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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28화 (28/96)

28화.

수요일 저녁. 주희와 식사를 하기 위해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앉은 설우는 말 한마디 없이 스테이크를 썰었다.

“여기 음식 괜찮죠?”

“괜찮네.”

설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안심이 썩 마음에 들었다.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은 설우가 직원을 호출했다.

“필요하신 거 있으십니까.”

“안심스테이크 두 개랑 해물 로제 파스타 하나, 안심 리소토 하나 포장 부탁해요. 아아, 에그 베네딕트도. 30분 후에 나갈 테니 시간 맞춰 준비해줘요.”

“네, 알겠습니다.”

얼마 전 브런치 카페에서 에그 베네딕트를 먹은 연은 손뼉을 칠 정도로 좋아했다.

스테이크랑 파스타는 원체 좋아하니 사다주면 좋아할 테지.

“뭘 그렇게 많이 포장해요? 저녁 시간 다 지났는데.”

야식으로 배불리 먹이고, 재우고, 내일 오전에 출발하면 되겠네. 첸한테 김밥이라도 싸라고 해야겠군.

“…….”

연에게 먹일 음식과 내일 함께 가기로 한 놀이공원 일정을 되뇌느라 주희의 말을 듣지 못한 설우가 느긋하게 식사를 마쳤다.

제 말엔 대답도 하지 않는 모진 남자를 힐긋거리던 주희는 와인을 홀짝이는 것으로 답답한 속을 달랬다.

“첸하고 이든 주려고요?”

“30분이면 충분하지?”

“네?”

“그쪽 식사 시간.”

“아, 네….”

식사는 늘 이런 식이었다.

대화도 없고 감정 교류도 없는. 주희에겐 마지막 지푸라기였고, 설우에겐 성가신 시간 낭비였다.

주희는 초조했다. 설우가 제게 원하는 결혼은 쇼윈도보다 못한 비즈니스 웨딩이었다.

한강일 시장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CH그룹이 뻗어 나가는 앞길에 돌멩이 하나 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한, 서로의 지원을 약속하는 증표가 바로 이 결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따로 살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한 집에서 몸을 부대끼고 지내면 없던 정도 들겠지, 하고 막연히 기대했던 제가 멍청했다.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한 치의 틈도 내어주질 않으니 방법이 없다.

거기다가 그 여자. 저와 머리채를 잡고 싸웠던 여자는 그 후로도 설우의 집무실을 드나든다고 전해 들었다.

정체불명의 여자도 어디로든 치워야 했다.

“손바닥은 왜 그래요? 다쳤어요?”

“아, 별거 아니야.”

걱정을 해주어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 가지고 싶다, 저 고고한 남자를.

“내일 펠리체로 가구 들일 거예요. 직접 가서 볼 예정이고요.”

“마음대로 해. 어차피 그쪽이 살 집이잖아. 굳이 펠리체로 들어와 살겠다는 이유를 모르겠군. 조롱거리가 되고 싶은 건가?”

“조, 조롱거리라뇨!”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인간들은 남의 추문을 좋아하니까. 보안이 끝내주는 거 빼곤 장점이 없는 곳이지.”

당장 내일부터 시끄러워지겠군.

주희와 펠리체에서 마주칠 생각을 하니 니코틴이 당긴다. 줄담배를 피우고도 남을 짜증이었다.

제 앞에 앉은 여자가 펠리체로 들어오는 순간 우스운 이야깃거리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예비부부가 각자 다른 집을 사용하고 거기다 예비 신랑은 다른 여자를 끼고 산다며 신나게들 떠들겠지. 치정은 언제나 가장 재미있는 이슈니까.

“당신은 왜 거기 사는 건데요?”

“내가 살긴 편한 곳이거든. 고작 하나 있는 장점이 마음에 쏙 들기도 하고.”

연과 함께 살지 않았다면 한주희가 펠리체로 들어오는 걸 환영했을지도 모른다.

그 어떤 더러운 소문도 밖으로 세어 나가지 않는 곳이니, 비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기에 알맞은 장소였다.

하지만 연이 함께 있는 지금은 달랐다. 그녀에게로 쏠릴 입주민들의 손가락질이 문제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정치인 아버지 밑에서 배운 게 없을 거 같아요? 그런 집단에서 아군 만드는 일 어렵지 않아요. 유력 대선 후보 딸인데, 누가 감히 무시하겠어요.”

자신은 남들이 뭐라 지껄이든 개 짖는 소리로 치부할 수 있었지만, 연이 상처받진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여기저기서 욕심내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선 펠리체가 최선인데.

한주희가 오는 바람에 펠리체의 폐쇄성이 양날의 검이 되어 버렸다.

“그래, 그럼 잘 해봐.”

더는 대화를 주고받을 생각이 없다는 듯, 설우가 의자 등받이에 편히 기대앉았다.

나른한 얼굴에 담긴 의미를 용케 알아들은 주희는 이내 조용히 식사를 이어나갔다.

설우가 탄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 무섭게 이든이 후다닥 뛰어나왔다.

연을 위해 포장해 온 음식들을 두 손 가득 든 설우는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그림자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 형 일찍 왔네?”

“갑자기 웬 마중. 연이는 자?”

이든의 옆과 뒤를 살핀 설우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기 레트리버처럼 졸졸 따라 나왔을 연이 보이지 않았다.

“자는 건 아닌데. 아오!”

이든이 마구잡이로 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연이를 잘 돌보라고 입이 닳도록 말하는 그에게 전하기 힘든 사고가 생겼다.

“왜 그러는데.”

현관 복도를 지나치는 설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뭘 하든 망설이지 않는 이든이 우물쭈물 말을 흐리는 것을 보니 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꼬맹이가 좀 다쳤어.”

“얼마나.”

“요리하는 거 구경하고 싶다고 했거든. 홈바 앞에 어슬렁거리다가 쓰러져서 이마가 찢어졌어. 부딪혔나 봐.”

설명이 끝남과 동시에 거실로 들어선 설우가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이든에게 떠넘겼다.

삐죽거리는 입술을 앙다문 연의 눈가에 붉은 기가 돌고 있었다. 아파서 운 모양새였다.

설우의 입매가 일자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으아! 아파요, 첸.”

“조금만 참아, 소독은 해야 해.”

“네.”

볼썽사납게 찢어진 연의 눈썹 언저리에 약을 발라주던 첸이 먼저 설우를 발견했다.

“왔어?”

“둘이서 애 하나를 못 봐? 정신 안 차릴래?”

소파로 걸어온 설우가 다짜고짜 성질을 부렸지만 틀린 말이 아니니 할 말은 없었다.

“그러게. 미안해, 연아.”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사고였다고 변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잠깐 한눈을 팔아서도 안 될 만큼 위험한 아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니에요! 첸이랑 이든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내가 잘못한 거예요, 죄송해요.”

“네가 뭘 잘못했는데.”

“약효가 떨어졌을 시간인데 위험하게 돌아다녔어요. 약 먼저 먹을걸. 이든이 빨리 약 먹어야 한다고 말도 했었어요. 근데 제가 안 들었어요.”

“아니야, 연아. 내가 미안해. 괜히 잘난 척한다고 불 쇼를 해서는.”

약을 곱게 펴 바른 상처 위로 하얀 거즈를 덮고 드레싱 밴드를 정성스럽게 붙여준 첸이 울상을 지었다.

연의 환호성을 듣고 불길 속에서 웍을 돌리는 화려한 잡기술을 선보인 그였다.

웍 안에 든 건 고작 비엔나소시지였다.

“아냐, 꼬맹이. 내가 미안해. 네 옆에 꼭 붙어서 첸 형의 잘난 척을 같이 구경했어야 하는데.”

“아니에요. 다 나 때문이야.”

측은한 시선을 주고받던 셋이 일어나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모여드는 폼이 썩 자연스러운 것을 보니 종종 하는 놀이인 듯했다.

“잘들 논다, 아주. 나만 못 됐지.”

“헤헤, 그러니까 화내지 마세요. 일하느라 고생했어요, 오빠. 인사!”

잔뜩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손쉽게 뻗어진 설우의 두 팔이 연을 마중 나갔다.

자동문처럼 열리는 품으로 쏙 안긴 연이 말간 미소를 짓자 걱정 섞인 화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많이 아팠겠다.”

“하나도 안 아팠어요.”

“아파서 펑펑 울었잖아.”

“이든!”

큰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연에게 얄밉게 혀를 내민 이든이 그제야 쇼핑백 안을 살펴보았다.

첫 번째 봉투는 먹을 거, 두 번째도 먹을 거. 세 번째도 역시. 세상에, 차설우가 지금 음식을 사 들고 들어온 거야?

“약 먹고, 옷 갈아입고 와. 맛있는 거 사 왔어.”

“설마, 이거 전부 다 먹을 거야?”

“어. 연이가 잘 먹을 거 같아서.”

“와아. 고마워요, 오빠. 빨리 올게요!”

“발발거리지 말고 조심해.”

“네네.”

불그스름한 핏방울이 묻은 잠옷을 갈아입기 위해 연이 방으로 들어가자 다이닝룸으로 향한 세 남자는 차근차근 음식을 세팅했다.

“그럼 저녁은 못 먹은 거야?”

“그런 셈이지. 꼬맹이는 약 바르면서 소시지 몇 개 받아먹었어.”

“훌쩍훌쩍 울면서 계속 받아먹더라. 귀여워 죽는 줄.”

“우리 집 사랑둥이잖아. 나중에 시집보낼 생각하니까 벌써 눈물이 크흡… 악!”

연이 쉽게 집어먹도록 미리 스테이크를 자르던 설우가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는 이든의 뒤통수를 가볍게 후려쳤다.

“누구 마음대로 시집을 보내. 내가 평생 데리고 살 건데.”

“꼭 한 대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첸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겠어, 더러운 변태 씨? 아주 죽겠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는 침대로 기어들어 오고, 매번 안겨서 비비적거리는데 원하는 만큼 만질 수는 없고. 혈기왕성한 나이에 그 불타오르는 색욕을 어떻게 참나 몰라.”

“얘가 그걸 무슨 수로 참아, 다른 여자 만나겠지.”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은 이든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설우를 놀렸다.

평소 그런 이든을 말리는 첸도 흔쾌히 동조했다.

“그럼 형은 세 집 살림을 하는 거야? 한주희랑 연이랑 또 다른 여자까지?”

“그럴 수 있지. 이 자식이 지금까지 울린 여자만 해도 펠리체 한 채는 가뿐히 채울걸.”

“여자 안 만나, 요즘 도 닦는 중이거든.”

천진하게 안겨드는 연을 언제까지 참아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만.

“한주희는 어쩔 셈인데? 이제 한 달 조금 넘게 남았나?”

“내일 펠리체 8호로 들어올 거야, 결혼을….”

다른 잠옷을 입은 연이 방문을 나오자 설우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제가 사는 나쁜 세계에 관해선 뭐든 모르는 편이 좋을 테니까.

“우와! 먹어도 돼요?”

눈을 반쯤 가려 거슬리는 드레싱 밴드를 만지작거리며 다가온 연이 끝없이 감탄사를 뱉으며 눈을 반짝였다.

간식을 앞에 두고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가 된 연은 재빨리 교정 젓가락을 찾아 손가락에 끼웠다.

“응, 대신 천천히 먹어.”

“네네, 잘 먹겠습니다.”

식탁 의자에 앉은 연이 발을 동동 구르며 젓가락을 바삐 움직였다.

젓가락질이 어설퍼 5번 중 4번을 떨어뜨려도 한 번 입에 넣으면 배시시 웃으며 설우와 눈을 마주쳤다.

“잘하네.”

초롱초롱한 금빛 눈동자는 그럴 때마다 칭찬을 원했다.

“오늘 한주희 만났잖아. 거기서 포장해 온 거야?”

“응, 음식이 괜찮더라고.”

“…쿨럭!”

에그 베네딕트를 반으로 잘라 한꺼번에 밀어 넣었던 연이 사레가 들려 입을 막았다.

첸이 곧장 물을 떠다 주었다.

“왜 그래. 저번에 싸운 거 생각났어?”

“아, 아뇨. 잘못 삼켰어요.”

“저 큰 걸 한입에 넣으니까 그렇지.”

설우가 다른 에그 베네딕트들을 4등분으로 잘라놓았다.

연이 음식을 집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이름 석 자만 들어도 기분이 상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결혼하지 말고 나랑 있어 달라고 하면 오빠가 내 말을 들어줄까.

아주 오래, 많이 나를 그리워했다고 했는데. 간절히 바라면 들어주지 않을까?

욕심내지 않기로 했지만, 떨어져 살고 싶진 않았다.

특히나 그 포악하고 못된 여자한텐 보내고 싶지 않다.

“왜 안 먹어. 젓가락질하기 힘들어? 자, 포크로 먹어.”

“꼬맹이가 젓가락질이 늦어지는 가장 큰 이유가 형이야. 나한텐 집어주지 말라고 하더니.”

“연아, 왜 그래. 다친 데 아파서 그래?”

순식간에 스테이크 한 접시를 비웠어야 할 연이었다.

갑자기 깨작거리기 시작한 그녀가 걱정된 설우가 포크를 쥐여주었다. 이든과 첸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연의 본심을 모르는 이들은 독한 약 때문에 식욕까지 잃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럼 정말 큰일인데.

“아니에요! 다 먹을 거예요.”

“그래, 배부르게 먹고 일찍 자야 내일 놀이공원 가지.”

부쩍 가까워진 설우가 흐트러져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쓸어주자 심장이 멋대로 들썩였다. 이 두근거림의 정체를 모르지 않았다.

순진한 연 때문에 설우가 고생할 거라는 이든의 생각과 다르게 연은 아주 빠르게 제 감정의 정답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매일 보는 드라마와 만화책들의 도움이 컸다. 사랑을 글로 배우는 중이랄까.

물론 서툴고 투박했지만, 오히려 세상 물정 모르는 순수함이 거침없이 행동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오빠.”

입안 가득 넣었던 리조토를 삼킨 연이 한껏 진지한 얼굴로 설우를 응시했다.

“응.”

“그 마녀 같은 여자랑 결혼 안 하면 안 돼요?”

“뭐?”

“나랑 첸이랑 이든이랑 지금처럼 같이 살면 안 돼요? 나 버리지 말아요.”

“내가 널 왜 버려.”

“같이 안 살면, 그게 버리는 거잖아요.”

“누가 그래. 또 이든이 그렇게 말했어?”

“나 아니야!”

신나게 파스타를 흡입하던 이든이 벙찐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안 버려. 우린 계속 같이 살 거야.”

“정말요?”

“응. 그런 쓸데없는 걱정 할 시간에 밥 잘 먹고, 약 잘 챙겨 먹어. 이렇게 다치지 말고.”

“약속할 수 있어요?”

“뭐, 손목이라도 걸어?”

“그런 걸 왜 걸어요! 자, 새끼손가락 줘요.”

가는 새끼손가락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릴 때도 무조건 새끼손가락부터 내밀더니. 이런 건 하나도 안 변했네, 선우연.

한마디가 넘게 차이 나는 손가락이 얽혀들었다.

꼼꼼하게 도장까지 찍은 연은 차례대로 손가락을 내미는 첸과 이든에게도 한 번씩 새끼손가락을 꼬아주었다.

“너무 맛있어요.”

한동안 계속되었던 걱정이 사라지자 연이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이렇게 잘 먹으니 뭐든 사주고 싶지.

복스럽게 먹는 그녀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세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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