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달라붙어 사랑을 속삭이는 진중한 눈을 지그시 보던 연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듣기 좋아요.”
“누구한테 듣는 걸 상상했는데.”
“누구든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들어본 기억이 없는 거지. 재호 아저씨랑 준이가 매일같이 했었어.”
“아빠랑 오빠를 언제쯤 기억할 수 있을까요? 평생 못하려나.”
“납골당에 가볼래?”
연을 제 품 깊숙이 끌어안은 설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7년 만에 마주한 세상과 아픈 몸을 감당하는 것도 벅찰 테니 굳이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잠시 고민하듯 눈을 깜빡이던 연이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돌아와서 진심으로 슬퍼지고 그리워지면 그때 갈래요. 지금은 얼굴을 봐도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안타깝지만 사실이었다. 잃어버린 삶도, 가족도, 찬란했던 어린 시절도 전부 잊고 산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다.
“충분히 슬퍼 보이는데?”
“음, 잊었다는 자체가 조금 슬프긴 해요. 오빠도 잊었잖아요.”
“우린 지금 같이 있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곧 가족이 될 거잖아.”
“실감은 안 나요. 오빠가 그 성질 더러운 여자랑 결혼하지 않는 건 다행이고요.”
어지간히도 싫었나 보네.
퉁명스럽게 중얼거리는 연을 코알라 새끼처럼 등에 태운 설우가 드레스룸을 나섰다.
“이 안 닦고 왔지?”
“네.”
“그럼 아이스크림 먹자.”
“전 초코맛이요, 많이.”
“발등 드레싱도 해야 해. 퇴원은 했어도 통원치료 계속 받아야 하는 거 알지? 이든 잘 따라다녀. 이든이 괴롭히면 오빠한테 이르고.”
“으, 지겨운 병원.”
“으, 지겨운 자식들.”
진절머리 치는 연을 따라 고개를 저은 설우가 잽싸게 달려오는 커다란 두 남자를 보았다.
“연아! 귤 먹어, 귤. 엄청 달다.”
“아니, 복숭아가 더 달아. 꼬맹이 복숭아!”
껍질이 모두 벗겨진 귤이 한가득 담긴 그릇을 들고 다가온 첸과 울퉁불퉁 깎아 놓은 복숭아 접시를 들고 온 이든이 동시에 연에게 손을 뻗었다.
“와, 맛있다.”
귤과 복숭아를 차례로 받아먹은 연이 허공 위에 떠 있는 발을 흔들었다.
병원에서도 다 함께 있는 날이 많았었지만, 펠리체로 돌아와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집이 주는 안정감이 생소했다.
“나는 입도 아니지.”
“형은 손이 없어? 직접 먹어.”
“눈은 장식이야? 손 없잖아, 지금.”
설우의 두 손은 등에 업은 연을 받치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
대놓고 차별을 당한 설우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귀여운 막내의 볼이 빵빵해지도록 복숭아를 밀어 넣던 이든이 한 조각 남은 복숭아를 설우에게 주었다.
엎드려 절받기군.
딩동, 딩동. 딩동.
복숭아를 제 입에 넣어주며 얄미운 미소를 짓는 이든의 엉덩이를 발로 차려던 설우가 시끄러운 초인종 소리에 얼굴을 구겼다.
“뭐야, 이 시간에. 방문 호출 없었잖아.”
“펠리체 주민인가 본데.”
성벽과 같이 높은 담장 안에 지어진 펠리체는 외부인 출입 시 절차에 따라 방문하는 동으로 반드시 승인을 위한 호출이 들어왔다.
방문 호출 없이 대문 초인종을 누를 수 있는 부류는 입주민과 펠리체에 상주하는 직원뿐이었다.
딩동, 딩동.
“내 집 초인종을 이렇게 처 누를만한 인간이 펠리체 안에 있었던가.”
“생겼네, 누를 만한 인간.”
거실 한쪽 벽에 내장된 비디오폰 화면을 확인한 첸이 반갑지 않은 방문객을 보고 오픈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문 열어, 차설우! 문 열으라고오오!
“와우.”
날카로운 하이톤의 목소리가 거실 대리석 벽을 둥둥 울렸다.
펠리체의 주민들을 전부 깨울 생각인지. 주희는 초인종을 누르는 것으로 모자라 괴성을 질러댔다.
“오빠, 나 내릴게요.”
“그래, 아이스크림 먹고 양치해. 이든, 연이 보고. 가드 불러, 첸.”
-야, 차설우! 이 나쁜 새끼야!
“우리 오빠 나쁜 새끼 아니거든요!”
설우의 등에서 내려온 연이 비디오폰을 향해 빼액, 소리를 질렀다.
“이거 누르고 말해야 들리는 거야, 바보야. 씻으러 가자, 형이 알아서 해결할 거야.”
“조심해요, 오빠.”
“너나 조심해. 잠들지 말고.”
“네.”
연의 볼을 살짝 주무른 설우가 현관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다정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어지고, 불쾌한 대면을 앞둔 입매가 뒤틀렸다.
미치려면 곱게 미치던지. 어디 와서 행패야.
“만취인 거 같은데. 알 만한 사람이 왜 저럴까. 내일이면 온 동네에 소문이 파다하겠어. 펠리체 1동의 한밤중 치정극.”
“8동을 내준 게 실수야. 입주민의 권리를 쥐여준 꼴이 됐군. 여기 들어오지도 못했을 여잔데.”
“난 파혼 못 해! 죽어도 못한다고.”
대문에 가까워지니 주희의 앙칼진 목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은 설우가 거칠게 문을 열었다.
“미친 건가.”
애타게 부르짖던 설우가 나타나자 초인종을 끊임없이 누르던 손가락이 멈췄다.
“파혼으로 모자라 결혼까지 하겠다고? 그 금발 계집애랑 하니?”
“그렇다면.”
어둠 속에서 흐느적대는 인영들이 보이자 짜증이 치밀었다. 입주민 중 몇몇이 소란을 듣고 모여든 모양이었다.
“나 못해, 파혼 못해! 그리고 당신도 결혼 못해. 내가 그렇게 안 둬!”
주희가 악다구니를 썼다. 아직 정식 발표도 나지 않았는데 암암리에 파혼 소식이 돌고 있었다.
설우와의 약혼을 부러워하던 친구들은 벌써 비웃음 가득 담긴 위로 전화를 걸어왔다.
“저기 오는 가드 둘 보이지. 저 둘이 여기 도착하면 넌 꼴사납게 끌려가는 거야. 그전에 제 발로 사라지는 게 어때.”
“결혼 한 달 전에 파혼이 말이 돼요? 그리고 나랑 결혼하기로 한 날에 같은 장소에서 다른 여자랑 결혼하겠다고요? 나 좀 살려줘요, 설우 씨. 모임에서 우스운 꼴 당하고 싶지 않다고요!”
“지금도 충분히 우스워. 더는 아무 짓도 하지 마. 봐주는 건 여기까지야.”
“8동으로 데려가요.”
가드들이 도착하자 첸이 하루살이를 쫓듯 손을 휘저었다. 비틀거리던 주희는 힘없이 끌려 내려갔다.
“나쁜 새끼, 잔인한 새끼, 천벌 받을 거야, 당신! 내가 저주할 거라고!”
“이 여자, 1동 근처엔 얼씬도 못 하게 해요.”
“예, 알겠습니다.”
설우의 나지막한 경고에 가드가 허리를 숙여 예의를 차렸다.
투박한 손길에 끌려가면서도 주희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를 무심하게 깔아본 설우는 곧장 뒤돌아 집으로 들어갔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던데.”
자신을 버린 설우를 저주하겠다고 눈에 쌍심지를 켜는 주희를 보던 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금이라도 뿌려놔야겠군.
주희가 떠난 자리를 보며 눈가를 긁적이던 첸도 대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하얀색 원피스가 가을바람에 펄럭였다.
이든의 손을 잡고 문화센터로 향하는 작은 발이 경쾌하게 땅을 디뎠다.
“그럼 오늘은 골프만 배워요?”
“아니, 골프하고 그림. 내일은 꽃꽂이하고 레고. 내일모레는 연이 드레스 고르러 가는 날.”
“너무 좋다.”
“웃긴. 약효가 떨어지면 안 될 텐데.”
“2시간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
“골프 치고 그림 그리고 점심 먹고 들어가면 딱이겠다. 뭐 먹고 싶어?”
찡긋거리는 연의 콧잔등을 누른 이든이 자동문의 열림 버튼을 툭, 건드렸다.
“음, 뭐 먹지. 짜장면?”
“너 짜장면 중독이야. 다른 거 먹어.”
“돈가스.”
“그래, 그거 먹어.”
“사람이 엄청 많아요, 이든.”
“다 펠리체 입주민이야. 여기가 펠리체 대통합의 장소거든.”
“그렇구나. 신기하다.”
사이좋게 몰려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연이 이든의 손을 꼭 쥐었다.
아는 얼굴이 보이면 대강 고개를 까딱이던 이든이 여러 시선에 낯설어하는 연의 어깨를 감싸고 자리를 옮겼다.
골프 수업을 기다리며 우르르 몰려 수다를 떨던 사모들이 다정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든과 연을 힐긋거렸다.
마침 어제 1동에서 행패를 부린 주희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우는 중이었다.
마트에서 설우와 연이 애정표현을 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 있는 아진이 맞잡은 손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남편인 우석 또한 1동의 여자가 설우의 연인이 확실하다고 했었는데. 왜 오늘은 저 둘이 손을 잡고 있는 거지.
“뭐야, 뭐야. 도대체 1동 저 여자는 정체가 뭐야?”
“그러니까. 차설우 사장 약혼녀가 금발 어쩌고 하는 거 보고 차 사장이랑 바람난 건 줄 알았는데?”
“에이, 바람은 아니지. 이젠 파혼도 했는데.”
“결혼 한 달 앞두고 여자 생겨서 파혼한 건데. 솔직히 바람이랑 다를 게 뭐야? 파혼 전에 동거 시작했잖아.”
“어우, 근데 내가 남자였어도 홀딱 넘어갔겠다. 저렇게 생긴 애가 벗고 달려들면 버틸 재간이 있어? 적어도 펠리체 안에 있는 남자들은 두 팔 벌려 환영할걸.”
“어머, 이 언니 봐. 벗고 달려들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뻔하지. 아니, 그건 그렇고 저 꼴은 뭐냐고. 설마 거기 사는 남자 셋을 다 꼬신 거야?”
12동에 사는 자영이 붉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빈정거렸다. 치정으로 얽힌 스캔들을 가장 반가워하고 재미있어하는 인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작정하고 꼬시면 안 될 게 뭐 있어요? 애초에 1동에 여자가 들어온 것부터가 이상한 거라고요. 남자 셋이 사는 집에 어린 여자라니.”
상식을 벗어난 말도 일단 내뱉고 나면 말이 되는 곳이 바로 펠리체였다.
미리 준비하지 못한 골프웨어를 구경하는 이든과 연의 뒷모습을 감상하며 숙덕거리는 이들의 얼굴엔 흥미가 가득했다.
“이든, 나 옷 갈아입고 올게요!”
“같이 가. 앞에 있을게.”
“으으음, 안 돼요. 금방 올 테니까 여기 있어요. 화장실이랑 탈의실까지 쫓아다니면 너무 창피하잖아요.”
“다칠까 봐 그렇지.”
“나 멀쩡해요. 약 기운 때문에 그 흥분 호르몬이 막, 막 솟아나고 있다고요.”
“흥분 호르몬 같은 소리 하네. 알았어, 정말 조심해야 해. 너 또 다치면 나 설우 형한테 죽어.”
창피하다니까 봐준다.
제 목 앞을 손가락으로 그어 보인 이든이 연을 혼자 보내주었다.
40분 내내 골프 기본자세를 배우고 또 다른 사십 분 내내 엉터리 스케치만 해도 즐거워 까르르 웃기 바빴던 연이었다.
이든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던 시간이었다.
골프웨어를 벗고 원피스로 다시 갈아입은 연이 거울 앞에서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졌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안 그래도 가까이서 한번 보고 싶었는데.
타이밍 좋게 탈의실로 들어온 자영이 연에게 바짝 다가섰다.
“황자영이라고 해요, 난 12동 살아요.”
“선우연이에요.”
“이사 온 지 꽤 됐죠? 이제야 얼굴을 보네. 모임도 좀 나오고 그래요.”
“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생판 모르는 사람이 친근한 척 말을 걸자 어색한 미소를 지은 연이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자리를 피하고자 움직였다.
“누구 애인이에요?”
“네?”
“차 사장? 아니면 오늘 같이 온 이든 씨? 아니면 첸 씨? 우스갯소리로 하긴 했는데 혹시 셋 다는 아니죠? 1동 남자들이 외국에 오래 살았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쪽으로 프리한가 해서.”
나쁜 의도가 다분히 담긴 자영의 말을 천천히 되짚던 연이 점점 미간을 찌푸렸다.
하마를 닮은 아줌마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런 거 아니에요.”
“어제 차설우 사장 약혼녀 와서 난리 치던데. 역시 차 사장이죠? 능력 좋다. 서울 시장 예비 사위도 가로채고.”
“…….”
“끼고 사는 걸 보니 어디서 데려온 거 같은데. 차 사장 어떻게 만났어요? 강남 요정? 아니면 고급바?”
“저기요, 아줌마.”
뭐? 아줌마?
거침없이 나온 호칭에 자영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따지고 보면 아줌마가 맞지만 대놓고 아줌마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 계속 이든 씨 손잡고 다니던데. 남들이 보면 오해하기 딱 좋아요. 조심 좀 해.”
충고로 위장한 비난이었다.
“언니 여기 있었어? 어! 1동 사는 여자분이네? 둘이 무슨 얘기해?”
“궁금한 거 물어봤지! 누가 진짜 애인인지.”
“진짜? 누구예요?”
“아직 제대로 대답 안 했어.”
다른 수업이 끝난 건지. 갑작스럽게 우르르 사람들이 몰렸다.
제게 집중된 시선에 당황한 연이 서둘러 탈의실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다.
그녀의 존재가 드러난 이상 입주민들의 수군거림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연은 이미 펠리체 사모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희 거리가 되어있었다.
터벅터벅, 기운 없는 발걸음이 고요한 복도를 울렸다.
설우의 할아버지도 그렇고, 한주희도, 좀 전의 그 아줌마도. 생경한 이들이 주는 악의 넘치는 시선이 마음을 상하게 했다.
좋은 곳에는 덜 나쁜 사람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병원에서 저를 못살게 굴었던 의료진들이나 별반 다를 게 없구나.
“우앗!”
제 발끝만 바라보고 걷던 연이 가까워진 까만 구두를 발견했을 땐 이미 늦어있었다.
딴딴한 가슴팍과 부딪혀 비틀거리는 그녀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갔다.
“누가 땅만 보고 걸으래. 넘어지면 어쩌려고.”
“오빠! 언제 왔어요? 회사 갔는데 벌써 왔어요? 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궁금한 거 많아서 숨넘어가겠네. 너 잘 놀고 있나 감시하러 왔지.”
“우으, 보고 싶었어요.”
“3시간 전에 봤잖아. 왜, 이든이 괴롭혔어?”
“그건 아니고요.”
“그럼 누가 괴롭혔는데.”
“아무도 안 괴롭혔는데.”
“아닌데. 어깨 축 처진 거 보니까 누가 괴롭혔는데.”
삐딱하게 서 연을 품에 안은 설우가 그녀의 어깨너머로 여자 탈의실 부근을 바라보았다.
뒤이어 나오려던 자영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설우를 보고 저도 모르게 몸을 숨겼지만, 이미 인기척을 들킨 후였다.
‘연이 옷 갈아입으러 갔어.’
‘똑바로 안 따라다닐래? 혼자 두지 말라니까.’
‘꼬맹이가 절대 따라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거든. 사람들이 쳐다봐서 창피하다고.’
‘센터는 어때? 좋아해?’
‘난리 났지. 재밌다고 싱글벙글, 춤추고 돌아다닐 기세야.’
먼저 만난 이든에게 전해 들은 말과 다르게 눈앞에 선 연은 기가 팍 죽은 상태였다.
연이 슬쩍 뒤를 돌아 탈의실 문을 보았다.
“12동 사는 황자영이란 아줌마요. 나보고 셋 다 만나느냐고 했어요. 능력 좋다고. 그리고 강남 요정이나 고급 바에서 오빠랑 만났냐고 하던데. 바는 알겠는데 요정은 뭐예요? 팅커벨?”
아니, 저렇게 죄다 이른다고?
적나라한 고자질을 들은 자영이 소리 없이 놀라며 입을 꾹 눌렀다. 그녀는 예상하지 못한 반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