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39화 (39/96)

39화.

CH그룹 본사 꼭대기 층에 있는 차성태 명예회장의 집무실.

화진이 혀를 차는 적폐 3대장이 악의 카르텔을 굳건히 하기 위해 모여있었다.

“한 시장 딸은 좀 어때. 차 사장한테 정을 많이 줬던 것 같은데 마음은 잘 추스르고 있는 게야?”

반질거리는 생활 한복을 차려입은 백창석이 딱딱한 얼굴로 앉은 한강일 시장을 위로했다.

껄끄러운 주제가 튀어나오자 차성태 명예회장이 짧게 헛기침을 했다.

“펠리체로 들어간 후로 보지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펠리체는 입주자 허락 없이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니까요. 주희가 매번 거절하네요. 교도소 들어간 자식한테 면회 신청하는 것도 아니고, 이건 뭐.”

“쯧, 아쉽게 됐지. 혼인이 성사됐으면 우리가 얻을 게 많았을 텐데. 차설우 사장이 참, 만만치가 않구먼. 차 회장도 손자 때문에 골머리 좀 썩겠습니다.”

“이번 일은 정말 유감이야, 한 시장. 제 어미까지 끌어들일 줄은 몰랐어. 그렇게 대책 없는 놈이 아닌데. 여자에 눈이 멀어서는.”

차 회장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설우가 판을 제대로 뒤엎은 탓에 면이 서지 않는 상황이 못마땅했다.

“눈멀게 하기 충분한 아이죠. 금빛 안에 희미하게 피는 푸른 아지랑이가 얼마나 신비롭던지. 서양에선 금안을 두고 늑대의 눈이라고 한다는데. 영 잊히지 않더이다. 아, 이제 차 회장 손자며느리가 될 테니 자중해야겠네요.”

창석이 적당한 온도로 내려간 국화차를 머금으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설우의 집무실에서 단 한 번 마주쳤던 기억이 선명했다.

“최대한 빨리 설우 옆에서 걷어낼 생각입니다. 삶이 가엽지만 그뿐이죠. 백 대표 별채로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설우가 아무리 기를 써도 평창동에 들어간 아이를 데리고 나오진 못하겠죠.”

연의 계부인 권상철과 백창석 대표의 관계를 듣고도 왜 진즉 떠올리지 못했을까. 설우가 마음을 놓을 때쯤 평창동으로 보내 버리면 되겠군.

“잔인하십니다, 회장님. 그래도 손자가 원하는 아인데.”

혀끝을 자극하는 씁쓸한 차 맛을 음미한 한 시장이 눈썹을 삐뚜름하게 세웠다.

제 딸의 자리를 빼앗은 여자가 불행한 미래를 갖게 되길 바라는 마음과 별개로 피도 눈물도 없는 차 회장의 방식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하하하! 저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미리 언질만 주세요. 한 시장은 아직 그 아이 본 적 없지?”

“관심 없습니다. 주희는 만난 적이 있는 거 같던데 질투에 눈이 멀어 괜한 사고를 칠까 걱정입니다.”

“한 시장 차 트렁크에 사과 두 박스 넣어뒀네. 딸자식 상하게 한 걸 돈으로 보상할 순 없지만 받아. 현수 처 시켜서 좋은 혼처도 알아봐 줄 테니 자넨 대선 준비에만 신경 쓰고. 파혼 기사 나가면 정경유착이니 뭐니 떠들어대서 지지율도 분명 떨어질 거야. 한남동 재개발하고 하산 신도시로 밀고 나가.”

“예, 그래야죠.”

“이야, 역시 우리 차 회장님. 손 큰 건 알아줘야 해.”

백창석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오만 원짜리가 빼곡히 들어찬 두 박스면 얼마쯤 되려나.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니 이렇게라도 갚아야지.”

“잘 쓰겠습니다.”

“그나저나 청첩장을 다시 돌리셔야겠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중요한 인사들은 전부 직접 만나 청첩장을 전했는데 이 무슨 굴욕입니까, 황망할 따름이에요. 기사 터지고 나면 손자의 사랑을 응원하는 정 많은 할아버지 코스프레라도 해야 할 참이에요.”

“대놓고 비난하진 않을 겁니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지겹게 쑥덕이겠지.”

첩첩산중이었다. 설우와 주희가 정략결혼이었음을 인정하고 청첩장을 돌린 지 세 달 만에 신부가 바뀐 또 다른 청첩장을 돌려야 하는 우스운 상황을 맞이했다.

고급스러운 찻잔을 들어 올리는 차 회장의 손에 짜증이 잔뜩 묻어있었다.

일생에 두 번은 없을 치욕이었다.

작정하고 설우에게 일러바친 연은 말을 하다가 열이 받았는지 두 뺨을 복숭앗빛으로 물들이며 씩씩거렸다.

설우의 서늘한 손바닥이 연의 볼을 문질렀다.

“나랑 결혼할 거라고 말했어야지. 그러니까 개소리하지 말라고.”

탈의실 벽 뒤로 숨은 자영에게 들릴 만큼 큰 목소리였다.

연을 앞에 두고 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니 급한 대로 하는 경고였다.

잔뜩 가라앉은 저음이 귓가에 박히자 자영이 어깨를 들썩였다.

세상에 결혼이라니.

설우의 약혼녀가 파혼과 결혼 이야기를 했다는 말은 전해 들었지만, 1동의 여자와 설우가 결혼을 할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잘못했어요.”

“너, 또.”

“오빠가 화내는 거 같아서요.”

“그런 거 아니야. 겁은 많아서.”

설우의 서늘한 저음에 놀란 건 자영뿐만이 아니었다.

안심하라는 듯 짓는 미소에 쭈뼛거리며 다가간 연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결혼한다고 소문내고 다녀요?”

“소문은 곧 날 거야. 아까 같은 상황에선 당당하게 말하라고. 연아, 오빤 돈이 아주 많아. 심심하면 하늘에 뿌리고 다녀도 될 정도로 남아돌거든.”

“와, 많은 건 알았는데 그 정도였어요? 하긴. 맨날 엄청 비싼 음식도 사주고, 엄청 비싼 옷도 사주고. 목걸이도 사주고, 예쁜 반지도 사줬으니까. 오빠 짱.”

꼼짝도 못 하고 서 있을 자영에게 하는 말이었는데.

순진하기 짝이 없는 답이 돌아오자 설우가 피식, 웃으며 연의 등을 쓰다듬었다.

“이든 말투 좀 배우지 마. 어쨌든 우린 돈이 곧 권력인 세상에 살고 있지.”

“?”

“12동에 사는 사람들을 펠리체에서 쫓아내는 일이 나한텐 아주 쉽다는 뜻이야.”

“쫓아내진 않아도 돼요.”

“처음 한 번은 봐주는 게 좋겠지?”

“네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야. 앞으로도 이렇게 전부 다 일러. 혼자 속상해하지 말고.”

“네, 근데 뭘 알아들어요?”

“몰라도 돼. 돈가스 먹고 싶다며, 가자.”

손을 맞잡은 설우와 연은 탈의실 반대편으로 멀어져 갔다.

조금 전의 일은 말끔히 잊고 팔을 흔들며 기분 좋게 걷는 연과 달리 묵직한 경고를 들은 자영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약 먹은 시간 쟀어?”

“응, 먹은 지 5시간 36분째.”

테이블에 올려지자마자 포장 용기 속으로 들어가게 된 음식들을 챙겨 나온 직원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이든의 손에 여러 개의 종이 가방을 건네주었다.

“돈가스는 바로 먹어야 맛있는데. 눅눅해지면 무슨 맛으로 먹나.”

“6시간만 넘겨도 감사할 텐데.”

“심지어 점점 줄어드는 중이잖아.”

먹고 싶은 음식을 잔뜩 시켜놓고 잠들어버린 연은 설우의 품에서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각성제를 먹은 시간을 체크하는 것은 연의 수면 패턴을 가장 적은 오차로 추측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약 때문에 수면 패턴이 일정해진 거 같긴 한데 결국 고쳐지지 않으니 무슨 소용인가 싶고. 예전엔 낮에 잠들면 한 시간도 안 넘기고 일어났는데 요즘은 너무 오래 자는 거 같아 걱정이고.”

주머니를 뒤적거린 이든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12시간이 넘도록 자는 연을 보고 식겁한 이후로 오래 자는 것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최대한 버티다가 정 안 되겠다 싶을 때 약을 늘려야지.”

다른 이들은 약 한 알에 12시간을 버틴다는데. 왜 연이는, 왜 연이만 이렇게 효과가 작은 건지.

“그래, 회사 안 들어가도 돼?”

“응, 급한 일은 끝내고 왔어.”

“그럼 나 체육관 좀 갔다 올게. 한동안 못 갔더니 몸도 뻐근하고 갑갑하네.”

스트레스도 풀고, 운동도 할 겸 이든은 주기적으로 체육관을 찾아 주짓수와 킥복싱을 즐겼다.

한동안 연을 돌보느라 몸을 쓰지 못해 어깨가 뻣뻣해지는 감각이 불쾌했다. 스파링으로 풀어낼 때가 된 듯싶었다.

“실컷 하고 와. 내가 볼 테니까.”

“알았어, 들어가.”

설우의 손가락에 포장해 온 음식을 걸어준 이든이 대문이 닫히고 나서야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셋 모두가 제법 익숙해진 연을 위한 작은 배려였다.

***

연예인의 사생활만큼이나 이슈가 되는 게 재벌가 스캔들이었다.

결혼과 이혼, 불륜은 물론이고 혼외자, 여배우 스폰서, 마약 등 잊을만하면 포털사이트 뉴스 메인에 걸리는 재계 이슈의 이번 주인공은 CH파라다이스의 차설우 사장이었다.

<차설우 사장, 결혼 한 달 앞두고 파혼>

<그동안 부인하던 정략 결혼설이 결국 사실이었나>

<[단독] CH파라다이스 차설우 사장, 파혼 후 일반인 연인과 결혼 예정>

<정경유착 아닌 연애결혼임을 강조하던 한강일 시장, 대선 준비에 적신호>

<피아니스트 한주희 양, 독주회 무기한 연기>

주희와 파혼 후 곧바로 진행되는 결혼은 그들의 약혼이 서로의 이익을 취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꼴이 되었다.

설우의 파혼 선언으로 웃음거리가 된 건 한강일 시장과 주희였다.

인터뷰에서 주희와 설우의 연애결혼을 주장했던 강일은 체면을 구기는 것은 물론 굳건하던 지지율까지 하락세를 보였다.

일반인 연인에게 밀려 버림받은 꼴이 된 주희 역시 수치스러운 상황을 견디지 못했다.

대학 강의는 전부 휴강, 공들여 준비하던 독주회까지 중단시킨 그녀는 펠리체 안에서 두문불출하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설우를 이기지 못해 모임에 해를 끼친 차성태 회장은 자존심이 상해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도 대외적으론 인자한 할아버지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고 있었다.

“세상에. 뭘 입어도 천사 같아.”

“난 못 고르겠어.”

“나도, 너무 예쁘잖아.”

눈앞을 가리고 부산스럽게 사진을 찍는 이든을 밀어낸 설우가 세 번째 드레스를 입고 나온 연을 보고 손뼉을 쳤다.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리며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 장본인은 드레스숍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 웨딩드레스를 입은 연을 머릿속에 새겨 넣기 바빴다.

“나도 다 좋아요!”

“신부님이 워낙 인형 같으셔서 안 어울리는 드레스가 없네요. 지금까지 왔던 신부님 중 탑이세요.”

숍의 실장이 엄지를 추켜세웠다. 입에 발린 빈말이 아니었다.

순백의 드레스와 가는 목선을 드러내고 올린 금발, 보면 볼수록 신비로운 눈동자는 그림으로 그려 넣은 듯 완벽했다.

“감사합니다.”

칭찬을 받은 연이 맑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꾸벅 숙였다.

착하기도 하지. 내가 감사하다는 말을 언제 마지막으로 들었더라.

예의 따윈 개나 준 듯 갑질을 일삼는 고위층 여자들을 상대하다 보니 사소한 인사에도 기분이 좋았다.

드레스를 갈아입는 시간 동안 나눈 몇 마디 대화에도 순하고 사랑스러운 성격이 고스란히 나타났다.

정략결혼이고 뭐고 눈이 뒤집혀 파혼을 선택하기 충분하다고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정도였다.

“어쨌든 선택해야 하니까. 난 가장 화려한 게 좋을 거 같은데 처음 입었던 거.”

얼마 전, 약혼녀 주희가 드레스를 고를 땐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던 남자였다.

무심한 예비 신랑 때문에 잔뜩 골이 난 주희는 실장에게 온갖 화풀이를 했었다.

연을 세심하게 챙기는 설우를 보며 실장이 설핏 비웃음을 지었다.

정략결혼이었다더니. 바쁜 게 아니라 관심이 없었던 거였구나.

“오빠는 안 입어 봐요?”

“응. 난 사이즈 맞춰서 대충 입으면 돼.”

“하긴. 너무 잘생겨서 뭘 입어도 멋있을 거예요. TV에서 봤는데 신랑 입장! 이거 할 때 근사하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오빠한테 반하면 어떡하죠? 안 되는데.”

가까이 다가와 단정한 라인으로 떨어지는 드레스를 둘러보던 설우가 걱정이 가득 담긴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야말로.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절대 그렇게 예쁜 말 해주지 마.”

“첸하고 이든은요?”

“쟤네도 안 돼.”

“아, 왜.”

“와, 꼬맹이랑 결혼한다고 막 나가네. 조심해, 형. 결혼식 날 내가 연이 데리고 튀는 수가 있어.”

“뒤지, 아니 혼나고 싶으면 해보든지.”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험한 말을 끊은 설우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혼나고 싶으면, 이라니.

뒤지기 싫으면 입 닥쳐, 를 한껏 순화시킨 말을 들은 이든이 얼빠진 얼굴로 탄식을 뱉어냈다.

연 때문에 부러 사용하는 온화한 어투가 심각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네, 형님. 아주 혼쭐을 내주십쇼!”

“큭, 푸흡!”

“이든! 혹시 또 술 마시고 왔어요? 왜 혼나려고 해요.”

“푸하하하!”

설우를 놀리려 취한 이든의 오버액션을 본 연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소파에 편히 앉아 셋을 구경하는 첸만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야 꼬맹, 그거 알아? 나는 사실 혼나는 게 아니야. 너 없으면 쌍욕을 처먹는….”

“첫 번째 드레스로 하자, 어때? 괜찮지?”

설우에게 말이 끊긴 이든이 입을 삐죽거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네네, 그걸로 해요.”

“조심해서 갈아입고 와.”

“네!”

내가 드레스를 입게 되는 날이 오다니.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잔뜩 들뜬 연이 해사한 얼굴로 커튼으로 들어갔다.

짧은 기간 안에 결혼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지만 즐거운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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