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일어나 반겨주는 성진과 악수를 한 연은 다른 어른들에게도 꾸벅,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신없이 인사하는 연의 어깨를 감싼 설우가 첸의 옆자리 의자를 빼내 주었다.
“식전 죽 놓아드리겠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전복죽과 애피타이저로 나온 냉채가 테이블 위로 올랐다.
음식 서빙이 끝나고 주인을 찾아가는 포크를 어이없게 보던 성태가 눈썹을 들썩였다.
“쯧.”
뾰족하게 반짝이는 은색 쇠붙이는 다 큰 성인들의 식사 자리, 그것도 상견례라는 감투가 쓰인 자리엔 어울리지 않았다.
“드세요, 아버지. 그래야 저희도 먹죠.”
현준이 눈치껏 예의를 차렸다.
성에 차지 않는 손자며느리를 앞에 두고 신경이 곤두선 차 회장은 미간을 있는 힘껏 좁힌 채 쓸데없이 식기를 만지작거리는 연을 노려보았다.
“한남동에 들어오면 식사예절부터 배워야겠구나. 관우 어미한테 일러뒀으니 차씨 집안의 며느리로서 갖춰야 덕목들 전부 빠짐없이 배우도록 해.”
“아, 제가 말씀을 안 드렸나요?”
“무슨 말.”
“출근할 때 같이 나갔다가 퇴근할 때 데리고 들어올 거라 할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집안일은 배울 시간이 없을 겁니다.”
“네놈이 그러고 싶다 하면 내가 오냐, 그래라. 하고 두고 볼 줄 아는 게야? 가르칠 게 태산인데 어디 헛소리를 해대고 있어.”
뜨거운 죽을 휘저으며 역정을 내는 조부를 앞에 두고도 태연한 설우는 적당한 크기로 자른 편육 위에 새콤한 냉채를 얹어 연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죽 먼저 먹고. 계속 자느라 배고팠겠다. 얼른 먹어.”
“네.”
어쩔 줄 모르는 눈동자를 마주한 설우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은 그제야 죽을 떠먹기 시작했다.
낯선 집단 속에 던져진 막내를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던 첸과 이든도 뒤이어 숟가락을 들었다.
“헛소리 아니고 진심입니다. 혼자 둘 생각 없어요.”
“정신 빠진 놈.”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차 회장이 입을 닫았다.
“유린기와 대게 살 볶음 놓아드리겠습니다.”
노기 어린 비난이 이어질 타이밍에 끼어든 직원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새로운 요리를 서빙했다.
원형 테이블에 놓인 음식의 가짓수가 많아질수록 설우의 손도 바빠졌다.
잘 가꾼 정원을 더럽힌 잡초를 보듯 하찮게 깔아보는 차 회장의 시선을 담담히 이겨낸 연은 부지런히 포크를 움직였다.
혀를 즐겁게 하는 맛있는 음식 덕분에 독살 맞은 언사를 금세 떨쳐낼 수 있었다.
“복스럽게도 먹네. 난 뭐라고 불러야 하지? 조카며느리?”
“그냥 연이라고 부르세요. 엄마도요.”
제 입보다 커 보이는 튀김을 한입에 모조리 집어넣는 것을 보며 낮게 웃은 성진이 말을 붙였다.
“그래. 말은 편하게 해도 되겠죠?”
“그럼요.”
“연이도 편하게 외삼촌, 아니 삼촌이라고 불러.”
“네, 삼촌.”
친근감 가득한 호칭이 빠르게 돌아갔다.
연은 붙임성이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제게 호의적인 사람에겐 살갑게 다가섰다.
처음 설우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쳤던 발버둥이 부족한 사회성을 채우는 그녀만의 방법이 된 것이었다.
“연아, 이것도 먹어. 혹시 졸리면 눈치 보지 말고 곧장 말하고.”
접시에 놓아주기 무섭게 연의 입속으로 사라진 닭고기의 빈자리를 보며 피식 웃은 설우가 빵빵하게 튀어나온 볼을 쓰다듬었다.
“크흡…!”
외조카의 다정한 손짓을 목격하고 사레가 들린 성진이 급하게 냅킨을 찾았다.
“쟤 귀신 들렸다니까.”
“귀신 안 들렸다고요. 왜 자꾸 귀신 타령이세요, 어디 무당 친구라도 생기신 거예요?”
“어머, 까칠해진 것 봐. 귀신 나갔다 보다.”
설우의 이상행동을 연이어 목격한 화진이 말장난을 치자 여기저기서 웃음을 터뜨렸다.
차 회장이 입을 닫으니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지속 되었다. 예상보다 평화로운 식사였다.
“형 요즘 도 닦아요, 어머니. 연이 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매일 안절부절. 볼 때마다 어찌나 웃긴지.”
“저게 진짜 날 잡고 처맞아야 정신을….”
이든을 노려보려다 말간 금빛 눈동자를 마주친 설우가 그대로 입을 닫았다.
“하하하! 보셨죠, 어머니? 저런다니까요.”
차현준의 유전자를 받아 제 배에서 나온 아들이 사랑을 하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가르치지도 않았고 배울 수도 없었을 다정함까지 갖추다니.
“이래서 다들 사랑 타령을 하나 봐.”
어깨를 으쓱인 화진이 설우와 연을 번갈아 보았다. 외모로는 퍽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잘들 노는구나.”
시종일관 도끼눈을 뜨고 있던 성태가 식사를 마치고 물 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아버님께서 고대하던 손자며느리를 얻지 못한 건 유감이지만 적당히 좀 하세요.”
“저 아이 때문에 입은 손해가 한두 가지여야지. 앞으로 입게 될 손해도 만만치가 않아. 그저 재호 딸로 남았으면 좋았을 것을.”
아니, 재호가 살아있었다면 이런 우스운 상황이 생기지도 않았겠지.
“아이 얼굴도 봤으니 다 드셨으면 먼저 일어나시죠.”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현준이 나섰다.
제 아비가 사람 면전에 대고 어떤 모욕까지 줄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이쯤에서 일어나야 했다.
현준이 겉옷을 챙겨 들자 차 회장이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집 밖으로 빼돌릴 생각 말아라. 지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공들여 다듬으면 집안에서 굴리건, 장식으로 내놓건, 할 수 있을 테니….”
“할아버지!”
당신이 제일 잘났다고 뽐내며 일평생을 살아온 인물답게 적당히가 없었다.
사람의 가치를 바닥까지 깎아내리는 말에 경악스러운 시선들이 차 회장에게 쏠렸다.
이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원에 쫓아와서도 독설을 퍼붓는 양반인데. 다 같이 모인 식사 자리라고 다를까.
“목소리 줄여. 어디 버르장머리 없이 큰소리를 내.”
“말씀하신 식사 자리 만들었고, 본가로 들어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럼 할아버지께서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주셔야죠.”
“뭐? 기본적인 예의?”
“차설우, 그만. 아버지도 그만 하세요.”
“할아버지 방식대로 연이 휘두를 생각 마세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아버지보다 할아버지랑 닮았어요, 저. 피도 눈물도 없다는 뜻입니다.”
설우의 한쪽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랐다.
제 잘난 맛에 두려운 것 없이 살아온 건 이쪽 또한 마찬가지다.
“그만하라니까.”
“늙은이 성질 긁어 좋은 거 없다는 것만 명심해라. 경전하사라고 하지. 영양가 없는 싸움에 네 옆에 앉은 아이만 화를 입는 거야.”
“현준 씨, 뭐해? 빨리 모시고 나가. 더 듣고 있다간 내 속이 터지겠어.”
참다못한 화진이 일어나 문을 활짝 열었다.
반년에 한두 번. 경제인 모임이나 자선행사에서 스치듯 보아도 반갑지 않은 얼굴이다.
이익을 위한 정략결혼이니 재벌가 며느리의 본분이니 시대착오적인 사상을 고집하는 말을 참아주는 것도 한계였다.
차 회장의 찢어진 눈매가 화진에게 향하자 한숨을 돌린 설우가 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세요, 아버지.”
현준의 재촉이 이어졌다.
문이 열린 탓에 손님을 배웅하기 위해 홀 매니저까지 다가오자 차 회장은 결국 못 이기는 척 룸을 나서야 했다.
식사가 끝나고 첸, 이든과 함께 연이 밖으로 나가자 화진은 곧바로 전자담배를 꺼냈다.
“너 한남동에서 쟬 어떻게 데리고 살겠다는 거야. 네 할아버지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버티고 있는데.”
“그래, 설우야. 삼촌도 좀 걱정되는데.”
성태를 가까이서 겪어봤기에 더욱 마음이 쓰였다.
“같이 사는 동안엔 적어도. 다치게 하진 않으시겠죠.”
차 회장을 염두에 두면 펠리체라도 안심할 수 없다.
이든도 있고, 알게 모르게 가드도 붙여뒀지만, 어느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 연을 빼앗아 숨길지 모를 일이다.
“그래, 한집에 살면 물리적인 방법을 쓰진 않겠지. 하지만 정신적으로 지독하게 괴롭힐 거야. 같이 나갔다가 들어오는 거? 웃기지 마. 그런 1차원적 방법으로 시집살이를 막을 수 있었으면 우리나라에서 고부갈등은 뿌리째 뽑혀 나갔을걸.”
“연이를 두고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하게 할아버지를 압박할 수 있는 무기가 생기면 곧바로 나올 거예요. 될 수 있으면 3개월 안에.”
“저 애가 못 버티면 어쩌려고.”
“첸하고 이든 있잖아요. 다른 애들이랑 편히 살게 해야죠. 그땐 정말 저한테 여동생이 생기겠네요.”
연인이 아닌 여동생.
입 밖으로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괜스레 목덜미를 문지르며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는 설우를 보며 화진이 혀를 찼다.
“이제 와 그게 되겠니? 지금 네 표정이 어떤 줄 알아?”
“처음엔 괜찮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연이를 찾고 나서도 한주희랑 결혼하려고 했고요.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마음이 변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나조차 적응이 안 되더라고.”
제 목으로 넘어간 건 분명 물인데.
쓴맛이 묻어나는 입가를 매만진 설우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런 주제에 여동생은 개뿔. 네 성격에 퍽이나. 행복하라고 보내주는 것도 착한 애들이나 하는 거야. 너처럼 성질 더러운 애들은 그거 못해.”
“설우한테 이런 모습 보는 것도 신선한데. 안 그래, 누나?”
“신선하긴. 나까지 감정 소모하는 기분이야. 일어나, 우리도 그만 가자.”
먼저 일어난 화진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설우를 구경하는 동생 성진을 툭, 건드려 일으켰다.
“그럼 결혼식 날 보자. 원하는 결혼할 수 있게 된 거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삼촌.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엄마.”
“낯간지러운 소리 하지 마. 애들 들여보낼 테니까 나오지 말고.”
“네, 가세요.”
익숙하지 않은 인사를 들은 화진이 몸을 부르르 떨며 룸을 나섰다.
연이가 힘들어하면 내가 연이를 놓을 수 있을까.
원한다면 이혼해주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는데. 생각을 거듭할수록 답을 내기 어려웠다.
텅 빈 테이블 앞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잠시 상념에 빠진 설우의 귓가에 다다다, 다가오는 작은 발소리가 울렸다.
“오빠!”
“어, 왔어?”
“어머님이랑 삼촌한테 인사했어요. 이든이 오빠 데리고 나오래요.”
“잠깐 이리 와서 앉아 봐.”
“네.”
툭툭, 제 허벅지를 치는 설우의 손을 따라 딱딱한 근육 위로 살포시 걸터앉기 무섭게 붕 뜬 몸이 가운데로 옮겨졌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두 다리가 제 허벅지 바깥쪽에 걸리자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연의 등허리를 안정적으로 받쳐주었다.
“나 때문에 할아버지랑 싸우느라 힘들죠?”
“너 때문에 싸우는 거 아니야.”
“그럼요?”
“나 때문에. 내가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 말이 그 말이죠.”
“더 가까이 와.”
마주 앉은 사이가 한 뼘 더 가까워졌다. 밀착된 허벅지가 비벼지니 꽤 야릇한 자세가 되어버렸다.
“왜 이러고 있어요?”
“키스하려고.”
“아, 그럴까요? 잠깐만요, 오빠. 그럼 내가 문을 닫고 올게요.”
“푸흡! 문을 왜 닫는데.”
비장하게 속삭이며 의자에서 내려가려는 연을 잡으며 킥킥거린 설우가 동그란 콧방울을 깨물었다.
“아아! 아파요. 키스하자면서요.”
초옥, 돌아온 건 짧은 입맞춤이었다.
“이거 하는데 문까지 닫아야 해?”
“이건 뽀뽀잖아요. 말을 똑바로 해야죠.”
한껏 가늘어진 눈으로 투정을 부리니 입꼬리를 끝없이 올린 설우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널 놓아야 하는 날이 온다면 내가 감내해야 할 고통은 어느 정도일까.
“진한 건 집에 가서 하자.”
설우의 마음이 바뀔세라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 연이 여전히 먹구름이 낀 얼굴을 살피다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위로의 의미로 조금 전의 설우처럼 가볍게 입을 맞추려고 했을 뿐인데 돌아온 반응이 제법 거칠었다.
집에 가서 하자니까.
연의 허리와 목덜미를 제게로 당기며 입안 깊숙이 혀를 집어넣은 설우는 뜨거운 숨결을 연신 쏟아냈다.
“흐응….”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이자 설우의 다리 위에 앉은 연이 허벅지를 달싹였다.
“더하면 안 돼요?”
“여기 식당이야. 문도 열려있어.”
“맞다. 이든이랑 첸도 기다리는데.”
여전히 코끝이 닿아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웅얼거린 연이 아쉬운 듯 눈가를 찡긋거렸다.
“내려가, 집에 가게.”
“너무 좋아.”
“내가?”
“아니요, 오빠랑 하는 키스.”
“…뭐?”
“왜 이렇게 잘하는 거예요? 막 온몸이 짜릿해요.”
“나는 안 좋고 나랑 하는 키스만 좋다는 건 아니지?”
“둘 다 좋은 거죠.”
그래, 정답이지.
“나랑 키스 중에 선택하라고 하면?”
“오빠랑 하는 키스를 선택할 순 없고요?”
이것도 정답.
흡족한 두 번의 답이 돌아왔지만 설우의 눈엔 여전히 의심이 가득했다.
뭔가 찝찝한데.
입술에 남은 연의 흔적을 혀로 훑어낸 설우가 좀 더 어려운 이지선다를 고민했다.
“키스 못 하는 나. 지금처럼 키스해주는 한서준. 3초 안에 골라. 하나.”
우연히 봤던 뉴스 기사 하나가 떠올랐다. 가을바람을 맞으며 키스하고 싶은 남자 연예인 1위가 한서준이라지.
그리고 연이가 즐겨보는 드라마의 남자주인공도 한서준.
“너무 극단적인걸요.”
“둘.”
“오빠와 키스는 하난데 왜 둘로 쪼개요!”
“셋.”
“…둘 다?”
역시. 어려운 건 오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