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똑똑.
간결한 노크와 함께 성재가 회장실로 들어섰다.
호텔에 처박혀 꿀 같은 주말을 보낼 생각이었던 화진은 아들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잠시 집무실에 나와 있었다.
“어때? 뭐 좀 나와?”
“큰 거 하나를 건져서 자잘한 건 내버려 뒀습니다.”
성재가 결재판 안에 끼워둔 사진 한 장을 화진에게 내밀었다. 예쁘장한 젊은 여자의 사진이었다.
“뭐야, 그 샌님 같은 양반이 여자가 있어?”
“백창석과 어울린 지가 10년입니다. 이제 샌님은 아니죠.”
“이렇게 쉽게 찾을 정도면 알 사람은 다 안다는 건데.”
“백 의원이 괜히 평창동 어르신이라고 불리는 게 아닙니다. 한 시장을 대권 주자로 밀고 있으니 알아서 뒤를 봐줬겠죠.”
“끼리끼리 꼴값이네. 여자는 백창석이 붙여줬으려나. 한강일 시장, 백창석 의원, 차성태 회장. 이런 걸 보고 적폐라고 하는 거지.”
화진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담배를 물었다.
그녀는 늙어서도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의 모임을 꺼렸다.
“생각보다 간단하네. 이거 하나면 충분하겠어. 설우 결혼시키자고 직접 돈 발라가며 키운 대권 주자를 버리진 않겠지. 요즘은 불륜 스캔들 하나면 정치 인생 끝이잖아.”
“그렇죠. 그 스캔들을 터뜨리기까지가 어려울 뿐이지.”
“나한텐 쉬워.”
희뿌연 연기가 눈앞에 흩어지자 성재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백해무익한 담배를 왜 저렇게 달고 사는 것인지. 외로움 탓인가.
“쉽진 않을걸요. 한강일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면 현진은 표적 수사 대상 1순위일 겁니다. 회장님이 말하는 적폐 무리에겐 겉도는 현진이 눈엣가시니까요.”
“그럼 그냥 터뜨릴까? 대통령 되는 것도 막고, 설우 결혼도 깨고.”
“리스크가 큽니다.”
“그렇지? 그 노인네들 모임이 애들 소꿉장난은 아니니까. 긁어 부스럼은 만들지 않는 게 좋긴 하지.”
“예, 조용히 결혼만 정리하시죠.”
소파 등받이 깊숙이 몸을 집어넣은 화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계열사 경호업체 직원 중에 실력 좋은 가드 몇 명 뽑아다가 그 여자애한테 붙여놔. 좀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라고 해. 설우도 신경 쓰겠지만 이중으로 둘러두는 게 나을 거야.”
“알겠습니다.”
“한 시장이랑 이 여자 만나는 사진 찍는데 일주일이면 충분하지?”
“그럴 거 같습니다. 꽤 깊은 사이라고 하니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겠죠. 사진 준비되면 차 회장과 식사 약속 잡을까요?”
“그래야지. 의도치 않게 자주 만나게 되네. 피차 반가운 얼굴도 아닌데.”
“차 대기 시키겠습니다.”
“그래, 이제 진짜 쉬러 가야지.”
이렇게 빠르게 정리될 일이었으면 호텔에서 보고받는 건데.
벌떡 일어나 기지개를 켠 화진은 미련 없이 집무실을 떠났다.
***
차병원 응급실에 도착해 잠에서 깬 연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누군가 제 발을 칼로 난도질하더니 이내 다리 한쪽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는다.
참을 수 있는 수준의 고통이 아니었다.
애가 닳다 못해 사라지기 직전에 다다른 설우가 식은땀에 흠뻑 젖은 연의 잔머리를 뒤로 넘겨주었다.
연이 응급실 베드에 앉기 직전 뛰쳐나간 이든은 편의점에서 달콤한 주전부리들을 한가득 사 왔지만, 데스크 간호사에게 모조리 뺏겨 힘없이 터덜터덜 돌아왔다.
입에 뭐라도 넣어주면 덜 울 텐데.
“울다 쓰러지겠어.”
“아파서 자꾸 눈물이 나요… 우흑.”
“오빠가 정말 미안해. 제대로 돌봐주지도 못하고.”
“아니에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오빠 잘못 아니잖아요, 내가 그만 울게요.”
마음 아프지 않게 잘 참아야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꼼꼼히 닦아낸 연이 눈을 곱게 휘었다. 하지만 억지로 지어 보인 웃음은 금세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설우의 손가락을 쥔 작은 손에 힘이 한가득 들어가 있었다.
“하필 또 발을 다쳤어. 한동안 걷지도 못하겠네.”
“오셨어요.”
기다리던 은태가 나타나자 첸과 이든이 냉큼 자리를 내어주었다.
일반 환자들은 석 달 전에 예약을 잡고 기다려야 할 만큼 이름난 교수들이 은태의 뒤를 따랐다.
나이 지긋한 의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젊은 남자에게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자 이런저런 이유로 응급실을 찾은 환자와 보호자들은 물론 데스크의 의료진들까지 술렁였다.
펠리체 4동에 사는 백아진의 남편, 성형외과 최우석 과장도 소식을 듣고 황급히 병원으로 돌아와 무리에 끼어들었다.
성형외과는 화상 치료가 전부 끝나고 상담을 해도 문제가 없었지만, 기획조정실장을 바라보는 우석은 설우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중이었다.
“발등, 발목 두 군데 다 2도 화상인 거 같네요. 3도까진 아닌데 2도치곤 좀 깊어 보여요. 자세한 진단은 2, 3일 후에 표피가 벗겨져 봐야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일단 소독부터 하고 소염제, 항생제 주사 처방하겠습니다.”
“향정신성의약품을 다량 복용 중이니까 기존에 처방된 약물 체크하고 주사나 약 처방하는데 신경 써야 할 거야. 극심한 수면장애 환자인 점 잊지 말고.”
“예. 김 선생은 가서 선우연 환자 신경정신과 처방 기록 리스트 업해둬. 소독약은 이리 주고.”
“제, 제가 하겠습니다, 교수님.”
“됐으니까 가 봐.”
차병원 화상센터장이 소독약과 패치를 들고 직접 나서자 화상외과 펠로우가 화들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
처치를 직접 할 양반이 아닌데. 오너 일가가 대단하긴 하네.
“아악!”
연의 날카로운 비명에 설우가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아픈 게 정상이야. 그래도 이 정도면 잘 참는 거지. 화상센터 가면 환자들 대부분 울고 소리치고 난리야.”
하여튼 사나운 성질머리하고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설우를 타박한 장 박사가 혀를 찼다.
“주사는 병동으로 올라가서 맞을게요. 이렇게 소란스러운 곳에서 안정이 되겠어요?”
품에 안은 연의 머리를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과는 결이 다른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사람이 많은 응급실의 소란스러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끼어들 타이밍을 재던 우석은 두 번은 볼 수 없을 광경을 구경하느라 넋을 놓고 있었다.
1동에 사는 여자가 차설우의 애인이었다며 호들갑을 떠는 아진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부와 명예가 차고 넘치는 남자이니 아름다운 인형이 가지고 싶었던 거라 여겼다.
그저 유희겠지 생각했는데. 제가 더 아픈 것처럼 인상을 구긴 설우는 다친 연인에게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펠리체 8동으로 차설우 사장 약혼녀가 들어온다고 하던데.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래. 수액도 병동에 올라가서 달지. 서 교수, 입원은 며칠이나 해야 할까?”
“최소 열흘은 하는 게 좋습니다. 화상 부위도 넓고 깊어서 걸을 때 통증이 어마어마할 거예요. 외부 감염 문제도 있고, 진물도 많이 나올 테니 드레싱 밴드는 절대 떼지 마시고요. 죽은 표피 제거나 치료는 화상센터 의료진과 제가 직접 VIP 병동으로 방문하겠습니다.”
“피부가 재생되는데 에너지원이 많이 필요하니까 약이랑 같이 음식도 잘 챙겨 먹이고. 특히 단백질.”
길쭉한 몸을 벽에 기댄 채 어깨를 축 늘어뜨렸던 이든이 장 박사의 말을 듣고 곧바로 자세를 바로 세웠다.
“나 소고기 사러 간다. 이따 병실에서 봐, 꼬맹이.”
“허….”
“첸, 연이 좀 봐줘. 장 박사님, 잠시만요.”
진지한 얼굴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이든의 뒷모습을 어이없게 바라보던 첸이 고개를 끄덕이고 설우 대신 연의 옆에 섰다.
“왜.”
장 박사가 설우를 따라 구석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입원해있는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두려고요. 자는 동안에 만요. 상처도 깊은데 잘못 움직였다간 정말 큰일이 날 거 같아서요.”
“신체억제대 준비하라고 해둘게. 넌 사용동의서 쓰고, 팔목이랑 발목억제대만 있으면 되는 거지?”
“다른 것도 있어요?”
“상황에 따라 목이랑 허리도 묶어두긴 해.”
설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팔다리로 모자라 목이랑 허리까지 묶어둘 상황은 대체 어떤 걸까.
“필요에 의해서 하는 거겠지만 참 비인간적이네요. 연이는 팔다리만요.”
“그래, 알았다. 약을 먹어도 수면 중 움직이는 현상이 지속되면 장기입원 치료 고려해 봐.”
“아뇨.”
“저번 일 때문에 그런 거라면….”
“장기입원은 절대 안 시킬 겁니다.”
단호한 대답이 연이어 돌아오자 은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밤새도록 지켜볼 거 아니면 집에서도 묶어둬. 자유롭게 두는 거 너무 위험해.”
“네.”
“그리고 인상 좀 펴. 너 때문에 애가 아픈 내색도 제대로 못 하잖아. 절단보다 아픈 게 작열통이야, 화상. 고통을 1부터 10으로 나누면 저 통증이 바로 10이라고.”
화상을 입어 본 적이 없으니 알지 못하는 고통이었다.
하얀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장 박사가 연이 느낄 통증의 강도를 정확하게 집어주자 그녀를 등지고 선 설우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작은 천사가 느끼기엔 너무 버거운 통증이었다.
“진통제 더 처방해주세요.”
“죽을 만큼 아파하면 그때 이야기해. 몸에 약 성분이 너무 많아. 서로 영향을 주는 약을 피하고 피해도 다른 약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사용되면 좋을 게 없어.”
“알겠어요.”
설우가 거칠게 눈가를 문질렀다.
그에게도 역시 버겁기만 한 상황이었다.
“힘들지.”
“두 손 놓고 지켜봐야 하는 게 정말. 정말 사람을 환장하게 하네요.”
지옥 불 한가운데 내던져진 가슴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속이 다 타버리기 전에 이 열기를 가라앉히고 싶었다.
이러다 정말 눈물이라도 터져 나오겠군.
자조 섞인 미소와 함께 긴 한숨을 내쉰 설우가 아무렇지 않은 척 뒤를 돌아 연에게 향했다.
“이제 좀 괜찮아?”
“이거 붙이니까 나아졌어요. 하나도 안 아파!”
“거짓말.”
“아주아주 조금만 아파요.”
“입원해도 이든이랑 첸이 계속 같이 있을 거야. 나도 자주 들를 거고. 너무 무서워하지 마.”
“혼자 있는 거 아니면 괜찮아요.”
고통이 줄어들자 연이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고 있으니 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누구보다 선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왜 이런 극한의 고통을 짊어지게 하는지.
눈앞에 실체가 존재한다면 신의 멱살이라도 틀어쥐고 싶은 심정이다.
“오빠, 무슨 생각해요?”
“우리 집 사랑둥이가 그만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
“소원 하나 들어주면 노력해 볼게요.”
“말만 해. 뭐든 들어줄게.”
“이리 가까이요.”
연의 손짓에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인 설우가 빨갛게 부어오른 입술 앞으로 귀를 대어 주었다.
“이따가 둘만 있을 때 오빠 입술 좀 빌려줘요, 딱 1분만.”
“뭐 하려고.”
“알잖아요, 말랑말랑.”
설우의 옆구리를 찌른 연이 수줍은 척 고개를 요리조리 움직였다.
“1분 가지고 되겠어? 5분 줄게. 5분 동안 너 가져.”
이런 요물 같은 게.
연의 장난 같은 진심에 심장을 녹이던 뜨거운 불길의 온도가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봄은 아직 멀었는데. 따스한 봄 햇살이 마음속에 스며들어 너덜너덜 찢어진 심장을 메운다.
“와, 5분이요? 오빠 최고!”
함박웃음을 지은 연이 두 손 엄지를 세워 흔들었다.
예쁜 짓 하는 법도 참 가지가지네.
“멱살은 잡으면 안 되겠다.”
“네?”
“그냥 비는 게 좋겠어.”
하늘에 계실지 땅에 계실지 모르는 창조주님, 멱살을 잡겠다는 건 개소리였어요.
무릎을 꿇으라면 꿇고, 엎드려 빌라면 빌 테니 이 천사 같은 미소를 앗아가지 말아 주세요.
이 가여운 아이의 모든 아픔을 제발, 제발 전부 제게 주세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갸웃거리는 연의 머리를 쓸어준 설우가 쓰게 웃었다.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자란 남자가 태어나 처음으로 하는 처절한 기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