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31화 (31/96)

31화.

밤새도록 쏟아진 비는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싫어서일까. 연은 오전이 다 지나도록 눈을 뜨지 않았다.

지나치게 창백한 안색도 그렇고. 깨워도 곧바로 다시 눈을 감는 그녀가 걱정된 설우는 출근을 미루고 장 박사를 불러들였다.

“어디가 안 좋은 거예요?”

“그럼 멀쩡하길 바란 거야? 낮에는 각성제로 뇌를 흥분시켰다가 밤에는 억지로 뇌를 재우는데. 괜찮아 보였다면 이 애가 독하게 버틴 거지.”

“…그렇군요.”

“지금은 그냥 오래 자는 것뿐이야. 신경을 자꾸만 약으로 조절하니 얼마나 지치겠어. 종종 이럴 테니 자게 내버려 둬.”

“주기적으로 드나들 의사는 아직이에요?”

“고르는 중이야.”

“신경 써주세요. 지난번처럼 말 같지도 않은 여자 갖다 붙이지 말고.”

“크흠, 그 일은 미안하다니까.”

제가 소개한 박은주 교수가 연에게 한 짓을 들은 은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사과를 거듭했다.

꾸준히 이름값을 쌓아온 후배 교수가 그런 짓을 할 줄이야. 노기 어린 얼굴로 들어선 그녀의 연구실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

“아픈 내색을 안 해서 큰일이네요.”

“수면장애는 어때. 약으로 잡히는 거 같아?”

“잘 모르겠어요. 괜찮았다가, 안 괜찮았다가. 약효보다 부작용이 더 커 보여요.”

“그럴 수밖에 없지. 후유증이든 뭐든 애초에 뇌 손상으로 시작된 병을 너무 오래 방치해 뒀으니. 약을 더 늘리면 몸이 버티질 못할 텐데, 쯧.”

안타까움에 혀를 찬 은태가 묵직한 가방에 청진기를 집어넣고 일어났다.

문밖에서 빼꼼히 고개를 들이밀었던 첸과 이든이 방문을 열어주었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조심히 가시고요.”

“퇴행성 뇌 질환 고위험군인 거 잊지 마. 추적 검사 계속해줘야 해.”

“네, 그럴게요.”

벌써 정오가 다 되어가는데.

미동도 없이 설우의 침대를 차지한 그녀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연상케 했다.

넥타이를 헐겁게 푼 설우가 침대 아래에 주저앉았다.

차 회장을 만나기 전 화진에게 들러야 하는데. 연의 배웅 없이 나서기가 싫었다.

그녀의 하얀 손바닥 위로 제 손가락을 올리니 헐겁던 손에 작은 악력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내 연의 눈꺼풀이 위로 올랐다.

“연아, 왜 이렇게 오래 자.”

“…자꾸 졸려요.”

탁하게 흐려진 눈동자엔 여전히 졸음이 담겨 있었다.

“첸이 너 먹으라고 핫케이크 잔뜩 구워놨는데.”

“조금만 더 자고 먹겠다고 전해주세요.”

짧은 미소를 지은 연이 다시 눈을 감자 설우가 착잡한 마음에 눈가를 마구잡이로 문질렀다.

“형, 꼬맹이 일어났어?”

장 박사를 보내고 돌아온 첸과 이든이 발소리를 죽이고 방으로 들어왔다.

두 남자의 눈에도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깐. 다시 잠들었어.”

“어제 너무 신나게 놀아서 그런가.”

세 남자의 목소리가 흐린 날씨만큼이나 우중충하게 가라앉았다.

연이 신나게 집안을 휘젓고 다닐 시간인데. 무거운 침묵이 낯설기만 하다.

“난 일단 나갔다 올게. 둘은 오늘 집에 있어.”

“그래.”

“연이 깨면 전화하고.”

“꼬맹이 일어나면 약 먹여?”

이든이 걱정스럽게 웅얼거렸다. 약을 먹어 연이 더 아픈 거 같이 느껴졌다.

쓰러져 잠이 드는 것보다 죽은 듯이 잠을 자는 모습이 더욱더 보기 힘들었다.

“먹여야지. 꾸준히 먹어야 좋아진다고 했어.”

“알았어.”

두툼한 이불을 세심하게 여며준 설우가 천근만근 무거운 다리를 움직여 침실을 나섰다.

***

현진호텔 스위트룸. 화진은 오랜만에 꿀 같은 휴가를 즐겼다.

아로마 마사지로 몸을 풀고 여러 음식을 테이블에 깔아놓은 그녀는 퍼스널쇼퍼 윤세인을 불러 쇼핑을 시작했다.

화진이 좋아하는 브랜드의 쇼가 시작될 때 비서실장 성재의 안내를 받은 설우가 전실로 들어섰다.

“왔어?”

“왜 대낮부터 술을 드세요.”

“휴가잖아. 너도 한잔할래?”

화진의 수발을 들기 위해 서 있는 호텔 웨이트리스에게 슈트 재킷을 건넨 설우는 널찍한 1인용 소파에 자리 잡았다.

“할아버지 뵙기로 했어요.”

“노인네 꼬장꼬장한 건 여전하더라.”

“만나셨어요?”

“어제. 너 놀이공원 간 거 어제였지? 어지간히 급했나 봐, 그날 바로 쫓아왔네.”

피로감이 몰려오는 목덜미를 문지른 설우가 눈앞에 보이는 물 잔을 들었다.

차 회장은 제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실 건데요.”

“넌 어쩔 건데. 파혼할 거야? 그냥 결혼하고 만나. 네 할아버지 벌써 그 애 치우겠다고 난리야. 윤 실장, 이번 건 전부 할게. 아, 두 개씩 해 줘. 챙겨가, 네 애인 선물. 다음 건 우리 아들 간 다음에 시작하자.”

“네, 회장님.”

설우와 세인에게 번갈아 가며 이야기를 전한 화진이 와인을 홀짝였다.

꾸벅, 고개를 숙인 세인이 모델들을 데리고 사라지자 설우가 허리를 세웠다.

“파혼할 생각이에요.”

“제대로 홀렸나 보네. 자료 전부 봤어. 너 병수발이 쉬운 줄 아니? 막말로 걔가 잠결에 불이라도 지르면 어쩔 거야? 그 애 키운 부모도 상태 안 좋던데. 7년 동안 정신병원에 갇혀 있던 애가 일상생활이 되니?”

“그 사람들 부모 아닙니다. 일상생활은 되게 만드는 중이에요. 그리고 한주희 정리되면 결혼할 겁니다.”

“뭐, 뭘 해?”

파혼을 고민한 후로 가장 먼저 마음속에 자리 잡은 단어는 결혼이었다, 아주 우습게도.

성급한 결심이었지만 결혼이 주는 법적 구속력이 아슬아슬한 삶을 사는 연에게 큰 안정감을 줄 수 있을 거 같았다.

화진에게 처음 내뱉고 나니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자료 보셨다면서요. 위태로운 아이예요. 어떤 상황이 와도 보호해 줄 수 있게 제가 법적인 보호자가 되어줄 겁니다.”

“놀이공원에서 사진 찍힐 때부터 미쳤다 싶더라니.”

“도와주세요. 이제라도 엄마 노릇 할 기회, 드리는 거예요.”

“너는 말을 예쁘게 하면 입에 가시가 돋니? 네 애인한테도 이따위로 말해?”

도와 달라는 말에서 끝내면 될 것을.

화진이 인상을 구기며 설우를 노려보았다.

“그럴 리가요. 나중에 만나면 엄마도 말조심하세요, 워낙 순한 애라서 아, 잠시만요.”

“하!”

허탈한 미소를 지은 화진이 잘 정리된 눈썹을 추켜세웠다.

충격을 받은 모친에게 어깨를 으쓱인 설우가 진동이 울리는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오빠아.

기다리던 연락이 오자 설우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이든이 전화를 걸어준 모양이었다.

“일어났어?”

-네, 지금 핫케이크 먹고 있어요.

“몸은 어때.”

-푹 자서 개운해요. 너무 오래 자서 놀랐죠? 이든이랑 첸은 엄청나게 놀랐대요.

“놀랐지. 핫케이크 맛있게 먹고, 잘 놀고 있어.”

-네. 언제 올 거예요?

“저녁에. 뭐 사다 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약 기운을 이기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나온 탓에 설우는 평소보다 더 살가웠다.

“너 귀신 들렸니?”

어투도, 목소리도. 완전히 달라진 설우를 얼빠진 얼굴로 지켜보던 화진이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없어요! 일하는 중인 거 같은데 그만 끊어요.

“그래, 다치지 말고.”

-네.

전화가 끊기자 설우가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반쯤 넋이 나가 있던 화진은 잔이 가득 차도록 와인을 따랐다.

“귀신 안 들렸어요. 도와주실 거예요?”

“뭐 할 건데, 너.”

“연이가 다치지 않으려면 할아버지와 거래를 해야 해요.”

“네가 내놓을 패는.”

“현 여당과 재계의 유착으로 압박할 겁니다. 그동안 돈이 오간 자료 전부 가지고 있어요. 한강일 시장 지지율 폭락은 둘째치고 할아버지의 오랜 인맥들까지 죄다 잡혀 들어갈 만큼 강력한 증거예요.”

“그건 압박이 아니라 협박이지. 차설우, 네 할아버지 만만하게 보지 마. 그러다 네가 다쳐.”

화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설우가 파혼에 사용할 카드는 지나치게 위험했다.

백 년 묵은 독사 같은 차 회장에게 어떤 역풍을 맞으려고 저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단 말인가.

차 회장은 저를 이기려 드는 괘씸한 손자를 벌주기 위해 설우의 옆에 선 아이를 죽이고도 남을 만큼 잔악한 사람이었다.

“연이 사랑해요, 사랑하게 됐어요. 그래서 잃고 싶지 않아요. CH와 할아버지께 피해가 생겨도 어쩔 수 없어요.”

담담한 말이었지만 간절함이 느껴졌다. 아직 연에게도 하지 못한 고백이었다.

귀신 들린 게 아니라면 남의 영혼이라도 쓰인 걸까.

생경한 아들의 모습을 마주한 화진에게 복합적인 감정이 찾아 들었다.

피폐한 삶에서 사랑이라도 찾았으니 다행이다 싶다가도 하필 아픈 아이를 만난 게 안타까웠고, 설우에게 큰 기대를 품은 차 회장이 뻗을 마수가 걱정되었다.

“그래, 알아들었어. 뭐든 쉬운 쪽으로 생각을 좀 해볼 테니까 일단 파혼 얘긴 꺼내지 마.”

“한 달 남았어요.”

“너 지금 사랑에 눈멀어서 대책 없고 극단적이야. 정신 차려, 자식아. 아무런 준비 없이 덜컥 파혼선언 했다가 여자애 잃고 후회하지 말고 잠자코 기다려.”

“감사해요.”

“할아버지 손 안 닿게 잘 지켜. 애 예쁘긴 하더라.”

“결혼도 반대 안 하시죠?”

“그런 걸 왜 하니, 피곤하게.”

화진은 다른 재벌가 사모들과 성향이 확연히 다른 사람이었다.

부를 대물림하기 위해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하나뿐인 아들은 제가 갖지 못한 평범하고 인간적인 삶을 살았으면 싶었다. 사랑도 그 일부였으니 말릴 생각은 없었다.

“펠리체로 한 번 오세요. 연이 보여드릴 테니.”

“알았으니까 그만 가, 쇼핑할 거야.”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되자 화진이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그럼 가볼게요.”

차 회장을 넘을 수 있는 든든한 아군을 얻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설우는 들어올 때보다 밝은 얼굴로 스위트룸을 나설 수 있었다.

***

짝짝짝, 짝짝짝짝―

파혼을 알리지 않았기에 차 회장과 독대를 빠르게 끝내고 돌아온 설우의 귓가에 요란스러운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꼬맹이, 오른쪽! 오른쪽에 첸 형!”

“이든은 바로 뒤에 있어.”

“씨, 둘 다 거짓말쟁이! 없잖아요.”

“자, 다시 손뼉 친다. 잘 들어.”

부딪힐 위험이 있는 가구들은 전부 뒤로 밀어낸 넓은 거실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중이었다.

이든과 첸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손뼉을 치자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연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아! 뭐야, 누구야!”

“하하하, 느려 터졌잖아. 꼬맹이.”

“연이 운동 좀 해야겠는데?”

그녀의 뒤늦은 반응이 웃긴 첸과 이든은 아주 가까이 다가가 연을 톡톡 건드리며 놀렸다.

그래, 이렇게 시끌벅적해야지.

오전과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에 피식, 웃은 설우가 거실로 들어섰다.

“연아.”

“어? 오빠 목소리! 오빠 왔어요?”

“응, 여기.”

“꺄악!”

갑자기 다가온 팔이 연을 번쩍 안아 들었다.

앞도 보이지 않는데. 발이 땅에서 떨어지자 화들짝 놀란 연의 가는 다리가 다급히 설우의 허리에 감겼다.

“일찍 왔네?”

“응. 얘기가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재미있던 놀이가 끝난 첸과 이든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거실을 원상복구 시키기 시작했다.

체구가 작은 연을 드는 건 한 손으로도 충분했다.

놀고 있는 왼손으로 연의 눈을 가린 끈을 잡아 내린 설우가 제 방으로 향했다.

달칵, 방문을 닫은 설우는 그대로 드레스룸까지 들어갔다.

다양한 종류의 시계가 진열된 아일랜드 서랍장 위에 연을 앉혀둔 그가 천천히 넥타이를 풀었다.

“술래잡기하는데 나만 계속 술래였어요. 아무래도 첸이랑 이든이 가위바위보 할 때 나 몰래 짠 거 같아요.”

“네가 자꾸 속으니까 재미있어서 그래.”

백설기 같은 볼을 가볍게 주무른 설우는 넥타이를 대충 던져두고 갑갑한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냈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단추를 푸는 설우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손등에 도드라진 힘줄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한 번도 못 잡았어요. 까먹기 좋은 땅콩에서 배부른 거북이가 됐어요.”

“이든 혼내줘?”

“아니요. 아, 아니, 오빠! 나 여기 앉아있는데 왜 자꾸 벗어요. 부끄럽잖아요.”

와이셔츠를 벗을 때까진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가 보려 했다. 하지만 그 안에 받쳐 입었던 반소매 티를 거침없이 잡아 올리는 설우를 보고 당황한 연이 허둥지둥 눈을 가렸다.

“나 벗은 몸 끝내주거든. 보고 반하라고.”

“버, 벗지 마세요. 심장 터질 거 같아요.”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 딸꾹질이 나올 것만 같다.

반쯤 끌어올렸던 티셔츠를 놓은 설우가 빨개진 얼굴을 식히는 연에게 한걸음 다가섰다.

“연아, 오빠 얼마큼 좋아? 첸이랑 이든보단 좋지?”

“당연하죠, 오빠가 제일 좋아요. 혼내고 막 소리 질러도 좋아요. 첸이랑 이든한텐 비밀이에요, 삐칠 거예요.”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목소리를 잔뜩 낮춘 연이 홍조 띤 얼굴로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쉿. 귀엽게 모이는 붉은 입술로 설우의 눈길이 내려앉았다.

“그럼 얼마큼 좋은 건데.”

“음, 세상에서 제일? 제가 지금까지 좋아할 만한 게 없었잖아요. 오빠를 만나고 오빠 덕분에 좋아할 수 있는 게 많이 생겼어요. 근데 그중에 오빠만큼 좋아할 수 있는 건 없을 거예요.”

“앞으로도 쭉?”

“앞으로도 쭉. 오빠가 제일 좋을 거예요.”

연의 금빛 눈동자엔 언제나 한 치의 거짓도 담기지 않았다.

“나도 네가 좋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연에겐 아직 버거울 세 글자를 감추며 최선의 고백을 한 설우는 그 어떤 초콜릿보다 달콤한 입술을 향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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