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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46화 (46/96)

46화.

1층 브런치 카페 입구에 붙어 있는 작은 방울이 요동쳤다.

문을 힘껏 열어젖힌 상철이 세희를 찾아 가게를 돌아다녔다.

“자기,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당신, 김 전무 만났어?”

“하여튼 그 동네 소문도 빨라.”

“세희야, 그 돈 당장 가져와. 사채까지 끌어오면 어떡해! 김 전무가 얼마나 악랄한지 몰라? 그 돈 제때 못 갚으면 너랑 연주 아니, 우리 다 같이 죽는 거라고!”

안쪽 테이블에 앉아 화장을 고치는 세희는 지나치게 여유로웠다.

평창동에 들어갔다가 아연실색할 소식을 들은 상철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세희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그깟 돈 갚으면 되는데 죽긴 왜 죽어? 건물 담보 대출 최대치로 땅겨서 어쩔 수 없었어. 그래도 안면이 있어서 김 전무가 신경 써 주던데? 선이자도 빼주고 이자도 3개월 후부터 붙이겠대.”

“1억 빌렸다며. 이자만 40%야! 한 달 이자가 4천만 원이라고. 그게 감당이 돼?”

“그 이자 붙기 전에 갚을 거라니까. 자기도 연주 말 들었지? 주가가 열 배가 뛴다잖아.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다름없어.”

“정말 그 주식을 사겠다는 거야?”

“당연하지!”

천진한 대답에 깊은 한숨을 내쉰 상철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있는 돈만 가지고 해. 김 전무 돈은 당장 가져와.”

“있는 돈 없는 돈 전부 긁어모아서 30만 주 채울 거야. 그거 열 배면 24억이야, 무조건 해야 하는 거라고.”

“계속 고집부리면 앞으로 생활비 1원 한 푼도 못 줘. 당신 좋아하는 명품? 그 근처에도 못 갈 줄 알아.”

상철이 으름장을 놓자 미간을 좁힌 세희가 벌떡 일어났다.

“그럼 어떡해? 방법이 없잖아! 이게 다 당신 때문이잖아. 애초에 다미를 놓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고. 당장 다미 잡아다 팔 수 있어? CH에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이 돈 벌어서 당장 떠나야 해, 우리!”

그 주식을 백 퍼센트 믿을 수 있었다면 나도 그렇게 단순하게 끝냈겠지. 하지만 K건설 아들이건 VIP투자클럽이건 믿음이 안 간다고, 젠장!

김 전무 돈으로 이제 막 상장하는 기업의 주식을 사들이는 건 너무 큰 도박이었다.

김석호 전무는 평창동에 들어가는 검은돈을 책임지고 있는 남자였다. 다미를 창석에게 넘긴 후 자신이 욕심내 보려던 자리의 주인이기도 했다.

사채업계에서 일인자로 군림하는 그는 돈 앞에서 누구보다 악랄하고 지독했다.

창석에게 여자를 갖다 바치는 일 역시 그의 임무였기에 창석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당신이 말하는 주식 상장 전에 해결할게. 다미 무조건 데려올 테니까 일 잘 풀리면 김 전무 돈 전부 돌려줘.”

“어쩌려고?”

“뭐든 해야지.”

결연함이 담긴 상철의 주먹 위로 굳은살 하나 없는 세희의 손바닥이 감겼다.

“자기야, 저번처럼 실패할 거면 시작도 하지 마. 현태 꼴 당하면 어쩌려고. 처음에 키 큰 남자가 찾아왔을 때 원하는 걸 말하고 끝냈어야 했어. 어르신이고 뭐고 순순히 다미를 내어주면 좋았잖아.”

“나도 일이 이렇게까지 꼬일 줄은 몰랐어.”

인생은 후회의 연속이라더니. 이든에게 진작 원하는 걸 말했더라면.

차병원에서 다미를 빼 왔던 날 곧바로 창석에게 그녀를 넘겼더라면.

아니, 애초에 차설우의 가게가 있는 골목에서 다미를 놓치지 않았더라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딸을 팔아먹으려다가 마주한 상황은 끝없이 자라나는 넝쿨처럼 얽혀 가고 있었다.

질긴 나무줄기가 제 몸을 전부 옭아매기 전에 모조리 잘라내야만 했다.

고생 없이 살아온 세월을 말하듯 부드러운 세희의 손을 잡은 상철의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찼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제 사촌 동생을 만신창이로 돌려보낸 의도는 분명했다.

차설우는 칼을 빼 들었고, 다미를 되찾아 그를 상대하는 것 말고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미를 데려와 숨 쉴 구멍을 만들어 내야 했다.

***

날씨 좋은 주말의 한강 캠핑장엔 많은 인파가 몰렸다. 주차하는 데만 한 시간 가까이 소비한 세 남자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근교에 펜션을 빌릴 걸 그랬어.”

“풀빌라도 괜찮았을 텐데.”

“호텔 파티룸도 나쁘지 않고.”

“왜 하필 한강이야?”

“연이가 좋아할 거 같아서. 보다시피 좋아 죽네.”

불만스러운 이든의 시선을 받은 설우가 제자리를 빙빙 돌며 눈을 굴리느라 바쁜 연에게 턱짓을 했다.

설우를 만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이든과 첸은 물론, 날 때부터 상류층 삶을 영위한 설우 역시 북적이고 치이는 장소를 좋아하지 않았다.

시설 좋고 프라이빗한 곳을 두고 한강을 선택할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쟤는 어딜 가든 좋아했을걸.”

“사람 구경하는 걸 재밌어하더라고. 같이 어울리지 못해서 그런가.”

금세 씁쓸해진 시선들이 신나게 웃고 있는 연에게 닿았다.

“가자, 예약해 둔 텐트는 저쪽이야.”

“연아, 이리 와.”

눈썹을 가리는 하얀 벙거지 모자를 만지작거리며 지나다니는 사람을 구경하던 연이 쪼르르 다가와 설우에게 착, 달라붙었다.

“자석이 따로 없네.”

“이든도 손잡아 줘요?”

“됐어. 모자 안 불편해?”

“응, 괜찮아요.”

치사하다, 차설우.

선뜻 내민 손을 설우가 재빨리 거둬들이자 이든이 입술을 씰룩이며 언짢음을 드러냈다.

모두의 막내를 혼자 차지하려 드는 그가 얄미웠다.

“나랑 이든은 입장권 끊고 필요한 것들 좀 챙겨갈 테니까 넌 연이 데리고 마트 다녀와. 저쪽에 보이지?”

텐트 예약부터 시작해 대략적인 위치를 미리 알아둔 첸이 이든을 잡아끌었다.

“형들끼리 가. 내가 꼬맹이랑 갈게.”

돌아올 대답을 뻔히 알면서 어림없는 말을 내뱉는 이든을 가볍게 무시한 설우는 깍지낀 작은 손을 끌어 마트로 향했다.

“오빠, 마트는 왜요?”

“저녁에 바비큐 해 먹어야지, 고기.”

“아아, 불 확, 올라오면 고기 촤악, 올려서 소주 한잔 캬, 고기 한 점 딱! 이거요?”

다채로운 의성어 때문에 멍해졌던 설우가 눈썹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소주 한잔에 고기 한 점은 아니거든?”

저런 건 또 어디서 배운 거야.

“한 잔만 먹으면 안 되나? 저번에도 못 먹게 하고.”

“약 때문에 안 돼. 너 위스키 잔뜩 마시고 토했던 거 기억 안 나?”

“그건 꿈에서 마셨잖아요.”

“매번 말하지만, 너한테나 꿈인 거지. 그리고 숙취는 현실이었잖아.”

“하긴, 새벽에 속이 타들어 가는 줄 알았어요.”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나 그때 엄청 쫄았어요. 맨발로 쫓겨날까 봐.”

걸을 때마다 아래로 흘러 눈까지 가린 모자챙을 위로 쓱, 끌어 올려준 설우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며 부풀어 오른 분홍빛 볼을 꾹 눌렀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진작 쫓겨났지.”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죠? 처음으로 죽어라 도망쳤는데 그 길 끝에서 오빠를 만났다는 게.”

“천만다행이지.”

“내 모든 불행과 맞바꿀 수 있을 정도의 행운이에요. 오빠랑 이든이랑 첸을 만나려고 그렇게 힘들었나 싶기도 하고.”

“제이에 왔던 날 그랬잖아. 숨겨주지 않으면 죽으려고 했다고. 그 말 진심이었어?”

“네. 팔려 가기도 싫었고, 좀 지쳐있기도 했고요.”

제 앞에선 그저 천진하고 해맑은 연이 죽음을 선택하려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몰려있었던 걸까.

“지금은 그런 생각 전혀 안 하지?”

“당연하죠! 구원받았잖아요, 오빠한테. 지금은 행복해서 죽을 거 같다니까요.”

진심을 담아 환하게 웃는 얼굴에 가슴이 찡, 하고 울려온다.

혼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프고 힘들다고 칭얼대도 괜찮은데.

“왜 이렇게 순하게 컸어.”

“좋게 말하면 순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바보래요.”

“이든이?”

“네.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가 되는 거라고 그랬어요. 센터에서 나한테 뭐라고 하는 아줌마들 대신 안 혼내줄 거니까 직접 따지라고. 10동 아줌마한테 심한 말을 한 건 이든의 영향이 컸죠.”

“순한 게 바보는 아닌데 그럴 땐 화내는 게 맞는 거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마트 입구에 도착했다.

그리 크지도 않은 마트에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을 본 설우가 저도 모르게 연의 손을 강하게 쥐었다.

“아파요, 오빠.”

“미안. 오빠 팔 잡고 잘 붙어 있어.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고.”

“고기가 제일 먹고 싶어요.”

“그래.”

이든을 데려올 걸 그랬나.

사람이 워낙 많은 탓에 한 손으로 카트를 끌며 제 팔을 잡은 연을 챙기고 장을 보는 게 녹록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뛰어다녀도 누군가와 부딪힐 일 따윈 없는 펠리체 안의 마트만 다니다 보니 끊임없이 어깨가 닿는 좁은 공간이 영 불편했다.

“오빠, 라면도 사요?”

“응, 사. 모자 좀 올리고. 그러다 앞도 안 보이겠어.”

“올려도 계속 내려가는걸요.”

“머리가 너무 작아서 그래.”

라면 한 묶음과 과자를 골라 넣고 다가간 과일코너 역시 한창 북적이고 있었다.

연이가 좋아하는 딸기, 복숭아, 오렌지.

옆에서 쉴 새 없이 재잘대는 목소리에 가볍게 맞장구를 쳐주며 과일을 골라 담았다. 반나절에 해치우기엔 지나치게 많은 양이었다.

과일 시식을 위해 몰린 사람들을 지나쳐 축산코너에 가까워진 설우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연아.”

제 팔을 잡은 작은 악력이 사라진 것을 뒤늦게 느낀 설우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분명 옆에 있었다. 분명 있었는데. 아니, 없었나? 언제까지 옆에 있었지? 복숭아를 집을 땐 있었는데.

“연아?”

카트를 내팽개치고 뒤를 돈 설우가 바짝 달라붙은 사람들을 밀쳐가며 연을 찾았다.

동시다발적인 비난이 터져 나왔지만, 그의 귓가엔 닿지 않았다.

하얀 모자, 하얀 모자. 왜 안 보이는 거야.

몇 분 지나지도 않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거세게 눈을 비빈 설우가 다시 연을 찾아 움직였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조심해요, 아가씨. 사람도 많은데.”

과일 코너의 아래. 떨어진 모자를 주워 툭툭 털고 일어나던 연이 지나가는 남자의 다리에 부딪혀 주저앉는 게 보였다.

가는 실에 간신히 매달려있던 심장이 가차 없이 아래로 툭, 떨어지는 기분이다.

“오빠?”

열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제 옆에 연이 서 있지 않음에 놀라 한 치 앞도 보지 못한 것이다.

하아.

안도의 한숨과 함께 다가간 설우가 거친 손길로 연을 당기자 간신히 주운 모자가 손에서 사라졌다.

“놀랐잖아.”

언제나 작게만 느껴지는 몸을 최대한 깊숙이 끌어안은 설우가 가는 어깨로 고개를 떨궜다.

“모자가 벗겨져서. 죄송해요.”

“잃어버린 줄 알았어.”

“되게 잠깐이었는데. 나 안 보였어요? 나는 오빠 보였어요. 빨리 줍고 따라가야지 했거든요.”

“응. 이렇게 튀는 금발이 안 보이더라. 눈이 멀었나 봐.”

“무슨 그런 말을 해요. 쪼그려 앉아서 안 보였을 거예요, 오빤 키가 크니까.”

옆에 없다는 사실 하나로 사고회로가 전부 작동을 멈췄다.

연을 잃어버렸다는 공포가 새하얘진 머릿속을 빠르게 채우니 겁이 나 눈앞이 아찔했다.

그녀가 제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다시 한번 깨우치게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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