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종잡을 수 없는 증상은 매번 겁을 들어먹게 한다.
어제는 천국, 오늘은 다시 지옥. 내일은 그사이 어디쯤 서 있으려나.
“네.”
-목소리가 왜 그 모양이야.
“연이가 자꾸 자네요.”
-그 애 돌봐줄 의사 구했다. 집에 있어?
“네.”
-과수면도 장애의 일부야. 그리로 데리고 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네, 그러세요.”
침대 밑으로 널브러진 끈 대신 연의 손을 잡은 설우가 장 박사와 짧은 통화를 마쳤다.
부족한 거 없이 평탄한 30여 년을 살았으니 앞으로 30년은 롤러코스터를 태울 셈인가 보다.
너를 일찍 찾았더라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난 투자모임 들렀다가 상견례 장소로 시간 맞춰 갈게.”
“그쪽 상황은 어때?”
“열심히 낚여 드는 중이지. 장세희 딸은 눈이 돌았어. 곧 장세희 끌고 들어올 거야.”
“돈을 최대한 끌어다 써야 할 텐데.”
재기불능이 되어 다리 밑을 전전하도록 만들고 싶다.
차마 죽일 수 없으니 스스로 삶을 끝낼 만큼 황폐한 세상을 맛보여 줄 작정이었다.
그래도 너희는 멀쩡한 하루를 보낼 수 있으니 연이보다 나은 삶을 살겠지. 그 사실을 되뇔 때마다 치가 떨렸다.
“그럴 거야, 허영심과 돈 욕심이 하늘을 찌르니까. 권상철보다 더 독한 게 장세희잖아.”
“선우 아저씨가 어쩌다 그런 여자랑 재혼했을까. 사람이 너무 순하고 착한 것도 문제야. 지금 연이 꼴을 보면 저승에서 피눈물을 흘리겠지. 매일 업고 다닐 정도로 애지중지했던 막내딸인데.”
“깨워봤어? 슬슬 나갈 준비해야 하잖아.”
“일어나기 싫은가 봐. 눈을 떴다가도 금방 다시 감네.”
“그래, 곧 일어나겠지. 이든은 운동 갔으니까 연이만 데리고 오면 돼.”
저녁 식사까지 겨우 2시간 남짓 남아 있었다.
선선한 가을바람과 따뜻한 햇볕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날씨였다.
연의 낮잠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진 탓에 며칠 전부터 계획했던 한강 나들이가 수포로 돌아갔다.
오전 내내 들떠 날아다녔는데, 일어나면 많이 실망하겠지.
-공동 현관에서 방문 호출이 들어왔습니다.
옆에 놓아둔 휴대 전화로 간편하게 방문 수락 버튼을 누른 설우가 천천히 일어나 연의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처방전이 필요한 약들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직 충분하네.
서랍을 가득 채운 약병을 하나하나 흔들어 본 설우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40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익숙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은태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오셨어요.”
“인사해. 연이 주치의 맡아주실 분이야.”
“차설우입니다.”
“안녕하세요, 윤강석입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앞장선 설우가 서재로 그들을 안내했다.
첫인상은 나쁘지 않다.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는 간결한 인사가 좋았다.
처음부터 자세를 낮추고 아부부터 시작하는 이들을 많이 봐온 탓인지 우직하고 딱딱한 인상 역시 마음에 들었다.
“증상은 장 박사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수면 관리도 그렇고 갈수록 다치는 일이 많아서요. 그래도 병원은 데려가고 싶지 않으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각성제 효과가 미미한가 보네요.”
“밤에 움직이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낮에 잠을 많이 자더라고요. 각성제의 효과가 부족한 건지 수면제가 듣질 않는 건지 모르겠네요.”
“뇌척수액 검사 결과 들으셨죠?”
강석의 물음에 설우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나 새우 같아요? 허리가 잔뜩 굽었어요.’
‘내 등에 지금 바늘 있어요?’
‘으음, 안 아파요. 주사 맞는 거처럼 따끔했어요. 이든이 아픈 거라고 겁줬는데 거짓말인가 봐요. 오빠가 이든을 혼내줘야겠어요.’
연은 긴장하거나 겁을 먹었을 때 말이 많아졌다.
등 뒤에서 일어나는 일을 눈으로 볼 수 없으니 불안감에 어깨를 움츠린 연은 쉴 새 없이 짹짹거리며 제 손을 꼭 붙잡았었다.
연에게도, 자신에게도 생소했던 검사는 반갑지 않은 결과까지 안겨주었다.
“뭐, 총체적 난국입니다. 수면에 영향을 준다고 알려진 호르몬 수치가 일반인 아니, 같은 병을 가진 환자들보다도 낮습니다. 사실 거의 없다고 봐야죠.”
“윤 교수가 원래 좀 직설적이야. 네가 이해해.”
“괜찮습니다. 빙빙 돌려 괜한 희망 주는 것보단 낫네요.”
“과거 교통사고 때 간뇌 시상하부 부근에 문제가 있었을 거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출혈이었든 충격이었든 그로 인해 수면과 관련이 깊은 신경 어딘가가 완전히 망가졌지만, 그 시발점을 이제 와 찾을 수가 없는 거죠.”
강석의 눈엔 흥미가 가득했다.
자존심 강한 그가 재벌 집 출장 의사가 되라는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단순했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희귀 케이스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가정이 아닌 결론을 지어온 의사는 처음이네요.”
“수면장애뿐 아니라 식욕 문제나 충동 장애, 성격장애 역시 생길 수 있고 이미 기억을 잃은 것처럼 인지 능력에도 결함이 있을 겁니다. 학습 능력 역시 현저히 떨어질 거고요.”
과식과 폭식, 좀처럼 늘지 않는 젓가락질. 충동 장애나 성격의 문제는 없었지만, 강석이 하는 진단은 정답에 가까웠다.
환자에 대한 걱정보다는 직업적 호기심이 다분해 보였지만 연의 치료에 가장 도움이 될 의사인 것 같았다.
“완치는?”
“그건 장담할 수 없습니다. 증상이 뚜렷한 기면증 자체도 희귀난치병으로 분류됩니다. 선우연 환자는 다른 수면장애까지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어요. 일단 혼자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죠.”
“약을 늘려야 합니까?”
“아뇨, 7년 동안 어떤 약에 대한 내성이 커졌을지 모르는 상황에선 약효 또한 장담할 수 없어요. 지금처럼요. 그 긴 시간 몸에 쌓였던 약들이 언제 어떤 부작용으로 튀어나올지도 알 수 없고요. 약은 최소한으로 쓰는 걸 추천합니다.”
“그렇군요.”
완치를 장담할 수 없다고 해도 괜찮았다.
그 누구도 주지 않던 명백한 몇 가지 답을 들으니 끊임없이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은 편안해진 것 같았다.
“오빠, 나 밥 먹다가 잠들면 어쩌죠?”
“너 오늘 오래 잤어. 잠들진 않을 거야.”
화진이 고른 고급 중식당의 입구를 지나다 문득 떠오른 걱정에 연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든이랑 첸은요?”
“벌써 도착했어.”
“오빠, 나 근데 젓가락은 어떡해요?”
“이든한테 포크 챙겨 두라고 했어.”
“창피하다, 진짜. 할아버지가 엄청 싫어하시겠죠?”
“괜찮아, 나랑 살 건데 뭐.”
“오빠, 오늘 누구누구 오신다고 했죠?”
“무서워서 시간 끄는 거지, 너. 가지 말까?”
한 걸음 나아가면 멈추기를 반복하는 연에게 맞춰주던 설우가 발갛게 물든 볼을 톡톡 건드렸다.
“아니, 아니거든요! 그냥 물어보기만 한 건데요.”
“볼은 언제까지 분홍색일 예정이야? 귀여워서 아무도 보여주기 싫잖아.”
잘 익은 복숭아같이 생겨서는.
“매일 귀엽다, 귀엽다 하면 진짜 귀여운 줄 알고 기어오른대요.”
“대체 그딴 말은 어디서 주워듣는 거야. 또 이든이야?”
“어제 골프 수업하는데 14동 아줌마가 남자 선생님 엉덩이를 만지는 걸 봤어요. 손으로 툭툭, 이렇게 하더니 골프 선생님이 가니까 다른 아줌마한테 그랬어요. 저게 요즘 건방을 떨어. 귀엽다, 귀엽다, 해주니까 진짜 귀여운 줄 알고 기어오른다니까? 이랬어요.”
성대모사라도 하듯 저와 어울리지 않는 억센 말투로 14동 여자를 따라 하는 연을 보고 기함한 설우가 입을 쩍 벌렸다.
하여튼 펠리체에 있는 인간들이란.
재미있고 유익한 것을 배우라고 센터에 보내는 건데 몰라도 될 일들까지 죄다 주워듣고 오면 어쩌자는 거야.
“그런 사람들이랑 어울리지 마.”
“어차피 이든 때문에 못 어울려요. 이든이 얼마나 사나운 줄 알아요? 내 옆에 아무도 못 오게 으르렁거려요. 골프 선생님도 간신히 온다니까요.”
“최근 들어 가장 잘하고 있네. 그리고 이든은 원래 사나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보면 놀랄걸?”
“나한텐 안 사나우니까 괜찮아요.”
“너한테 사납게 굴면 나한테 죽지.”
홀 매니저의 뒤를 따라 복도 끝 좌식 룸으로 앞에 도착한 설우가 종알거리는 연을 한 번 끌어안았다.
“왜요?”
“걱정하지 마. 우리가 같이 있으니까 다 괜찮을 거야.”
그래, 괜찮을 거야.
불편한 식사를 해야 하는 연을 위로하는 동시에 제게 하는 다짐이었다.
“나 정말 괜찮아요. 눈치 안 보고 밥 잘 먹을 거예요.”
“응.”
돌아오는 대답에 힘이 없었다.
제가 좋아하는 그의 품이 평소와 다른 느낌을 주었다.
먹구름이 잔뜩 낀 얼굴을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내가 너무 오래 자서 속상했어요?”
“걱정했지. 또 내 위로 올라탈까 봐.”
“낮에 잘 땐 그렇게 안 움직이잖아요.”
“내가 너무 좋아서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들지 모르니 낮에도 조심해야지.”
“좋은 걸 어떡해요, 그럼. 자꾸 오빠한테 가고 싶어서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데.”
무엇하나 감출 줄 모르는 순진한 고백에 설우의 입꼬리가 헤벌쭉 위로 솟아올랐다.
“펠리체랑 한남동 본가에 침대 새로 주문했어.”
“침대요?”
“한쪽 벽을 전부 채울 만큼 큰 침대. 이제 허락 맡을 필요 없어, 매일 같이 잘 거야.”
“진짜요?”
“난 거짓말 안 해.”
“맞아, 오빠는 거짓말 안 해요.”
기분 좋게 방방 뛰던 연이 설우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연애질을 즐기는 커플을 등지고 선 홀 매니저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식은땀이 맺혔다.
손님을 안내하고 룸 안으로 들이는 것까지가 매니저의 의무였지만, 일행이 있는 룸 앞에 도착한 지 10분이 다 되어가도록 꽁냥거리는 남녀의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저기, 사장님?”
식전 죽을 실은 카트를 끈 직원이 나타나고 나서야 용기를 낸 매니저가 연에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이는 설우를 불렀다.
“네.”
“식전 죽이 나와서요. 도착하셨다고 말씀 전할까요?”
“아, 그러세요.”
어느새 제 뒤에 선 카트를 돌아본 설우가 연을 떼어내 구겨진 옷을 정리해 주었다.
“손님 도착하셨습니다.”
말을 마치고 잠깐 기다린 매니저가 별다른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문을 열었다.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잠에서 깬 연을 반기며 일어나는 이든과 첸, 한참 늦은 손자를 노려보는 차성태 회장과 무심한 차현준 사장.
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앉은 설우의 외삼촌 성진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연에게 손을 내밀었고 화진은 어서 앉으라는 듯 빈자리로 눈짓했다.
몇 달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상견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