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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41화 (41/96)
  • 41화.

    내게 꿈이란, 지독한 병이자 죄악이었다.

    ‘엄마, 엄마! 아악, 아프잖아!’

    ‘어우, 이 계집애가 또 어떻게 나온 거야!’

    창고로 쓰는 방에 연을 묶어두고 편히 잠들었던 세희가 연주의 비명을 듣고 다급히 달려왔다.

    제 딸의 허리 위에 올라타 마구잡이로 손을 휘두르는 연을 우악스럽게 떼어낸 세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연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어댔다.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해? 정신병원에 가둔다며! 빨리 좀 보내면 안 돼? 아니면 똑바로 묶어두던가! 내가 미치겠다고!’

    연의 주먹에 맞아 입술이 터진 연주가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지르자 얇은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음 주면 병원으로 보낼 테니까 조금만 참아. 그러게 문을 잠그고 자라니까. 야, 권다미! 정신 안 차려? 야!’

    ‘으, 아파…!’

    ‘아파? 아픈 건 아니? 너 왜 매번 연주 방에 들어와서 난리를 쳐, 잠도 못 자게!’

    ‘아, 아파요, 엄마. 놔주세요, 잘못했어요.’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넋 빠진 척하고 나타나서 일부러 나 때리는 거잖아!’

    ‘그런 거 아니야. 꿈에서 네가 날 때리길래….’

    ‘그 꿈 타령 좀 그만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넌 그냥 미친 거야, 정신병자라고!’

    무방비하게 얻어맞고 눈이 돌은 연주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악을 썼다.

    ‘됐어. 연주 진정하고 얼른 자. 내일 학교 가야지.’

    ‘잘못했어요, 엄마.’

    혼나는 게 두려운 연이 세희의 손을 잡으며 빌었지만, 자비 따윈 없었다.

    연의 머리채를 질질 끌고 연주의 방에서 나온 세희는 거친 발길질도 서슴지 않았다.

    ‘잘못했어요.’라는 말이 버릇처럼 튀어나오기 시작한 시절, 연의 나이 고작 17살이었다.

    설우를 만난 후 폭력적인 행동을 만들어 냈던 과거의 꿈은 대부분 사라졌다.

    가끔 다치기 쉬운 꿈을 꾸는 것을 제외하면 죄악이었던 꿈은 어느새 기분 좋은 환상이 되었다.

    -사랑해.

    설우의 품속에 안겨 잠든 연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사랑해, 연아.

    설우는 종종 꿈속에 찾아왔다. 그가 나오는 꿈은 언제나 즐거웠고, 꽃향기를 풍겼다.

    -그 말 자주 하지 말라니까요.

    마주 보고 누운 그가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이니 또다시 심장이 요동쳤다.

    -계속할 거야. 너도 내 말 안 듣잖아.

    -내가 언제요?

    -꼬시지 말라는 말.

    -오빠, 사실 아까 못한 말이 있어요.

    -무슨 말?

    -오빠가 날 머릿속으로만 벗기는 거 같아서 내가 도와주려고요.

    -뭐?

    -내가 먼저 벗길 테니까 오빠가 그다음에 벗겨주세요.

    싫다고 정색해야 할 설우가 조용히 입을 다물자 용기가 생긴 연이 작은 손을 뻗어 설우의 잠옷 단추를 풀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많기도 해라.

    마지막 여섯 번째 단추를 푼 연이 환하게 웃었다.

    미끈거리는 실크 잠옷이 어깨를 타고 내려가자 많은 이들이 탐내는 완벽한 상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쩍쩍 갈라져 모양이 잡힌 잔근육에 손을 올린 연이 찰흙을 만지듯 조물거렸다.

    인체 탐험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이제 나 벗겨요.

    -됐으니까 만지기나 해.

    -딱딱하고 뜨거워요. 입술이랑은 또 다른 느낌이야.

    -그래, 정말 색다른 느낌이네.

    보드라운 손길이 스칠 때마다 가늘어진 설우의 눈매가 움찔거렸다.

    -나 올라갈게요.

    -어딜?

    허락 없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연이 대답도 듣기 전에 설우의 맨 허리 위로 올라앉았다.

    -병원에서 오빠가 했던 거 하려고요.

    귀를 물고, 목덜미를 빨고, 여린 살결을 쓰다듬던 설우를 떠올린 연이 천천히 허리를 숙여 이미 붉어진 그의 귀를 물었다.

    “연아, 잠깐.”

    현실에선 연의 아래에 깔린 설우가 귓가에 느껴지는 더운 숨결에 몸서리쳤다.

    귓불을 핥던 혀는 목덜미에 닿았고 저를 흉내 내듯 오물거리던 입술은 이내 쇄골 아래로 내려앉았다.

    “으으.”

    악문 잇새로 억눌린 신음이 튀어나왔다.

    잠옷을 벗기는 거까진 어떻게든 참겠는데. 이건 아니지, 선우연.

    초점 없는 눈동자가 이렇게 야해도 되는 거야?

    쇄골을 떠난 촉촉한 입술은 탄탄한 가슴을 돌아다녔다.

    연아, 난 거기까지 안 내려갔었다고.

    진작에 피가 쏠리기 시작한 아랫배 밑으로 뻐근하게 솟은 부위가 설우를 못 견디게 만들었다.

    “그만. 이제 그만해, 연아. 읏…!”

    널찍한 가슴을 타액으로 적시던 연이 입술에 걸린 작은 돌기를 뭉개기 시작하자 설우가 허리를 비틀었다.

    이게 무슨 근본 없는 날벼락인지.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설우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높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기다람쥐야. 어린 양이라고. 작은 천사를 더럽히면 벌 받을 거야.”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해탈을 향해 가며 중얼거리는 설우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젠장!

    “아기염소를 잡아먹으면 첸이 내 배를 가른대, 연아. 근데 너 계속 이럴 거야?”

    목덜미로 돌아온 연에게 말을 붙여 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제발 이 색욕을 해소하게 해 달라는 듯 곤두선 감각이 비명을 질렀다.

    사탕이라도 발견한 듯 제 살결을 쪽쪽 빨아들이는 연의 어깨를 쥔 채 앓는 소리를 내던 설우가 따끔한 자극에 익숙해져 갈 무렵.

    움직임이 현저히 느려진 연이 결국 설우의 위로 풀썩 쓰러져 잠들었다.

    선명하게 부풀어 오른 곳을 보고 한숨을 내쉰 설우는 조심스럽게 연을 옆자리에 내려주었다.

    “하고 싶다.”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열기를 식히던 설우가 결국 벌떡 일어났다.

    손만 뻗으면 안을 수 있는 여자가 널렸으니 굳이 혼자 해결할 필요가 없었다.

    지극히 동물적인 행위는 지양하기도 했고. 하지만 오늘은 불가항력이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른 숨을 내쉬는 연을 원망스럽게 내려다본 설우가 자괴감에 휩싸여 욕실로 향했다.

    “어떡해. 어떡해요, 이든? 첸?”

    “집에 벌레를 키운다고 해.”

    “음식을 잘못 먹어서 알레르기가 올라왔다고 하는 건 어때.”

    아침 식사를 위해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의 시선은 설우의 목에 집중되어 있었다.

    귓불 아래에서 시작해 목덜미를 타고 내려온 붉은 반점은 와이셔츠 깃으로 가릴 수 없었다.

    “이번 건 진짜 꼬맹이 네가 심했다.”

    “나도 이럴 줄은 몰랐어요.”

    처음 설우를 마주하고 식겁했던 이든과 첸은 상황을 대충 전해 듣자 측은한 눈으로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설우 오늘 계열사 총괄 회의 있는데.”

    “그게 뭔데요?”

    “음, 회사에서 제일 높은 사람들이 모여 하는 회의? 그리고 설우 할아버지, 아버지, 사촌까지 전부 참석하는 회의야.”

    “세상에. 오빠, 미안해요. 화났어요?”

    대책을 떠올리는 셋과 달리 묵묵히 밥을 떠먹던 설우가 키스 마크로 범벅이 된 목을 문질렀다.

    “화 안 났어. 괜찮으니까 얼른 밥 먹어.”

    “목폴라는 좀 오반가?”

    “아직 날 좋아.”

    “하긴, 낮에는 덥더라.”

    “괜찮다잖아, 밥 먹자. 연이도 얼른 먹어.”

    “네.”

    눈치를 살피며 하얀 쌀밥을 입에 문 연이 국그릇 옆에 놓인 교정 젓가락과 쇠젓가락을 두고 잠시 고민하다 쇠젓가락을 집었다.

    이번 주말에 설우의 가족과 식사 약속이 잡혀 연습이 필요했다.

    앞서가는 마음과 다르게 엑스 자로 꼬이는 젓가락과 씨름하다 보니 입속의 밥이 전부 사라졌다.

    다시 한 숟가락 가득. 하지만 반찬 없이 밥만 꿀꺽. 며칠 안 남았는데 큰일이네.

    형편없는 실력에 인상을 잔뜩 찌푸린 연을 보고 몰래 웃던 설우가 생선 살을 발라 밥공기 안으로 넣어주었다.

    “그냥 교정 젓가락 써. 애쓰지 않아도 돼.”

    “다 커서 배우려니까 어려운 거야. 소시지도 먹고.”

    “그래, 꼬맹. 얼굴 펴. 넌 젓가락질 못해도 우리가 있으니까 괜찮아. 계란말이도 하나 해.”

    첸과 이든이 한마디씩 거들며 다른 반찬을 집어주었다.

    어느새 가득 찬 밥공기를 가만히 보던 연이 벌떡 일어났다.

    “왜 일어나?”

    “안아 주려고요.”

    “아싸, 나부터!”

    팔을 벌리기 무섭게 다가온 이든이 연을 높게 안아 올렸다.

    “으아, 이든. 너무 높아요.”

    “너무 오랜만에 안겼잖아. 치사하게.”

    허공에 높이 떴던 발이 내려오기 무섭게 이든을 밀어낸 첸 역시 연을 끌어안고 쉽게 오지 않는 기회를 만끽했다.

    천천히 일어난 설우가 마지막이었다. 해사한 미소를 지은 연이 익숙한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너무 좋아.”

    “반찬 몇 개 챙겨준 게 이렇게까지 좋아할 일이야? 누가 보면 처음 올려준 줄 알겠어.”

    “꼭 반찬을 줘서 그런 건 아니고요. 아침부터 기분이 너무 좋아요. 전부 다 행복하고. 그래서 아파도 행복해.”

    “앞으로도 이럴 거야. 나는 물론이고, 첸이랑 이든도 평생 네 옆에 있을 거야. 매일매일.”

    그러니 잔혹했던 과거는 전부 잊었으면 좋겠어.

    포옹 순회를 끝내고 자리에 앉은 연은 씩씩하게 밥을 떠먹기 시작했다.

    행복하단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기분은 이런 거였구나.

    하루하루 사랑받는다는 건 이렇게 행복한 일이었구나.

    뒤늦게 깨닫는 감정들은 더욱 진하게 다가온다.

    “오늘은 센터에서 뭐 배워?”

    “꽃꽂이랑 그림 그려요.”

    “형 그거 알아?”

    “뭐.”

    “꼬맹이 그림 더럽게 못 그려. 내가 다음에 연이 스케치북 훔쳐다가 보여줄게. 형이라고 그려놨는데 괴물 같아. 우악!”

    설우보다 빠르게 움직인 첸의 손바닥이 이든의 뒤통수로 날아갔다.

    대놓고 놀리는 이든 때문에 울상을 짓던 연이 속이 시원한 타격음을 듣고 고소하다는 듯 혀를 내밀었다.

    “이든도 엄청 못 그리거든요? 자기는 잘 그리는 줄 아나 봐.”

    “가져와서 형들한테 물어볼래? 누가 더 잘 그리는지?”

    “난 연이.”

    “나도 무조건 연이.”

    “와, 씨! 보지도 않았는데 고르는 거 봐.”

    “연이가 줄 하나만 그어도 너보다 잘 그리는 거야.”

    “하!”

    설우가 쐐기를 박자 할 말을 잃은 이든이 실소를 뿜어냈다.

    승리의 미소를 지은 연이 설우의 밥공기 위로 소시지 하나를 올려주었다.

    “저번에 꽃꽂이 수업하는데 원래 줄기 끝부분을 잘라야 하거든요? 근데 이든은 꽃 바로 밑을 다 잘라버린 거예요. 줄기끼리 묶어야 하는 데 전부 버린 거죠.”

    “이든은 원래 바보잖아.”

    “그러니까요. 그래서 꽃꽂이 강사님한테 혼났어요. 줄기 없이 연꽃처럼 연못 위에 띄울 거냐고요.”

    “와, 그땐 걱정하는 척하더니. 속으로 웃었지, 너?”

    “네, 사실은 웃겼어요.”

    연이 대답하기 무섭게 다가온 이든이 쫀득한 볼을 잡아당겼다.

    “으아!”

    “야, 놔. 안 놔?”

    연의 옆자리에 있던 설우가 이든의 손등을 내려쳤다. 이제는 습관이 된 장난질을 지켜보던 첸은 피식 웃으며 식사를 이어나갔다.

    오늘도 요란한 아침이었다.

    ***

    CH그룹 본사의 핫이슈는 붉게 얼룩진 목덜미를 드러내고 출근한 차설우 사장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파혼과 결혼으로 설우에 대한 관심이 활활 타오르는 상황에 기름을 떠다 부은 것이었다.

    회의실로 올라가는 설우를 마주친 직원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그가 사라지기 무섭게 입방아를 찧어댔다.

    전 계열사의 사장급 임원들만 모인 대회의실의 분위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살을 찌푸렸다.

    회의 내내 설우의 목을 흘깃거리는 임원들을 상석에서 모두 지켜본 차성태 회장은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만년필을 집어던졌다.

    “할아비 혈압 올릴 짓만 골라 하는 게야?”

    “그럴 리가요. 고분고분 명령에 따라 한남동 본가로 들어가잖습니까.”

    “네놈 행실이 글러 먹었잖아! 제정신 박힌 놈이 그 꼴로 회의실에 기어들어 와? 남들 보기 창피하지도 않으냐?”

    “남들 시선 관심 없습니다. 전 좋은데요. 임자 있다고 티 내면 들러붙는 여자도 없을 거 아닙니까.”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인 설우가 태블릿을 챙겨 일어났다.

    “점심 식사 예약해뒀다.”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현준이 곧장 회의실을 나가려는 아들을 불러 세웠다.

    “생각 없습니다. 아, 할아버지.”

    “왜, 이놈아.”

    노기 서린 얼굴로 씩씩거리던 성태가 눈을 치켜떴다.

    “청첩장 돌리실 때 신랑 측, 신부 측 구분 없이 앉게 신경 좀 써주세요.”

    “뭐야?”

    “어차피 사람도 많을 텐데. 비좁게 한쪽으로 몰리면 너무 꼴사납잖아요. 연이 엄청 기대하고 있는데 별것도 아닌 일로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요.”

    “저, 저런 뻔뻔한 놈을 봤나. 네가 직접 하면 될 일을 누구한테 떠넘기는 거야!”

    “전부 할아버지 손님이잖아요. 부탁드릴게요. 아버지도요. 그럼 전 이만, 상견례 때 뵙겠습니다.”

    제 할 말을 마친 설우가 회의실을 나가자 얼빠진 얼굴로 닫히는 문을 바라보던 성태가 헛웃음을 지었다.

    피붙이 없는 천애 고아를 보는 자리에 상견례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는 게 우스웠다.

    제가 총애하던 손자의 모습은 어디로 증발해 버린 건지. 마뜩잖은 놈 같으니라고.

    “제 어미를 닮아 저리 시건방진 게지.”

    쯧, 하고 혀를 찬 성태가 고개를 내저었다. 저를 닮았다고 좋아했던 패기는 어느새 건방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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