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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34화 (34/96)
  • 34화.

    이젠 익숙하기까지 한 VIP병동 A7호로 올라온 연의 가는 팔엔 순식간에 작은 구멍 두 개가 생겨났다.

    왼팔에 수액을 달고 오른팔에 피검사를 위한 채혈을 마친 연은 주사까지 맞은 후에야 편히 누울 수 있었다.

    침대 양옆으로 세워진 안전가드에 달린 검은색 끈들이 연의 가는 팔목과 발목을 단단히 결박했다.

    화상을 입은 한쪽 발만 자유로이 푹신한 쿠션 위에 올려 두었다.

    종아리 아래가 전부 욱신거렸지만 아픔을 꾹 참은 연이 의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설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빠가 또 마음 아파하겠네.

    묶이는 건 두렵지 않지만, 묶인 제 모습을 보고 어쩔 줄 모르는 설우를 보는 건 두려웠다.

    “배 안 고파? 첸한테 짐 챙겨 오면서 먹을 것 좀 사 오라고 할까?”

    “이든이 소 사러 갔잖아요.”

    “미친 거지. 새벽 4시가 넘었는데 무슨 소를 사겠다고. 어디 농장이라도 가서 직접 잡아 올 건가 봐.”

    “이든은 정말 바본가 봐요.”

    “너랑 박빙이지.”

    피식, 웃은 설우가 훤히 드러난 연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억제대로는 의도적으로 시선을 두지 않았다.

    “오빠 침대 좀 세워주세요.”

    “안 돼. 이제 자야 해. 그래야 안 아프지.”

    “5분 동안 오빠 입술 내 거잖아요.”

    “너 입술도 뎄잖아. 따가울 텐데.”

    “하나도 안 따가우니까 얼른 세워주세요.”

    “누워 있어, 내가 갈게.”

    둘의 사이에 세워진 안전가드를 아래로 내린 설우가 허리를 숙였다.

    코가 맞닿기 직전까지 자세를 낮추니 저를 애타게 기다리는 작은 입술이 달싹거렸다.

    “빨리요.”

    조금 나중에 묶어 달라고 할걸.

    두 손이 모두 묶여 있으니 제 의지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연이 울상을 지었다.

    닿을락 말락.

    부드러운 입술이 감칠맛을 내며 스쳐 지나가고 더운 설우의 숨결이 느껴졌다. 하지만 삐뚜름한 미소를 지은 그는 더 가까이 다가와 주지 않았다.

    “하고 싶어?”

    “계속 장난칠 거예요? 나 발도 엄청 아픈데!”

    “아, 맞다. 우리 연이 아프지.”

    안달하는 연을 놀리는데 열중했던 설우가 정신을 차리고 훅,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열기로 가득한 손이 연의 곧은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연은 설우의 혀를, 설우는 연의 입술을 작정한 듯 빨아들였다.

    서로의 타액을 삼키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병실을 울렸다.

    짜릿한 쾌감이 등허리를 타고 오르자 단단히 묶인 손이 바르작거리며 설우를 원했다.

    그를 만지고 싶다.

    “하아….”

    누구의 욕망이 더 큰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내쉴 틈도 없이 상대에게 삼켜지는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몸을 섞는 것만큼이나 야한 키스였다.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뻐근한 감각에 설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키스로 서는 시기는 혈기왕성한 사춘기 시절뿐이었는데.

    닳고 닳은 영혼과 굴릴 만큼 굴린 몸이 느끼기엔 너무나 순수한 흥분이다.

    눈처럼 하얀 네가 나를 물들이고 있는 걸까.

    아찔한 순간을 맞이하고 복잡해진 설우와 다르게 연은 오로지 제가 원하는 것을 탐하는 데 집중했다.

    역시 말랑말랑해.

    쉴 새 없이 아려오던 통증마저 희미하게 만들 만큼 기분 좋은 감촉이다.

    더하고 싶어, 더.

    “흐응, 오빠 나 손. 손 풀어주세요.”

    아쉬운 대로 시트를 부여잡았던 연이 칭얼거렸다.

    설우의 탄탄한 허리에 팔을 감고 싶었다. 화상을 입은 다리만큼 온몸이 뜨거웠다.

    “뭐 하려고.”

    “만지고 싶어요.”

    “싫어.”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서운할 만큼 단호한 거절이 돌아왔다.

    “왜요?”

    “그럼 나도 만지고 싶어지잖아.”

    “만지면 되잖아요. 지금 내 목도 만지고 있으면서, 치사하게.”

    “눈에 보이는 곳 말고. 안 보이는 곳이 만지고 싶다고.”

    연의 귓바퀴를 부드럽게 쓸며 한 번, 두 번, 세 번.

    설우는 말을 하면서도 붉어진 입술을 머금고 놓아주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으음, 만져도 돼요. 오빠가 날 숨겨준 순간부터 내 몸은 전부 오빠 거였다고요. 같이 만지는 거로 해요, 우리. 좋을 거 같은데.”

    “넌 그 말 좀! 조금만 덜 솔직할 마음은 전혀 없고?”

    안고 싶다. 정말 안고 싶어 미치기 직전이었다.

    입맞춤이 멈추자 뾰로통해진 연을 두고 멀찍이 떨어진 설우가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문질렀다.

    밖으로 나가 새벽 공기라도 맡고 싶지만, 연을 혼자 두고 나가는 것 또한 미친 짓이었다.

    “치, 알았어요. 5분 지난 거 같으니까 그만할게요.”

    “잘 생각했어. 나도 더는 못 해.”

    “내일 또 해요.”

    “싫은데.”

    “해주세요.”

    “싫다고.”

    나 이러다 몸에서 사리 나오겠다고.

    그녀가 주는 황홀한 열락을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제가 오만했다.

    “왜 다 싫은데요. 말 잘 들을게요, 해주세요.”

    “아니. 퇴원할 때까지 안 해.”

    “나쁘다, 진짜.”

    “너한테는 내 입술이 말랑한 장난감 정도겠지만, 난 아니라고.”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동그란 눈을 굴리던 연이 결국 입술을 삐죽였다.

    “소 먹자, 막냉이!”

    타이밍 좋게 벌컥, 문이 열리고 커다란 상자를 든 이든이 들이닥쳤다.

    “이드은.”

    “왜, 왜. 왜 이렇게 눈꼬리가 축 처졌어. 아파서 그래?”

    “오빠가 나랑 놀아주기 싫대요.”

    “야, 선우연 내가 언제…!”

    “형은 진짜 안 되겠다. 왜 애랑 안 놀아줘? 안 놀아 줄 거면 형이 소고기를 사 오든지 했어야지. 어, 뭐야! 꼬맹이 묶어놨어?”

    지가 제일 먼저 뛰쳐나가 놓고 뭐라는 거야. 이 시간에 저걸 사 온 것도 참 대단하다.

    설우가 호들갑을 떠는 이든의 뒤통수를 흘겼다.

    “나 아직 안 자는데 팔도 안 풀어줬어요. 귀찮은가 봐요.”

    “와. 심했다, 차설우.”

    메롱. 이든이 꽁꽁 묶인 제 팔에 집중하자 연이 당황한 설우에게 혀를 내밀었다.

    하!

    설우의 입에서 어이없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순진한 토끼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잔망스러운 여우로 성장해가는 연이었다.

    “아직도 그래?”

    “응. 아파서 그런 건지, 불편해서 그런 건지.”

    소고기도 맛있게 먹고, 이든과 신나게 놀다가 잠이 든 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끙끙 앓기 시작했다.

    열이 나는 것도 아닌데.

    작게 신음을 흘리는 연을 일그러진 얼굴로 바라보던 설우가 빡빡하게 손목을 감싼 억제대의 버클을 헐겁게 풀어주었다.

    “꼭 잘 먹고 잘 놀고 고생을 시켜. 쪼끄만 게.”

    이든이 앞머리를 모조리 쓸어 넘기며 간이의자에 주저앉았다.

    오랜만에 연의 침대를 둘러싼 세 남자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다.

    비명을 듣고 새벽에 일어나 해가 뜨고 한참이 지난 시간까지 잠들지 못하고 있으니 피곤한 게 당연했다.

    “진통제 더 처방해달라고 할까? 아픈가 봐.”

    펠리체로 들어가 짐을 잔뜩 싸 들고 온 첸이 보다 못해 고개를 돌렸다.

    “몸에 약 성분이 너무 많으니까 일단 참아 보래.”

    “꼬맹이보다 우리가 못 참겠다. 안쓰러워 죽겠어.”

    설우의 시선이 노란 진물로 물든 드레싱 밴드에 닿았다.

    죽은 표피를 벗길 때 끔찍하게 아프다던데. 어쩌면 좋지.

    “정수기는 갖다 버려. 방에 두고 싶으면 두든지.”

    “싫어. 볼 때마다 뜨거운 물 뒤집어쓴 꼬맹이 생각날 텐데. 자학하는 것도 아니고 그걸 왜 써.”

    “위험한 걸 좀 더 치워볼게.”

    “퇴원해도 한동안은 묶어 두려고.”

    힘없이 놓인 손을 잡은 설우의 눈동자엔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

    연이 깨어있을 땐 그저 즐거운 듯 장난을 쳤지만, 그녀가 잠든 시간엔 셋 중 누구도 웃지 않았다.

    “그래, 다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연이 잘 보고 있어. 조금 있으면 드레싱하고 수액 갈러 의사 올 거야, 신경 써.”

    “제이 가려고?”

    “그 자식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어.”

    “미친놈.”

    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2년도 채 안 되는 시간의 일탈일 뿐이었는데. 설우는 어린 시절부터 마피아 소굴을 뒹굴던 첸과 이든보다 더 잔혹한 성미를 가지게 되었다.

    “부러뜨린 손가락을 치료해주고 다른 손가락을 또 부러뜨려서 고통에 몸부림치도록. 연이 몸에 닿았을 열 손가락을 전부. 못쓰게 만들고 싶어.”

    설우의 서늘한 시선이 식은땀이 맺힌 작은 얼굴로 내려앉았다.

    원래의 나였다면, 너를 마음에 담기 전의 나였다면 수백 번도 할 수 있었을 무자비한 응징.

    “이거 봐. 이 형한테 걸리는 것보다 나한테 얻어맞는 게 백배, 천배 낫다니까.”

    “하고 싶다는 거야, 한다는 거야.”

    “하고 싶다는 거야. 근데 지금은 못 해. 내가 못된 짓 하면 연이가 더 아플까 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연이가 나 대신 벌 받을까 봐, 그래서 아무것도 못 하겠어.”

    그와 어울리지 않는 처연한 목소리였다.

    눈치 없는 이든도 설우에게 연이 얼마나 큰 존재가 되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하긴 그러니까 결혼도 안 하겠다고 했겠지.

    “애들 시켜서 반 죽여 놓으라고 할게. 형이 직접 한 거 아니니까 괜찮을 거야.”

    “그 자식 사진 찍어서 권상철한테 보내. 아, 그냥 손가락을 잘라 보낼까? 이것도 네가 시킨 거 아니니까 괜찮을 거야.”

    시선을 주고받은 이든과 첸이 속이 문드러진 설우를 위로했다.

    설핏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설우가 마른세수를 했다.

    “회사 들어가 봐야 해. 결재할 일도 많고, 법무팀이랑 회의 잡았어. 할아버지랑 부딪힐 준비도 해야지.”

    “어머님이 해결해 주신다며.”

    “파혼은 파혼이고. 내가 당신을 이겨 먹었다 느끼실 테니 보복하실 거야. 그 보복이 지나치면 CH파라다이스를 CH그룹에서 독립시킬 거야.”

    “그게 가능하겠어?”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내가 세운 내 왕국인데. 빈손으로 나갈 순 없잖아.”

    “그럼 같이 들어가. 내 머리도 필요하겠네.”

    “너는 장세희 쪽에 신경 써. 이든은 연이 잘 돌보고. 자주 오겠다고 했는데 시간 내기 쉽지 않겠어. 연이 깨서 나 찾으면 전화 걸어주고.”

    설우를 따르려던 첸이 엉거주춤하게 다시 내려앉았다.

    터벅터벅, 연의 앞으로 다가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뒤로 넘겨준 설우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병실을 나섰다.

    ***

    설우가 한남동 본가로 들어서자 현관 복도에 가로로 늘어선 입주 직원들이 허리를 숙였다.

    “앉아라.”

    곧장 다이닝룸으로 들어간 설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제자리를 찾았다.

    차성태 명예회장과 장남 차현수 총괄회장, 현수의 아들 차정우와 차관우, 설우의 부친 차현준 CH자동차 사장이 커다란 식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설우가 주도한 저녁 식사 자리였다.

    “밥은 챙겨 먹고 다니니? 얼굴 꼴이 왜 그 모양이야.”

    설우의 연락을 받고 질색하는 한남동 본가로 들어온 화진이 제 옆자리에 앉는 설우를 타박했다.

    살이 빠진 건지. 굵직한 뼈대가 평소보다 더 도드라졌다.

    “바빠서요.”

    “쪼르르 제 어미 찾아가 할아비 뒤통수칠 궁리하느라 바빴겠지. 시건방진 자식.”

    “차설우 여자 생겼다며? 사진 잘 봤다. 야, 진짜 끝내주던데? 그런 애는 어디서 만나냐. 나도 소개 좀 해주라. 아니면 너 다 놀고 나 주든지.”

    “차관우, 너 지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알맞게 구운 옥돔 살을 전부 발라두고, 커다란 토종닭을 분해하기 시작한 유정이 설우의 성질을 긁는 제 둘째 아들을 다그쳤다.

    “어허! 어디 식탁 앞에서 여자가 목소리를 내.”

    “죄송합니다, 아버님.”

    이 망할 집구석은 변한 게 없네.

    미간을 잔뜩 찌푸린 화진이 차현수 총괄회장의 아내이자 차 회장의 맏며느리인 유정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쏘아붙일 표정으로 앉은 화진에게 고개를 내저어 말린 유정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설우에게 아들 대신 사과의 눈짓을 해 보였다.

    어휴.

    화진이 답답한 숨을 내쉬며 제 몫으로 놓인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호된 시집살이와 차별 대우를 받으면서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유정이 못마땅했다.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그녀는 차성태 회장이 바라는 전형적인 맏며느리 상이었다.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하던 조선 시대의 여자와 흡사한 유정은 제 며느리까지 직접 교육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부족한 것 없이 자라 왜 천대받고 사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건지.

    화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삶이었다. 그랬기에 이혼을 했고.

    “네 수준에 맞는 여자 찾아다가 놀아. 싸고, 쉽고, 생각 없는. 너는 그런 애들이 딱이야.”

    “뭐라고? 너?”

    “차관우 그만. 설우 너도. 할아버지도 계시는데 형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5살이나 어린 사촌 동생이 주는 모욕에 발끈 한 관우가 몸을 들썩이자 결국 현수가 나서서 아들을 저지시켰다.

    “일단 먹자.”

    “먹기 전에 말씀드릴게요.”

    국을 뜨기 위해 숟가락을 움직이던 차 회장의 손이 우뚝 멈춰 섰다. 노여움 가득한 시선이 돌아왔지만 설우는 여전히 담담했다.

    차 회장은 손자의 저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로 마음먹었을 때. 모든 계획을 마치고 목표를 향해 달리겠다고 선언할 때의 얼굴.

    CH파라다이스를 구상하고 사업 계획안을 제 앞에 내밀 때 또한 저 얼굴이었다.

    차 회장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하고자 마음먹은 일에 있어서 앞뒤 옆도 살피지 않고 액셀을 밟아 대는 손자는 원하는 것을 얻어내지 못한 적이 없었다.

    “해 봐.”

    “파혼하겠습니다.”

    “그건 네 어미한테 이미 들었다. 자세한 건 식사 끝나고 다시 얘기해.”

    “파혼하고 한 달 후에 결혼은 예정대로 하겠습니다. 다른 건 전부 새로 하겠지만, 날짜와 식장은 그대로 쓰려고요. 저 연이랑 결혼해야겠어요, 할아버지.”

    식탁에 앉은 이들은 물론이고, 식사 시중을 들고 있는 CH가의 며느리들까지 경악을 금치 못할 발언이었다.

    놀란 건 화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결혼하겠다는 말은 미리 전해 들었지만, 가족들이 전부 모인 자리에서 통보할 줄이야.

    “다시 한번 말해보거라. 누구와 뭘 해?”

    “한 달 후에 연이랑 결혼하겠다고요. 아시다시피 연이 상태가 좋지 않아서 제가 옆에….”

    뻐억!

    “아버지!”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차 회장의 앞접시가 정확히 설우의 이마로 날아들었다.

    깨진 유리 접시는 매끈하던 이마에 길쭉한 상처를 남기고 후드득 떨어졌다.

    툭, 툭. 흘러내린 핏방울이 설우의 왼쪽 눈을 붉게 물들였다.

    “이런 미친!”

    싸늘한 침묵을 깨고 벌떡 일어난 화진이 제 물 잔을 집어 들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대쪽같은 노인네에게 똑같이 갚아 줄 작정이었다.

    감히 내 아들한테, 내 눈앞에서!

    “됐어요. 괜찮아요.”

    독이 바짝 오른 화진의 손목을 잡은 설우가 유리컵을 뺏어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네 놈이 미친 게야,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따위 생각을!”

    손수건을 꺼내 상처를 대충 누른 설우가 그대로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제가 죽지 않는 한, 이 결혼은 합니다. 그러니 괜한 힘 빼지 마세요.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시고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와, 저 미친 새끼.”

    뻔뻔하게 밥을 먹기 시작하는 설우를 멍하니 보던 관우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생애 가장 충격적인 저녁 식사로 남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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