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45화 (45/96)
  • 45화.

    무섭지만 무릎을 꿇을 순 없었다.

    비굴한 모습을 보이기엔 센터장실 문 앞에 모인 부하직원이 너무 많다.

    일부러 문을 활짝 열어두고 굴욕을 주는 거구나.

    고민 끝에 은주는 소파에 앉는 것을 택했다.

    “아래층에 검사를 보낸 게 전부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입은 웃고 있지만 매서운 눈매는 휘어지지 않았다.

    “그, 그게….”

    “아비에게 딸을 찾아주는 건 옳은 일이라고 자위하면서 그 착한 애를 백창석한테 노리개로 쥐여주려 했던 거잖아. 의사씩이나 돼서, 고작 이 방의 주인이 되어보겠다고. 감히 내가 품에 끼고 있는 아이를, 겁도 없이.”

    서슬 퍼런 눈동자가 번뜩였다.

    최대한 냉정하고 차분하게 마무리 짓고 싶었지만, 잘못했다고 빌기는커녕 남들의 이목을 살피며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여자를 보니 목덜미에 힘줄이 불거졌다.

    “문 좀 닫아줘요. 닫고 이야기해요.”

    “정신과 상담이 적대적이었다, 다른 정신증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나를 속이려고 작정한 이 두 마디를 믿고 혼자 있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애를 기어이 병실에 처넣던 내 기분이 어땠을 거 같아.”

    차설우 사장과 그 여자아이를 떼어놓기 위해 늘어놓았던 거짓 진단이 떠오르자 무릎 위로 올려둔 두 손이 잘게 떨렸다.

    “서, 선택은 차 사장이 했잖아요. 차 사장이 반대했다면 결국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에요.”

    “아줌마, 뚫린 입이라고 막 지껄이지 마. 의사가 아프다고 하는데 보호자가 별수 있어? 아줌마도 그 마음 이용했던 거잖아!”

    “맞아, 덕분에 뼈에 사무치는 후회가 뭔지 알게 됐지. 그래서 당신한테도 알려주려고.”

    발끈해 위협적으로 다가서는 이든을 저지한 설우가 가져온 서류 봉투 안에 든 내용물을 꺼내 은주의 앞에 놓아주었다.

    “뭐예요, 이게?”

    “남편 황정식, 한국대 교수. 여자가 없으면 붙여서라도 망신을 줄 작정이었는데 마침 있더군. 20살 어린 조교수. 이건 오전 중으로 기사 나갈 거야. 남편한테 언질이라도 해주든지. 강의 도중에 기사 터지면 곤란할 거 아냐.”

    생각지 못한 설우의 방식을 마주한 은주는 남편의 불륜 사진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가정적이고 점잖은 그에게 여자가 있을 거란 의심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었다.

    업무를 미뤄두고 센터장실 앞에 서 있던 직원들이 술렁였다.

    “황 교수님이 여자가 있다고? 세상에 웬일이야. 엊그제도 도시락 싸 들고 오셨잖아.”

    “설마, 아니겠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을 믿어?”

    “기사 터진다잖아!”

    “나 근데 저 남자 알 거 같아.”

    “누군데?”

    “CH파라다이스 사장. 이름이 차설우 였나. 얼마 전에 파혼이니, 결혼이니 했던 기사 봤었거든.”

    “진짜? 아침 댓바람부터 이게 무슨 일이래. 센터장님 차병원에 있다가 갑자기 이리로 오신 거랑 관련 있는 건가? 차병원이 CH 계열이잖아.”

    “문 좀 닫아달라고요, 제발!”

    센터장실 안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데스크로 새어 나가는 것처럼 직원들의 목소리 역시 안으로 흘러들었다.

    은주가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지르자 순간적으로 수군거림이 멎었다.

    문지기 역할을 하는 이든은 애처로운 은주의 시선을 비웃으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러게. 다람쥐 돌보느라 숨죽이고 지내는 사나운 짐승을 왜 건드리냐고.

    “첫째 아들 황유성, 서울남부지검 특수부 검사. 더위를 많이 타면 영월, 추위를 많이 타면 해남. 직접 가서 물어봐, 어디가 나은지.”

    “뭐 하려는 거예요?”

    “돈에 제일 크게 휘둘리는 게 공권력이야. 평검사 하나 좌천시켜 지방에 처박는 거, 어렵지 않다고.”

    남편의 불륜 사진 옆으로 첫째 아들의 가족사진이 놓이자 은주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요동쳤다.

    “내, 내가 한 짓이잖아요! 왜 죄 없는 가족들을 들먹여요!”

    “당신 가족이니까. 설마 내가 당신 하나한테만 죗값을 받아낼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 그럼 좀 서운한데. 날 너무 쉽게 본 거잖아. 하긴, 애초에 쉽게 봤으니 평창동 노인네한테 동조했던 거겠지.”

    “잘못했어요. 여기저기서 안 좋은 소식만 들려오니까 내가 미쳤었나 봐요. 출세에 눈이 멀어서!”

    “둘째 황재성. 엘리트 코스 밟은 형이랑은 정반대던데. 술 좋아하고 여자 밝히고 거기다 도박까지. 대부 업체에 있던 부채는 내가 가져왔어. 5억 가까이 되던가. 돈 있으면 대신 갚아줘. 저 자식이 데리고 있는 애들이 인정머리가 없어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

    비릿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설우가 삐딱하게 선 이든을 가리켰다.

    “윽, 으흑….”

    둘째 아들의 사진까지 놓이자 결국 눈물이 터져 나왔다.

    출세욕이 많았을 뿐 은주는 그저 평범한 여의사였다. 작정하고 물어뜯는 설우를 견뎌낼 재간이 없다.

    “셋째 황수진. 배우 지망생. 예쁘장하게 생겼더군. 나이도 어리고.”

    “아악! 잘못했어요, 잘못했습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어요!”

    막내딸의 프로필 사진을 보고 기겁한 은주가 재빨리 바닥으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평창동 노인네가 딱 좋아할 스타일이라 자리를 마련해 볼까 하는데. 박 교수 딸이라고 하면 더 좋아하겠네요.”

    “요, 용서해주세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원하시는 건 전부 할게요! 제발 아이들은, 아이들은 건들지 말아 주세요.”

    “제 자식 소중한 걸 알면 남의 자식 귀한 줄도 알았어야지. 다 늙은 평창동 노인네보다 날 두려워했어야지. 아쉽네, 그쪽에서 꾸미는 일을 나한테 알렸다면 지금보단 훨씬 좋은 결말을 맞이했을 텐데.”

    바닥에 납작 엎드린 은주가 아차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나이가 들어 머리가 굳은 건지, 하나만 알고 둘을 몰랐다. 백창석이 아닌 차설우에게 줄을 섰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시면 선우연 양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무릎을 꿇었으니 한 명은 구제해드리죠. 남편은 아닐 거 같고. 첫째, 둘째, 셋째 중 하나만 고르세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어도 더 아픈 손가락은 있기 마련이니까. 그럼 잘 골라서 연락해요.”

    “아, 안 돼요! 제발!”

    명함을 두고 일어난 설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은주가 애원했다.

    셋 중 하나라니. 그럼 나머지 둘은, 둘은 어떡하라고!

    설우는 구둣발을 거칠게 흔들어 은주를 떼어냈다.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설우의 눈동자에 얇은 실핏줄이 도드라졌다.

    ‘싫어요, 혼자 병원에 있는 거 싫어요.’

    ‘오빠, 제발요.’

    ‘오빠, 정말 안 돼요?’

    잊고자 했던 순간이 떠오르니 힘이 잔뜩 들어간 손이 파르르 떨린다.

    “싫다고 애원하는 애한테 막말까지 해대면서 입원을 시켰거든? 근데 그다음 날에 약에 취해서 사지가 묶인 꼴을 보게 된 거야. 어때, 내가 제정신이었겠어?”

    “그 사람들이 그런 짓까지 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셋 중 하나라도 제대로 살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

    똑같이 묶어 정신병원에 처넣고 싶은 걸 참고, 또 참은 거니까.

    “으흐윽, 안 돼요….”

    “너무 억울해하지 마. 다른 것들은 당신보다 더한 지옥을 맛볼 테니까.”

    절망한 은주가 바닥을 구르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지만 설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잔인하다, 잔인해.

    이든이 고개를 흔들며 뒤를 따랐다.

    잔인하지만, 아주 차설우 다운 보복이었다.

    설우의 차가 들어온다는 알림을 들은 연이 후다닥 로비로 뛰어갔다.

    “오빠!”

    “잘 잤어?”

    나갈 준비를 마친 건지. 연분홍색 원피스를 펄럭이며 달려온 연을 가볍게 안아 든 설우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 갔다 왔어요?”

    “이든이랑 일하러. 아침은 먹었어?”

    “첸이 소고기 구워줘서 엄청 먹었어요.”

    “약은?”

    “좀 전에 먹었고요.”

    “어우, 소름 끼쳐.”

    한 시간 전과 상반된 모습으로 살뜰히 연을 챙기는 설우를 지켜보던 이든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요, 이든?”

    “그냥 너랑 있는 형을 보면 종종 소름이 끼쳐.”

    한 사람과 그 가족들의 일상을 산산조각 낸 남자와 연을 안고 웃는 남자를 같은 사람으로 봐야 하는 걸까.

    무서운 우리 형.

    “시답지 않은 소리 하지 말고 짐이나 챙겨.”

    “짐? 필요한 게 있나?”

    “연이 베개랑 이불. 따뜻한 옷 같은 거.”

    “아아, 알았어.”

    언제 어디서 잠들지 모르니 챙겨두는 편이 좋았다.

    마중을 나가면 언제나 저를 안아 들고 드레스룸까지 들어오는 탓에 그의 시계가 전시된 아일랜드 서랍장은 선우연 전용 의자가 되어버렸다.

    서랍장 위에 앉은 연이 두 발을 허공에 휘저었다. 외출할 생각을 하니 벌써 기분이 좋다.

    “옷 갈아입을 거예요?”

    “응, 편한 옷으로.”

    이미 와이셔츠를 벗은 설우는 남색 니트를 꺼내 입고 있었다.

    “설마 바지도요?”

    “눈 감아.”

    설우가 허리춤에 손을 대자 큰 눈이 황급히 감겼다.

    매번 옷을 갈아입으면서 왜 데리고 들어오는 거야, 부끄럽게.

    발개진 볼을 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숙이는 연에게 다가선 설우가 예고 없이 입을 맞췄다.

    화들짝 놀라, 감고 있던 눈을 뜬 연이 제 허리를 감싸 오는 손길에 다시 눈꺼풀을 내렸다.

    한참을 붙어 타액을 섞던 입술이 떨어지자 작은 숨소리가 드레스룸을 울렸다.

    “더 해줄까?”

    찰랑이는 금발이 위아래로 요동쳤다.

    야릇한 미소를 지은 설우가 부족한 욕망을 채우려 연의 목덜미를 감쌌다.

    “형! 다 챙겼어, 빨리 가자!”

    연의 방에서 이든이 큰 소리로 설우를 찾았다.

    통로를 타고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연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든은 정말 바보예요.”

    아쉬운 입맛을 다시는 연을 다시 안아 든 설우가 씩, 웃으며 드레스룸을 나섰다.

    “오늘은 같이 자자. 자기 전에 해줄게.”

    “많이?”

    “많이.”

    키스를 해주겠다는 약속에 원 따봉이 돌아왔다. 엄지손가락이 이렇게 헤퍼서야.

    “차는 한대로 갈까?”

    “많이 끌고 가봐야 주차하기만 힘들 거야. 한대로 가자.”

    “꼬맹이 언제까지 안고 있을 거야, 버릇 나빠져.”

    안아주는 것으로 연의 버릇이 나빠진다면 두 번째로 지분이 많을 이든이 짓궂게 웃으며 타박했다

    “한남동에 들어가면 이렇게 안고 다닐까 봐.”

    “회장님 뒷목 잡고 쓰러지실걸.”

    “한남동에선 왜요?”

    “펠리체처럼 안전하지가 않아서 불안해.”

    “한남동 정원에 있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이제 나가자.”

    “네!”

    스르륵, 허공에서 내려온 연이 곧바로 설우의 손을 잡았다.

    주말이 아니면 함께하는 시간이 적은 터라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센터 다니는 건 어때, 재미있어?”

    마지막으로 차에 오른 설우가 연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어두운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가자 새파란 가을 하늘이 펠리체의 높은 담장을 지나쳐 흐르고 있었다.

    “네.”

    “뭐가 제일 재미있는데.”

    “다 좋아요. 승마도 해보고 싶어요.”

    “그건 절대 안 돼.”

    그저 희망 사항을 이야기 한 것일 뿐. 단호한 설우의 반응은 예정되어 있었기에 연은 실망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 꼬맹이 빨리 말해.”

    “뭐를요.”

    “그거 있잖아.”

    “그게 뭔데요.”

    뒷좌석으로 상체를 돌린 이든이 웃음을 참으며 알 수 없는 말을 하자 설우의 손가락을 가지고 놀던 연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한강까지 가는 동안 저를 놀리려는 게 분명했다.

    “너 센터에서 왕따잖아. 빨리 형한테 일러야지.”

    “아, 이든! 왜 그런 걸 말해요!”

    “푸흡!”

    “큭큭. 아, 귀여워.”

    오랜만에 듣는 단어에 운전대를 잡은 첸도 웃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폭로에 발끈한 연이 몸을 바로 세우며 이든의 팔뚝을 퍽퍽 두드렸다.

    “왕따야?”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나 빼고 다 아는 사이니까 자기들끼리 노는 거죠. 그리고 내가 일부러 안 어울리는 거예요.”

    “그래, 이든이랑 놀아. 친해져서 좋을 거 없어.”

    “웃으면서 말해서 그렇지, 심할 때도 있어.”

    “뭐가 심한데?”

    설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심한 거 없거든요. 다 무시하면 그만이에요.”

    “제일 심했던 게 뭐였더라. 아침부터 연이를 봐서 재수 없다고 했었나?”

    “뭐?”

    “10동 사는 아줌마가 그런 적 있긴 한데….”

    “그걸 가만히 뒀어?”

    “난 못 들었어. 꼬맹이가 와서 말해 준 거지.”

    “왜 오빠한테 말 안 했어. 너무 심하잖아. 첸, 10동 사는 인간들이 누구지?”

    펠리체로 돌아와 온화하게 풀렸던 설우의 얼굴에 다시 균열이 일어났다.

    뭐? 재수가 없어?

    “오빠, 근데 그게 사실은….”

    “끝까지 들어 봐. 대박이야.”

    “10동 아줌마 남편이 맨날 어린 여자랑 바람을 피운대요. 그래서 약혼한 남자 뺏었다면서 나도 싫어했거든요.”

    센터에 있다 보면 듣고 싶지 않아도 듣게 되는 여러 이야기가 있었다. 10동 부부의 불화설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자기 남편이 바람피운 걸 가지고 너한테 화풀이 한 거잖아.”

    “마주칠 때마다 한마디씩 하다가 며칠 전에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화가 나서….”

    “화가 나서?”

    “아줌마 성격이 못돼 처먹어서 남편이 바람피우는 거라고 그랬어요. 맨날 나쁜 말이나 하고 다니니까 아줌마를 안 좋아하는 거라고.”

    “세상에, 연이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하하! 다시 들어도 재미있어.”

    놀라 입을 벌린 첸과 다르게 미리 알고 있던 이든은 또다시 박장대소를 했다.

    “아줌마가 갑자기 울어서 조금 미안했어요. 그래서 오빠한테 말도 못 했고요.”

    꼭 나쁜 짓이라도 한 것처럼 심각하게 사실을 털어놓는 연을 마주 본 설우가 부들부들 떨리는 입가로 손을 올렸다.

    “네가 울렸다고? 사람을?”

    “울 줄은 몰랐어요.”

    상간녀라는 둥, 남의 남자 뺏은 뻔뻔한 년이라는 둥. 독한 얼굴로 폭언을 쏟아붓던 여자가 그런 식으로 울음을 터뜨릴 줄이야.

    “잘했어.”

    “네?”

    “아주 잘했어, 최고야.”

    연이 설우에게 주던 엄지가 돌아왔다.

    엄지손가락을 한껏 추켜세웠던 설우가 앙증맞은 양 볼에 쪽쪽, 뽀뽀까지 해주었다.

    헛구역질을 하는 첸과 이든은 중요하지 않았다.

    제게 해가 되는 사람에게 화를 낸 연이 매우 흡족한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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