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51화 (51/96)

51화.

스테이크를 써는데 집중한 연의 입술이 한껏 오므라들었다.

치즈가 듬뿍 올려진 리조또를 떠먹던 이든이 깜찍한 입술을 발견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스테이크는 먹을 만큼만 잘라먹어야 육즙의 풍미를 오래도록 느낄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견해는 연에겐 무용지물이었다.

꼼꼼히 썰어두고 순식간에 비운다. 그리고 한 접시 더. 연이 스테이크를 먹는 법이었다.

“잘 안 돼? 내가 해줄까?”

“아뇨, 스테이크는 잘 썰어요.”

“그럼 이거부터 한 입 먹어.”

“오오, 맛있어.”

한 숟가락 가득 퍼 올린 리조또를 받아먹은 연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미리 하나 더 시킬까?”

“네, 좋아요.”

“한 달 동안 내 손 안 잡을 거란 말 취소해.”

연이 제일 좋아하는 스테이크를 인질로 잡은 이든이 협상을 위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고민을 거듭하는 연의 앞에서 어울리지 않는 꽃받침을 만들어 턱을 괸 이든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애교를 피웠다.

설우 때문에 포옹도 금지된 시점에서 손도 잡지 말라는 건 너무 가혹했다. 적당히 놀릴걸.

“알았어요, 그 말은 취소할게요.”

역시. 먹보는 맛있는 음식으로 꼬드겨야 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물러난 이든이 곧바로 호출 벨을 눌렀다.

탕탕.

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인 레스토랑의 런치타임.

정신없이 홀을 돌아다니던 직원이 도착해도 테이블에 놓은 음식들에만 꽂혀있던 연의 시선이 경쾌한 울림소리를 내는 통유리로 옮겨졌다.

“어? 오빠다.”

레스토랑에 도착한 설우가 창가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이제 막 스테이크 한 조각을 찍은 포크를 내려놓은 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예상치 못한 격한 반응이 돌아오자 당황한 설우가 다급히 손짓했다.

곧 들어갈 테니 어서 앉아 먹으라고.

입을 벙긋거리며 움직이는 손의 의미를 알아들은 연이 도리질을 치고 레스토랑 밖으로 튀어 나갔다.

“오빠!”

“왜 나와, 내가 들어간다니까.”

“안에선 이렇게 못 안기잖아요.”

“스테이크를 버려두고 뛰쳐나올 정도로 반가워할 줄은 몰랐는데.”

“으음, 오빠 냄새.”

설우의 품에 쏙 안긴 연이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센터가 쉬는 한 주 동안 내내 붙어있었던 데다 인천 리조트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낸 탓에 그의 부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설우가 편안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면 그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을지도 몰랐다.

“이든이 우리 노려봐.”

가슴팍까지 간신히 닿는 머리를 비비적거리던 연이 그제야 테이블에 혼자 남은 이든을 떠올렸다.

“맞다, 이든 놓고 왔는데.”

“이든이 괴롭혔어?”

“아뇨, 화해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권상철을 만나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컨디션이 금세 상승곡선을 타고 고점을 찍었다.

환한 얼굴을 보면 저절로 힐링이 되는 기분이다.

“전혀, 오늘은 아무도 시비 안 걸었어요. 10동 아줌마를 한 번 울렸더니 이제 내가 만만하진 않은가 봐요.”

“그래, 추우니까 들어가서 얘기하자. 밥 먹어야지.”

“네.”

자신만만하게 튀어 오르는 어깨를 웃으며 감싸 안은 설우가 레스토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든을 보내고 설우와 함께 집무실로 올라온 연은 파란 장미가 담긴 꽃병을 어디에 둘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의 듀얼 모니터 옆쪽에 놓았다가,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용 테이블 중앙에 놓았다가.

끝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뜬금없이 책장 위에 올려놓는다.

저렇게 진지하게 고민할 일인가.

꽃병을 들고 제 개인 공간에 들어갔다가 도로 가지고 나오는 연을 바라보던 설우가 피식거렸다.

“그만하고 앉아. 여기 책상 위에 올리면 되잖아.”

“오빠 일하는 데 방해되잖아요.”

“이렇게 넓은데? 네가 책 읽는 곳 앞에다가 둬도 되고.”

센터를 쉬는 일주일간 꼬박꼬박 설우를 따라나선 연은 업무를 보는 그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었다.

둘이서 사용해도 공간이 차고 넘칠 만큼 커다란 책상이었기에 어느 곳에 놓아도 무리가 없었다.

“그럼 여기로 할게요. 죽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

꼼꼼히 검토한 결재서류를 정리하는 설우의 곁으로 다가온 연이 결국 책상 한쪽에 꽃병을 소중히 내려두었다.

“생화는 오래 못 살아.”

“내가 자주 가져다 줄게요. 꽃병 볼 때마다 내 생각하면 되겠다.”

“없어도 종일 네 생각만 하는데.”

이든이랑 잘 놀고 있을까. 약 기운에 힘들진 않을까. 위험한 순간에 잠들진 않았을까.

중요한 서류를 읽다가도, 회의를 하다가도 떠오르는 얼굴은 어김없이 퇴근 시간을 앞당기게 만든다.

“나도요. 오늘은 회의 없어요?”

“응, 오늘은 이것만 다 보면 돼.”

대수롭지 않게 두드리는 서류 뭉치의 개수를 확인한 연이 헤, 하고 입을 벌렸다.

“저렇게 많은 걸 오늘 다 읽을 수 있어요?”

벌써 2신데.

“당연하지. 놀아줄까?”

“아뇨, 책 읽을게요.”

푹신한 가죽 의자에 등을 기대니 조금 나른한 기분이 들었지만, 잠이 오는 건 아니었다.

일주일 동안 반도 읽지 못한 책을 꺼내든 연은 틈만 나면 바짝 마르는 입술을 손으로 문질렀다.

만화책과 이별을 선언하고 처음 접한 책은 인기 작가의 에세이였다.

<행복해지는 법> 제목에 이끌려 설우의 서재에서 꺼내왔지만, 누구나 읽기 쉬운 책이라는 소개 글은 전부 거짓말이었다.

간간이 나오는 어려운 단어 때문에 막히고, 문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막히고.

같은 부분을 두세 번씩 읽다 보면 속도는 현저히 떨어지고 집중력은 두 배로 소비되니 피로도 역시 두 배로 올라갔다.

그러니 완독이 느려질 수밖에.

혼자 다니는 여행의 장점과 필요성에 대해 늘어놓은 부분을 읽으며 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난 혼자 가는 것보다 오빠랑 가는 게 더 좋은데. 아니면 이든이랑 첸도. 사실 혼자 가지도 못하지만.

“혼자 가면 뭐 하고 놀지.”

“혼자 어디 가려고. 오빠 두고 아무 데도 못 가는데.”

계열사 분리 시 법적 분쟁에 관련된 자료를 반쯤 읽은 설우가 쓱, 서류철을 한쪽으로 밀어두었다.

멍한 눈을 깜빡이며 책에게 불만을 표출하는 연을 바라보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아니, 내가 가겠다는 건 아니고요.”

“이리 올라와.”

설우의 마음이 바뀔세라. 허벅지를 탁탁 두드리기 무섭게 책을 내던진 연은 재빠르게 그의 위에 올라앉았다.

“오빠. 근데 여기 회사잖아요.”

“올라오고 나서 그런 진지한 걱정은 반칙이지.”

“역시 붙어있으니까 좋다.”

목덜미에 감긴 두 팔에 힘을 준 연이 더욱 가까이 몸을 밀착시키자 설우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인천 리조트에 이어 이러려고 데려온 게 아닌데, 의 두 번째 버전이다.

“넥타이 좀 풀어줘.”

“어떻게요?”

“한쪽 끈은 뒤로, 매듭 부분은 아래로, 천천히 당겨.”

이미 블라우스 속으로 들어가 연의 부들부들한 살결을 쓸고 있는 두 손을 빼고 싶지 않은 설우가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이렇게?”

“그렇지, 잘하네. 이 정도면 됐어.”

목을 죄던 넥타이가 느슨하게 풀어지고 나서야 밖으로 나온 그의 손이 깊게 파인 브이넥 니트 안으로 보이는 블라우스 단추로 옮겨졌다.

“나중에 넥타이 매는 법 알려주세요.”

“해주려고?”

“네, 아침마다 해주면 좋을 거 같아요. 어려우려나?”

속살을 훤히 드러낸 블라우스가 니트와 함께 어깨를 타고 내려가도 연의 관심은 오직 넥타이에 쏠려 있었다.

설우 역시 아랑곳하지 않고 하얀 목덜미를 물었다. 그제야 제 처지를 파악한 연이 갑갑한 팔을 움직여 보았다.

“움직이지 마, 불편해.”

“내가 더 불편하거든요? 옷을 벗기려면 똑바로 벗겨야죠. 이게 다 뭐야.”

허벅지 위로 끌어 올려진 치마는 그렇다 치고.

양옆으로 잔뜩 늘어난 브이넥 니트는 팔꿈치에 걸려있었고, 설우의 마음에 들 만큼만 풀린 블라우스 역시 니트를 따라 팔꿈치까지만 흘러내렸다.

반만 벗겨진 상의가 몸을 조이니 영 못마땅했다.

“집무실에서 홀딱 벗겨 놓을 순 없잖아. 언제 누가 들어올지 모르는데.”

“네?”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언제, 누가 들어올지 알아서 이러고 있는 거 아니었어?

“이렇게 될 거 같아서 기를 쓰고 참았다고. 한번 하면 시도 때도 없이 하고 싶을까 봐.”

“시도 때도 없이 해도 괜찮긴 한데 오빠 직원이 들어올까 봐 무서워서 그렇죠. 차라리 저쪽 방이 낫지 않겠어요? 방에까지 들어오진 않겠죠?”

솔직 담백한 반응에 잔잔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세계에 갇혀 사는 그녀는 늘 색다른 재미를 가져다주었다.

“설마. 약속된 일정이 없으니 올 사람도 없을 거야.”

아마도.

거슬리는 속옷까지 끌어내리니 흐트러진 모습이 주는 시각적 흥분에 설우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아는 맛이 무섭다고. 보기만 해도 감촉이 느껴진다.

“오빠도 벗겨줘요?”

“아니, 집무실에선 안 돼.”

“그럼 나는요!”

“그러니까. 내 손이 자꾸 멋대로 벗겨. 어떻게 좀 해 봐.”

이 오빠가 지금 뭐라는 거야. 열심히 벗기고, 만져놓고.

“억울한 부분이 많네요.”

“하하하, 뭐?”

“처음 할 때도 그렇고. 오빤 너무 잘하고 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억울해요. 나만 막, 되게 녹을 거 같고, 기분도 이상해지고 좋고, 더하고 싶은 거 같고.”

“더 하고 싶다고?”

“아니, 지금 말고요.”

제 몸 곳곳을 주무르는 손길에 순간 힘이 들어가자 연이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난 지금도 하고 싶어 죽을 거 같아. 인천에선 네가 아파했으니 혀를 깨무는 심정으로 한 번에 끝냈다고. 네가 원 없이 희롱할 때마다 난 인내력 테스트를 받고 있잖아. 억울한 건 오히려 나야.”

내가 널 어떤 마음으로 사랑하는데. 어디서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려.

열감이 맴도는 눈동자를 빤히 마주하던 연이 가는 손가락을 들어 설우의 눈을 쓰다듬었다.

“잘생겼어.”

“뭐?”

“오빠가 날 많이 아끼는 게 표정에서 느껴질 때가 제일 잘생겨 보여요. 너무 좋아, 차설우.”

너무 좋아, 차설우.

고작 일곱 글자로도 사람을 홀리는 요망한 다람쥐.

함박웃음이 자리 잡은 작은 얼굴을 보던 설우가 체념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머지않아 저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사랑이 몸집을 불리는 걸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위아래로 뜀박질을 하는 심장이 거세다 못해 저릿하게 아파질 지경이었다.

“사랑해.”

벅찬 감정을 짧게 표현한 설우가 열기가 후끈한 허리를 휘감았다.

좁은 사무용 의자에 함께 앉아 몸을 맞댄 둘은 이곳이 집무실이란 것을 잊은 것처럼 진한 키스를 이어갔다.

“으음….”

미끈한 혀와 함께 움직이는 손이 예민한 곳을 골라 찾았다.

발끝이 쭈뼛 서도록 쉬지 않고 찾아드는 자극에 점점 뒤로 휘어가는 연의 허리를 집요하게 따라간 설우가 참지 못하고 바지 버클을 풀기 위해 손을 내릴 때였다.

삐.

-사장님, 회장님 들어가십니다.

허락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힐 불청객의 등장이었다.

취한 듯 하얀 살결을 탐하는 설우보다 먼저 정신을 차린 연이 그를 밀어내고 황급히 의자에서 내려왔다.

“어떡해.”

“옷 입어, 괜찮아.”

이럴까 봐 반만 벗겼잖아.

하지만 설우의 예상보다 비서와 차 회장은 빠른 속도로 집무실 문고리를 돌렸다.

벌컥, 문이 열리고.

아직 브래지어 후크조차 채우지 못한 연이 헐레벌떡 커다란 책상 아래로 몸을 숨겼다.

설우는 그대로 의자에 착석. 불룩 솟아 나온 곳을 달래기 위해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차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집무실 주인의 허락이 들려오지 않았음에도 앞장서 걸어가는 차 회장을 어쩔 수 없이 따라온 비서가 설우의 눈치를 살폈다.

“필요 없으니 듣는 귀들 치워.”

“예? 아, 예. 회장님.”

근처 직원들을 모두 물리라는 말을 뒤늦게 알아들은 비서는 잽싸게 문을 닫고 사라졌다.

“잠시만 앉아 계세요. 급한 결재가 남아있어서.”

머리를 굴려 전자 결재 창을 띄운 설우가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뒷짐을 지고 걸어들어와 소파에 앉을 듯했던 차 회장은 그대로 설우의 책상 앞까지 다가왔다.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숨어 있는 연의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이런 모습으로 들키면 할아버지가 날 지금보다 더 미워할 텐데.

“일하는 놈 꼬락서니가 그게 뭐냐.”

풀어 헤쳐진 넥타이, 적잖이 구겨진 와이셔츠.

회사에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손자의 흐트러진 행색을 훑어본 차 회장이 한쪽 벽에 나 있는 방문을 노려보았다.

“어쩐 일이세요, 연락도 없이.”

“아이는 저 방에 숨겨둔 게야? 그래도 나와서 인사는 해야지. 오늘 자 사진까지 들고 왔으니 없다는 거짓말은 하지 말거라.”

“자고 있습니다. 잘 시간이거든요.”

“쯧, 변변치 못한 것 같으니라고. 그렇게 시원찮은 몸뚱이를 어디다 써먹겠다는 건지.”

아, 젠장.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간신히 삼킨 설우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고스란히 연에게 전해졌을 독설이었다.

당장이라도 몸을 숙여 귀를 막아 주고 싶은 충동 뒤로 후회가 밀려들었다.

적당히 할걸, 조금 더 참을걸, 둘 다 하지 못할 거였으면 방으로 들어갈걸.

등신같이 이딴 말이나 듣게 하고.

지금이라도 일으키고 싶지만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옷과 민망한 상황에 움츠러든 연이 절대 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말 하러 오신 거라면 돌아가세요. 듣고 싶지 않습니다.”

“할아비 얼굴엔 똥칠을 하고 CH그룹엔 먹칠을 하고, 아주 잘하는 짓이다. 여자에 미쳐 앞뒤 분간을 못해도 정도가 있지. 한두 번 그러려니 넘어가 줬다고 허구한 날 회사에까지 끼고 다녀!”

촤아악.

결혼 발표 후에 붙은 파파라치와 직접 고용한 사진 기사에게 받은 사진을 모아온 차 회장은 손자의 얼굴로 거침없이 수십 장의 사진을 집어 던졌다.

설우를 치고 지나간 사진들은 펄럭펄럭 날아다니다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또다시 저 때문에 일어나는 분란을 느끼고 손으로 입을 꾹 틀어막은 연의 눈앞에도 사진 여러 장이 떨어졌다.

가장 먼저 들어온 사진 안엔 지하주차장에서 연을 안고 움직이는 설우가 찍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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