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56화 (56/96)

56화.

부친인 한강일 시장에게 연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주희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뭐, 뭐라고요?”

“정신병원에 갇혀 있느라 중학교 졸업도 못 했다고. 그 여자 계부가 백 대표 심부름꾼이야.”

“하!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여자랑 결혼을. 미쳤어, 단단히 미쳤다고.”

몇 달 전, 제이로 뛰어들었던 여자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맨발과 지저분한 환자복. 길바닥을 굴러다니다 왔다고 해도 믿을 법한 몰골이었다.

“죽은 친부가 CH에서 차 회장 아래 있었다고 하더라. 이해타산적인 놈이 앞뒤 분간 못하는 걸 보면 아마 그때부터 인연이 있었겠지.”

“차 회장님이 그러세요?”

“그 양반은 숨기느라 급급해. 제 집안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큰 인간인데.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닌 아픈 손자며느리가 성에 차겠어? 일단 결혼은 시켜두고 차 사장 경계가 느슨해지면 치워낼 심산이야.”

불의의 사고를 당한 부하 직원의 딸을 손자며느리로 받아들인 자비로운 조부, 라는 역할 뒤에 숨겨둔 차 회장의 본심이었다.

“결국 그 앤 고아인 데다가 정신병원에 갇혀 있던 환자라는 거네요.”

“그래, 차 사장도 제대로 콩깍지가 쓰인 거지. 그러니까 너도 이제 그만 마음 추슬러.”

추슬러? 어떻게!

마음 깊은 곳에서 또다시 불길이 치솟았다.

밑바닥 인생이었던 여자에게 설우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니 두 볼이 화끈거렸다.

온몸을 휘감은 수치스러움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비참하게 버려진 저를 조롱하기 바쁜 이들이 설우를 빼앗은 여자의 정체까지 알게 된다면. 좋은 배경을 갖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을 한심하게 여기겠지.

“만나 봐야겠어요.”

“뭐?”

“이러다가 화병으로 죽을 거 같다고요!”

고작 머리채 한 번 잡은 게 전부였다. 그것도 쌍방으로. 이렇게는 도저히 끝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모멸감과 열등감을 이기지 못한 주희는 결국 연을 만나기 위해 센터로 향했다.

‘이든, 이거 봐요! 오빠가 나한테 하트 보냈어요.’

‘이든, 우리 점심 뭐 먹어요?’

‘꽃이 이렇게 예뻐도 되는 거예요? 아, 꽃이니까 예쁜 걸까요?’

그늘 한 점 없는 얼굴이 화사한 미소를 지을 때마다 주희의 마음속에 차근차근 분노가 쌓여갔다.

가진 건 쥐뿔도 없는 여자가 설우의 비호 아래 호의호식하는 꼴을 보니 창자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눈앞에서 치우고 싶었고,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창 밖으로 노란 우비가 보이는 순간 액셀레이터를 밟은 건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다.

끼이익, 콰앙!

앞 유리까지 날아와 부딪힌 이든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된 주희가 핸들에 얼굴을 묻었다.

쾅, 쾅!

“이봐요, 당장 내려요!”

요란한 사이렌과 함께 나타난 구급차가 연과 이든을 태우고 사라지자 한숨을 돌린 펠리체의 가드들이 운전석 유리창을 마구 두드렸다.

주희의 고운 손이 두려움으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정말로 칠 생각은 없었다.

천진하게 물장난이나 치고 있는 태평한 여자에게 겁을 먹이고 싶었을 뿐이다.

화들짝 놀라 물웅덩이에 엉덩방아나 찧게 만들어 보려는 유치한 심보에서 시작된 짓이었는데.

‘알았어, 꼭 안고 잘게.’

‘사랑해.’

얼마 전 자선행사에서 들은 설우의 다정한 음색이 떠오르자 브레이크를 밟을 수가 없었다.

달려든 이든을 보고 정신을 차렸지만, 돌이키기엔 이미 늦어있었다.

“한주희 씨! 빨리 문 여세요!”

차량 등록이 필수인 펠리체에서 정체가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굳게 잠긴 차 문의 손잡이를 거침없이 당기는 덩치 큰 남자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주희를 압박했다.

떨리는 손을 간신히 움직여 휴대 전화를 찾은 주희가 강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주희야.

“아, 아빠. 도와주세요.”

-무슨 일이야.

“펠리체 안에서 사고를, 내가 차로 사람을 쳤어요.”

-너 설마 그 여자애를!

“설우 씨랑 같이 사는 이든이요. 그 남자가 차에 치였어요.”

-…….

“앞에 사람이 너무 많아요, 아빠. 나 어떡해요?”

분홍색 핸들 커버 위로 눈물방울이 툭, 툭 떨어져 내렸다.

평탄한 삶이었다. 의원 배지를 달았지만, 영향력이 거의 없던 부친은 직급이 높은 공무원과 같았다.

피아노를 치고, 방학 땐 가까운 해외에 나가 놀 수 있을 정도의 여유로움. 친구들은 그런 저를 부러워했다.

그랬던 삶이 달라진 건 권력을 탐내기 시작한 강일이 차성태 회장과 백창석 대표를 만나고 난 이후였다.

‘못 보던 얼굴이네? 누구래?’

‘뭐, 어디 의원이랑 딸이라는 거 같던데.’

‘푸하, 원피스가 저게 뭐야. 저거 재작년 디자인 아닌가?’

‘가방이랑 구두도 만만치 않은데 뭘. 어디서 빌려왔나 봐, 요즘 렌털숍 많잖아.’

‘야, 그래도 CH랑 백 대표 소개로 왔던데? 친해지긴 해야겠더라.’

강일과 함께 나가게 된 상류층 사교 모임엔 나이대가 비슷한 아이들이 많았지만, 쉽게 친해질 수 없었다.

외제차 한 대 값을 몸에 두르고 다니는 재벌가 자제들은 저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강일이 서울 시장에 당선되기 전까지 종종 굴욕적인 상황을 겪었던 주희는 자신을 무시했던 이들을 우습게 깔아보는 설우를 봤을 때 그를 꼭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너 대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해!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

-후,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일단 기다려. 알았지?

가혹했던 그 세계가 날 이렇게 만든 걸까, 아니면 내 욕심이 날 이렇게 만든 걸까.

무엇이 되었든, 절대 되돌릴 수 없을 추락이었다.

***

탁, 탁, 탁. 고요한 수술실 앞 복도에 다급한 구둣발 소리가 메아리쳤다.

연락을 받고 반쯤 정신이 나간 설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연을 찾았다.

어디, 어디 있는 거야.

초조하게 돌아가던 시선의 끝자락에 제가 골라 입힌 노란 우비가 걸려들었다.

간이의자 옆에 주저앉은 연이 보이자 숨통이 트였다.

병원으로 오는 내내 누군가 제 목을 조르고 있는 듯했다.

“정신 차려, 멍청아. 정신 차리라고.”

빨갛게 물든 작은 주먹이 빗물에 흠뻑 젖은 머리를 후려쳤다. 이까짓 통증으론 부족했다.

이내 빳빳하게 펴진 손바닥이 이미 부어있는 볼을 내려치니 거센 마찰음이 복도를 울렸다.

얼얼한 손바닥을 다시 한번 높게 든 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연아!”

미끄러지듯 달려든 설우가 허공에 떠 있는 손을 낚아챘다.

“오, 오빠. 이든이요, 이든이 피가 너무 많이 나서….”

“알아, 괜찮아. 괜찮을 거라고 했어. 너 얼굴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붉게 부어오른 두 볼에 드문드문 검푸른 멍 자국이 생겨나고 있었다.

“으흑…. 혼자 잠들면, 우윽, 안 된다고 했는데. 자꾸만 졸려서 그랬어요, 흐윽….”

의사들에게 둘러싸여 수술실로 들어가는 이든을 보고도 졸음이 밀려왔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쥐어 봐도 속절없이 감기는 눈꺼풀을 뜯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자해는 설우가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하….”

말문이 막혔다. 눈물과 빗물이 섞인 얼굴이 만신창이였다.

“나 자기 싫어요, 우흑… 이든을 봐야 하는데.”

“일단 옷부터 벗자, 다 젖었잖아. 지금 네 몸이 얼마나 차가운 줄 알아?”

애끓는 소리가 목을 긁었다.

심장이 반으로, 그리고 다시 반으로.

조각난 부분을 메우기 무섭게 상처가 덧대어진다.

연을 노란 병아리로 만들어두고 펠리체를 나설 때까지만 해도 피실피실, 헛웃음이 새어 나왔었는데.

반나절 만에 또다시 지옥으로 쑤셔 박혔다.

이 작은 아이가 견딜 수 있는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이라도 하는 걸까.

핏방울로 얼룩진 우비를 벗기고 제 코트를 입혀준 설우가 찬 바닥에 앉은 연을 일으켜 세웠다.

“나 이제 센터도 안 가고 집에만 있을래요.”

“네 잘못 아니야. 내 잘못이야.”

“오빠가 왜요.”

“그냥 전부 내 탓이야.”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들은 비수가 되어 돌아온다.

“그래도 안 갈래, 너무 무서워요.”

눈에 보일 정도로 발발 떨리는 몸이 힘없이 늘어졌다.

끝내 이기지 못할 잠이 연을 집어삼켰다.

꼬박 이틀이었다.

생기가 넘쳐흐르던 금안은 오래도록 아무것도 담지 못했다.

허기가 지면 일어나 밥을 씹어 넘기고,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일어나 움직이는 게 전부. 그 짧은 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은 암흑이었다.

자고, 자고, 또 자고. 피가 마르는 설우를 뒤로한 채 연은, 고집스럽게 눈을 감았다.

-야, 꼬맹. 스테이크 먹으러 갈까?

꿈속에 나타난 이든은 몇 번이고 차에 치였고.

-우리 공주님이 오늘은 또 왜 이렇게 뾰로통하실까.

-연아, 오빠랑 같이 서울 구경 가자!

밝은 목소리로 저를 부르는 재호와 준 역시 그날, 그 시간. 전복된 차 안에서 피를 쏟아내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작은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길을 따라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잊었던 기억들이 따라붙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잊고 살지 않았냐고. 제게서 버려진 시간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아무리 잊으려 발버둥을 쳐도, 언젠간 돌아올 기억이었다.

“오빠.”

“배고파? 아니면 화장실? 이제 그만 일어나주면 안 될까?”

“이든은요?”

피폐하게 말라 있던 설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틀 만에 처음, 연이 이든을 찾았다.

“이든은 괜찮아, 수술도 잘 끝났고. 검사할게 남아서 아래층에 내려갔어. 네가 잠만 자서 이든이 엄청 걱정했어.”

“아픈 건 이든인데 왜 날 걱정해요. 바보 같아.”

“다 잔 거지, 또 잘 거 아니지?”

“네, 다 잤어요.”

“다리 좀 주물러 줄게. 잠 다 깨면 펠리체로 가자.”

연이 자는 동안, 설우는 잘 수 없었다.

붉게 충혈된 눈을 여러 번 깜빡인 설우가 이틀 동안 제대로 걷지 않아 힘이 빠졌을 다리를 가볍게 주물러 주었다.

“오빠.”

“응.”

“그 몸매 좋은 미국 언니랑은 언제 헤어졌어요? 이름이 뭐였지, 세리? 세라?”

“세이라. 헤어지긴 뭘 헤어져, 걘 그냥 잠깐…!”

“이제 보니 오빤 금발을 좋아하나 봐요. 나도 그래서 좋아해요?”

돌아온 기억을 에둘러 표현하는 연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천 갈래, 만 갈래로 저를 찢는 사고의 기억은 잠시 밀어두고, 까맣게 잊고 있었던 차설우를 떠올린 것에 집중하고 싶었다.

“기억이, 난 거야? 전부?”

“날 한 손으로 안고 다니던 오빠가 기억나면 전부 나는 거겠죠? 내가 정말 하나도 안 자랐나 봐. 오빤 아직 날 한쪽 팔로 안고 다니잖아요.”

근데 너 왜 그렇게 예쁘게 웃어.

아무렇지 않은 듯, 이틀 전과 같이 천진하게 웃는 연을 보는 설우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갔다.

화내고 절망하고 울부짖는 게 정상이었다.

가족을 제대로 떠나보내지도 못했고, 잃어버린 시간은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나라도 붙잡고 원망해야지, 연아. 웃을 게 아니라.

“내가, 널 너무 늦게 찾아서 미안해.”

“어떻게 찾겠어요, 내가 선우연을 잊고 살았는데. 기분이 이상해요. 15살에서 하룻밤 사이에 성인이 된 것 같아요. 아아,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다. 난 오빠랑 잤고, 앞으로도 자야 하니까 미성년자면 안 되지.”

“잔망스러운 말버릇은 여전하네.”

“15살로 돌아간 게 아니라 15살 때까지 기억이 돌아온 거뿐이거든요. 달라진 건 없다고요.”

“정말 괜찮은 거야? 너 괜히….”

“오늘 딱 하루만. 오늘 하루는 그냥 오빠랑 이렇게 웃을래요. 슬픈 건 내일부터 할게요.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이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그리고 오빠가 나보다 더 슬퍼할 테니까.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이든의 사고에 연이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저를 보며 힘들었을 설우도.

찬란했던 어린 시절과 함께 심장을 후벼파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자신도.

그저 웃으며 쉬어가고 싶을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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