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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32화 (32/96)
  • 32화.

    설우의 허리보다 높은 서랍장 위에 앉은 연은 제 목덜미를 잡아 내리는 힘을 따라 순순히 상체를 숙였다.

    촉촉한 입술을 가볍게 빨아들인 설우가 떨어지려 하자 자유롭게 늘어져 있던 연의 팔이 설우의 목을 단단히 감았다.

    “무슨 뜻이야.”

    “더하고 싶어요. 어떡해, 중독됐나 봐요.”

    “자꾸 꼬시지 마. 너 그러다 잡아먹힌다니까?”

    스윽, 앞으로 다가온 설우가 연이 앉은 서랍을 두 손으로 짚으며 자세를 낮췄다.

    “솔직히 말해도 돼요?”

    “해 봐.”

    “잡아먹혀도 괜찮을 거 같아요, 크앙!”

    설우의 애간장을 녹일 장난을 친 연이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크앙이 아니고 어흥이라고.

    그녀가 생각하는 짐승은 아기호랑이인 모양이었다. 조금 사나운 고양이거나. 나는 너를 한입에 집어삼킬 거대한 어른 호랑이인데.

    “잡아먹힌다는 게 무슨 뜻인 줄은 알고?”

    “당연히 알죠. 쇼핑하러 호텔 갔을 때 기억 안 나요? 오빠가 원한다면 할 수 있다고 했었는데.”

    “그리고서 움직이지도 못했잖아. 센 척하지 말지. 한번 시작하면 엉엉 울어도 안 놔줄 건데.”

    “울 만큼 아픈 거예요?”

    “고통과 쾌락이 함께 하지. 아파서 울고, 좋아서 울고.”

    “상상이 안 가요. 간호사 아줌마는 되게 좋은 거라고 했는데.”

    “걱정하지 마. 때가 되면 아주 자세히 알게 해줄게.”

    짧은 입맞춤을 끝으로 연을 바닥에 내려준 설우가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참고, 참고 또 참으면 참나무가 된다고 했던가.

    당장 침대로 데려가고 싶은 충동을 오늘도 역시 잘 이겨낸 그였다.

    “언제 알려줄 건데요. 오늘? 내일? 아, 첸이랑 이든이 없어야겠죠?”

    하지만 그 참나무의 꼭대기에 사는 천진한 다람쥐는 끝도 없이 저를 못살게 군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나 안달 나게 하려고.”

    “네? 뭐가요?”

    “후, 아니야. 마트 갈까?”

    다람쥐의 시선을 돌리기엔 도토리가 딱이지.

    “네!”

    쏜살같이 돌아오는 반응에 너털웃음을 지은 설우가 신이 나 발끝을 들썩이는 연을 품에 안았다.

    “약 때문에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 말 안 하면 모르잖아, 연아.”

    “참을 수 있어요. 많이 아프지도 않은데 괜히 엄살 피워서 다들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요. 맨날 아프다, 아프다 하면 오빠도 지겨울걸요.”

    “아닌데. 하나도 안 지겨울 건데?”

    “못 참을 만큼 힘들면 꼭 말할게요.”

    “그래. 옷 갈아입고 나갈 테니까 가서 첸이랑 이든한테 마트 가자고 해.”

    “과자 많이 사도 돼요?”

    “당연하지.”

    근사한 미소를 짓는 설우에게 두 손의 엄지를 모두 세워준 연이 쪼르르 달려나갔다.

    첸과 이든은 각각 카드를 하나씩 끌었고, 설우는 연의 하얀 손을 쥐었다.

    첸이 끄는 카트에는 벌써 과자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이건 꼬맹이 소시지, 이건 꼬맹이 치즈, 이건 꼬맹이 젤리, 이건 꼬맹이 요구르트!”

    카트를 세워두고 사라졌던 이든이 품 안 가득 연이 즐겨 먹는 것들을 안고 나타났다.

    후두두, 카트로 쏟아지는 양이 어마어마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놀란 기색은 없었다.

    “여기 있어. 나 닭볶음탕 재료 좀 가져올게. 카트 끌고 따라와, 이든.”

    “Roger.”

    연이 오고 난 후 펠리체 1동의 일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마트 구경을 좋아하는 연 때문에 일주일에 두 번씩 함께 쇼핑했고, 음식을 해주는 황 여사는 첸에게 주방을 뺏겨 사흘에 한 번, 밑반찬을 해줄 때만 펠리체에 방문했다.

    밖으로 나돌던 이들이 집안에 상주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청소를 담당하는 도우미도 근무시간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살이 엄청나게 찌겠어요.”

    “넌 쪄야 해. 먹는 거로 봐서는 이미 쪘어야 하는데. 삐쩍 말라 가지고.”

    “첸 말대로 운동을 할까 봐요.”

    “상태가 좀 나아져야 하지. 너무 위험해.”

    삐뚤어진 연의 모자챙을 아예 뒤로 돌려 버린 설우가 이유 없이 오물거리는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설우의 입술이 순식간에 닿았다가 떨어지자 혀로 아랫입술을 축인 연이 입맛을 다셨다.

    “자꾸 아쉬워할래?”

    “물렁물렁한 게 너무 좋아요. 오빠 입술만 이런 걸까요?”

    “다른 사람도 그렇다면 어쩔 건데. 이 사람, 저 사람 껴안아 주는 것처럼 입술 부딪히고 돌아다니게?”

    “그래도 돼요?”

    “죽을래?”

    “헤헤, 장난이에요.”

    이제 날 가지고 노는구나.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연의 해사한 웃음에 잔뜩 구겨졌던 설우의 미간이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오빠, 그럼 내가 하고 싶을 때 해도 돼요?”

    “안 돼.”

    “왜요!”

    단호한 거절이 돌아오자 발끈한 연이 작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고작 키스 한 번 하는데 내가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줄 알아?”

    “마음을 왜 잡는데요.”

    “됐고, 어쨌든 안 돼.”

    “치사해요. 그럼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죠. 이렇게 좋은 걸 알려주고 못 하게 하는 게 어디 있어요.”

    “말은 바로 하자. 처음은 너였거든? 네가 덮쳤잖아.”

    “그, 그건 꿈이었잖아요! 난 기억도 잘 안 난다고요.”

    “너한테나 꿈이었지.”

    말문이 막혀 어버버거린 연이 붉어진 볼을 숨기려 모자챙을 다시 앞으로 돌려놓았다.

    대체 부끄러운 타이밍이 어디야? 키스하자고 조를 땐 아무렇지도 않더니.

    정말, 단지 입술의 말캉한 느낌이 좋아서 조르는 걸까.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알았어요, 먼저 안 할게요.”

    새초롬한 얼굴로 답한 연이 괜스레 오렌지를 만지작거리자 설우의 머릿속엔 불순한 생각들이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오로지 느낌이 좋아 그런 것이라면.

    연이 말하는 말랑말랑, 몽글몽글한 감각을 첫 관계에서 잔뜩 느끼게 해주면 키스보다 더한 것도 해달라고 매달리려나.

    저 말간 눈으로, 저 순한 얼굴로. 해달라고 조르는 모습은…… 아, 젠장.

    찰싹!

    멋대로 연을 벗겨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설우가 정신줄을 잡으려 제 뺨을 후려쳤다.

    더 나아갔다간 연에게 못 볼 꼴을, 첸과 이든에겐 평생의 놀림거리를 선사하게 될 것만 같았다.

    “오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왜 자기 볼을 때려요?”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요란한 소리에 화들짝 놀란 연이 붉게 달아오른 설우의 볼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연아, 오빠 좀 그만 괴롭혀.”

    “내가 괴롭혔어요? 죄송해요, 안 그럴게요.”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도 모르면서.

    연의 입에선 죄송하다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오래도록 길들여진 버릇이었다.

    정신 차리자, 차설우.

    “아니야, 장난이었어.”

    “오빠 뺨은….”

    “벌레 붙었었어.”

    “너무 세게 때렸잖아요. 아프겠다.”

    제 볼을 만지기 위해 연이 까치발을 들자 설우가 상체를 숙여주었다.

    갈 길이 구만리쯤 되는 건가. 그래도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니 그거 하난 다행이네.

    “어, 첸이랑 이든 와요.”

    “그래, 저쪽으로 가자.”

    얼마나 떨어져 있었다고.

    첸이랑 이든을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달려가는 연을 잠시 지켜보던 설우도 그들을 향해 카트를 밀었다.

    서로만 바라보며 이야기꽃을 피운 둘은 알지 못했지만, 마트엔 꽤 많은 입주민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평소 함께 어울리는 사모들과 함께 장을 보러 나온 아진도 그들을 훔쳐보기 바빴다.

    1동에 사는 정체불명의 여자가 차설우의 애인, 또는 결혼을 앞둔 차설우의 세컨드로 결론 지어지는 순간이었다.

    ***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찾아오면 기쁨이 클까, 고통이 클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

    재벌가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자라다 보니 무료한 시간에 가끔 그런 쓸모없는 호기심을 가지곤 했다.

    그땐 몰랐다.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찾아오는 상황을 제가 직접 맞이하게 될 줄은.

    불행과 함께 찾아온 행복은 어둠 속 한 줄기 빛이 되어 길을 밝혀주었고, 행복과 함께 찾아온 불행은 고통을 지나 절망 속으로 저를 떠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찾아왔을 때 더 큰 쪽은 불행이 주는 고통이었다.

    “아아아악!”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고통에 찬 연의 비명이 펠리체를 울렸다.

    귓가를 찌르는 소리에 눈을 번쩍 뜬 설우가 허겁지겁 방을 나섰다.

    반대편 복도에서 달려오는 첸과 이든의 발소리가 바닥을 울리고 시스템 리모컨을 찾은 그가 재빨리 불을 밝혔다.

    “으… 으으.”

    “연아!”

    연이 쓰러져 있는 곳은 다이닝룸이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머그잔에서 스멀스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빨갛게 달아오른 연의 발 위엔 물기가 뚝뚝 흘러내렸다.

    상황 파악을 끝낸 설우가 다급히 연을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화상을 입은 부위에 차가운 물을 뿌리는 설우의 눈동자가 거세게 요동쳤다.

    “이, 이든. 구급상자 좀 찾아봐. 난 장 박사님한테 전화할게.”

    “구급상자? 구급상자가 어디 있었지?”

    갑작스러운 사고에 첸과 이든도 허둥지둥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깊은 새벽, 누구 하나 당황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죄송해요.”

    “괜찮아, 정말 괜찮아. 아파서 어떡해. 입술은 왜 이래. 설마 마신 거야?”

    “입술에 닿고 너무 뜨거워서 정신 차렸어요. 놀라서 떨어뜨린 거예요. 바보같이.”

    하아.

    어찌 보면 천만다행이었다. 넋 놓고 마셨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눈앞이 아찔했다.

    설우의 옷깃을 잡은 작은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얼마나 놀랐을까. 얼마나 아플까.

    아직 이마에 흉터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다치는 횟수가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어쩌지? 병원에 가야 할 거 같은데.”

    흉측하게 벗겨진 살갗은 둘째치고 노란 물집이 올라오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프다는 말도 못 하고 끙끙거리는 연의 볼을 연신 쓰다듬던 설우가 다시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안절부절못하고 밖에서 기다리던 이든과 첸이 쪼르르 다가왔다.

    꼭 대형견 두 마리를 보는 거 같아 연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스쳤다.

    “넌 왜 아파도 웃어.”

    설우는 늘 그게 불만이었다. 캔디도 아닌 게. 아플 때도 슬플 때도 무서울 때도 자꾸만 웃는다.

    “심한 거 같은데. 꼬맹이 괜찮아?”

    “조금 아파요.”

    사실 눈물이 찔끔찔끔 새어 나올 정도로 발등이 화끈거렸지만 이미 충분히 놀란 세 남자의 속을 새카맣게 태우고 싶진 않았다.

    “일단 거즈로 덮고 출발하자. 장 박사님이 빨리 오래.”

    “첸, 연이 겉옷 좀 챙겨서 대문 앞으로 와. 차고에서 차 뺄 테니까.”

    “알았어, 가.”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연이 잠드는 패턴도 익혔고, 부딪히기 쉬운 불필요한 가구들도 치웠고, 모서리는 죄다 찾아다니며 푹신한 보호대를 붙였다.

    그녀를 묶어 두지 않기로 한 후엔 깊게 잠들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약을 먹은 후론 잠결에 돌아다니는 것도 뜸해졌었고, 기껏해야 제 방에 오는 것이 전부였는데.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여긴 것이 오만이었고, 오판이었다.

    “콘솔로 다리 뻗어, 연아.”

    운전석에 앉은 이든이 콘솔 위에 얹어진 연의 발등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내가 대신 다쳤다면 좋았을 텐데.

    뼛속 깊이 파고드는 아릿한 고통에 지친 연이 설우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목이 말랐어요.”

    “그래.”

    “그냥 목이 마른 게 느껴졌어요, 그게 다였어요.”

    “그래.”

    “정신을 차렸는데, 너무 뜨거웠어요.”

    “…….”

    “오빠, 내가 정말 미쳤나 봐요.”

    마지막은 작은 웅얼거림이었다.

    붉어진 눈시울을 식혀보려 설우가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조수석에 올라탄 첸이 챙겨온 카디건을 상처 난 발등을 피해 덮어주었다.

    “잠든 거야?”

    “응.”

    “다행이다.”

    “다행이지.”

    첸과 이든의 목소리 역시 어둡게 가라앉았다.

    다행이란 말이 어울리는 상황인 건가.

    적어도 병원으로 가는 동안은 고통을 느끼지 않을 테니 다행이 맞는 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네.”

    신호에 걸리자 이든이 핸들 끝에 이마를 부딪치며 자책했다.

    “이번엔 정말 무기력했어.”

    첸 역시 동의했다. 연에게 닥칠 위험 중 정수기의 뜨거운 물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사용법을 알면 충분히 가능한 일임을 인지했어야 하는데. 연의 비명이 아직도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이든.”

    “응.”

    “그때 병원에서 잡아 온 새끼 어디다 뒀어.”

    “제이 지하실. 애들이 감시하고 있어.”

    설우의 살기 어린 목소리에 괜히 긴장한 이든이 마른침을 삼켰다.

    올 게 왔구나. 차설우 성질머리에 이 정도면 많이 참았지.

    연을 돌보느라 꾹꾹 눌러둔 분노가 터져 나오는 모양이었다.

    분노의 주체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연을 아프게 한 사람이든, 그녀를 돌보지 못한 자신이든. 그저 지금은 화풀이할 대상이 절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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