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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53화 (53/96)
  • 53화.

    연에게 했던 말대로 설우는 10시가 되기 전에 펠리체로 돌아왔다.

    “왔어?”

    “연이는?”

    “약 먹고 누운 지 한 시간쯤 됐나. 자는 거 같은데? 조금 전까지 계속 톡 보냈거든.”

    소파에 앉아 긴 다리를 테이블까지 쭉 뻗은 첸과 이든은 캔맥주를 들고 영화를 보는 중이었다.

    휴대 전화를 처음 접하고 신이 난 연은 쉬지 않고 메시지를 보냈다. 끊임없이 진동하던 휴대 전화가 조용한 걸 보니 잠이 든 모양이었다.

    “톡?”

    “형 금방 온다고 해서 안 묶었어. 휴대 전화 가지고 열심히 놀더라.”

    “잘 때까지 옆에 좀 있어 주지.”

    “당연히 있어 준다고 했지. 꼬맹이가 혼자 잘 거라고 나가랬어. 은근히 고집부린다니까.”

    시원한 맥주를 모조리 털어낸 이든은 새로운 캔을 따 입에 부었다.

    “야야, 천천히 좀 마셔. 항아리야, 뭐야.”

    “맥주로 치사하게 굴 거야?”

    “다섯 캔 밖에 안 남았다고.”

    영화는 이제 막 시작했는데. 빠른 속도로 늘어가는 빈 깡통을 못마땅하게 보던 첸이 이든을 타박했다.

    “설우 형한테 사다 달라고 할걸.”

    “그러니까. 이렇게 많이 처마시면서 그 생각이 왜 이제야 나냐고.”

    “모자라면 뭐 시켜 먹으면 되지! 맥주도 같이 시키고.”

    “되겠냐?”

    첸이 소파 옆에 삐딱하게 선 설우에게 턱짓을 했다.

    “연이 자는 데 시끄럽게 하지 말고 있는 거나 먹어. 위스키 먹든지.”

    “요즘 우리가 마트에 뜸했나 봐. 꼬맹이 간식도 거의 다 떨어졌어.”

    “내일 갈까?”

    “시간 되면. 첸, 성진물산 주식은 언제 풀린다고?”

    “다음 주 월요일.”

    “장세희 잘 지켜봐, 돈 털리고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이든, 넌 내일 권상철한테 가 봐. 물도 주지 말고 잠도 재우지 말라고 했으니 지금쯤 제정신 아닐 거야. 네가 가서 적당히 살려두고 와.”

    듣기만 해도 부아가 치미는 두 개의 이름이었다.

    대충 던져 놓은 빈 맥주캔처럼 눈살을 찌푸린 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이고 싶은 놈을 적당히 살려 두라니.

    “몇 대 쳐도 되지?”

    “말했잖아, 적당히 살려두라고. 적당히 안에 속하면 네가 원하는 만큼 해. 어차피 그 자식 얼굴 보면 주먹이 절로 튀어 나갈 테니까.”

    “오케이, 접수. 연이 때렸던 놈 풀어주고 한동안 적적했는데 잘 됐다.”

    “근데 이든 보내면 연이는 누가 봐? 내가 출근하지 마? 아, 차가워!”

    “어우, 쏘리.”

    “이 망할 자식아. 탄산을, 왜, 흔들어서, 따냐고. 안 그래도 몇 개 없는데 소파에 기부하냐?”

    권상철을 괴롭힐 생각해 취해 저도 모르게 흔든 맥주캔이 터져 호박색 액체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가만히 있다가 봉변을 당한 첸이 이든의 목덜미를 붙잡고 흔들었다.

    “연이는 내일 나랑 갈 거야.”

    “요즘 너무 둘만 돌아다니는 거 아니야? 인천 리조트부터 아주 의심스러워. 어제도 밤늦게 들어오고.”

    잠자코 첸에게 얻어맞던 이든이 설우를 흘겼다.

    “어디 가려고?”

    “엄마랑 외삼촌 보기로 했어. 연이랑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겠다네.”

    “호텔 아니고 백화점? 어머니가 웬일로.”

    “휴무래.”

    “오너한테 휴무가 어딨어, 그냥 휴식이지.”

    “말고, 백화점.”

    “아아, 어쩐지. 형아, 내 옷도 부탁해.”

    “넌 지랄 말고 맥주나 닦아.”

    맥주가 튄 옷을 갈아입기 위해 벌떡 일어난 첸은 찡긋거리는 이든의 눈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이 형이 진짜! 아, 꼬맹이 표정 따라한 건데. 지금 딱 귀여웠을 거라고. 설우 형 꼬실 수 있었는데.”

    첸의 손을 뿌리치고 벌떡 일어난 이든이 억울함을 표출했다.

    뭐라는 거야.

    이든이 괴상한 표정을 지을 때부터 질겁해 미간을 구긴 설우가 관자놀이에 대고 손가락을 돌렸다.

    “맥주 한 캔을 한입에 들이부으니까 취하지. 가서 닦을 거나 가져와.”

    “취한 거 아니거든?”

    “빨리 가, 가라고.”

    “아, 하지 마!”

    실내화를 툭 벗어던진 첸이 딴딴한 궁둥이를 툭툭 두드리자 거세게 몸부림을 친 이든이 결국 자리를 떴다.

    “좋은 거 하나 사 와, 곧 저 자식 생일이잖아.”

    어리광을 피우는 덩치 큰 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큭큭 거리던 첸이 설우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너보다 내가 돈 많아.”

    “아, 맞다.”

    빠른 수긍과 함께 반짝이는 카드는 홈웨어 주머니 속으로 금세 사라졌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형제는 매일같이 티격태격 언성을 높이면서도 누구보다 더 서로를 의지했다.

    다 큰 성인 남자 셋이 모여 사는 이유였다.

    소란스러운 거실과 다르게 방안은 조용했다. 작은 스탠드를 켜놓고 잠든 연은 제법 편안해 보였다.

    밤엔 깊이 잠들지 못하는 연이 깰까 봐 거실에서 아예 잘 준비를 마치고 들어온 설우가 최대한 발걸음을 죽였다.

    프레임이 높은 침대를 빼고 새로 들여놓은 매트리스는 볼 때마다 마음에 쏙 들었다.

    “이불을 다 차버린 거야?”

    따뜻한 수면 잠옷 때문에 열이 올랐던 것인지. 두꺼운 이불은 무릎 아래로 내던져져 있었다.

    “우음… 오빠아.”

    또 무슨 꿈을 꾸길래.

    눈을 감은 채 웅얼거리는 입술이 설우를 찾았다.

    꿈에 갇힌 연이 바르작거리기 시작하자 설우가 조심스럽게 매트 위로 올랐다.

    “좋은 꿈도, 나쁜 꿈도 꾸지 말라니까.”

    팔로 감고, 다리로 엮고. 갑갑할 만큼 연을 단단히 끌어안은 설우는 곤히 자는 그녀를 한참 지켜보고 나서야 눈을 감을 수 있었다.

    ***

    현진의 주인인 박화진 총괄 회장이 방문한다는 통보를 받은 현진백화점의 직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오전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눈길도 주지 않을 이월 상품과 행사 상품은 모조리 창고로 밀어두고 가격은 비싸지만, 희소성이 큰 제품들로 매장을 채웠다.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이벤트에 본사에서 내려온 직원들까지 백화점을 들쑤시고 다녔다.

    그녀의 방문을 쇼핑을 가장한 시찰로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자, 자! 10분 남았습니다. 매장 앞에 정렬하세요!”

    지점장의 우렁찬 외침에 옷매무새를 다듬은 직원들이 매장 앞에 섰다.

    하나하나 지적해가며 만족스러운 그림을 만든 지점장은 화진을 맞이하기 위해 정문으로 나섰다.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는 회전문 앞으로 화진의 퍼스널 쇼퍼 윤세인을 비롯해 백화점 소속의 컨시어지, 본사 직원, 보안 팀원 등 다수의 인력이 오와 열을 맞춰 그녀를 기다렸다.

    백화점의 휴무일. 지나다니는 사람도, 붐비는 차도 없는 입구로 검은 세단이 들어서자 정문에 서 있던 이들이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가장 앞서있던 발렛직원을 밀어낸 지점장이 허겁지겁 뒷좌석 문을 열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회장님!”

    “어우, 이게 다 뭐야?”

    그저 아들 내외와 쇼핑을 하러 온 것뿐인데.

    직접 연락을 넣은 윤세인 실장 양옆으로 줄지어 선 낯선 직원들을 발견한 화진이 당황스럽게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오셨어요, 회장님.”

    “윤 실장 직원들이야?”

    “하하, 그럴 리가요. 저 빼곤 전부 백화점 소속 직원인 것 같아요.”

    “돌겠네. 박 대표한테 전달 안 했어?”

    “했지. 편하게 쇼핑할 거니까 다른 준비 시키지 말라고.”

    열댓 명은 되어 보이는 이들을 둘러본 화진이 동생 성진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그쪽은 어디 소속이에요?”

    “강남 지점장 구용범입니다. 원활한 쇼핑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세상에.”

    지점을 잘못 고른 거였구나.

    파이팅 넘치는 지점장이 지나친 의욕으로 일을 벌인 듯했다.

    정돈된 눈썹을 문지르는 손길에 난처함이 묻었다. 새벽같이 나와 발을 동동 굴렀을 직원들을 내치기가 쉽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일행이 도착을 하지 않아서요, 조금 기다렸다가 들어가죠.”

    “일행이요?”

    “아, 저기 오네.”

    걱정이 가득한 화진과 달리 이제 막 들어서는 세단을 가리킨 성진의 얼굴엔 기대감이 맴돌았다.

    조카며느리와 쇼핑이라니. 누나 화진을 제외하고 혈혈단신인 그에겐 즐거운 시간이었다.

    “저 까탈스러운 자식이 얼마나 잔소리를 할 거야. 보는 눈 줄여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설우의 날 선 목소리가 벌써 귓가를 울렸다.

    지점장 용범은 화진의 다른 일행에 관련해선 전달받지 못했지만, 차 문을 열어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어이쿠!”

    하지만 설우가 먼저 문짝을 밀어버린 탓에 마른 몸이 힘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난 모르는 일이야.”

    설우는 내리자마자 화진부터 찾았다. 입구로 들어서기 무섭게 보인 인영들 때문이었다.

    “사람 많으면 불편하다고 몇 번이나 말을 했는데.”

    “오빠, 나 내리지 말아요?”

    “아니야, 내려.”

    문을 막고 선 설우의 허리춤에 한쪽으로 단정히 땋아 내린 금발이 쑥 머리를 내밀었다.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지점장이 벙찐 얼굴로 눈만 끔뻑이는 동안 설우는 차에서 내린 연의 어깨를 감쌌다.

    “왔니? 연이 오랜만이네.”

    “안녕하세요, 삼촌. 안녕하세요, 어머니.”

    “네 남편 사나운 눈깔만 치우면 안녕할 거 같은데.”

    나와 이든은 그렇다 쳐도 엄마한테까지 도끼눈을 뜨다니.

    제 어깨 아래로 내려온 설우의 손을 툭툭 건드린 연이 앙증맞은 입술을 달싹였다.

    “사나운 눈깔 좀 치우세요, 남편. 오빤 눈으로 욕하는 버릇을 고쳐야 해요.”

    “허….”

    눈깔과 남편. 연에게 어울리지 않는 거친 단어와 심장을 간질이는 호칭이 동시에 들려오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매번 극과 극을 달리는 그녀가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극락과 나락도 함께 보여주는 너인데. 이 정도쯤이야.

    “푸흡!”

    연과 반갑게 인사한 성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자그마한 아이가 설우를 꾸짖으니 닦고 있던 안경을 떨어뜨릴 뻔한 그였다.

    “나는 얘 이런 게 마음에 들어. 애가 투명하고, 단순하잖아. 흑심 품고 너한테 덤벼들던 애들보다 훨씬 나아.”

    “칭찬이세요?”

    “그럼 이게 욕이니? 마음에 든다는데?”

    “칭찬을 욕같이 하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안 그래요, 외삼촌?”

    “뭐 이 자식아?”

    “하하하, 난 빼 줘. 너보다 누나를 훨씬 더 많이 봐야 하거든. 괜한 욕먹기 싫다. 연이는 그새 더 예뻐진 거 같네? 조카며느리 말고 내 딸 삼고 싶어.”

    “그럼 결혼을 해. 딸 삼는 거 말고 딸을 낳을 생각은 없는 거야?”

    “누나 재혼하면 나도 결혼하지 뭐. 우리 누님 나 없으면 더 외롭잖아.”

    능글거림에 질색한 화진이 버킨백 손잡이를 힘껏 쥐었다.

    저를 빤히 보는 말간 눈동자만 없었어도 성진의 뒤통수를 후려쳤을 텐데.

    “허튼소리 그만하고 들어가.”

    “제가 모시겠습니다, 회장님.”

    줄곧 뒤에서 알짱거리던 지점장이 이때다 싶어 빈틈을 찾았지만, 화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내는 윤 실장 하나면 충분해요. 뒤따라오는 건 괜찮지만 거슬리진 않았으면 좋겠네.”

    “아유, 그럼요. 편하게 둘러보셔야죠.”

    “윤 실장, 오늘은 나보다 우리 며느리 위주로. 설우랑 같이 쇼핑할 때 봤다고 했었지?”

    “네, 회장님. 한번 뵀습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사모님. 윤세인 실장입니다.”

    처세술이 뛰어난 세인은 재빨리 연에게 예의를 차렸다.

    여유롭게 대화를 주도하는 겉모습과 다르게 그녀 역시 충분히 놀라는 중이었다.

    몇 달 전 묘한 분위기를 풍겼던 여자를 보았을 땐 차설우 사장 역시 결혼과 연애를 따로 즐길 생각인가 보다 했었는데. 당당히 안주인 자리를 꿰찼을 줄이야.

    “네, 안녕하세요. 선우연입니다.”

    사모님. 생경한 호칭에 쭈뼛거리던 연이 어색한 인사를 전했다.

    세인을 포함해 저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웠다.

    “아, 오빠 잠깐만요.”

    “왜?”

    “신발 끈이요, 금방 묶을게요.”

    “기다려, 내가 해줄게.”

    “네? 혼자 할 수 있는데….”

    설우와 이든이 신발 끈을 묶어주는 건 익숙한 일이었지만, 오늘은 낯선 눈이 많았다.

    연과 설우를 기다리기 위해 자리에 멈춰 선 직원들의 눈이 빠르게 굴러갔다.

    직원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감추려고 애써도 호기심은 이겨낼 수 없었다.

    파혼 후 결혼이라는 초강수를 두어 상류층 스캔들에 한 획을 그은 설우와 베일에 싸여있던 그의 연인이 코앞에 있으니 멋대로 눈길이 쏠렸다.

    “많이 걷지도 않는데 왜 맨날 끈이 풀려?”

    “그러니까요. 나도 궁금해요.”

    설우는 주위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얀 운동화 끈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뻘쭘해진 연이 바닥에 쭈그려 앉은 설우를 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왜, 또 창피해?”

    “네에.”

    자리에서 일어나 찰떡같은 볼을 쭉 잡아당긴 설우가 발개진 얼굴을 제 가슴팍으로 숨겨주었다.

    조용히 지켜보던 화진이 혀를 내둘렀다.

    아주 녹네, 녹아.

    “나이 서른이 넘어서도 인격이 바뀌나?”

    “글쎄, 굳이 따지자면 예외가 생기는 거겠지.”

    저게 내 배 아파 낳은 아들이 맞는 건지.

    하루하루 색다른 모습을 뽐내는 설우가 볼수록 놀라운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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