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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54화 (54/96)
  • 54화.

    짧고 굵게 세 곳만. 약속을 잡을 때부터 설우가 강력하게 강조한 내용이었다.

    연이 잠들기 딱 좋은 시간인 것도 그렇고 첸과 이든 없이 외출을 하면 가시 돋친 고슴도치처럼 신경을 잔뜩 곤두세워야 하는 자신도 문제였다.

    즐거워할 연을 위해 수락한 쇼핑이었지만, 안락한 호텔 스위트룸을 두고 왜 백화점을 택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나마 사람이 없으니 다행이지.

    명품관으로 이동하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늘어선 직원들이 깍듯하게 허리를 접었다.

    “다음 엘리베이터 도착하면 뒤따라 가겠습니다.”

    “아뇨, 여기까지만 하죠.”

    설우는 단호하게 용범이 준비한 극진한 대접을 거부했다.

    “예? 하, 하지만….”

    용범이 화진의 눈치를 살폈다. 도움을 요청하는 듯했다.

    “성가신 거 질색입니다. 쇼핑하는데 이렇게 우르르 몰려다닐 필요 없잖아요? 각자 일보세요.”

    “그래요, 구 지점장.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마음만 받을게. 보다시피 까칠해서.”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일개 지점장이 계열사 대표가 아닌 기업의 총수를 마주하게 되는 일은 흔치 않았다.

    화진에게 제 존재를 각인시킬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머뭇거리건 용범은 정수리에 꽂히는 고압적인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한걸음 물러났다.

    탕, 묵직한 문이 닫히자 설우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손.”

    “여기요.”

    “안 졸려?”

    “쌩쌩해요.”

    엘리베이터 한편에 기댄 설우가 두 손을 내밀었다.

    쌔쌔쌔라도 하겠다는 건가. 맞잡은 손을 흔드는 둘을 바라보다 설우와 눈이 마주친 세인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돌렸다.

    화진이 즐겨 찾는 브랜드 위주로 코스를 구상해온 세인은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동안 현진백화점 8층에 있는 유명 브랜드들을 차분히 되짚었다.

    쇼핑의 주체가 화진이 아닌 연이라고 했으니 고심해 골라두었던 매장은 전부 쓸모가 없었다.

    어떤 스타일을 좋아했었더라.

    “쇼핑 얼른 끝내고 밥 먹자. 연이 뭐 먹고 싶어?”

    “전 아무거나 괜찮아요. 오빠가 사주는 건 전부 맛있으니까.”

    “나도 너랑 먹는 건 전부 맛있어.”

    스위트룸 쇼핑 때의 기억을 더듬던 세인은 사랑놀음에 푹 빠진 둘을 다시 힐긋거렸다.

    8층에 도착하기 전에 그들을 안내할 세 곳의 매장을 결정해야 하는데. 시선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받아내는 사람이 녹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달콤한 사랑이 듬뿍 담긴 눈동자였다.

    일면식도 없는 남이 보아도 그가 여자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차설우의 대단한 집안에서 손바닥 뒤집듯 결혼을 엎으면서까지 그의 연인을 받아들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랑이 무섭긴 무섭네.

    「8층입니다」

    “이쪽으로 가시죠.”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한 채 8층에 도착했지만, 세인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섰다.

    기다란 복도를 걸으며 어지러운 머릿속을 비우니 옷과 쇼핑에 익숙하지 않아 했던 연이 떠올랐다.

    심지어 제 발 사이즈도 모르는 상태였지.

    그날도 초이스는 전부 차 사장이 했으니 이번에 역시 그가 즐겨 찾는 브랜드로 안내하면 될 것 같았다.

    단순 명쾌한 결론을 내린 세인은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매장입니다.”

    왕의 간택을 기다리는 후궁들처럼 기대와 긴장을 품고 줄지어 서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솟구치는 환호를 꾹 눌러 참은 매니저가 재빨리 달려왔다.

    매출과 성과급이 비례하는 시스템에서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직접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랜드 매니저 황태상입니다. 안쪽 룸으로 모시겠습니다.”

    세인과 화진, 성진이 차례로 들어서고, 설우와 연이 뒤를 따랐다.

    일행의 가장 끝자락에서 설우의 품속에 숨겨져 있던 여자를 뒤늦게 발견한 매니저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백화점의 밝은 조명 아래 연이 가진 색은 화려하게 빛났다.

    어쩌면 시선이 끌리는 게 당연했다.

    “뭘 그렇게 빤히 봅니까.”

    “죄, 죄송합니다.”

    잠시 넋을 놓았던 태상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어우, 또 시작이네. 야, 저 미친놈 좀 어떻게 해 봐. 대체 왜 저런다니?”

    괜히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자고 해서는. 내 발등을 내가 찍었지.

    세 번째 매장에 들어서기 무섭게 작은 소란이 벌어지자 화진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연이가 워낙 남다르니까 더 예민한 거겠지. 아프기도 하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겨우 세 군데 쇼핑하면서 조용히 넘어가는 매장이 없어! 저게 정상이야?”

    0과 1밖에 모르는 컴퓨터 회로도 아니고.

    제 여자를 뺀 나머지는 전부 적으로 인식하는 수준이었다.

    “하하하! 왜, 난 재미있는데.”

    짜증이 만연한 화진과 다르게 성진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연에게 잠시라도 머무는 시선, 쇼핑 중 실수로 생기는 작은 부딪힘. 무엇 하나 가볍게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괜찮아요, 한두 번도 아닌데. 계속 화내면 주름 생겨요.”

    “대놓고 쳐다보는 걸 어떻게 참아.”

    “그럼 결혼식 땐 어떡해요? 손님 엄청 많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닳아 없어질까 걱정이야.”

    면사포라도 씌워 가려야 하나.

    친가와 외가 모두 나라를 흔들 만큼 큰 영향력을 가진 대기업인 탓에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성대한 결혼식이다.

    특히 차 회장에겐 부와 명예를 맘껏 뽐낼 수 있는 좋은 명분이었다.

    비록 마음에 차지 않는 신붓감이라도 제 핏줄의 결혼식은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화려해야 했다.

    피곤한 충돌 없이 빠르게 결혼식을 마치기 위해 설우가 한발 양보한 부분이었지만, 그 많은 하객이 가장 아름다울 연을 보게 되는 건 탐탁지 않았다.

    “안 닳아요. 내가 맨날 훔쳐보는 데 오빠도 안 닳잖아요.”

    “넌 대놓고 보면 되는데 왜 훔쳐봐.”

    “원래 대놓고 봐요. 오빠 일할 땐 방해하면 안 되니까.”

    “넌 뭐든 된다니까.”

    일행이 들어간 룸 앞에 잠시 멈춰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구경하던 설우가 참지 못하고 쪽쪽, 입술에 뽀뽀를 했다.

    “나 입술이 너무 말라서 좀 별로죠?”

    “아니. 안 말랐어, 촉촉해. 그래서 계속하고 싶은데 할까?”

    “아뇨! 지금은 안 되죠. 우리도 빨리 들어가요. 어머니랑 삼촌 기다리시겠다.”

    “그래. 이든 것도 몇 개 골라.”

    “이든이 사다 달래요?”

    “곧 이든 생일이야, 생일선물.”

    “와, 진짜요?”

    생일. 연에겐 참 낯설고 먼 기념일이었다.

    본래 제 생일은 물론 권다미의 생일 역시 알지 못했다.

    언젠가 스치듯 본 적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잊혀졌다.

    어차피 갇혀 있었고, 단 한 번도 축하받지 못했으니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응, 네가 골랐다고 하면 더 좋아할 거야.”

    “네! 그럼 열심히 골라 볼게요.”

    선우연의 생일은 언제냐고 물으려던 그녀는 달싹이던 입을 꾹 다물었다.

    왠지 이야기를 꺼내면 설우가 슬픈 표정을 지을 것만 같다.

    기억도 없는데 생일은 알아서 뭐해. 때가 되면 오빠가 알려주겠지.

    “왜, 졸려? 안아줄까?”

    “아직 괜찮아요.”

    “평소보다 많이 돌아다녀서 걱정돼.”

    빠져나온 잔머리를 말끔히 넘겨주는 커다란 손을 잡고 방긋 웃은 연이 안심하라는 듯 힘차게 그를 끌어 안으로 들어갔다.

    쇼핑을 마치고 근처 고깃집으로 들어온 이들은 편한 좌식 룸을 선택했다.

    “이든이랑 이것저것 배우고 있다며. 어때, 재밌어?”

    “네, 재미있어요.”

    연을 위해 잔뜩 주문한 한우가 나오기 전, 설우가 챙겨준 육회를 집어 먹던 연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뭐가 제일 재미있는데?”

    쇼핑 내내 이어지는 설우의 날 선 행동에 진절머리가 난 화진이 벽에 기대어 멘탈을 바로잡는 동안 성진이 대화를 이끌었다.

    “음, 사실 다 재미있어요. 각자의 매력이 있거든요.”

    “하하하, 매력?”

    “네, 꽃꽂이는 되게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라 집중하기 좋아요. 예쁜 꽃들 보면서 오빠 생각도 하고. 이든이 방해를 하긴 해요. 장미 만지다가 자꾸 가시에 찔렸다고 징징거리고 자기가 손질해야 할 꽃들을 전부 저한테 떠민다니까요.”

    “이든이랑 상극인 수업이네. 걔는 워낙 불같잖아. 난 사실 설우랑도 오래 못 살 줄 알았어. 얜 완전 얼음이잖아? 다른 건 또 뭘 하는데?”

    연의 재잘거림이 흥미를 끌었는지, 화진이 슥 앞으로 다가왔다.

    “골프도 배워요. 근데 저는 소질이 없나 봐요. 제가 아직도 헛스윙을 하는데 선생님이 그럴 때마다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저보다 더 안타까워하세요.”

    “괜찮아, 하다 보면 늘어.”

    설우가 정수리를 톡톡, 두드려주자 연이 히죽 웃어 보였다.

    “골프장에 유독 나쁜 아줌마들이 많긴 해요. 오빠 내가 저번에 말했죠? 선생님 엉덩이 만진 아줌마. 아니, 며칠 전 수업에선 다른 선생님 엉덩이를 만지는 거예요!”

    “그런 건 왜 자꾸 봐.”

    “눈앞에 보이는걸요. 이든이 눈을 가려주긴 했어요.”

    “여러 가지 보면서 나쁜 물도 들이는 거지.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없다잖아.”

    “이건 나쁜 물 정도가 아니잖아요. 아깐 연이가 투명하고 맑아서 좋다더니 갑자기 나쁜 물을 들이라고요?”

    “티 나게 흑심 품는 애들보단 맑은 게 낫고, 지나치게 맑은 것보단 적당히 흐린 게 낫다는 거지.”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을 듣던 설우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섰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연이는 예쁘고 좋은 것만 보고, 듣고, 느끼게 할 겁니다.”

    “너야말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네 주위엔 예쁘고 좋은 것들보다 못생기고 나쁜 것들이 많은데 그게 네 마음대로 되겠니? 네 할아버지부터 이겨 먹고 그런 말을 해라.”

    “정답게 밥 좀 먹자. 성질머리 똑 닮은 모자 아니랄까 봐 툭하면 싸워.”

    뜬금없이 튀어나온 차 회장 이야기에 빈정이 상한 설우가 인상을 찌푸리자 성진이 중재에 나섰다.

    “걱정 마세요. 최대한 빨리 이겨 먹고 나올 테니까.”

    “그 노인네 혀에 독이 바짝 스몄어. 얘가 착해서 웃어넘기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러니까 제가….”

    “오빠.”

    “응, 연아 잠깐만.”

    “나 졸려요.”

    화진과 언쟁을 벌이느라 정면만 바라보던 고개가 순식간에 연에게 돌아갔다.

    겨우 육회 몇 가닥 밖에 못 먹였는데.

    “이런, 배고파서 어떡해. 밥 먹고 자야 하는데.”

    이미 반쯤 감긴 눈엔 가망이 없어 보였다.

    “일어나서 먹을게요, 이따 봐요….”

    느릿하게 감았다 뜨던 눈꺼풀이 완전히 닫히자 어깨로 떨어지는 작은 머리를 받친 설우가 조심스럽게 제 허벅지 위로 올려주었다.

    -주문하신 생갈비와 등심 놓아드리겠습니다.

    마블링이 이리저리 뻗어있는 한우가 두 접시를 가득 채워 도착했지만, 신나게 먹어 치울 연은 색색 숨소리를 내기 바빴다.

    “이래서 매번 안고 돌아다니는 거니?”

    사진과 기록에서 본 증상을 코앞에서 마주한 화진이 당황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연과의 대화에 푹 빠졌던 성진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껏해야 회사 지하에서 올라갈 때, 아주 가끔 같이 외출할 때뿐인데 매번 사진이 찍히더라고요. 몇 번 나가 놀지도 못하는 애를 왜 그렇게 찍어 대는지.”

    “상태는 어떤 거야, 호전은 되고 있는 거야?”

    “좋진 않아요.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중이죠.”

    평온하게 잠든 연의 얼굴로 애틋한 눈길이 내려앉았다.

    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설우가 결국 그녀를 안고 일어났다.

    “가려고?”

    “네, 편히 재워야겠어요. 드시고 가세요.”

    “여기 소 괜찮으니까 집에 가서 먹여. 펠리체로 몇 팩 보내 놓을게.”

    “고마워요, 외삼촌. 가볼게요, 엄마.”

    “그래.”

    화진의 짧은 대답을 끝으로 설우가 룸을 나서고, 성진은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종알거리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를 맴돌았다.

    “매일 저런다는 거지?”

    “아마도.”

    “웃는 게 참 예쁘던데. 딱하기도 해라.”

    성진이 괜스레 집게를 만지작거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떠들썩하게 시작한 식사 자리엔 고요한 침묵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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