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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47화 (47/96)

47화.

타박타박, 작은 발소리 뒤로 터벅터벅, 여러 개의 큰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화장실을 눈앞에 둔 연이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진짜 그만 와요, 이제 다 왔잖아요.”

“약 먹은 지 12시간 다 됐어. 안 자는 건 다행인데 혹시 모르잖아.”

“그래서 여자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오게요? 그리고 왜 셋 다 오냐고요. 여기까지만 와요, 바로 앞이잖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녀올게요.”

강바람을 맞으며 산책도 하고, 텐트 안에 누워 만화책도 읽고, 열심히 배드민턴도 배웠다.

신나게 놀고 나면 한숨 푹 잘 줄 알았는데. 연은 여전히 쌩쌩했다. 드디어 좀 나아지는 건가.

“알았어, 셋이 사이좋게 여기 앉아 있을게. 조심해서 다녀와.”

마침 보이는 나무 벤치에 설우와 이든을 눌러 앉힌 첸이 손을 흔들었다.

화장실에 가겠다는 연을 따라나선 세 남잔 100m 전에서 한 번, 50m 전에서 한 번, 연에게 제지를 당했지만 끈질기게 이곳까지 쫓아온 것이었다.

여자친구 가방을 들고 기다리는 남자들도 수두룩한데 뭐가 자꾸 창피하다는 건지.

첸까지 의자에 앉자 마음을 놓은 연은 도망치듯 후다닥 뛰어 화장실로 들어갔다.

“하는 짓이 죄다 귀여워서 큰일이야.”

“그러니까. 근데 이제 아침밥도 못해주잖아. 한남동 보내기 싫다.”

“자다 깨서 눈 비비는 꼬맹이가 진린데.”

“펠리체로 데려다줄 거라니까.”

나란히 앉아 똑같은 자세로 다리를 꼬아올린 셋의 시선은 여전히 여자 화장실 입구에 고정되어 있었다.

우연히 남자 셋의 뜨거운 눈길을 받게 된 몇몇은 의아해하면서도 얼굴을 붉혔다.

“그 여의사는 잘 처리했고?”

“말도 마. 사극에 나오는 대사 알지? 삼족을 멸하리라. 딱 그런 느낌이었어.”

“삼족을 멸해도 부족하지. 많이 봐준 거야.”

진심이 담긴 서늘한 눈매를 흘깃거린 이든이 혀를 내둘렀다.

“권상철이랑 장세희는 어떻게 처리할 거야?”

“글쎄. 나락으로 떨어뜨려 놓고 생각해 봐야지. 목줄을 묶어 개처럼 끌고 다닐까.”

그들이 연에게 했던 것처럼 사지를 묶어 약을 달아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고.

“멀지 않았어. 장세희가 있는 대로 돈을 끌어모으는 중이야. 평창동 김 전무 돈까지 빌렸고.”

“순조롭게 잘 풀리겠네. 수준 떨어지는 모임 드나드느라 고생했어.”

무심하게 들어 올린 설우의 주먹에 제 주먹을 가볍게 맞댄 첸이 붉게 물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우리 연이만 안 아프면 해피엔딩이지. 해가 짧다, 슬슬 불 피워야겠어.”

“폭식하는 버릇도 고치긴 해야 해.”

“그냥 둬, 체하는 건 아니잖아.”

“도토리 저장해두는 다람쥐도 아니고 작은 입에 죄다 밀어 넣으니까 그렇지.”

“7년 동안 길들여진 식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뀌겠어? 천천히 해.”

첸의 말에 동의하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설우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뭐야, 저건.”

“우리 다람쥐한테 못생긴 청설모가 도토리를 주려나 본데.”

화장실에서 나온 연에게 순식간에 다가선 남자가 네모난 초콜릿과 함께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

그 뒤로 남자의 일행으로 보이는 이들이 휘파람을 불어댔다.

짜증이 묻은 손길로 눈썹을 문지르며 다가간 설우는 다짜고짜 초콜릿부터 뺏어 들었다.

“누구세요?”

“나? 얘 큰 오빠, 겸 예비 남편. 어디다 눈독을 들여, 죽을라고.”

“난 둘째.”

“난 막내. 혹시 싸움 잘해요? 난 잘하는데.”

“죄송합니다.”

어깨를 두어 번 돌린 이든이 위협적으로 다가서자 화들짝 놀란 남자가 잽싸게 고개를 숙였다.

말 한번 잘못 붙였다가 봉변을 당할 뻔한 20대 청년은 그렇게 친구들의 품으로 사라졌다.

“진짜 못됐어.”

우르르 둘러싸고 건들거리는 세 오빠를 흘긴 연이 앞장서 움직였다.

“초콜릿 줬다고 편드는 거야?”

“나쁜 짓을 안 한 사람한테 무섭게 굴었잖아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 전부!”

“나쁜 짓을 왜 안 해. 그 짧은 순간에 세 가지나 했는데.”

성큼성큼 따라온 설우가 연의 손을 잡았다.

“어떻게 세 가지나 해요?”

“첫 번째, 널 봤지.”

“그게 뭐예요.”

“두 번째, 너한테 말을 걸었지. 아주 불순한 마음가짐이었을 거야.”

“…또요.”

“마지막, 너를 초콜릿으로 꼬시려고 했지.”

“으음, 잘못이야. 아주 큰 잘못이지. 초콜릿을 인질로 우리 먹보를 잡으려고 했어.”

이든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잘못은 너도 있어.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걸 덥석덥석 받으면 어떡해.”

텐트 앞에 도착한 설우가 연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리지.”

“시끄러워, 이든. 가서 불이나 피워.”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고.

맞장구를 치며 연을 약 올리는 이든을 밀어낸 첸이 숯 봉투를 던져주었다.

“나도 그런 건 알거든요? 받기만 하고 안 먹을 거였다고요.”

“오, 이제 반항을 좀 하는데?”

잘못했다고 눈치 보기 바쁘던 연이 큰 눈을 치켜뜨자 설우가 실소를 터뜨렸다.

“내, 내가 언제요!”

“결혼하면 더 막 나가겠어.”

“아니거든요. 말 잘 들을 거예요.”

“말 안 듣고 속 썩여도 되니까 아프지만 마.”

“알았어요.”

멀쩡하게 하루를 보낸 연이 대견하면서도 애잔했다.

오늘처럼만 지내주면 더는 바랄 게 없는데.

누군가에겐 당연한 일상이 누군가에겐 선물 같은 하루라는 게 조금 억울하게 느껴진다.

“불 다 피웠어, 고기 굽자!”

기다란 집게를 휘두르던 이든이 신나게 외치자 연이 벌떡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나 다 혼난 거죠? 그럼 가요, 오빠.”

“그래.”

고운 손 위로 설우의 손이 겹쳐졌다.

너를 다시 만나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오랜 시간 고민했었다.

‘오랜만이야.’

‘재호 아저씨와 준이는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사고 소식을 늦게 들었어. 너무 늦게 찾아와서 미안해.’

‘많이 힘들었어?’

기억을 잃고 망가진 네 앞에서 모조리 쓸모없어진 말들이었다.

“오늘은 잠이 안 와요. 너무 신기하다.”

“좋아?”

“그럼요.”

너를 돌보기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 너에게 온전한 하루를 주기 위해 죽도록 노력할 테니, 영원히 이렇게 예쁘게 웃어주기를.

***

이른 아침. 펠리체 대문이 잘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워둔 상철의 눈이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마지막 발악을 하기 위해 제 아래에 있는 수하들을 전부 불러 모은 그는 설우의 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검은색 세단이고, 차 번호는 1432. 적당한 장소 봐뒀으니까 내가 가로막으면 곧바로 뒤에서 받아. 다른 놈들 도착하기 전에 다미만 꺼내서 튈 거야.”

“차 안에서 시간을 끌 텐데요.”

“앞 유리를 깨든 창문을 깨든 해. 지체되면 우린 전부 죽는 거야.”

“안에 다미가 없으면요?”

“최근 하루도 빠짐없이 회사로 데려가는 거 확인했어. 오늘도 같이 나올 거야.”

“그렇게 전달해 두겠습니다.”

설우를 끈질기게 감시하며 세운 계획을 되뇌며 으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간 상철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펠리체 문화센터의 휴식 주가 되자 설우는 늘 연을 데리고 회사로 출근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첸이 차려준 아침을 든든히 먹은 연이 배를 문질렀다. 널찍한 뒷좌석에서 굳이 연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설우는 해사한 얼굴을 감상하기 바빴다.

“그만 봐도 되지 않아?”

“빨리 가고 싶어서 자꾸 보게 돼요.”

만화책이 담긴 가방에서 제주도 관광명소를 소개하는 책자를 꺼낸 연이 어깨를 들썩였다.

아무리 가까워도 해외는 무리라고 판단한 설우는 신혼여행지로 제주도를 선택했다.

그래도 연이 꽤 오래 살았던 곳이니 익숙한 곳을 지나다 보면 기억을 되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생겼다. 제주도를 고른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어어, 아니 무슨 운전을 저따위로… 으악!”

양옆으로 아파트 공사를 하는 2차선 도로는 한산했다.

평소와 같은 길을 지나며 평소와 같은 속도를 내던 운전기사가 방향지시등도 켜지 않고 차선을 바꿔 끼어드는 앞차 때문에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이었다.

코앞에 끼어들어 안전거리조차 확보되지 않았는데. 이유 없이 급브레이크를 밟은 앞차를 그대로 들이받은 기사가 소리를 질렀다.

콰앙.

충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뒤쪽에서 연이어 터진 사고에 에어백으로 얼굴이 처박힌 기사는 연신 신음을 흘렸다.

“연아, 괜찮아?”

“아?”

앞 유리 너머로 가까워진 차가 보이자마자 연을 끌어안아 보호한 설우가 차창에 부딪힌 머리를 털었다.

추돌사고에 대한 상황 파악이 되기도 전에 야구 배트를 든 남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런 미친 새끼가.

일부로 낸 사고의 가해자가 상철임을 확인하자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퍼억, 퍽. 거침없이 유리창을 강타하는 무식한 쇠 방망이를 피해 가운데로 자리를 옮기던 설우가 말없이 얼어붙은 연을 바라보았다.

“연아? 왜 그래, 연아.”

제 옷깃을 잡은 손을 벌벌 떨던 연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공포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 준이 오빠가.”

“뭐?”

“준이 오빠가 숨을 안 쉬어서….”

“연아, 정신 차려. 나 봐!”

좌우로 요동치는 동공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공을 응시했다. 패닉이었다.

“사, 사장님 밖에!”

부서진 창문 안으로 두꺼운 장갑을 낀 손이 몰려들었지만,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빠랑 오빠가, 사고가. 오빠가 나를 안아서, 그래서….”

“괜찮아. 괜찮아, 연아.”

가득 고였던 눈물이 후두두 아래로 떨어졌다.

떠올리지 못했던 사고 당일의 기억이 빠르게 연의 머릿속을 잠식시켰다.

커다란 트럭과 부딪히고 정신을 차렸던 건 혼자뿐이었다.

저를 안고 보호한 오빠 준은 피를 뚝뚝 흘리며 숨이 멎어갔고, 운전석에 있던 아빠 재호는 단 한 번도 제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아니야, 나만 두고 가지 마. 오빠 제발… 우욱!”

지나친 고통과 충격을 견디지 못해 지워졌던 기억이 되살아나니 머리가 깨질 듯 아파졌다.

“연아, 진정해. 괜찮아.”

“우윽, 우욱!”

당시의 지독했던 피비린내가 떠오르자 연이 속에 있는 음식물을 게워냈다.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설우의 슈트가 엉망이 되었지만,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애를 괜히 데리고 나와서, 젠장할.

“우욱…!”

이미 다 비워진 위에서 위액까지 토해내던 연은 몸을 벌벌 떨다 결국 눈을 감았다.

문이 열리기 직전 도착한 가드들이 차에 달라붙었던 상철과 수하들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차장 밖으로 날아다니는 검은 인영들을 보던 설우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형! 괜찮아? 뭐야, 꼬맹이 왜 이래!”

“집으로 가야겠어. 윤 교수 연락해.”

“토한 거야? 어디 크게 부딪혔어? 설마 머리 부딪힌 거야?”

“아니, 아니야. 전에 났던 교통사고가 떠올랐나 봐.”

뱉어낸 음식물이 잔뜩 묻은 연을 망설임 없이 안아 든 이든이 빠르게 다른 차로 움직였다. 첸 역시 다급히 뒤를 따랐다.

출퇴근은 물론 24시간 지척에서 그들을 보호하는 가드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상철은 절망했다.

첸과 이든 둘, 아니 많아도 다섯 이하일 거라 생각했는데.

줄지어 도착한 차에서 내린 남자들은 한 번에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제이 지하실에 데려다 놔.”

“처음부터 다미 정체를 알고 숨겨준 거였어?”

“알다 뿐일까. 전국을 들쑤시고 뒤져도 찾지 못해서 애가 타던 참이었지. 덕분에 찾고 나서도 애가 타네. 너희들 전부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 못하는 게 천추의 한으로 남을 거야.”

“…이런 엿 같은.”

“기대하고 있어. 네 와이프도 곧 데리고 올 테니까.”

“세, 세희는 내버려 둬!”

“개소리도 사람 봐가면서 해야지. 죽여달란 말이 나올 때까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게 해줄게.”

분노로 일렁이는 눈동자에서 살기가 풍겼다.

정계를 휘어잡고 있는 백창석이 섣불리 차설우를 건드리지 않은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았다.

꿇어앉은 상철에게 으르렁거리던 설우가 어서 가자는 듯 손짓하는 이든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하얗게 질린 연을 본 설우는 붉어진 제 눈가로 차가운 손을 올렸다.

먹잇감을 차례로 잡아먹기 시작한 맹수는 작은 하룻강아지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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