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파혼이 전해진 한강일 시장의 집 안엔 딸 주희의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말렸건만. 혼자만 죽어라 목을 매더니 결국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다른 여자가 생겨 혼담을 깰 작정으로 제 불륜 사진을 들이밀었다는 사실이 괘씸했다.
주희와 파혼을 하고 곧이어 결혼까지 하겠다니.
상도 없이 제멋대로 구는 설우에게 달려가 멱살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차설우를 이길 순 없었다.
백창석도 함부로 손대지 못하는 재계 최고 권력자에게 임기 막바지 시장 따위는 우스운 존재겠지. 그러니 제 딸을 이렇게 헌신짝 버리듯 버렸을 테고.
차 회장도 차 회장이지만, 설우의 뒤에 버티고선 현진그룹 박화진 총괄회장도 버거운 상대였다.
국가 원수가 되어 돈으로 천하를 호령하는 재벌가의 그 높은 콧대를 눌러주겠다는 다짐이 절로 생겨날 법한 상황이었다.
“한주희, 그만 못해? 일곱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대체 언제까지 징징거릴 거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내려가요. 괜히 애 더 서럽게 만들지 말고.”
“다른 여자랑 살겠다는 놈 뭐 아쉽다고 울어, 울기는.”
“겨우 한 달 남았었다고요! 펠리체로 가구도 들여놓고 끅, 친구들한테 매일같이 자랑했는데! 나 이제 어떡해, 엄마? 모임은 어떻게 나가! 얼굴은 어떻게 들고 다니냐고, 우흑….”
히스테릭한 외침이 들려오자 강일이 눈을 질끈 감았다.
상태를 보아하니 한동안은 마음을 추스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질투에 눈이 멀어 괜한 사고만 치지 않아도 다행인데.
“시간 지나면 금세 잊힐 거다.”
“아뇨, 이건 절대 잊히지 않을 거예요. 제이에서 그 계집애를 만났을 때 어떻게든 끌어냈어야 했는데! 결국 그 여자한테…!”
가만 안 둬. 절대 이렇게는 못 물러난다고!
“주희야, 차 사장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어. 제 잘난 맛에 사는 남자 데리고 살면 피곤해.”
달콤한 주스를 챙겨온 정 여사가 딸을 달래봤지만, 원망과 분노, 질투가 뒤섞인 눈을 부릅뜬 주희는 주먹을 힘껏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나 펠리체로 들어갈 거예요.”
“뭐야?”
“아직 한 달 남았잖아요. 뭐든 해야겠어요.”
“파혼 기사랑 같이 차 사장 결혼 기사 뜰 거야. 펠리체로 들어가면 더 심각한 구설에 오를 거다.”
“상관없어요. 파혼 기사 올라오면 어차피 웃음거리라고요.”
주희가 이를 갈았다.
두 손 모아 잡고 기다리던 결혼이 허무하게 엎어지니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든 되돌리고 싶었고 끝끝내 설우를 빼앗아간 여자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될 대로 되라는 심보였다. 다른 이들의 시선은 제쳐두고 펠리체로 들어가 그 둘을 제 눈에 담아낼 작정이었다.
***
“골프는 너무 위험할까?”
“난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어차피 연습장 안에서 치는 거니까.”
“안 돼, 위험해.”
센터 일정표를 깔아두고 심각한 얼굴로 연이 배울 것을 정하는 중이었다.
펠리체는 왕국의 축소판이란 칭호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다양한 교양 활동을 즐길 수 있었다.
연이 오기 전까진 관심도 두지 않던 정보였다.
“승마는 절대 안 되고.”
“수영도 좀.”
“수영은 당연히 안 되지.”
칼같이 답하는 설우의 한쪽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섰다.
위험한 건 둘째치고 수영복에 드러난 몸매를 펠리체 입주민들한테 보여줄 생각이 없다고.
“연이는 뭐 하고 싶어?”
“전 다 좋아요. 수영도 좋은데.”
“수영은 안 된다니까.”
첸이 만들어온 3단 도시락을 차례로 비우며 설우의 옆에 착 달라붙어 있던 연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연의 입가에 묻은 데리야키 소스를 닦아 제 입속으로 가져가는 설우를 보며 이든과 첸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꽃꽂이나 그림 그리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나쁘지 않지. 내가 같이 해야 한다는 거 빼면.”
“푸흡! 이든이 꽃꽂이를 한다고?”
첸이 웃음을 터뜨렸다. 꽃꽂이와 그림이라.
190cm가 넘는 거인 하나가 꽃 한 송이를 쥐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맛있어?”
“완전. 첸이 최고예요.”
잔뜩 욱여넣은 음식을 오물거리며 두 손의 엄지를 첸에게 들어주자 설우의 눈매가 묘하게 아래로 흘렀다.
“내가 제일 좋다며.”
매일 바뀌는 건가. 그래도 진한 스킨십은 나랑만 하는데.
“오빠아, 그건 비밀로 하기로 했잖아요. 이든이랑 첸이 서운해한다고요.”
맞은편에 앉은 이든과 첸의 눈치를 살피던 연이 원망스럽게 설우를 올려보며 그의 팔뚝에 머리를 마구 비비적거렸다.
좌우로 나풀거리는 금발을 바라보는 세 남자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차올랐다.
아, 귀여워.
모두가 똑같은 마음이었다.
“역시 난 이렇게 꼬맹이를 보낼 순 없어. 이 결혼은 반대야!”
“나도. 늙고 못된 늑대한테 저 천진한 다람쥐를 맡겨야 한다니.”
이든과 첸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법적인 보호자가 되기 위한 결혼이라지만 흑심이 덕지덕지 묻은 설우를 모르지 않았다.
연에 대한 사랑이 커져 파혼에 이어 결혼까지 쉼 없이 달리는 와중에 분명 다른 욕심도 생겼겠지.
“너랑 나랑 동갑이거든? 그럼 너도 늙고 못된 늑대냐?”
“아니지. 난 10살 어린 천진한 다람쥐를 탐내진 않거든.”
“얘 천진한 다람쥐 졸업했어. 전망 떠는 여우로 진화한 지 오래됐지.”
“아니, 난 오빠를 좋아하는 염소 할래요.”
“왜 염소야.”
“책에서 보면 염소가 늑대한테 잡아먹히거든요. 나도 오빠한테 잡아먹히려고, 크앙!”
아, 얘 또 크앙이래.
피식피식, 미소를 지은 설우가 뽀얀 호빵 같은 볼을 잡아당겼다.
“봤지, 전망 떠는 거.”
“우리 꼬맹이가 설우 형이랑 진짜 연애를 하려나 봐.”
“천천히 해라, 차설우. 연이 아직 어린 거 알지? 먹은 나이보다 훨씬 어리다. 애가 앞뒤 분간이 전혀 안 된다고. 어? 그러니까 막, 그, 그 아무튼 차분히 아주 늦게 잡아먹으라고. 배 갈리기 싫으면.”
“왜 네가 난리야. 내가 알아서 해.”
“첸! 사람 배 가르면 죽어요.”
“나쁜 늑대가 염소를 잘못 먹으면 원래 배를 가르는 거야.”
첸은 아주 단호하게 배를 반으로 가르는 손짓을 해 보였다.
티셔츠 속에 감춰진 설우의 배를 흘깃거리던 연이 울상을 지었다.
오빠 배가 갈리면 안 되지, 절대 안 돼.
“꼬맹이 이쪽으로 와 봐.”
꼬았던 긴 다리를 푼 이든이 저와 첸의 사이 공간을 툭툭 두드려 연을 불렀다.
도시락통을 들고 쪼르르 다가와 앉은 연이 멀뚱히 이든을 보았다.
“형이랑 결혼하는 거 좋아?”
“네, 좋아요.”
세차게 끄덕이는 머리 위로 이든의 커다란 손이 내려왔다.
“차설우가 못되게 굴면 우리한테 바로 일러야 해.”
“설우 형 집안 사람들이 괴롭혀도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바로 말하고.”
“차설우가 화내고 서운하게 만들어도 꼭 얘기해.”
“형이 안 놀아줘도 말해. 우린 막냉이 편이야.”
“맞아, 우린 무조건 네 편이야.”
김밥을 넣은 연의 고개가 첸과 이든을 향해 번갈아 움직였다.
“자, 크로스.”
“크로스.”
“크로스!”
“뭐야, 매번. 나만 왕따지?”
내민 세 개의 팔이 겹쳐졌다.
정면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설우가 눈썹을 들썩였다.
죽고 못 사는 남매처럼 구는 이들에게 벌써 몇 번째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건지.
소외감은 느껴졌지만,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연아, 왕따 챙겨주러 가. 형 삐지면 오래간다.”
“왕따 아니에요. 오빠 나 근데 좀 졸려요.”
“연이 약 먹은 지 몇 시간 됐어?”
저를 향해 뻗는 연의 손을 잡은 설우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이든에게 물었다.
“4시간쯤.”
“약효가 빨리 떨어졌네. 이리 와, 한숨 자고 퇴원해야겠다.”
“네에.”
첸이 싸 온 점심을 먹고 퇴원할 예정이었는데.
아쉬운 기색을 드러낼 시간도 없이 설우의 허벅지를 벤 연은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열흘 만에 돌아온 펠리체는 천국처럼 느껴졌다.
이제 정말 다치지 않고 아프지 말아야지.
지겨운 병원 냄새를 더는 맡고 싶지 않았다.
룰루랄라 나풀거리는 실크 잠옷을 챙겨 입은 연이 익숙하게 벽에 난 통로를 기어 설우의 방과 이어진 드레스룸으로 넘어갔다.
이제 막 티셔츠를 벗던 설우가 가늘어진 눈으로 연을 흘겼다.
“왜 왔어. 내가 갈 건데.”
“굿나잇 키스요. 이든이랑 첸이 같이 있을 때 하긴 좀 민망하잖아요. 오빠가 또 날 만지고 싶어질 수도 있으니까 몰래 해요.”
끄응. 입 밖으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올 뻔했다.
필터링 없는 저 입을 어쩌면 좋을까.
숨기는 것 하나 없는 말들은 언제나 자극적으로 다가와 제 몸을 괴롭힌다.
만지고 싶을 수도 있으니 몰래 하자는 건 만지라는 거야?
하아, 신이시여. 이 조막만한 아이한테서 절 좀 구원해줘 보시든가요.
말간 눈을 마주한 설우는 심호흡 세 번과 함께 나쁜 욕망을 밀어 내리고 짧은 뽀뽀를 해주었다.
“아니이….”
“아쉬워하지 마, 화낼 거니까.”
설우가 매서운 얼굴로 검지를 들이밀자 금세 입을 꾹 다문 연이 눈치를 살피곤 제 방으로 건너가려 뒤를 돌았다.
“아니야, 화낸 거 아니야. 이리 와.”
강압적으로 대하지 않아야 하는데.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서늘해지는 제 인상이 퍽 위협적임을 알고 있었다.
화낼 거라고 했다가 화낸 거 아니라고 했다가. 변덕스러운 말은 제가 듣기에도 우스웠다.
보통 연인들은, 아니 보통 사람 누구도 내 심정을 알 순 없겠지.
매번 입으로 옷을 벗는 이 작은 천사를 갖지도 놓지도 못하는 고통스러운 심정을.
“안아도 돼요?”
“응.”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이 설우의 허리를 감아 안겼다.
왜 계속 붙어있고 싶은지. 잘생기고 멋있는 걸 떠나 그저 차설우라는 존재가 너무나 좋다.
그와 함께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심장의 작은 떨림도 그가 주는 안정감도 몸을 뜨겁게 하는 낯선 감각도. 무엇 하나 잃고 싶지 않다.
“집에 오니까 좋아요.”
“문화센터에서 뭐 배울지는 결정했어?”
“일단 골프, 꽃꽂이, 그림이요. 다른 건 이든이랑 좀 더 고민해 보려고요.”
“골프는 위험한데.”
“조심할게요.”
“그래, 알았어. 왼손 내밀어 봐.”
연을 품에서 떼어낸 설우가 옷을 갈아입으며 꺼내두었던 반지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반지요?”
“결혼반지. 원래 내일 꽃이랑 같이 주려고 했는데 지금 주고 싶어졌어.”
작은 다이아몬드가 빼곡히 박힌 적당한 두께의 실버링이 연의 네 번째 손가락에 딱 맞게 끼워졌다.
“예쁘다.”
“이젠 누가 뭐래도 내가 네 보호자야. 그것 때문에 욕심부리는 중이야, 나.”
“욕심이요?”
“응,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거든. 사람들이 많이 수군거릴 거야. 부러워서 그런다고 생각하고 너무 상처받지 마.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야. 되도록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그럴게요.”
“많은 게 달라질 거야. 내가 최대한 노력해도 막을 수 없는 것들이 있을 거고. 버티지 못하겠으면 말해. 내 멋대로 하는 결혼이니 네가 원할 땐 곧바로 이혼해 줄게.”
연을 아일랜드 서랍장 위에 앉혀 눈높이를 맞춘 설우는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버틸 수 있어요. 오빠랑 계속 같이 살래요.”
굳은 다짐에도 설우의 얼굴은 어두웠다.
제가 사는 세계는 연을 괴롭게 만들기 충분했다.
“식을 급하게 진행하느라 앞으로 꽤 바쁠 거야.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네.”
엄한 말과는 다르게 높이 앉은 연의 다리 사이로 바짝 들어간 설우가 긴장해 뻣뻣해진 허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 무서워?”
“오빠가 계속 겁을 주잖아요. 다른 건 생각 안 할래요. 어쨌든 결혼하면 이제 여보가 되는 거예요? 여보, 자기?”
애교를 부리며 상체를 좌우로 흔들던 연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두 다리를 꼬아 설우의 허리를 감았다.
사랑하지 않는 게 불가능한 아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내 토끼.
“연아.”
“네.”
“오빠 옆에 오래오래 있을 거지?”
“당연하죠!”
이젠 네가 없는 나를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만약 너를 잃게 되면, 이라는 가정만으로 숨이 막힌다.
“사랑해.”
“네?”
“사랑해, 연아.”
원 없이 사랑해주고, 부족한 것 없이 돌봐줄 테니 너의 그 지독한 병을 이겨내고 오래오래 내 곁에서 살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