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30화 (30/96)
  • 30화.

    11시를 넘어가는 늦은 밤. 종일 돌아다닌 탓에 곯아떨어진 연을 업은 설우와 피곤함에 찌든 첸과 이든이 펠리체로 돌아왔다.

    겨우 2시간 남짓 낮잠을 잔 연은 놀이공원의 정복자가 될 기세로 돌아다녔다.

    어린이용 기구를 빼곤 전부 한 번씩, 재미있는 기구는 두 번씩. 지칠 수밖에 없는 긴 하루였지만, 그만큼 즐거웠다.

    “씻고 맥주 한잔하자.”

    “좋지.”

    두 갈래로 나뉜 복도에서 멈칫한 설우가 가벼운 술자리를 제안했다.

    연이 병원에 잡혀갔다 온 이후로 셋이 이야기할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으니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야 했다.

    “우음….”

    푹신한 매트리스가 느껴지자 연이 눈을 반쯤 떠 설우를 보았다.

    “집에 왔어. 편하게 자.”

    “씻어야 하는데…”

    “안 돼, 잠결에 씻다가 큰일 나.”

    “세수랑 양치만 할 테니까 오빠가 봐주세요.”

    “그래.”

    축축 늘어지는 몸을 일으킨 연이 잠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설마 옷을 갈아입는 이 짧은 시간에 잠들진 않겠지.

    “들어오세요.”

    그녀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연분홍색 실크 잠옷이 살랑거렸다.

    전동칫솔을 움직이는 손길이 퍽 자연스러워진 걸 보니 적응이 잘 된 모양이었다.

    사용이 힘들어 낑낑대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잘하네.”

    설우가 볼록한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칭찬하자 연이 금세 헤실거렸다.

    지나치게 불우한 과거를 보내고도 어쩜 이렇게 예쁘게 웃는지.

    “오늘은 왠지 안 돌아다니고 푹 잘 수 있을 거 같아요.”

    뽀득뽀득, 세수를 마친 연이 대충 로션을 찍어 바르고 침대에 누웠다.

    헤아릴 수도 없이 긴 시간 동안 느낄 수 없었던 기분 좋은 노곤함이었다.

    무기력하게 누워있던 시간을 견디게 해주었던 행복한 상상이 이루어진 날, 누군가에겐 그저 그런 나들이일지라도 연에게는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자.”

    “고마워요, 오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너무너무 즐거운 하루였어요.”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며 설우의 손가락을 쥔 연이 제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솔직히 전했다.

    “앞으로도 쭉 이럴 거야.”

    “그랬으면 좋겠다.”

    “병원에 혼자 뒀던 건, 정말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괜찮다고 했잖아요.”

    연의 머리맡에 앉은 설우가 반질반질한 이마를 다정하게 쓸어 주었다.

    잠들기 직전의 연을 볼 때마다 낡은 침대에 묶여 있던 모습이 아른거렸다.

    이 작은 몸으로, 나약한 몸으로 어떻게 그 끔찍한 시간을 견뎠니.

    너는 괜찮다고 하지만, 나는 괜찮지가 않다.

    아무도 너를 돌보지 못한 동안에 너를 좀먹은 긴 악몽이 끝내 널 잡아먹진 않을까 두렵다.

    “오빠, 오빠.”

    점점 어둡게 가라앉는 설우를 툭툭 건드린 연이 해맑게 웃었다.

    “응.”

    “그렇게 미안하면 아까 그거 한 번 더 해주세요.”

    “아까 그게 뭔데.”

    “뽀뽀, 는 아니고 키스. 말랑말랑, 몽글몽글해서 기분이 되게 좋았어요. 해주면 사고 안 치고 조용히 잘게요.”

    사고 안 치는 게 네 의지로 되는 일이었던가.

    “뭐가 이렇게 노골적이면서 순수해.”

    저 두 단어가 자연스럽게 섞이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안 돼요? 아, 하고 싶은데.”

    아쉬운 입맛을 다시는 연 때문에 실소를 뱉은 설우에게 열감이 맴돌았다.

    “네가 날 시험에 들게 하는구나.”

    키스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향이 닿는 순간 만지고 싶고, 제 아래에 두고 싶은 욕망을 참는 것이 고역이었다.

    “잠들 거 같아요.”

    인상을 쓴 설우가 고민을 거듭하는 사이에 연이 눈을 뜨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설우의 입술이 연에게 내려앉았다. 졸음이 가득한 몸짓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은 연이 물컹한 입술을 맘껏 느끼다 눈을 감았다.

    연의 팔이 스르르 미끄러지고, 귀여운 오물거림이 사라졌다.

    “너한테 녹는다, 내가.”

    피식, 웃은 설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연의 앞에 서면 차설우 본래의 모습은 입에 넣은 솜사탕처럼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나는 너처럼 깨끗하지 않고,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 아닌데. 너에게만은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

    상체를 숙여 연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설우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아, 시원해! 이제 좀 살겠네.”

    맥주 반 캔을 단숨에 비운 이든이 짜릿한 청량감에 몸서리쳤다.

    “연이는 어때?”

    “너무너무 즐거운 하루였대.”

    “다음번엔 아쿠아리움을 갈까? 꼬맹이 엄청 좋아할 거 같은데.”

    “주에 한 번은 시간 낼 테니 여기저기 많이 다니자.”

    “좋지.”

    첸과 이든도 연 못지않게 신난 모습이었다.

    생기가 도는 집안엔 세 남자의 잔잔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연이 아까 사자 때문에 부르르 떠는 거 봤어? 푸흐, 웃겨 죽는 줄 알았네.”

    “난 롤러코스터 탈 때. 울먹거리면서 어찌나 센 척을 하는지.”

    “바이킹도 웃겼어. 올라갈 땐 신나서 방방 거리다가 내려갈 땐 엎드리고. 두더지인 줄.”

    간단한 마른안주와 함께 맥주를 들이켜는 짧은 술자리의 이야깃거리는 늘 한결같았다.

    그녀가 오고 밤하늘에 달빛처럼 밝아진 펠리체 1동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선우연이었다.

    “형, 결혼은 어쩔 거야. 정말 할 거야?”

    “내일 8동에 가구 들일 거라던데.”

    “시끄러워지겠네.”

    “그래서 할 거냐니까.”

    “글쎄, 내가 결혼을 해야 할아버지가 연이한테 관심을 끌 거야. 하는 게 더 안전한데 최근 들어 좀 흔들리네.”

    남은 맥주를 털어 넣으며 씁쓸하게 웃은 설우가 또 다른 맥주캔을 집었다.

    “난 반대야. 꼬맹이한테 불륜녀 소리 듣게 하고 싶지 않아. 형 연이랑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아니잖아. 사생활 간섭 없는 정략결혼? 일반 사람들 잣대론 그거 아니지. 연이만 나쁜 년 된다고.”

    “난 찬성이야.”

    “뭐? 형, 진심이야?”

    마른오징어를 잘근거리던 이든이 인상을 구겼다.

    “연이 두고 이 자식이랑 차 회장님이랑 싸우면 어떨 거 같은데. 한 번 실수하면 끝이야. 차설우가 지랄발광을 해도 차 회장님 손에 연이 뺏기는 순간 두 번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고. 그 살얼음판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 거 같아? 그럴 바엔 간통으로 욕먹는 게 낫다고.”

    연이가 없는 우리는 이제 상상할 수가 없잖아.

    둘 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의견이었다.

    깊은 고민에 빠진 설우가 탁탁, 맥주캔 옆구리를 두드렸다.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더니.

    연을 찾기 전엔 한주희를 방패막이로 세우기로 마음을 굳혔는데 막상 연과 함께 지내고 나니 결혼에 거부감이 커졌다.

    “어쩔 수 없지.”

    “뭐! 그래서 결혼하겠다고?”

    “아니. 같은 편이 되면 할아버지를 이겨 먹을 수 있는 권력자를 찾아가야지.”

    “누구?”

    물음표 가득한 얼굴로 첸과 이든이 동시에 묻고,

    “엄마.”

    “아, 맞네.”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설우가 현진그룹 박화진 회장의 외아들인 것을 종종 잊는 그들이었다.

    화진은 CH그룹의 며느리라는 위치에서 깔끔하게 벗어나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양육권과 친권을 모두 포기했다.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설우는 저를 버린 것과 다름없는 화진을 많이 원망했었다.

    그가 장성한 지금은 간간이 만남을 유지했지만, 모자 사이의 긴밀한 정은 여전히 부족했다.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인데.

    저 자신보다 소중해진 연을 위해 이 상황에서 최선을 선택해야 했다.

    ***

    “손님 도착하셨습니다.”

    회색의 미닫이문이 열리고, 강렬한 와인색 슈트를 멋들어지게 소화한 화진이 룸으로 들어섰다.

    먼저 와 자리를 지키던 차성태 회장이 설핏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설우보다 한 수 위에 있는 그가 먼저 화진을 찾은 것이었다.

    “오랜만이구나.”

    “네, 상견례가 마지막이었던가요?”

    “별다른 행사가 없었으니 그랬겠지.”

    재킷의 단추를 열며 편한 자세를 잡은 화진이 물수건으로 대충 손을 닦았다.

    차 회장을 마주하고도 전혀 긴장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집 떠난 며느리랑 정답게 식사나 하자고 부르신 건 아닌 거 같고. 어쩐 일이세요?”

    사이가 좋지 않은 게 당연했다.

    차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끝없는 기업 간의 경쟁을 이끄는 수장이었고, 화진은 성태의 가부장적인 태도를, 성태는 화진의 주도적인 성향을 싫어했다.

    “설우 결혼 고작 한 달 남았다. 어미가 돼서 자식 엇나가는 건 막아 줘야지.”

    음식이 가득한 테이블 위로 사진 몇 장이 올려졌다.

    설우와 연이 집중적으로 찍힌 사진은, 그들이 놀이공원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장면을 담고 있었다.

    “아, 저번에 봤어요. 지금까지 만난 애 중에 제일 낫던데요, 외모가. 누군지 아세요?”

    “선우연이라고, 내 비서실장이었던 선우재호 딸이야.”

    “선우 실장 딸이라고요? 이런 딸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설우 미국 가기 전에 3년 동안 같이 지냈어. 부모 사랑을 못 받은 탓인지 지나치게 정이 들어버렸더군. 내가 경솔했어.”

    내내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하던 화진이 순간 표정을 굳혔다.

    설우에게 사랑을 주지 못한 것. 이제 와 그녀가 땅을 치고 후회하는 일이었다.

    “아버님 요즘 적적하신가 봐요? 손자 여자 만나는 것까지 들쑤시고 다니시고.”

    붉은 립스틱이 발린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섰다.

    느닷없는 호출이 아들의 여자관계 때문이라니.

    “만나는 건 상관없다. 눈감아주기로 약속도 했고.”

    “눈감아주는 대가로 설우가 그 머리 나쁜 약혼녀랑 밥을 먹어주는 모양이네요. 하하하, 아버님이 나선 거래치고는 너무 애들 장난인데요?”

    적의를 숨기지 않은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성태가 주름진 눈가를 씰룩거렸다. 두세 번 꼬아 던지는 화진 특유의 말버릇이 항상 못마땅하던 그였다.

    “고약한 말버릇은 여전하구나.”

    “칭찬으로 들을게요. 그래서 이걸 왜 보여주시는 건데요?”

    “파혼하고 싶다고 널 찾거든 도와주지 마라.”

    “설우 파혼한대요? 하긴 여자애가 너무 별로더라. 아버님 스타일이지 설우 스타일이 아니잖아요.”

    “너는 그 시건방 때문에 큰코 다칠 거다.”

    “아버님은 무능력한 장남 때문에 다치시겠던데요. CH 2위 얼마 안 남았어요. 아들 힘 좀 내라고 하세요. 조카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빌어먹고 살면 자존심 안 상한대요?”

    “뭐, 뭐야? 이…!”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른 차 회장이 분에 못이겨 삿대질을 했다. 반박할 말이 없다는 게 더 자존심이 상했다.

    적당히 단속을 해두려고 만난 것인데. 화진은 시종일관 삐딱선을 타고 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갱년기라. 이렇게 쏘아붙이지 않으면 속에서 천불이 나더라고요. 옛날 생각이 나기도 하고.”

    “후, 설우한테 가장 편한 결혼 상대니까 딴소리 못 하게 해. 설우 입에서 파혼 얘기 나오면 당장 그 여자애부터 치울 테니까.”

    “내가 그래도 설우 엄만데. 애가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주지, 아버님 말씀 듣겠어요?”

    “설우 옆에 있으면 위험한 아이다. 알아보기 귀찮을 테니 직접 보고 결정해.”

    노란 봉투를 던져 테이블로 올린 성태는 할 말이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회장이 밖으로 나가고 동그란 단추에 걸린 끈을 돌려 푼 화진이 안에 든 내용물을 꺼내 보았다.

    연의 과거와 권다미로 지낸 오랜 시간. 병원 기록. 최근 백창석과 연관된 일까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종이를 넘기던 화진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물 한 잔을 마셨다.

    “정신 빠진 자식.”

    차 회장이 던져준 사진 속의 설우는 그녀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호텔에서의 사진을 받았던 저도 꽤 놀랐었으니 설우를 끼고 산 세월이 긴 차 회장이 충분히 쫓아올 만한 일이었다.

    웬만하면 편을 들고 싶지만, 서류 봉투 속에 든 정보는 화진도 용납하기 힘든 것투성이였다. 생각지 못한 변수에 고민이 깊어지는 그녀였다.

    ***

    우르르 쾅!

    공기가 차게 가라앉은 새벽. 거센 빗줄기가 쏟아지며 천둥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번쩍이는 번개와 함께 눈을 뜬 연이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부터 천둥번개를 두려워한 연은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베개를 끌어안았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요란한 소음 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그녀에게 양을 세라며 핀잔을 주던 간호사의 말을 떠올렸다.

    콰앙!

    번개가 지나가고 땅이 울리는 느낌을 주는 거대한 소리에 어깨를 들썩인 연이 침대를 내려와 저와 설우의 방을 이어주는 통로로 향했다.

    베개를 들고 설우의 침대 앞에 물끄러미 서 고민하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를 흔들었다.

    “오빠.”

    “…….”

    “오빠아.”

    “…어, 연아.”

    목울대를 긁는 쉰 소리를 들으니 죄책감이 느껴졌다.

    종일 나랑 놀아주느라 힘들었을 텐데. 하지만 그만큼 무서웠다.

    “저 여기서 자면 안 돼요?”

    “지금 자고 있는 건 아니지?”

    꿈속의 연이 찾아온 건가 싶어 상체를 일으킨 설우가 그녀의 눈동자를 살폈다.

    “아니요. 천둥소리가 무서워서요.”

    “아, 그래. 이리 와.”

    “방해해서 죄송해요.”

    “아니야, 잘 왔어.”

    “예전부터 무서워했어요.”

    “안아줄까?”

    “네.”

    잘게 떠는 어깨 아래로 설우가 팔을 집어넣어 주자 연이 꼼지락거리며 그의 허리를 감아 안겼다.

    “잘 자, 꿈꾸지 말고.”

    “네, 오빠도 좋은 꿈 꿔요.”

    천둥이 칠 때마다 몸서리치던 연은 일정하게 등을 토닥여주는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작정하고 쏟아지는 빗줄기와 함께 길었던 하루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