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40화 (40/96)

40화.

거의 한 달을 갇혀있다 돌아온 현태의 몰골은 끔찍했다.

묵직한 쇠사슬에 묶여 지하실에 감금되었던 현태는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것 빼고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현태 삼촌 꼴이 왜 이래?”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나타난 연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씻지 못해 더러운 건 둘째 치고, 체격이 좋은 편에 속했던 현태는 피죽도 얻어먹지 못한 듯 초췌하게 말라 있었다.

“자, 일단 먹어.”

1층 카페에서 파는 브런치 몇 가지를 가져온 세희가 쟁반을 내려두기 무섭게 물티슈로 손을 대충 닦은 현태가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단맛, 쓴맛, 짠맛을 한 달여 만에 느낀 현태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연주, 넌 들어가 있어.”

“아, 왜. 나도 있을래. 엄마한테 할 말도 있고.”

돈 천만원은 우습게 깨졌을 정도로 값비싼 명품 로고가 박힌 쇼핑백들을 발견한 상철이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켰다.

모녀의 허영심과 사치에 죽어나는 건 상철이었다.

불법으로 운영하는 새희망 정신병원의 수익과 백창석의 개가 되어 온갖 추잡한 일을 처리한 대가로 받는 돈은 모조리 세희와 연주의 품위 유지비로 사용되었다.

담보대출 이자와 오백이 넘는 월세까지 감당하려니 등골이 휘다 못해 부러질 지경이었다.

이것 때문이라도 다미를 백창석에게 팔았어야 했는데. 세희의 건물이 없으면 길바닥에 나앉기 딱 좋은 시기였다.

“병원부터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천천히 먹어, 체하겠어.”

“가, 감사합니다.”

“자기는 왜 이렇게 얼굴이 굳었어. 무슨 일 있어?”

게 눈 감추듯 접시를 비운 현태에게 물과 음식을 더 챙겨다 준 세희가 튼실한 허벅지 안쪽을 쓸었다.

돈 걱정에 얼굴을 흙빛으로 물들이던 상철이 설핏 웃으며 세희의 손을 잡았다. 남들이 들으면 대놓고 비웃을 순정이었다.

“적당히 먹었으면 이제 얘기해 봐.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평창동에서 무슨 꼴을 당했는지 알아?”

성한 곳 없이 망가진 나를 보고도 저런 말이 나올까.

가슴속에 뜨겁게 차오른 원망을 참아낸 현태가 물 한 잔을 비웠다.

“차설우 사장이 병원으로 직접 다미를 찾으러 왔어요. 제이 바에서 봤던 놈이 혼자서 병원에 있던 애들을 상대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제대로 주먹 한 번 뻗지 못할 만큼 실력이 좋았어요.”

“삼촌 잠깐만. 지금 CH파라다이스 차설우 사장을 말하는 거야? 이 남자?”

오렌지 주스를 쪽쪽 빨던 연주가 재빠르게 설우의 사진을 찾아 휴대 전화를 들이밀었다.

“맞아, CH 차설우.”

“헐, 대박. 말도 안 돼. 권다미를 이 사람이 데려갔다고? 근데 이 사람 이번에 파혼하고 일반인이랑 결혼한다고… 설마! 아니지?”

일반인 연인이 권다미라고?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 대단한 사람이 왜, 왜 그런 정신병자를!

“CH라니. 저번에 다미 데려갔던 사람이 CH그룹 사람이라고?”

“응. 내가 얘기 안 했었던가.”

“안 했잖아!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저번에 찾아온 남자도 그쪽 사람이었던 거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세희가 매섭게 소리쳤다. 잔뜩 커진 목소리와 다르게 그녀의 눈동자는 불안으로 얼룩져 있었다.

새카맣게 몰랐다.

와인바에 찾아왔던 키 큰 남자가 말하는 사장이 CH그룹의 임원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선우연을 세상 속에서 감춘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 자신이 안일했다.

“맞아, CH. 당신 왜 그러는데.”

“걔 친아빠가 CH 사람이었어.”

“뭐?”

“선우연 친아빠 선우재호! 그 사람이 제주도 오기 전에 CH그룹 회장 밑에서 일했었다고! 세상에 어떡하지? 분명 알고 데려간 거야. 그 애를 알아본 거야.”

세희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는 세희를 멍하니 보던 상철이 마른세수를 했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차설우가 다미랑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였다는 건가? 백창석은 그 사실을 몰랐던 거고?

‘근데 왜 데려온 걸까요. 물론 다미 외모가 단번에 관심을 끌긴 했겠지만, CH의 젊은 후계자가 욕심낼만한 타입은 아니잖습니까? 정신연령도 어린 데다 애가 멀쩡하지도 않은데요. 혹시 옛날에 다미와 알던 사이인 거 아닐까요?’

다미를 찾기 위해 펠리체 앞에 죽치고 있을 무렵 현태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현태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착잡한 얼굴로 상철과 눈을 마주했다.

그때 의심해 보기만 했어도. 내가 이런 꼴까지 당하진 않았을 텐데.

“다미를 알고 있는 건 확실해졌네요. 사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잖아요.”

“…….”

“전 병원에서 곧장 끌려 나왔고 이든이란 남자가 사람을 시켜 가뒀어요. 갇힌 이후로 먹은 건 하루에 물 한 병, 식빵 한 쪽이 전부였어요.”

‘꼬맹이를 많이 굶겼다고 들었는데. 먹는 거로 장난치는 건 좀 아니지. 너도 여기서 죽지 않을 만큼만 처먹어 봐.’

악마와 흡사한 모습으로 잔악한 응징을 일삼던 이든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에요.”

현태가 몸서리쳤다. 사흘 걸러 하루씩 들러 주먹을 휘두르던 이든의 발목을 붙잡고 울며 애원해봤지만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차 사장도 왔었어?”

“아뇨, 차 사장은 안 왔습니다. 마지막엔 처음 본 남자가 왔어요. 손가락을 부러뜨렸죠.”

붕대가 투박하게 감긴 왼손이 허공에 흔들리자 등골이 오싹해진 상철이 괜스레 담뱃갑을 만지작거렸다.

“새희망 정신병원에 있는 다미 기록을 보내라고 했어요. 어떻게 지냈고, 어떤 약을 줬는지. 표정을 보니 다미 상태가 안 좋은 거 같더라고요.”

“그딴 게 어딨어!”

“저도 그렇게 대답했어요, 사실이니까. 그래도 가져오랍니다. 그리고 다음번에 갇히는 건 형님일 거라고….”

“젠장, 뭐 이런 엿 같은 경우가!”

살 떨리는 경고를 들은 상철이 거칠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분명 나도 가만 안 둘 거야.”

얼빠진 세희가 중얼거렸다. 사면초가였다.

“엄마, 내가 성원 오빠네 투자클럽 파티에서 진짜 끝내주는 정보를 들었거든?”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을 듣던 연주가 머리를 감싸 쥔 세희의 팔을 흔들었다.

“지금 그게 중요해? 나중에 얘기해.”

“들어봐. 성진 물산이라는 회사가 이번에 상장하는데 주식 200만 주가 풀릴 거래. 10만 주에 팔천인데 무조건 10배 이상 뛴다는 거야!”

“10배?”

“이거 지금 증권가에도 안 풀린 정보래. 현진그룹에서 밀어줄 예정이라 주식도 그쪽에서 다 매수할 가능성이 크대. 어차피 망하게 생긴 거 건물 정리하고 투자하는 거 어때? 돈이 있어야 도망을 가든 뻔뻔하게 살든 할 거 아니야!”

“연주야, 그런 거 함부로 믿는 거 아니야.”

“아저씨, 이거 VIP 투자클럽에서 나온 정보라니까요? 성원 오빠가 확실하다고 했어. 자기도 돈 구해서 살 거라고.”

성철의 만류는 통하지 않았다.

연주의 말에 혹하기 시작한 세희가 눈을 빛내며 경청했다.

설우가 짜놓은 판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파멸뿐이었다.

***

터벅, 터벅. 차례로 켜지는 복도 센서등 불빛에 의존하며 넥타이를 잡아 내린 설우가 침실로 들어섰다.

새벽 3시를 향해가는 시간.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지는 회식 자리에서 간신히 벗어난 설우는 술기운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두어 번 흔들었다.

“후.”

CH파라다이스를 CH그룹에서 분리하기 위한 물밑 작업을 시작한 설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평소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주주들과의 회식 자리에 참석해 영양가 없는 농담과 지겨운 아부를 들어준 이유는 그들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주요 주주까진 아니었지만 성태의 젊은 시절부터 함께 회사를 키워온 이들이었기에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지분은 가지고 있었다.

‘우리 CH의 실세는 여전히 차성태 명예회장님이시죠.’

성가신 노인네들.

현재 CH그룹 총수인 차현수 총괄회장의 입지가 작은 만큼 성태에 대한 충성심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싶었다.

회유가 안 되면 결국 협박인가.

성태는 무슨 수를 써서든 제게서 연을 떼어내려 할 테니 연과 함께 한남동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벌어둔 시간 동안 그를 압박할 카드를 가능한 한 많이 준비해 두어야 했다.

“오빠.”

불도 켜지 않고 드레스룸으로 향하려던 설우가 침대 위에서 들린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여기서 잤어?”

“네, 여기서 자겠다고 했어요.”

어서 가까이 오라는 듯. 연이 치렁치렁한 억제대 끈이 매달린 손을 뻗었다.

“나 술 마셨는데. 냄새나.”

“괜찮아요. 종일 못 봤잖아요.”

“보고 싶었어?”

“당연하죠!”

기분 좋게 웃으며 다가온 설우가 손목을 압박하던 끈을 풀어주자 작은 몸이 너른 품속을 파고들었다.

그의 온기와 향이 주는 안정감이 좋다.

포근해.

“이든한테 말해서 회사로 오지 그랬어.”

“이든이 오빠 바쁘다고 했어요. 일하는 데 방해하기 싫어서 안 갔어요.”

“넌 방해해도 돼. 낮에 많이 잤나 보네? 이 새벽에 깨어있고. 몇 시간 잤어?”

“낮에 4시간요. 그리고 약 먹고 밤 11시에 자서 방금 깼어요.”

“낮잠을 줄여야 밤에 잘 잔다니까. 꿈도 안 꾸고.”

“졸린 걸 못 참겠어요. 그래도 한 번에 확, 잠드는 건 좀 없어진 거 같아요. 졸리다고 세 번쯤 생각할 여유가 생겼어요. 나아진 거 맞죠?”

“응.”

딱하기도 하지.

진심으로 기뻐하는 연을 안쓰럽게 보던 설우가 마른 제 입술을 혀로 가볍게 문질렀다.

목에 걸린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는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대니 순간 멈칫한 연이 이내 까르륵 웃었다.

눈동자가 초롱초롱한 것을 보니 잠은 이미 멀찍이 달아난 모양이다.

“오빠 우리 저번에 사진 찍은 건 언제 볼 수 있어요?”

“서둘러 달라고 했으니 곧 볼 수 있을 거야.”

얼마 전 스튜디오에서 웨딩 촬영을 마친 연은 결혼을 실감해 가는 중이었다.

예행연습을 핑계로 결혼식 장면이 나오는 드라마 마지막 회를 어찌나 많이 봤는지. 이든이 지겹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여기서 자도 돼요?”

“이미 잤잖아.”

“오빠 없을 때랑 있을 땐 다르죠. 같이 자면 내가 오빠 괴롭힌다면서요.”

“알긴 아네. 내가 이렇게 밝히는 놈인지 몰랐어. 하긴 애초에 널 사랑하게 될 줄도 몰랐지.”

아니, 알았던가.

훌쩍 자란 연을 다시 만나고 묘한 이질감을 느꼈을 때부터 사랑은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오빠.”

“응.”

“아무래도 사랑한다는 말은 자주 들으면 안 될 거 같아요.”

“왜. 매일 할 건데.”

제 손등을 덮고 있던 설우의 손을 끌어다 왼쪽 가슴팍 위에 올린 연이 그를 멀뚱히 올려보았다.

“둥둥거리는 거 느껴져요? 가끔 오빠 때문에 터질 거 같다고요. 이제 보니까 오빠도 날 괴롭히는 거 같아요.”

“가끔 난, 네가 순진한 척하는 구미호처럼 느껴져.”

쿵쿵 울리는 심장 박동이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녀만의 서툰 사랑 표현에 결국 몸이 단 설우가 가는 목덜미를 감싸며 입술을 겹쳤다.

술기운 탓인지 평소보다 조급하게 연의 입속을 헤집던 설우는 그녀의 혀로 옮겨가는 위스키 향을 느끼고 곧바로 떨어졌다.

“독한 술 마셨는데, 미안.”

“더할래요.”

“안 돼. 씻고 올 테니까 얌전히 있어. 나 씻는 동안 안 잘 수 있을 거 같아? 그럼 풀어두고 갈게.”

“네. 절대 안 잘 거 같아요. 씻고 나와서 또 해요?”

“아니, 끝이야.”

“아깝다.”

기대 가득한 눈동자를 본 설우가 피식, 웃으며 연의 콧잔등을 건드렸다.

“꼬시지 마.”

“안 꼬셨는데요.”

“매일같이 꼬시잖아.”

“꼬시는 게 아니라 그냥 더 하고 싶은 거라고요.”

“네가 이럴 때마다 내가 더러운 변태가 되는 거라고.”

“오빠 더러운 변태 아니라니까요.”

“맞아. 내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

욕실로 가기 위해 스윽, 침대에서 일어난 설우가 넥타이를 머리 위로 빼내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요?”

“널 계속 벗겨.”

“……!”

“널 수십 번, 수백 번 벗긴다고.”

연의 귓가로 상체를 숙인 설우가 야릇한 속삭임을 끝으로 사라졌다.

그가 떠나고도 색기 넘치는 목소리가 맴도는 연의 귓불이 빨갛게 물들었다.

머릿속 말고 여기서 벗겨도 되는데.

연이 눈가를 긁적였다. 부끄럽지만 진심이었다.

난 정말 괜찮은데, 왜 매번 참는 거지.

쏴아,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줄기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린 연이 침대에 누워 베개를 끌어안았다.

내가 먼저 벗겨줘야 하나.

얼핏 보았던 설우의 탄탄한 상체를 떠올린 연이 저도 모르게 발장구를 쳤다.

그 잠깐의 생각이 설우를 진짜 벗기게 될 거란 걸 상상도 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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