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평창동 김 전무를 포함하여 여러 군데의 사채를 끌어다 성진 물산의 주식을 사들인 세희는 눈이 벌게진 채로 가게를 돌아다녔다.
장세희는 설우와 첸이 짜놓은 판 안에서 그들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었다.
10배가 오를 거라는 투자모임의 정보를 철석같이 믿은 세희와 연주는 매수가 늦어 이미 제법 오른 주식을 시장가 그대로 구매했다.
상승세를 타던 주가는 머지않아 하락하기 시작했고, 투자금 3억은 순식간에 반 토막이 났다.
“오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무조건 오른다며!”
-…아, 뭐야. 아침부터.
뭐? 벌써 11시가 넘었는데 아침?
휴대 전화 너머로도 술 냄새가 풍길 것 같은 남자친구 성원의 웅얼거림에 연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계속 떨어져, 오빠. 오를 기미가 없다고.”
-좀 기다려 봐. 곧 오르겠지.
모녀는 피가 마르는 반면에 성원은 지나치게 태연했다.
오르면 좋고, 아니면 말고. 전 재산을 쏟아부은 그녀들과 다르게 성원에게 주식 투자는 그저 용돈을 불릴 한 가지 방법이었다.
“정말 오를까?”
-정보는 확실했다니까. 작전 주에 말려서 매도 타이밍 놓친 것만 아니면 오를 거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 몰라, 피곤해. 저녁에 아파트로 와. 저번에 오빠가 사준 거 있지? 꼭 챙겨 입고. 끊는다.
제대로 된 답은 주지도 않고 제 할 말만 뱉은 성원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아악! 진짜 미치겠네.”
“연주야, 뭐래?”
“기다려보래. 확실히 오를 거라고.”
“엄마 정말 불안해.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오르겠지, 오를 거야. 근데 아저씨는 대체 어디 간 거야? 돈 벌러 갔어?”
“아니, 다미 잡아 오겠다고 나가서 연락이 안 돼.”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상황에 나쁘게만 흘러가니 저를 말리던 상철의 모습이 떠올라 그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세희의 손에서 화려한 네일아트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손톱을 깊게 깨문 탓에 피가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
그만큼 두려웠고, 의지할 사람이 절실했다.
선우재호를 만나기 전의 시궁창 같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제발.”
눈을 감아도 잠을 잘 수 없는 상태에 이른 세희가 늦은 기도를 거듭했지만, 상철은 돌아오지 않았고 반 토막이 났던 주가는 또다시 반으로 쪼개져 세희가 투자한 돈은 끝내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 연을 밀어 넣었던 지옥이 수십 배로 깊어져 제게 돌아오고 있었다.
***
넓은 매트리스 위에 설우가 없는 것을 느낀 연이 발버둥을 쳤다.
분명 눈을 감고 있는데 환한 방안이 눈앞에 선연했다.
오빠가 날 이렇게 묶어두고 갈 리가 없는데.
저를 가둔 끈에서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이 점점 더 거세졌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순식간에 낡은 침대로 바뀌고, 손목과 발목을 감싼 부드러운 천은 사슬이 메인 가죽 족쇄가 되어 살갗을 파고들었다.
여긴 우리 집이 아니야. 갈래, 풀어줘!
카앙, 캉. 손발을 흔들 때마다 쇠붙이들이 부딪혀 울리는 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나 좀 꺼내줘. 꺼내주세요, 제발.
“읏…!”
낮은 신음이 방안을 울리자 연의 눈동자가 초점을 되찾았다.
“오빠?”
“응, 오빠 여기 있어. 꿈이야, 괜찮아.”
설우가 익숙하게 연을 달랬다.
“오빠 얼굴이… 내가 그런 거예요?”
설우의 턱선을 타고 그어진 붉은 실선을 발견한 연이 입술을 물었다. 깊게 긁힌 곳은 핏방울까지 맺혀 있었다.
낑낑거리는 연을 풀어주려다 마구잡이로 흔드는 손을 피하지 못해 생긴 상처였다.
“아니. 어제 이든이랑 장난치다가 긁힌 건데? 네가 일찍 자서 못 본 거야.”
“나 그 정도로 바보 아니거든요. 정말 미안해요.”
“하나도 안 아파. 네가 새긴 흔적 같아서 좋다고 하면 너무 미친 거 같을까?”
미처 풀지 못한 마지막 억제대까지 벗겨준 설우가 씩, 웃으며 연의 위로 올랐다.
“지금 오빠가 야해 보이면 나도 미친 거 같겠죠? 잘생긴 얼굴에 상처나 만들고 하는 소리가 뭐 이래. 나 진짜 염치없다. 내려와요, 약 가지러 갈래요.”
“출근하면 저녁때까지 못 보는데, 5분만.”
연의 허락은 필요치 않았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른 입술을 삼킨 설우는 이른 아침에 어울리지 않는 진한 키스를 5분이 넘도록 이어갔다.
연을 괴롭힌 악몽도, 제 얼굴을 할퀸 죄책감도. 헐떡이는 숨에 묻혀 모두 잊길 바랐다.
“…하아.”
“이제 제법 잘하네. 더 할까?”
“네!”
한결같이 재빠른 대답이 돌아왔다.
“오늘 수업은 뭐야?”
“꽃꽂이랑 도예요. 이든 생일 선물 만들 거예요.”
“꽃만 해줘, 도예는 좀.”
지난 번 수업 때 만들어온 그릇도 컵도 아닌 진흙 덩어리를 떠올린 설우가 짓궂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별로였어요?”
“푸흡, 장난이야. 네가 주는 선물은 뭐든 좋아할걸.”
“예쁘게 만들어야지.”
“자지 말고 기다려? 같이 생일 축하 노래도 부르고, 파티도 하자.”
“자고 있어도 무조건 깨워주세요! 물에 빠뜨려서라도. 이든 꼭 축하해주고 싶어요.”
굳은 결심이 박힌 눈에 입을 맞춘 설우가 키스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열이 올라있는 볼에도 입술을 찍었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그런 짓을 해. 무리한 부탁은 사절이야.”
잔머리를 넘겨주는 살가운 손길이 연의 이마에 닿을 때마다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마음을 가득 메운 사랑을 당장 꺼내놓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처럼.
그녀가 깨어있는 1분 1초가 아쉬운 설우는 늘 부족한 사랑을 쏟아냈다.
“알았어요, 안 자고 기다릴게요.”
“응, 맛있는 거 많이 사 올게.”
“이제 끝이에요?”
“아직. 딱 1분만 더해주고 씻으러 갈게. 사랑해.”
“나도요.”
서로를 원하는 입술이 다시 겹쳐졌다. 핑크빛으로 가득한 아침이었다.
아침부터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던 빗물은 센터에 갈 시간에 맞춰 우수수 쏟아지는 장대비로 변했다.
“이든, 설우 오빠 얼굴에 생긴 상처 봤어요?”
“응, 봤지.”
“그거 내가 그랬어요. 곧 결혼식인데, 안 나으면 어떡하지.”
“메이크업하면 하나도 안 보여.”
“손톱 좀 진작 자를걸. 난 왜 이 모양일까요.”
“야, 꼬맹. 내 생일인데 이렇게 우울하기 있어?”
날씨도 우중충한데.
“아니, 우울한 게 아니고요. 오빠 얼굴에 흉질까 봐 걱정돼서 그렇죠.”
“울상인데 또 왜 이렇게 귀엽고.”
진득한 습기와 바짓단을 적시는 물웅덩이 때문에 구겨졌던 얼굴이 제 손을 잡은 병아리 한 마리를 보고 헤벌쭉 풀어졌다.
허벅지 아래로 내려오는 노란 레인코트에, 얇은 종아리를 감싼 노란 장화. 대충 씌워 놓은 후드 모자 아래로 밝은 금발이 나풀거렸다.
설우가 출근하기 전 만들어 놓은 노란 병아리였다.
“이든은 꿈 안 꿔요?”
“아주 가끔?”
“난 되게 자주 꾸는데. 내 꿈 가져가요, 좋은 꿈만 줄게.”
“나쁜 꿈도 같이 줘, 내가 대신 다 꿔줄게. 난 싸움도 잘하고 꼬맹이 너보다 훨씬 건강하니까 괜찮을 거야.”
“으음, 안 돼요. 나쁜 꿈은 아무한테도 안 줄 거예요, 우앗!”
입구에 도착해 이든이 검은색 우산을 적신 빗물을 털어내는 동안 타박, 타박 계단을 뛰어오르던 연이 옆으로 휘청였다.
“조심해. 너 다치면 알지? 나 설우 형한테 죽어. 생일날 죽고 싶진 않다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반사 신경을 가진 이든은 어렵지 않게 연을 붙잡아 주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잠드는 연을 가장 많이 받은 건 설우가 아닌 이든이었다.
장난스럽게 웃어넘기지만 이럴 때마다 마른침이 절로 넘어갈 정도로 등줄기가 시렸다.
“죄송해요. 미끄러운 줄 몰랐어요.”
“안 다쳤으면 됐어, 들어가자.”
우산을 반대 손으로 바꿔 든 이든이 다시 연의 손을 잡았다.
센터 로비에 삼삼오오 모여있던 입주민들은 여느 때처럼 이든과 함께 들어오는 연을 힐긋거렸다.
꼭 센터에 나오던 첫날과 같은 열띤 마중이었다.
“아줌마들이 다시 나한테 관심이 생겼나 봐요. 너무 눈에 띄게 입었나?”
“난 왜인지 알 거 같은데.”
시야가 넓은 이든은 사람들 속에 섞인 한주희를 발견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연도 이든을 따라 그녀를 찾아냈다.
저 여자는 무슨 생각으로 여길 나온 거야. 다 같이 남의 입에 오르내리자는 뜻인가.
주희를 노려보는 이든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 분 펠리체 살아요?”
“응. 설우 형이 제대로 실수했지.”
본인이 결혼을 깰 줄은 몰랐을 테니.
“한 번도 못 봤잖아요.”
“마주칠 일이 없었지. 저 여자가 오늘처럼 센터에 나오지 않는 이상.”
주희의 사나운 시선이 연과 이든에게, 아니 그들이 맞잡은 손을 향해 움직였다.
“수업을 같이 듣진 않겠죠?”
“글쎄. 수업이 겹친다면 저 여자가 우릴 따라오는 거겠지.”
센터에선 같은 타임에 열 가지가 넘는 다른 수업들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따라오지 않는 이상 같은 수업을 듣는 건 불가능했다.
“가요, 이든. 오늘은 도예가 먼저예요.”
연이 이든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어서 자리를 피하지 않으면 그가 주희의 머리카락을 모조리 뜯어낼 것만 같았다.
따라오지 않길 바랐는데.
곧바로 시작된 도예 수업은 물론이고 휴식 후에 이어지는 꽃꽂이 수업에도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주희 덕분에 연과 이든은 동물원의 원숭이가 되어야 했다.
수업은 제쳐두고 침묵 속에 이어지는 치정극을 구경하기 바쁜 입주민들 때문에 꽃꽂이 강사 역시 곤란해 보였다.
“이건 무슨 꽃이래?”
“리시안셔스요. 되게 예쁘죠?”
“예쁘네. 활짝 핀 게 우리 집 막둥이 같아.”
“진한 보라색 하나, 연보라색 하나, 하얀색 하나.”
저를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이들에게 진작 이골이 난 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꽃다발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또 형 줄 거야?”
“그럼요.”
“나 생일인데.”
“이든 선물은 백화점에서 잔뜩 사 왔어요!”
깜짝 선물은 아니었는데. 서운한 기색을 뿜어내는 이든을 보니 장난을 치고 싶었다.
파티할 때 안겨주면 엄청 좋아하겠지.
기뻐할 이든을 상상하니 마음이 들떴다. 매일 자신을 돌보느라 개인 시간이 적은 이든에게 더 크고, 더 예쁜 꽃다발을 만들어주고 싶은 작은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즐거울 생일 파티로 머릿속이 가득 찬 연은 입술을 꾹 깨문 채 저를 노려보다 밖으로 나가버리는 주희를 볼 수 없었다.
커다란 꽃다발을 품에 안은 연과 함께 센터에서 나온 이든이 허전한 손을 보며 소리쳤다.
“아, 우산!”
수업을 받는 동안 빗줄기는 잦아들었지만, 완전히 그친 것은 아니었다.
“비가 그쳐야 정원에서 놀 수 있겠죠?”
“안 그쳐도 놀 수 있어. 천둥은 안 쳐서 다행이네. 무섭다고 한참 징징거렸을 텐데.”
“아니거든요! 이제 조금 덜 무서워해요.”
“센 척은. 같이 갔다 올까?”
“아뇨. 꽃에 물 주고 있을게요, 벌써 시든 거 같아.”
“그냥 비 맞고 놀고 싶다고 해.”
“금방 다녀올 거죠?”
“3분도 안 걸려. 안 졸리지?”
“3분 안엔 절대 안 자요.”
확신에 찬 대답이었다. 로비 계단을 내려간 연이 물웅덩이를 신나게 밟아대는 것을 보며 웃던 이든이 우산을 찾으러 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말처럼 3분도 채 걸리지 않은 시간이었다.
우산을 감싼 비닐을 벗겨내며 나온 이든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비를 맞고 있는 연을 확인했다.
저러다 감기 걸리겠네.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걸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두꺼운 이불을 돌돌 감싸주면 답답하다 신경질을 부리겠지.
“이든, 빨리요!”
멀찍이 선 노란 병아리의 손짓을 보던 이든이 우산을 펼칠 때였다.
“?”
자택으로 접어드는 언덕길에 서서 와이퍼를 돌리고 있던 차가 요란한 배기음을 터뜨리며 연을 향해 돌진했다.
“왜 그래요, 이든?”
빗길에 미끄러지는 타이어 바퀴 소리에 연의 목소리가 먹혀들어 갔다.
설마 연이한테 가는 거야?
연은 빗속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노란 우비를 입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차는 지금, 사람이 서 있는 것을 알면서 달려오는 것이었다. 들이받을 작정으로.
“연아!”
안 돼, 안 돼!
끼이익, 콰앙!
우산을 집어 던지고 달려 나와 연을 밀어버린 이든이 범퍼 위를 굴렀다.
거침없이 속력을 높여가던 차는 마지막 순간에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가속이 붙어 멈추지 못했다.
선명하게 남은 스키드마크 위로 빗물이 툭, 툭 떨어져 내렸다.
“…으윽.”
“이든!”
아스팔트에 엎어졌던 연이 까무러칠 듯 소리를 지르며 바닥을 뒹구는 이든에게 다가왔다.
흐르는 빗물에 검붉은 피가 섞여들었다.
“크윽….”
“이, 일어나지 마요!”
팔꿈치로 땅을 짚으며 일어나려 애쓰던 이든이 움직일 수 없다고 비명을 지르는 몸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엎어졌다.
“어, 어떡해. 도와주세요. 이든 좀, 으흑… 도와주세요!”
“뭐야, 1동 아니야?”
“세상에, 피 좀 봐.”
“말도 안 돼, 일부러 쳤나 봐. 그거 아니면 펠리체 안에서 어떻게 교통사고가 나!”
센터가 마치는 시간. 순식간에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점점 커지는 웅성거림은 이명이 되어 귓가를 울렸다.
흐릿해지는 정신을 악을 쓰고 부여잡은 이든이 눈을 부릅떴다.
“연아.”
“우윽… 이든, 아, 아저씨들 오고 있어요. 조금만 참아요.”
펠리체의 가드들이 우르르 달려오는 모습을 확인한 연이 힘겹게 뻗은 이든의 손을 잡았다.
“절대… 안 돼.”
“네?”
말을 마치지 못한 이든이 인상을 찌푸렸다.
온몸의 장기가 꼬여 드는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져 숨쉬기가 버거웠다.
하아, 하아. 거칠어지는 이든의 숨소리를 따라 연의 울음소리도 커져갔다.
혼자 두고 눈을 감을 수가 없는데. 어떡하지, 형.
“절대, 혼자, 잠들면… 안 돼.”
“아, 아아! 아니야, 안 돼. 이든, 이든!”
버틸 만큼 버틴 이든의 눈꺼풀이 결국 내려앉자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펠리체를 울렸다.
사방에 흩뿌려진 보라색 꽃잎이 거세지는 빗줄기를 타고 떠내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