 네, 밖에 모르는 유정의 반문에 빈정이 상한 차 회장이 사나운 눈을 치켜떴다.
‘설우 결혼하고 한남동 들어가면 형님은 나서지 마세요.’
‘응? 나서지 말라니?’
며칠 전 모임에서 화진이 한발 앞서 유정에게 당부했다.
유정은 차 회장과 설우의 기싸움에 가장 피해를 볼 인물 중 하나였다.
가부장적인 문화에 물들었을 뿐, 천성이 순한 유정이 설우와 부딪히지 않길 바랐다.
‘아버님 말도 안 되는 시집살이에 동조하지 마시라고요.’
‘동서도 우리 집 잘 알잖아.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야? 괜히 아버님 눈 밖에 났다가 그이랑 관우한테 얼마나 싫은 소릴 들으라고.’
‘둘이 같이 있는 거 아직 못 보셨죠? 그 애한테 옷깃만 스쳐도 설우 눈 뒤집고 달려들 테니까 괜히 중간에 끼어서 다치지 마세요. 직원들한테도 미리 일러두고요.’
‘나야 아직 못 보긴 했지.’
‘어쨌든 고생하시겠어요, 날이면 날마다 엎어진 아침 밥상 치우시려면. 혹시 아버님 설우한테 손찌검하면, 그건 좀 알려주시고요. 내가 그 노인네 손버릇을 고쳐놓을 테니까.’
‘푸흡! 그래, 알았어.’
걱정이랍시고 해주는 충고가 의아하면서도 진심인 거 같아 긴장은 되었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다른 아이들이랑 똑같이 가르칠게요.”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차씨 집안에 순종하며 살아온 유정에겐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그래, 나가 봐라.”
“네.”
발소리를 죽이며 나간 유정이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한 강일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한 시장이 여기까진 어쩐 일로. 공무로 바쁠 시간이 아닌가.”
“후, 주희가 사고를 냈어요. 그 여자아이에게 겁을 주려다가 차로 이든을 치었다네요.”
“뭐, 뭐야?”
과일을 집으려던 포크를 내던진 성태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치다니.
“면목 없습니다. 펠리체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 아직 조용합니다만, 차 사장이 가만히 있을 거 같지 않아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왜 그렇게 무모한 짓을! 밖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웃음거리가 되는 건 물론이고 자네 지지율에 치명적일 게 뻔하지 않나.”
한남동에 들어올 설우를 못 견디게 만들 계획만 잔뜩 세워두던 성태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 멍해지는 머리를 털었다.
“전부 제 불찰이에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펠리체에서 데리고 나왔어야 했는데.”
“설우는, 아직 아무 연락 없고?”
“예.”
“한 시장, 자꾸 이렇게 허술하게 행동하면 우리도 아주 곤란해. 나랑 백 대표가 자네한테 얼마나 공들이고 있는지 모르는 겐가.”
서늘하게 얼굴을 굳힌 성태가 입술을 깨문 강일을 훑어내렸다.
화진에게 불륜 사진을 찍혀 맥없이 설우의 결혼을 허락하게 만든 걸로 모자라 또 다른 일거리를 가져온 강일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강일은 연신 고개를 처박았다.
대선이 머지않은 상황에서 차 회장과 백창석 대표를 잃는다면 순식간에 낙동강 오리알이 될 제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상하고 비참해도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전엔 그들의 아래에 꿇어야 했다.
“버르장머리 없는 손자 놈한테 또 내어줄 게 생기겠구먼.”
“차 사장이 움직이기 전에 연락해볼까요?”
“됐어. 셈이 빠른 아이니, 나부터 찾아올 거야.”
짜증이 솟구친 성태가 힘이 들어간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또다시 설우에게 한 수 접어야 할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