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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36화 (36/96)
  • 36화.

    설우가 도착하자 보고 있던 만화책을 내려둔 이든이 소파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늦었네.”

    “응. 회의가 좀 길어져서. 언제 잠든 거야?”

    “한 시간쯤 됐어.”

    이틀 내내 병원에서 지내느라 뻐근한 몸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치료받을 때 안 울었어?”

    “이제 안 아프대. 차 회장님은 어디 독설 학원 같은데 다니셔? 한심하다부터 시작해서 비참하진 않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설우 망치지 마라. 아픈 애한테 그렇게까지 말하고 싶을까.”

    “연이가 그 말을 다 들었다고?”

    “들었지, 그럼. 차 회장님 입을 막을 수도 없고 연이 귀를 막을 수도 없고. 애가 얼마나 상처받았을까. 내색은 안 해. 그냥 아무렇지 않게 놀다가 자는 거야.”

    차 회장이 다녀갔다는 연락만 받았을 뿐 자세한 상황을 전해 듣지 못했던 설우가 거친 손길로 앞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내가 잘못 선택한 걸까.”

    “뭐야, 형답지 않게.”

    결심하고 나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 남자가 후회라니.

    “욕심을 부린 게 아닌가 싶어서. 한주희랑 파혼하지 않았다면 할아버지가 연이에게 손대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직접 보지 못했어도 차 회장이 신랄하게 독설을 퍼붓는 장면이 눈앞에 선연했다.

    너한테 그딴 말이나 듣게 하려고 마음먹은 결혼이 아닌데.

    “본가로 들어오라고 하시던데. 괜찮겠어?”

    “일단은 들어가야지. 파라다이스 독립시키는 동안 할아버지 눈 속일 시간이 필요해.”

    “연이는. 나랑 첸도 없는데 어쩌려고. 형 바쁘잖아, 그 집안에 혼자 어떻게 둬.”

    “아침에 나올 때 펠리체로 데려다줄 거야. 첸도 일이 많을 테니까 네가 잘 데리고 놀아.”

    저와 연을 본가로 끌어들이는 차 회장의 속내가 훤했다.

    가풍을 핑계로 연에게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키려는 거겠지.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 두려워 고이고이 아껴두는 아이를 집안사람들 손에 놀아나게 놔둘 줄 아는 걸까.

    순순히 본가로 들어간다고 해서 그런 짓까지 눈감아 줄 생각은 없었다.

    “나야 완전 땡큐지. 뭐 할지 계획표라도 짜야겠네.”

    “펠리체 안에 있는 문화센터나 데리고 다녀. 종일 집에 있으려면 답답할 거야.”

    “아, 그럴까? 근데 연이가 가면 다들 수군거릴 텐데.”

    “너 있잖아. 연이도 이제 사람들 시선에 적응해야지. 결혼하고 나면 더 심해질 거고.”

    “알았어. 꼬맹이 되게 좋아하겠다. 나가 노는 거 환장하잖아.”

    차 회장이 다녀간 후 한남동 본가로 들어갈 연에 대한 걱정이 태산같이 쌓였던 이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내가 있을 테니까 펠리체로 들어가. 아침에 올 때 문화센터 일정표도 좀 가져오고. 연이 뭐 하고 싶나 물어보게.”

    “알았어. 쉬엄쉬엄해. 이러다 형이 쓰러지겠다. 연이 보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잖아.”

    “괜찮아.”

    “나이 생각해라, 한참 어린 신부 맞으려면 건강 챙겨야지. 한약도 좀 지어먹고.”

    “나만 늙어? 너랑 첸도 같이 늙어.”

    “흑, 맞아. 우리 막냉이만 안 늙어, 큰일이야.”

    울상을 지은 이든이 곤히 잠든 연을 흘깃거렸다.

    솜털도 가시지 않은 살결이 어찌나 보들보들한지.

    뽀얀 볼을 꼬집을 때의 촉감을 이길 수 있는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듯했다.

    “무슨 생각해.”

    “연이 피부가 너무 부드럽잖아. 내일 볼을 마구 꼬집어야겠다는… 악!”

    그래, 그딴 생각 하고 있을 줄 알았지.

    음험한 눈으로 연을 보는 이든의 뒤통수에 가차 없이 거친 손바닥이 날아왔다.

    “하루에 한 번만 만져.”

    “아, 왜! 안 그래도 요즘 좀 컸다고 안아주지도 않는다고! 오빠가 여동생 볼도 못 만지냐?”

    “그러니까 한 번만 만지라고. 네 손 닿으면 닳을 거 같아.”

    “진짜 치사하다. 형이 만지면 안 닳아?”

    “안 닳지. 연이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대.”

    “아니, 형이 무섭게 구니까 거짓말한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이든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연이 설우를 가장 특별하게 여기는 것을 알지만 쉽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을 해주는 건 첸이고, 즐겁게 놀아주는 건 자신인데. 왜 설우를 졸졸 따르는지.

    “내일 연이한테 물어보든지. 그만 가, 피곤해.”

    “그래. 내일 일찍 올게, 쉬어.”

    연을 두고 장난스럽게 티격태격하던 이든이 병실을 나서자 설우가 넥타이를 잡아 내리며 소파에 앉았다.

    어느새 새벽 2시를 넘은 시간. 하루가 긴 탓에 피로감이 컸다.

    카앙!

    푹신한 등받이에 기댄 채 잠시 눈을 감았던 설우가 쇳소리가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벌떡 상체를 세웠다.

    반쯤 눈을 뜬 연이 묶인 손발을 비틀어 당기며 버클이 안전가드에 부딪히고 있었다.

    “연아, 연아.”

    다급히 침대로 다가와 연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떨림이 묻었다. 제 목소리를 듣고 어서 깨어나길 바랐다.

    “…….”

    “연아, 일어나. 일어나자, 응?”

    거친 행동으로 깨우고 싶지 않았기에 시간이 걸렸다.

    연의 어깨를 흔들며 두어 번 더 이름을 부르자 초점 없던 금빛 눈동자에 설우의 얼굴이 비쳤다.

    “…누가 날 잡으러 와요.”

    “지금은 아니야, 오빠 여기 있잖아.”

    “언제 왔어요?”

    “30분 전쯤. 무슨 꿈이었는데.”

    “그냥 도망치는 꿈이요.”

    “나한테서 도망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오빠가 나오면 죽어라 쫓아갈 건데.”

    나른한 눈으로 배시시 웃어 보인 연이 묶인 손을 바르작거렸다.

    그게 꼭 잡아달란 의미인 것 같아 안전가드 위로 팔을 넘긴 설우가 작은 손을 감싸 쥐었다.

    “할아버지가 심한 말을 했다던데.”

    “이든은 입이 너무 가벼워요.”

    오빠에게 말하지 말라고 진작 입을 막아 둘걸.

    “이런 건 말하는 게 맞는 거야.”

    “지금처럼 속상한 표정을 지으니까. 모르는 게 더 좋아요.”

    “자꾸 끈을 당기니까 벌써 자국 났잖아.”

    나도 모르게 굳어 있었나.

    밋밋한 입매를 끌어올려 설핏 미소를 지어준 설우가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며 발갛게 달아오른 연의 손목을 문질렀다.

    사라질만하면 되돌아 진해지는 자국이 이젠 문신처럼 느껴졌다.

    폐쇄 병동에서 워낙 오래 묶여있던 탓에 다른 곳과 살결 자체가 다르기도 했고.

    “하루 이틀도 아닌걸요. 이제 정말 아무렇지 않은데.”

    “너만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첸도, 이든도, 그리고 나도. 보는 사람은 얼마나 속이 쓰린데.

    “그건 오빠가 아직 잘 몰라서 그래요.”

    “뭘.”

    “내가 지금 정말 엄청나게 많이 행복하다는 거.”

    수식어를 백 개쯤 갖다 붙여도 부족했다.

    단 한 번의 기회를 잡아 도망친 후 설우를 만난 건 다신 없을 행운이고 행복이었다.

    지나친 불행에 날이면 날마다 신을 원망하니 제 목소리가 지겨워 던져준 축복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렇게 묶여있어도?”

    “네. 아주 오랫동안 혼자였는데 이젠 오빠도 있고, 이든도 있고, 첸도 있잖아요. 난 하루하루가 너무 좋고 행복하니까 오빠도, 이든도, 첸도 내가 힘들까 봐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엿 같은, 아니 그런 나쁜 곳에서 어떻게 이렇게 착하게 컸을까.”

    “음, 오빠 만나려고?”

    “예쁜 말만 골라 하는 건 누구한테 배웠어. 이걸 이든이 알려줬을 리는 없고.”

    연을 위해 지었던 작은 미소가 그녀로 인해 크게 번져 나간다.

    딱딱했던 얼굴에 어느새 웃음꽃이 핀 설우가 연의 콧방울에 제 코를 비비며 짧게 입을 맞췄다.

    “규칙을 좀 정해요.”

    맞닿았던 입술이 허무하게 사라지자 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치사하게. 맨날 자기 좋을 때만 하고.

    “규칙?”

    “나도 하고 싶을 때 하게 해주세요.”

    “싫다니까.”

    “그럼 오빠도 하지 말아요. 이렇게 입맛만 다시게 할 거면 차라리 하지 말라고요.”

    “하하하! 뭐?”

    샐쭉하게 노려보는 연의 눈 사이를 검지로 꾹 눌러 편 설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 그냥 다른 사람이랑 막 하고 다닐래. 이든한테도 해달라고 하…!”

    억울한 투덜거림이 단숨에 설우의 입속으로 먹혀들었다.

    만족스러운 반응을 얻어낸 연의 입꼬리가 삐죽 솟아오르며 그를 받아들였다.

    “다리, 괜찮아?”

    “괜찮아요.”

    “그래. 오늘은 만져도 돼.”

    그만하는 줄 알았다. 오늘도 역시 아쉽네, 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연의 양손이 자유로워졌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안전가드를 내린 설우가 넥타이를 벗어 던지며 연의 위로 올랐다.

    다친 다리를 염두에 두며 다시 입을 맞추니 연이 탄탄한 어깨에 팔을 걸었다.

    “흐응.”

    환자복 속을 파고든 서늘한 손이 느껴지자 연의 허리가 좌우로 비틀렸다.

    설우의 손은 단 한 번도 오르지 않았던 여린 살결을 찾고 축축한 입술은 귓가로, 귓가를 지나 목덜미로 내려갔다.

    “…아!”

    속옷과 함께 알맞은 크기의 가슴을 쥔 설우는 멈추지 않았다.

    백자기 같은 피부에 붉은 반점이 자리 잡고 주무르는 손길을 따라 끌려 올라간 속옷은 제 역할을 잃은 지 오래였다.

    능숙한 손가락을 이기지 못하고 딱딱하게 솟은 정점은 커다란 손에 끊임없이 농락당하고 있었다.

    “흐읏, 오빠…!”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이한 연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내가 뭐랬어. 잡아먹히기 전에 적당히 하라고 했지.”

    물론 언젠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첫 상대가 설우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낯선 감각이 몸을 지배하게 될 줄은 몰랐다.

    말랑말랑하던 키스와는 전혀 달랐다. 체온이 오르며 오감이 지나치게 예민해진다.

    손길이 스치기만 해도 발끝부터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기분이 이상해요, 으으. 오빠 손, 손가락 좀 그만요!”

    매끈하고 말랑한 언덕을 멋대로 굴려대던 손이 다시 허리로 내려가 이내 옷 속을 빠져나왔다.

    “막 하고 다니기만 해.”

    “…하아, 죽을 뻔했다.”

    “푸흡! 죽긴 뭘 죽어.”

    “그치만 몸이 너무 뜨거워서. 아직도 뜨거워요. 기분도 몽롱하고.”

    “맛보기야. 결혼하고 나면 제대로 알려줄게.”

    거친 숨을 몰아쉬는 연을 보고 웃던 설우가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왜요? 그냥 같이 자요. 나한테 결혼 얘기도 안 해줬잖아요.”

    “그래, 해줄게. 근데 잠깐 테라스 좀 다녀올게. 딱 3분만.”

    “갑자기 테라스를 왜요?”

    “3분만 얌전히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연을 두고 통유리창을 힘차게 밀고 테라스로 나간 설우가 난간에 기대 참았던 한숨을 내뱉었다.

    “아, 젠장.”

    뻐근할 만큼 부푼 다리 사이를 연이 느끼지 못한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맛보기? 웃기고 있네.

    색욕에 눈이 멀어 넋을 놓고 만져댄 주제에.

    토끼 같은 눈을 깜빡이는 연에게 태연한 척 무게를 잡았지만, 매번 작은 몸에 농락당하는 건 자신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연은 오히려 승자였다.

    혼자 흥분하고 혼자 안달하고 혼자 갈망하며 인내의 한계를 끝없이 늘리고 있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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