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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29화 (29/96)
  • 29화.

    이른 아침. 가장 먼저 일어난 첸은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미리 손질해 둔 재료들을 꺼내고 손을 씻으니 터벅터벅,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연아,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눈이 번쩍 떠졌어요. 너무 들떴나 봐요.”

    “그렇게 좋아?”

    “엄청요. 나가서 돌아다니는 게 오랜만이잖아요.”

    설렘을 가득 품고 잠든 연은 알람도 없이 잠에서 깼다.

    놀이공원에 가는 것도 물론 좋았지만, 밖에 나가 종일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다.

    위험성이 큰 폭탄을 품고 있는 연은 펠리체에서 지낸 후로도 밖을 돌아다니지 못했다.

    설우의 집무실, 펠리체 안의 마트, 집 앞의 정원. 차를 타고 갔다가 차를 타고 오는 외식이 동선의 전부였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 섞여 두 발로 걸어본 기억이 희미했다.

    “앉아 있어. 금방 아침 만들어 줄게.”

    “나도 같이하면 안 돼요? 알려주세요, 첸.”

    “그럴래? 손 씻어. 연이가 유부초밥 만들면 되겠다.”

    “네!”

    아침 공기가 평소보다 더 시원하게 느껴졌다. 보호대가 붙어있어도 매번 툭툭 걸리기 일쑤였던 홈바 모서리에도 부딪히지 않았다. 약 때문에 느껴지는 현기증도 없었고, 늘 바짝 말랐던 입술마저 촉촉하다.

    오늘 하루가 정말 행복할 거라는 계시를 받는 기분이었다.

    “물기 잘 닦고 비닐장갑 껴 봐.”

    김밥을 말 준비를 마친 첸이 제 옆자리에 유부초밥 재료를 늘어놓았다.

    단촛물로 잘 버무린 밥과 물기를 짠 유부를 지척으로 밀어주자 연이 큰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첸은 왜 요리를 잘해요?”

    “음,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 한국으로 와서 제대로 배웠는데 써먹을 일은 거의 없었어. 근데 우리 집에 잘 먹는 막내가 생겨서 쓸모가 생겼지. 자, 아.”

    유부에 밥을 말끔하게 채우는 법을 먼저 보여준 첸이 완성된 유부초밥을 연의 입에 물려주었다.

    “맛있다.”

    “만들면서 다 먹으면 안 돼.”

    “첸한테 하나 만들어 줄게요.”

    “나도.”

    “아, 오빠!”

    “인사부터.”

    나란히 앉은 연과 첸에게 다가오던 설우가 우뚝 멈춰 두 팔을 벌렸다.

    아침저녁으로 하지 않으면 이젠 아쉽기까지 한 인사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일회용 비닐장갑을 낀 채 쪼르르 걸어온 연이 기름기 가득한 손이 닿지 않도록 살포시 품에 안겼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짹짹거려. 놀다가 피곤하면 어쩌려고.”

    “놀다가 낮잠 자고 또 놀아도 돼요?”

    “낮잠은 어디서 잘 건데?”

    “차?”

    “그래, 아예 잠깐 자고 다시 노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열심히 김밥을 말던 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면증 환자들이 갑작스러운 졸음을 방지하기 위해 간간이 낮잠을 잔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보통 기면증 환자와는 다른 연에게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피곤한 상태로 돌아다니는 것보단 낫겠지.

    “그럼 동물원 구경 먼저 하고 연이 좀 재우고, 오후에 놀이기구 타는 거로 하자.”

    “세상에, 동물원이라니.”

    홈바로 돌아가 유부초밥을 조물거리던 연이 두 손을 맞잡고 어깨를 들썩였다.

    천진한 그녀가 귀여우면서도 가여웠다.

    장세희의 손에 끌려다니고, 갇혀 있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고 싶은 일과 가고 싶은 곳이 얼마나 많았을까.

    첸 역시 설우와 같은 생각을 했다.

    안타까울수록 오늘 하루는 온전히 연을 위해 써야겠다는 마음이 커졌다.

    “자, 여기 첸 거. 이건 설우 오빠 거.”

    “와, 진짜 못 만들었어.”

    “밥으로 찰흙 놀이를 한 거야?”

    너무 오래 주무른다 했지.

    가늘어진 눈으로 찐득하게 엉겨 붙은 밥을 입에 넣은 설우가 일회용 비닐장갑을 꺼내 제 손에 꼈다.

    “너도 하게?”

    “얘보단 내가 나을 거 같은데. 연이는 가서 이든 깨워.”

    “네.”

    자리를 비켜준 연은 곧장 비닐장갑을 벗어 던지고 이든의 방으로 향했다.

    “김밥이랑 유부초밥만 하면 되는 거야?”

    “연이 좋아하는 소시지랑 계란말이도 해야 해. 모자라는 건 밖에서 사 먹자. 놀이공원 가면 연이 눈 돌아갈 음식들 많잖아.”

    “종일 먹기만 하겠네.”

    “만들고 여기에 담아, 깔끔하게.”

    “잘 때 필요한 것도 몇 개 챙겨야겠네. 차라리 돗자리나 텐트를….”

    “우악! 오빠아!”

    연의 괴성을 듣고 화들짝 놀란 설우가 뒤를 돌았다.

    이든의 어깨에 걸쳐진 연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저 미친.”

    뻐억. 설우는 밥풀이 묻은 비닐장갑을 낀 채로 이든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오! 아 씨, 뭐야. 형 일어나 있었어?”

    “너 자꾸 연이 괴롭힐래?”

    “귀여워서 그렇지. 원래 막냉이랑은 이렇게 놀아 주는 거래.”

    “누가.”

    “웹툰이?”

    뻐억. 이든의 어깨에서 내려준 연을 홈바 쪽으로 민 설우가 또다시 손을 올렸다.

    쯧, 맷집을 키우는 거야, 뭐야.

    맞을 짓을 골라 하는 이든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첸이 예쁘게 잘린 김밥을 연에게 내밀었다.

    “맛있겠다.”

    아침부터 티격태격 싸우는 이든과 설우를 구경 삼아 김밥을 신나게 집어먹은 연은 소시지와 계란말이도 하나씩 맛보고 나서야 볼록 나온 배를 통통 두드리며 욕실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반짝이는 금안을 지나치게 빛내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연의 머리 위엔 분홍색 토끼 귀가 달려 있었다.

    판다와 레서판다를 보며 방방 뛰는 그녀는 세 남자의 혼을 쏙 빼놓는 것으로 모자라 주변 사람들의 시선까지 사로잡았다.

    “저 여자 봐. 진짜 인형 같다.”

    “우리랑 같은 종족이 아닌 거 같은데? 장난 아니다.”

    “와….”

    윤기 흐르는 금발이 눈앞을 일렁일 때마다 여기저기서 감탄이 일었다.

    분명 판다를 보러 왔는데. 판다를 보는 연을 구경하게 된 사람들이었다.

    “천천히 돌아다녀. 판다 어디 안 도망가.”

    “오빠, 오빠. 쟤 좀 봐요. 나무에 걸려 있는데 막 흘러내려요. 레서판다는 사육사 아저씨랑 하이파이브도 했어요. 어떻게, 너무 귀여워.”

    “네가 더 귀여워.”

    오랜만에 제게 다가온 연의 볼을 주욱 당긴 설우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저 두 눈에 졸음이 담기지 않기를 바랐다.

    “형한테 한 마리 사 달라 그래.”

    츄러스를 떼어 연의 입에 넣어준 이든이 장난을 치며 설우를 흘깃거렸다. 천하의 차설우라도 할 수 없는 건 분명 존재했다.

    “안 돼요. 자기들이 좋아하는 집에서 살아야죠. 다른 곳에 갇혀 있으면 행복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든이 참 생각이 없지? 심지어 얘네들은 멸종 위기 동물이라 개인적으로 키우는 건 불법이야.”

    “이든, 나쁜 짓 하지 말아요.”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가 연에게 꾸지람을 들은 이든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엄한 얼굴로 이든을 타박한 연은 다시 판다를 보겠다며 앞으로 나아갔다.

    “자주 데리고 나와야겠다.”

    “너무 좋아하는 걸 보니까 오히려 좀 마음이 아픈데.”

    “우리가 잘 놀아 주면 되지. 가자, 꼬맹이 저거 정신 팔려서 뒤도 안 돌아본다.”

    놀이공원에 도착하자마자 판다 월드에 들어온 연은 판다와 호랑이, 원숭이, 겨우 세 가지 동물을 꼬박 2시간을 본 후에야 발걸음을 옮겼다.

    “맛있어?”

    “완전 맛있어요.”

    물개 쇼와 사파리를 끝으로 동물원을 나온 이들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 점심 식사를 시작했다.

    집에서 가져온 도시락과 더불어 놀이공원 안에서 파는 치킨과 햄버거 등 여러 음식을 사 와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많이 먹고, 약도 먹고, 차에서 잠깐 자면 되겠다.”

    “우린 뭐 하고 있지?”

    “우리도 차에서 자자. 아이 쫓아다니는 부모가 왜 그렇게 피곤해하는지 알 거 같아.”

    이든과 설우에 비해 체력이 월등히 부족한 첸은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건 뭐, 에너자이저 건전지를 넣은 것도 아니고. 지치지도 않고 돌아다니는 연이 버거운 그였다.

    “쯧. 늙었다, 형.”

    “나랑 설우는 30대라고.”

    “난 괜찮아. 네가 운동 부족인 거지.”

    연의 입가에 묻은 튀김 부스러기를 톡톡 털어준 설우가 빠르게 음식을 비워가는 그녀에게 콜라 잔을 내밀었다.

    “크흐.”

    “뭐야, 이 아저씨 같은 반응은? 우리 막냉이 어디 갔어.”

    가득 삼킨 탄산이 목을 찌르자 눈가를 찡긋거린 연이 저도 모르게 뱉은 낮은 감탄사를 놓치지 않은 이든이 너스레를 떨었다.

    “재미없거든요!”

    “연아, 이든 말고 놀이공원은 어때. 재밌어?”

    첸의 물음에 연의 고개가 다섯 번쯤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연을 만난 이래로 가장 신이 난 모습에 세 남자의 입가에도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이거 봐. 꼬맹이 엄청 귀엽게 나왔어.”

    “아니, 이게 더.”

    “이 사진이 제일이야.”

    만족도 높은 사진 서비스를 제공하는 동물원 덕분에 연의 사진을 사이좋게 한 장씩 나누어 가진 그들이었다. 넷이 함께 찍은 사진은 연의 몫으로 돌아갔다.

    각자 지갑에 넣어둔 사진을 자랑하던 이든과 첸이 설우가 내민 사진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사육사가 알려준 하트 모양을 만든 연이 레서판다 인형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졌네.

    “이따 판다 기념품 숍 좀 들리자. 꼬맹이, 내가 큰 판다 사줄게.”

    “진짜요?”

    “당연하지.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다 골라.”

    “이것도 공평하게 하나씩 해. 연아 3의 배수로 골라. 3개 사든지, 6개 사든지, 9개 사든지.”

    이든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지갑을 흔들자 첸이 끼어들었다.

    저 자식 혼자만 선물 사주는 착한 오빠로 만들 수는 없지.

    “네, 알겠어요.”

    “연이 다 먹었어?”

    “네.”

    “그럼 물 챙겨서 일어나자. 약 먹고 한숨 자야지.”

    연이 더는 손을 움직이지 않자 깔끔하게 빈 접시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언제 이렇게 많이 먹었는지. 그 많던 음식 중 남은 거라곤 치킨 한 조각뿐이었다.

    잠깐의 휴식을 위해 둘 씩 나뉘어 차에 올랐다. 적당한 그늘을 찾아 차를 세운 설우가 조수석 시트를 뒤로 젖히고 미리 챙겨온 베개를 올려주었다.

    “그래도 판다가 제일 귀여웠어요, 특히 레서판다.”

    “그래, 다음에 또 보러 오자.”

    “그리고 아까 사파리에서 사자들은 진짜 무서웠어요. 걸을 때마다 등이 우락부락. 얼굴에 있는 털은 많이 빠지겠죠? 음, 그럴 거야.”

    “겁먹어서 먹이도 못 줬잖아.”

    “아니에요! 그래도 하얀 호랑이한테는 줬는데….”

    “내가 같이 잡아서 줬지.”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시트에 누웠다가도 금세 일어나 종알거린다.

    회사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설우는 첸과 이든보다 더 연의 일상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아쉬웠다.

    사랑둥이. 이든이 했던 말이 정답이네.

    “오빠 아까 곰 봤죠? 엄청나게 큰 애가 막대기를 이렇게 막 돌리잖아요. 너무 신기했어요.”

    “맞아, 신기했어.”

    그녀가 하는 말에 맞장구를 치고 있지만 오물거리는 빨간 입술로 자꾸만 눈길이 갔다.

    네가 너무 사랑스러우니까 참을 수가 없잖아.

    “연아.”

    “네?”

    “오빠가 참을성이 이 정도밖에 안 돼서 미안해.”

    무슨 소리야. 저를 빤히 올려보는 눈동자가 이야기했다.

    “그게 뭐가… 우읍!”

    근데 정말 더는 안 되겠어.

    설우의 입술이 다급하게 연을 찾았다. 비좁은 차 안이란 건 중요하지 않았다.

    달콤하고 말랑한 저 입술을 삼키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만큼 몰려있었다.

    놀라 벌어진 입안으로 열기로 가득한 혀가 밀려 들어왔다.

    충동적인 시작과 다르게 설우는 부드럽고 느릿하게 연의 작은 입안을 탐했다.

    꿈속에서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었지만, 기억이 희미했다.

    현실에서 처음 설우의 입술을 맛보게 된 연은 등허리가 짜릿할 만큼 충격적인 행위에 소름이 돋아났다. 이상야릇한 쾌감이었다.

    굳은 목덜미를 주무르며 긴장을 풀어준 커다란 손이 내려와 허리를 쓰다듬다 헐렁한 반소매 티 안으로 들어갔다.

    아, 젠장.

    고작 키스 한 번에 흥분이 지나치다. 비단결 같은 속살에 손끝을 스치니 머리가 아찔했다.

    그녀가 제게 가져다줄 열락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더운 손길이 닿은 몸이 잘게 떨리자 순백의 천사를 탐하는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은 비틀린 흥분이 일었다.

    진정해. 진정하자, 차설우.

    연의 여린 속살을 향해 오르려는 손을 끝내 잡아 내린 설우가 천천히 멀어졌다.

    발갛게 열이 오른 얼굴로 쌕쌕, 숨을 내쉬는 장면조차 색정적이다.

    “미안.”

    “네?”

    “바람 좀 쐬고 와야겠어.”

    설우가 다급히 차에서 내렸다.

    바람을 쐬겠다는 거창한 말과 다르게 그는 운전석 차 문 앞에 기대 하늘을 바라보는 듯했다.

    “달다.”

    물렁물렁한 복숭아 같아. 좋아, 또 하고 싶어.

    입술이 맞닿아 있는 내내 하늘에 붕 떠 있는 기분을 느낀 연은 생경한 감촉을 단 세 마디로 정리했다.

    쌓이기만 하는 욕망을 조금이라도 해결해보고자 시작한 키스가 설우를 더욱 못 견디게 만들 연의 좋은 놀잇감이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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