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44화 (44/96)

44화.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고요한 차 안에 갇힌 연은 고집스럽게 정면을 응시하는 설우를 흘깃거렸다

왜 화가 났지.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

창문을 오르내리는 버튼을 딸깍였다가 콘솔 박스에 담긴 껌 통을 흔들어보고 잘 꽂힌 안전벨트를 당겨 보며 변덕스럽게 손을 놀리던 연이 시트 위로 두 다리를 올려 무릎을 세웠다.

“다리 내려, 위험해.”

“나 보여요?”

“보여.”

“오빠 내가 뭐 잘못했어요? 말해주세요. 말 안 해주면 잘 몰라요, 나.”

차 안에서 무정하게 구는 설우는 처음이었다.

둘이 있을 때건 운전기사가 있을 때건, 잠시도 손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던 그였기에 더욱 눈치가 보였다.

“화 안 났어.”

“그럼 손잡아도 돼요?”

무릎을 덮은 치맛자락을 꼭 손에 쥔 연이 용기를 냈다.

모처럼 펠리체 밖으로 나왔는데.

집이 그리워지는 침묵을 깨고 싶었다.

연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하얀 손을 내밀자 속절없이 올라가는 입매를 잡지 못한 설우가 입가를 가린 채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낮에도 밤에도 혼자 애걸복걸하는 게 문득 억울해져 연에게서 돌아올 반응을 뻔히 알면서도 애를 태운 것이었다.

“운전할 때 손잡으면 위험해.”

“저번엔 잡았었는데….”

갈 곳을 잃은 손이 다시 치맛자락 위를 돌아다녔다.

세상 물정은 쥐뿔도 모르는 어린 다람쥐에게 하기엔 못난 짓임을 알지만, 사랑이 주는 수십 가지 감정 앞엔 저도 수가 없다.

“한서준이네. 키스만 잘하면 연이가 나만큼 좋아하는 한서준.”

“나 그런 말 한적 없어요.”

“한서준이 준 휴대 전화도 당장 개통해야겠다. 키스만 잘하면 나만큼 좋다는 남자가 준 선물인데.”

신호가 걸린 틈에 옆 차선에 붙은 버스 광고판에 대문짝만하게 걸린 서준의 얼굴을 발견한 설우가 빈정거렸다.

의기소침한 연에게 주는 작은 힌트였다.

한서준, 한서준. 설우의 입에 여러 번 오르내리는 이름을 되뇌던 연이 짝, 소리가 나게 손뼉을 쳤다.

“한서준.”

“그래, 한서준. 이제 외간 남자 이름까지 막 부른다 이거지?”

왜 굳이 한서준이 나오는 드라마만 찾아보냐고 타박하던 모습이 떠오르니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둘 다, 란 대답이 문제였구나.

“오빠, 아까 내가 말을 잘못했어요.”

“늦었어.”

“나 한서준 씨 하나도 안 좋아해요. 식당에서는 키스 하고 난 다음이라 몽롱하기도 했고. 아니, 아니. 졸렸던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실수했어요.”

“더 해 봐.”

“휴대 전화도 필요 없어요! 이든이 오빠한테 전화도 잘 걸어주는걸요. 음, 그리고 또… 아! 한서준 씨 나오는 드라마도 이제 안 볼게요. 난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으니까, 오빠가 싫어하는 건 절대 안 해요.”

운전석을 향해 몸을 반쯤 돌린 연이 횡설수설 떠오르는 대로 말을 뱉었다.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하니 만족스러운 미소로 얼굴을 밝힌 설우가 한 손을 내어주었다.

내색은 않았지만, 마지막 말에선 심장이 찌르르 울리기까지 했다.

사랑과 소유욕의 크기가 비례하니 연에겐 미안하지만, 간간이 이렇게 잡아줘야겠다.

“화난 건 아니었어.”

“그럼요?”

“삐친 거지. 내가 원래 속이 좁은 편은 아닌데 그냥 좀 서운했어. 네가 내 입술만 좋아하는 거 같아서. 아니, 내 몸을 좋아하는 건가.”

“오빠랑 입술이랑 몸은 전부 같은 건데 더 좋아하고, 덜 좋아하는 게 어디 있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원하던 손을 얻어낸 연은 뼈대가 도드라진 손가락 마디를 문지르고 튀어나온 힘줄을 마음껏 눌러댔다.

아닌 게 아닌 거 같아 문제지.

“더 좋아해 줘.”

“네?”

“나 좀 더 좋아해 달라고.”

여전히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설우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연의 손을 잡았다.

“여기서 더요? 그럼 오빠 부담스러울 텐데. 사실 조금 참는 거거든요. 방금도 엄청 귀여웠어요. 여자들이 오빠 되게 좋아하죠? 하긴 술 먹고 찾아오는 여자도 있었지.”

“예쁘게 종알거리지 마. 운전에 방해돼.”

“손 놓지 말아요.”

“그래.”

다행이다, 오빠 기분이 풀려서.

사납고 차가운 설우를 손쉽게 무장해제 시킨 연이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꼿꼿이 세웠던 등을 시트에 편히 기대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오색찬란한 불빛이 어두운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주말의 밤거리는 어느 곳이든 화려했다.

우르르 모여 웃고 떠드는 무리를 보는 연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연아, 졸려?”

“아뇨. 밖에 구경하고 있어요.”

주황색 신호등을 보고 천천히 차를 세운 설우가 고개를 돌렸다.

연이 보고 있는 것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거리를 돌아다니는 모두를 보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부러워?”

“아주 조금.”

“왜 아주 조금이야.”

많이 부럽다고 하면 오빠가 마음 아플 테니까.

“오빠랑 첸이랑 이든이 펠리체에서 잘 놀아주니까. 꼭 저렇게 밖에서 안 놀아도 좋아요. 밖에서 놀면 위험하기만 하잖아요.”

“오늘 못 간 한강은 내일 가자.”

“내가 또 자면요?”

“그럼 내가 안아서 데리고 나올게. 그리고 너 일어날 때까지 있으면 돼.”

“정말요?”

“응. 요트 타고 보는 야경은 저 길보다 훨씬 예뻐.”

“빨리 가고 싶다.”

알게 모르게 시무룩해졌던 얼굴이 금세 웃음을 되찾고 고개를 끄덕인다.

제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밖에 나와 노는 것을 보니 얼마나 부러울까.

혼자서 한 발 내딛지도 못하는 삶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고 했다.

수면장애와 우울증은 뗄 수 없는 사이니 심리 상담도 꾸준히 진행 해야 한다고.

워낙 맑고 밝은 아이라 그런 걱정은 없다고 호언장담했던 제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오빠가 뭐라고 그랬지? 연이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생길 때마다 전부 말하라고.”

“그래, 네가 원하는 건 다 해줄 거야.”

“짱.”

창가로 향했던 눈길을 거둔 연이 씩, 웃으며 엄지를 세웠다.

씁쓸한 마음은 밀어내고 그녀를 따라 똑같이 웃어준 설우는 어서 이 길에서 멀어지길 바라며 서둘러 엑셀을 밟았다.

“오빠가 오늘 일이 많아서.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되기도 하고. 점심 먹기 전엔 올 거니까 첸이랑 아침 먹어.”

분홍색투성이인 방의 분홍색 침대에 누운 연은 빨간 자국이 사라지지 않은 팔목을 내밀었다.

방에 혼자 재우는 게 미안한 설우가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이든도 없어요?”

“응, 이든이랑 같이 나갔다 올 거야. 딩가딩가 놀고 있지 말고 한강 갈 준비해 둬.”

“네, 이제 묶어 주세요.”

손목을 두른 자국을 따라 그대로 감긴 검은색 끈은 보는 사람의 숨을 막히게 한다.

가장 부드럽고, 가장 자극이 가지 않는 억제대를 구해봤지만 하얀 살결을 옥죄이는 압박은 지워지지 않는 문신을 새긴다.

“오늘 어땠어?”

“좋았어요. 맛있는 것도 먹었고 삼촌도 생겼고 어머님도 너무 멋있으세요. 어머님이 다음에 쇼핑하자고 하셨어요. 내가 입으면 예쁠 거 같은 옷이 많대요.”

“우리 엄마가 원래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닌데. 네가 마음에 들었나 봐.”

“왜요? 너무 좋으시던데.”

단단히 묶인 손발을 확인한 설우가 침대 아래에 앉아 연의 손을 잡았다.

베개 위로 흐트러진 금발을 정리해주니 배시시 웃은 연이 약 기운에 흐릿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설우의 손길을 느꼈다.

“엄마는 욕심이 많았어. 그래서 아버지랑 결혼했지. 그 시절만 해도 여자가 대기업 오너가 되긴 힘들었거든.”

“오너?”

“최고로 높은 사람.”

“아아. 지금은 최고로 높으세요?”

“응.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나가는 여성 오너지. 그게 날 버린 대가였어.”

“오빠를 버렸다고요? 아닌 거 같은데….”

“버렸었어, 그때는.”

“그래서 슬펐어요?”

“슬펐다기보단 외로웠지.”

그래서 너희 가족에게 큰 애착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부모가 버젓이 살아 있음에도 없는 것처럼 지내온 제게 온기 넘치는 정을 알려주고 보듬어 준 이들.

여전히 욕심 많은 조부와 욕심이 많아 어린 저를 포기했던 엄마를 원망할 일도 아니다.

나 또한 욕심이 많아 너무 늦어버렸다.

이상하리만큼 연락이 닿지 않았을 때 한국으로 돌아왔다면 거리를 돌아다니는 평범한 일상을 부러워할 일은 생기지 않았을지도.

“괜찮다고 했잖아요.”

“뭐?”

“묶을 때마다 맨날 똑같은 표정이라고요. 내가 더 마음 아파지는 표정.”

“네 마음 아프게 하기 싫은데.”

“그럼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묶이는 것도 괜찮고, 밖에 못 돌아다니는 것도 괜찮으니까….”

서서히 어눌해지던 말을 끝내지 못한 연이 눈을 감았다.

“사랑해.”

연의 손등을 연신 쓰다듬던 설우가 작게 읊조리며 바랐다.

나쁜 꿈도, 좋은 꿈도. 그 어떤 꿈도 꾸지 말고 편히 잠들기를.

“우음, 첸?”

“응, 잘 잤어?”

“네. 오빠는 나갔어요?”

“조금 전에. 안겨, 아침 먹으러 가자.”

설우 대신 연을 깨우러 들어온 첸이 억제대를 풀며 붉게 달아오른 손목을 여러 번 주물렀다.

“오빠한텐 비밀이에요.”

“당연하지.”

약 기운이 남아 현기증이 도는 머리를 흔든 연이 자세를 낮춘 첸의 목에 팔을 걸었다.

“오늘 아침은 뭐예요? 고소한 고기 냄새가 나는데?”

“오, 천잰데? 소고기 구웠어.”

“맛있겠다.”

커다란 보폭으로 금세 다이닝룸에 도착한 첸이 살포시 연을 앉혀 두고 물수건을 가져다주었다.

육즙이 흐르는 소고기와 쌈 채소,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를 앞에 둔 연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하게 웃었다.

“찌개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근데 오빠랑 이든은 어디 간 거예요?”

“아침 일찍 만날 사람이 있어서. 금방 올 거야.”

“점심 먹기 전에 온대요. 그리고 우리 오늘 한강 가잖아요. 약 먹고 절대 안 잘 거예요.”

“그래, 얼른 먹어.”

고기 두 점을 넣고 싼 상추쌈을 내민 첸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망설임 없이 덥석 받아먹고 입을 오물거리는 연의 모습이 귀여워 또다시 웃음이 났다.

한남동으로 들어가면 이 소소한 유희도 끝이구나.

다른 것보다 아침밥을 차려줄 수 없다는 게 가장 아쉬운 그였다.

***

백하대병원 수면센터에 도착해 박은주 교수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의사라는 여자가 겨우 수면센터장 자리 하나에 환자를 납치하는 범죄에 가담하다니.

“누구시죠? 약속 잡고 오셨나요?”

센터장실 데스크에 앉아있던 비서가 벌떡 일어났지만 설우와 이든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 이봐요!”

약간의 소란과 함께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린 문을 어이없게 바라보던 은주가 이른 아침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하고 만년필을 떨어뜨렸다.

“뭘 그렇게 놀랍니까.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연이를 돌보느라 내가 좀 늦었죠.”

어쩔 줄 몰라 눈을 굴리는 여자를 보며 피식, 웃은 설우는 자연스럽게 소파 상석을 차지했다.

활짝 열린 문밖으로 센터장을 보필하는 직원들이 모여 웅성거렸다.

이제 막 출근을 해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이들도 보였다.

이든은 나무 문짝에 기대어 휴대 전화를 꺼냈다. 설우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닫힐 수 없을 문이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달은 은주가 천천히 일어나 설우에게 다가왔다.

“딸을 데려가는 거라고 했어요. 차 사장이 자기 딸을 데려간 거라고, 찾아야 한다고 했다고요.”

“그 머리로 어떻게 의사가 되셨을까. 연륜도 있으신 분이 변명이 가소롭네.”

“나, 난 아래층에 검사를 보낸 게 전부예요.”

“잘못을 인정할 마음이 없어 보이니 이야기가 더 길어지겠네, 앉아요. 아, 무서우면 바닥에 꿇어도 됩니다. 혹시 모르잖아. 꿇은 사람 성의를 봐서 내가 좀 봐줄지.”

높은 곳에 있는 건 은주였지만, 꼭 설우가 은주를 깔아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위압감이 컸다.

냉기를 뿜어내는 젊은 남자는 장년에 접어드는 여의사를 작정하고 희롱했다.

얽힌 악연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눈살을 찌푸리기 충분한 장면이었지만, 설우에겐 가벼운 시작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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