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52화 (52/96)
  • 52화.

    모든 사진 안엔 연과 설우가 있었다.

    CH파라다이스의 본사를 드나드는 장면은 물론 인천 리조트에서 찍힌 사진까지 발견한 설우가 인상을 구겼다.

    내던져진 사진의 반은 제가 잠든 연을 안고 이동하는 모습이었다.

    재계 유명 인사로 사생활 노출이 잦은 자신은 괜찮았다. 하지만 연의 사진까지 막무가내로 찍어댔다니.

    한참 좋았던 기분이 바닥으로 처박히는 건 찰나였다.

    차 회장을 노려보는 새카만 눈동자에 냉기가 뚝뚝 흘렀다.

    분풀이가 끊이지를 않는군. 이런다고 무를 수 있는 결혼이 아닌데.

    이걸 굳이 쥐어 들고 와 제 성질을 건드리는 의도가 뻔했다.

    “다 하셨으면 가세요.”

    “뭐야?”

    “사진 던지러 오셨잖아요. 원하는 거 다 하셨으니 이만 나가주세요, 업무가 많습니다.”

    “네놈 여자 끼고 회사 드나드는 거 임직원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연인과 결혼을 위한 정략혼 파기? 아랫동네에서나 좋아할 같잖은 소설이지. 이 동네에선 여색에 홀린 머저리 취급받기 딱 좋은 상황이라고.”

    “누가 어떤 식으로 말을 하건 관심 없습니다. 그 정도에 동요할 마음이었으면 결혼 결심조차 하지 않았을 거고요. 그리고 연이 그냥 여자 아니잖아요, 곧 제 아내가 될 텐데.”

    한때는 참 믿음직스러웠던 흔들림 없는 눈빛엔 적의가 넘쳤다.

    손자의 반항이 거세질수록 말년에 승리욕이 차올랐다. 젊은 기업인 시절부터 이어져 온 폐쇄적인 성격과 아집은 세월이 흐를수록 짙어지고 있었다.

    패배를 통감하며 제 아래 꿇어앉는 설우를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거진 다 기자 놈들한테 받은 사진이야. 네 염문설에 벌떼처럼 꼬여 든 것들한테 돈 먹이고 회유하느라 네 어미랑 강 변호사만 고생이지.”

    “따로 감사 인사 전하겠습니다.”

    열심히 주절거려도 단호한 대답이 돌아온다.

    조부의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짧게 대화를 끝내고 내보내는 게 최선이었다.

    “제대로 가르칠 때까지 중요 행사나 모임엔 데리고 다니지 말거라. 널 깎아내리고 싶어 안달 난 인간들한테 좋은 먹잇감이야. 결혼식 때도 모자란 거 티 나지 않게 잘….”

    -네, 보안팀 박대혁입니다.

    “사장실에 배웅해야 할 손님이 있는데 사람 좀 올려보내세요.”

    -예, 사장님.

    설우의 손가락이 결국 인터폰을 눌렀다.

    저를 쫓아 보내기 위해 가드를 부르는 괘씸한 손자를 이 악물고 노려보던 차 회장이 이내 집무실을 나섰다.

    “연아.”

    쾅, 소리와 함께 닫히는 문을 확인한 설우가 책상 아래를 확인하기 위해 무릎을 굽혔다.

    “…….”

    “어디까지 듣고 자는 거야.”

    마지막 한마디라도 듣지 못했으면 좋겠는데.

    쓴웃음을 지으며 연의 볼을 문지르던 설우가 흐트러진 옷차림 그대로 잠든 그녀를 소파로 옮겨주었다.

    자는 시간이 길든, 짧든 연은 밤보다 낮에 깊은 잠에 빠졌다.

    기면증 증상이 나타날 땐 자면서 움직이는 일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혼자 방에서 재울 수는 없었다.

    “잘 자.”

    베개와 이불을 챙겨 나와 안락한 잠자리를 완성한 설우는 편안한 얼굴로 쌔근대는 연의 이마에 굿나잇 키스를 남기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설우의 얼굴이었다. 꽉꽉 막힌 도로에 짜증이 나는지 고운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의 미간을 꾹 눌러주고 싶어 움직이려던 손이 보들보들한 담요에 막혀버렸다. 커다란 담요가 온몸에 세 바퀴쯤 감겨 있는 거 같았다.

    “날 애벌레로 만들어 놓은 거예요?”

    “깼어? 늦게 일어난 벌.”

    “벌써 밤이네.”

    “밤까진 아니고 저녁이지. 해가 짧아서 어두운 거야.”

    “깨웠어요?”

    “아니, 안 깨웠어. 낮에 더 곤히 자는데, 깨운다고 밤에 잘 자는 것도 아니니까 편하게 잤으면 해서. 사실 일어나지도 않잖아.”

    “오래 자기 싫은데 마음처럼 안 되네요. 오늘도 하루가 너무 빨리 갔어요.”

    아쉬워라.

    갇혀 있는 동안엔 하루에 12시간을 자든, 그 이상을 자든 아무 생각이 없었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많은 날이 사라지는 게 아깝지도 않았고,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되뇌고 싶지도 않았다.

    밤인지 낮인지도 모른 채 숨만 쉬며 사는 삶은 그만큼 무의미했다.

    하지만 지금은 햇살 좋은 낮을 잡아먹는 잠이 야속하다.

    설우와 함께하는 1분 1초가 소중한데. 언제 어떻게 급변할지 모르는 불안정한 미래를 가졌으니 그를 좀 더 자세히 기억해둬야 하는데.

    제가 가진 몹쓸 병엔 자비가 없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보고 싶어서요.”

    “맘껏 보고 있잖아.”

    “보고 있어도 계속 보고 싶어서요.”

    적당히 기울어진 시트에 기대 깜빡이는 금안엔 오롯이 설우뿐이었다.

    잠시 정차한 틈을 타 설우가 고개를 돌리니 연이 환하게 웃었다.

    만개한 꽃 같은 미소를 보면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잠들기 전에 어디까지 들었어?”

    “머저리 취급받기 딱 좋은 상황이라는 말까지 들었어요.”

    “거의 다 들었네.”

    마지막 말이라도 듣지 못했으니 다행인 건가.

    “괜찮아요.”

    “미안해, 그런 소리 듣게 해서. 넌 예쁜 말만 들었으면 좋겠는데.”

    더럽고 독한 말은 전부 나만 듣고 싶은데. 쉽지가 않았다.

    오히려 못된 말은 연이 듣고 자신은 그녀가 해주는 예쁜 말만 골라 듣는 것 같았다.

    “정말 괜찮아요. 오빠가 이런 시무룩한 표정 짓는 게 더 싫어요. 아프고 힘들면 다 말할 거라니까요.”

    그리고 할아버지가 하는 말은 다 사실인걸요.

    상처받고 힘들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설우의 옆에 있기 위해 제가 노력하고 극복해야 할 일이었다.

    모든 짐을 그에게 떠넘기고 싶진 않았다.

    지능이 부족하다고 사랑까지 모자란 건 아니니까.

    “그래. 배는 안 고파?”

    “조금요. 집까지 멀었어요? 담요나 풀어주세요, 오빠 손 잡을래요.”

    추울까 봐 꽁꽁 감아둔 담요가 본의 아니게 연을 묶어둔 꼴이 되었다.

    혹시나 길이 열릴까, 정면을 힐긋거리며 담요를 벗겨준 설우가 오른손을 내어주었다.

    연이 저녁 먹여야 하는데.

    열심히 제 손을 주무르는 손길을 만끽하던 그는 도무지 뚫릴 기미가 없는 교통체증에 다시 인상을 썼다.

    찡그린 눈가를 불만스럽게 보던 연이 안전벨트를 너르게 당기며 운전석을 향해 상체를 쭉 내밀었다.

    쪽쪽, 소리와 함께 제 볼에 닿았다가 사라진 입술의 주인을 바라본 설우가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뭐야, 이건. 서비스야?”

    “인상 쓰지 말라고요. 화난 거 같잖아요.”

    “계속 찌푸리면 계속해줄 거야?”

    “안 찌푸려도 오빠가 해달라고 하면 맨날 해주죠. 더 진하게도 해줄 수 있는데.”

    아, 내 심장.

    연신 눈웃음을 치며 내뱉는 발랄한 답을 들은 설우가 잠시 핸들로 얼굴을 묻었다.

    유행처럼 번져 나가 노래 제목으로까지 사용되는 심쿵, 이라는 신조어의 뜻을 뒤늦게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연아.”

    “네?”

    “집무실에서 못한 거 마저 하러 갈까?”

    좋으면 좋고, 싫어도 그만이라는 뉘앙스가 풍기도록 넌지시 묻고 싶었는데.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 간절함이 묻었다.

    물론, 연은 그 차이를 알지 못했다.

    그저 핸들에 고개를 박았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부산스럽게 손을 움직이는 설우의 이상행동이 의아할 뿐이다.

    “하던 거요? 아….”

    집무실에서 하던 걸 떠올린 연의 볼에 홍조가 자리 잡았다.

    “지금 우회전하면 바로 현진호텔이야. 가서 맛있는 거 먹고, 같이 목욕도 할 수 있어. 잠은 펠리체에 가서 자야겠지만.”

    약과 억제대가 없는 곳에서 1박은 무리지만 그 외의 모든 건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눈만 마주쳐도 몸이 달아 큰일이군.

    “가요, 낮잠도 많이 자서 컨디션도 좋아. 오늘은 두 번째니까 두 번 할까요? 아까 오빠 막 억울하다고 했으니까.”

    그럼 세 번째엔 세 번 할 거야?

    지나치게 밝히는 저를 숨기기 위해 목 끝에 일렁이는 말을 누른 설우가 천천히 핸들을 틀었다.

    ***

    CH문화재단의 자선 행사가 시작된 CH호텔의 행사장엔 날고 긴다는 정, 재계 인사들로 붐볐다.

    CH그룹 차성태 명예 회장의 막내 손자인 차설우 사장의 성대한 결혼식 전, 그룹 차원의 마지막 행사였기 때문에 기자들 역시 눈에 불을 켜고 기삿거리를 찾아다녔다.

    평소처럼 여유롭게 거닐며 독보적인 아우라를 뽐내는 설우와 독기 서린 얼굴로 목을 빳빳이 세운 주희는 특히나 이목을 끌고 있었다.

    샴페인 잔을 들고 지인과 인사를 나누는 설우를 원망스럽게 노려보는 주희 옆으로 값비싼 명품을 두른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와, 주희 왔어?”

    쪽팔려서 안 올 줄 알았는데.

    “너 좀 빠진 거 같다? 안 그래도 말랐는데, 그만 빼!”

    마음고생이 심했나 봐, 볼품없이 삐쩍 말랐네.

    “야, 기운 내. 세상에 남자가 차설우 하나야? 넌 더 좋은 사람 만날 거야.”

    차설우랑 결혼한다고 그렇게 자랑질을 하더니, 꼴좋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친분이 있는 재벌가 자제들을 맞이했지만, 위로하는 말속에 숨겨진 뜻이 저절로 귓가를 울리는 거 같아 속이 쓰렸다.

    누군가는 지나친 비관이라 여길지 몰라도 이 세계에 사는 이들에겐 진정한 위로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파혼 기사가 나가자마자 이미 저를 발가벗겨 조롱하고 왔겠지.

    “근데 주희야, 너 설우 씨 결혼 상대 누군 줄 알아? 진짜 궁금해 죽겠어!”

    “다들 결혼식 갈 거 아냐? 가서 보면 되잖아.”

    당장 다음 주가 결혼식인데. 굳이 왜 내 앞에 와서 호들갑을 떠는 거냐고.

    “청첩장에 이름밖에 없어서 더 궁금한 거 있지. 여자한테 기자들 어마어마하게 붙었는데 현진이랑 CH에서 같이 압박하니까 사진 한 장 마음대로 못 깐다더라.”

    “그래서 주희 넌, 결혼식 갈 거야?”

    “생각 중이야. 독주회 준비도 다시 시작해야 하고.”

    “주희는 설우 씨 진짜로 좋아했잖아. 가고 싶겠어?”

    자신보다 이전에 설우와 혼담이 오가던 법무부 장관의 차녀 민정이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속을 긁었다.

    “좋아한 게 아니라 호감이었어. 솔직히 여기서 설우 씨한테 흑심 안 품었던 사람 있어? 다들 CH에 혼담 넣었었잖아. 그래서 신부 얼굴이 보고 싶은 거잖아. 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차설우를 눈멀게 했나, 그게 궁금한 거 아니야?”

    “결혼 3개월 앞두고 파혼당한 너랑 잘난 남자한테 눈길 한 번 줬던 우리랑 마음이 같니? 결혼 날짜에 식장까지 다른 여자한테 뺏겨 놓고. 난 너 같은 상황이었으면 으, 정말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어쨌든 힘내고, 다음 모임 때 보자.”

    “그래, 대선도 다가오는데 한 시장님 잘 도와드려. 바쁘게 살다 보면 금방 잊을 거야.”

    “아, 맞다. 너 펠리체에서 집 뺄 거면 무조건 연락해! 지금 대기 순위 어마어마해. 값은 내가 배로 쳐줄게.”

    놀림 섞인 말에 발끈한 주희가 반격을 해보았지만,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었다.

    현재 제 처지는 그만큼 최악이었다. 오랫동안 공들여온 시간이 물거품이 되니 속이 텅 빈 것만 같다.

    우르르 다가왔던 이들이 우르르 사라지자 주희는 차 회장을 찾았다.

    그 집안사람 누구라도 붙잡고 설득하고 싶었다. 그러려고 참석한 행사였다.

    절박하게 행사장을 둘러보는 주희의 눈에 익숙한 실루엣이 담겼다.

    그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매달려보자, 혹시 모르잖아.

    손에 든 와인을 단숨에 털어 넣은 주희가 성큼성큼 테라스로 향하는 설우를 쫓았다.

    “그래서 전화를 혼자 걸었다는 거야?”

    -네! 전화 끊으면 내가 메시지도 남겨 볼게요.

    “뭐라고 남길 건데?”

    -보고 싶으니까 빨리 오라고?

    휴대 전화 사용법을 배우는 중이라며 한껏 들뜬 연의 전화를 받은 설우가 테라스로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따분한 자리인데. 보고 싶다니 더 빨리 가야겠네.

    “10시 전엔 갈게, 약 기운 돌아서 졸리면 기다리지 말고 자. 눈 뜨면 옆에 있을 거니까.”

    -네네, 그럴게요.

    “이불 꼭 덮고. 첸한테 매트도 켜달라고 하고. 손목 아프면 살살 묶어달라고 해.”

    -오늘 부들부들한 수면 잠옷 입어서 하나도 안 추워요. 오빠 와서 나 끌어안으면 곰돌인줄 알걸요?

    “덩치도 작은 게. 기껏해야 강아지겠지.”

    -어쨌든 푹신할 테니까 오면 나 꼭 안아 봐요?

    “알았어, 꼭 안고 잘게.”

    -네, 끊을게요.

    “응, 사랑해.”

    -쪽.

    대답 대신 귀여운 소리가 돌아오자 피식, 피식 웃으며 뒤를 돈 설우는 일정을 마무리 짓기 위해 행사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

    설우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주희는 휴대 전화를 붙잡고 다정하게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에 경악하며 몸을 숨겼다.

    한 번 더 매달려보자 했던 다짐이 우스웠다.

    듣기 좋은 저음이 말하는 사랑해, 란 세 글자가 귓가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차설우가 저런 남자였나.

    두 번밖에 본 적 없는 여자가 소름 끼치게 부러워졌다.

    아무리 사랑을 구걸해도 제겐 따뜻한 손길 한 번 주지 않던 남자는 다른 누군가에겐 세상에 둘도 없는 다정한 연인이 되었다.

    비참했다. 왜 나는 안 되고 그 여자는 되는 걸까.

    원망스러웠다. 그 여자는 왜 하필 그때 나타나서 설우를 빼앗아 간 걸까.

    네일아트가 곱게 발린 손톱이 주먹 쥔 손바닥에 선명한 자국을 만들어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는 끝내 눈물이 되어 진한 화장을 지워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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