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어쩌면 익숙한 장면이었다.
신인 시절 찍었던 막장 드라마에서 제 아들을 빼돌린 이들을 따라갔었고, 정통 멜로 영화에서 납치당한 애인을 찾기 위해 쫓았었고, 최근 국가정보원 역할을 맡아 추격전을 벌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짓을 하는 날이 올 줄이야.
“경찰에 신고부터 해야 할까?”
“글쎄. 상황을 모르는데 너무 섣부르지 않을까. 괜히 너한테 피해 생길까 걱정인데.”
“이렇게 무작정 쫓아간다고 될 일인가 싶어서.”
서준이 입가를 매만졌다.
서울 외곽 순환도로를 타고 한참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좌우로 바다가 펼쳐졌다. 대부도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국내 탑을 달리는 유명한 병원을 두고 아픈 사람을 왜 대부도로 데리고 들어가는 건지. 정말 납치라도 당하는 걸까.
서준의 반듯한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었다.
“명함이라도 한 장 받아 둘걸.”
“명함?”
“이든 말이야.”
신호에 걸려 스타렉스 바로 뒤에 멈춰 선 민준이 초조하게 핸들을 말아 쥐었다.
미행을 들켜 위험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이 차가 끌리더라니.
화려한 외제차를 제쳐두고 끌고 나온 검은색 세단 덕분에 일단은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다.
“형, VIP 병동 전화번호 알지.”
“아, 그러네! 병원에 전화해서 물어보면 되겠네. 그쪽도 모르게 환자가 사라진 거라면 난리 나는 거잖아.”
“번호 어디 있어?”
“휴대 전화에 저장해뒀어.”
“절대 놓치지 마, 형. 서울 외곽으로 나오는 것도 그렇고 진짜 이상해.”
서준이 컵홀더 안에 든 민준의 휴대 전화를 집어 들자 신호가 바뀌었다.
완전히 서울을 벗어나니 불안감에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안녕하십니까? 차병원 VIP 병동 전담간호사 윤정원입니다.
“안녕하세요, 한서준입니다.”
-아, 네. 예약 일정 때문에 연락 주셨나요?
“아닙니다. A7호에 환자의 보호자 연락처가 필요해서 연락드렸어요.”
-예? 그게 무슨… 무슨 일이신지 모르겠지만, 저희가 알려드릴 수 없는 부분입니다.
충분히 예상했던 답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알려줄 수밖에 없을 테니 나머지 한 손으로 제 휴대 전화를 든 서준이 번호를 찍을 준비를 마쳤다.
“A7호에 지금 환자 없을 겁니다.”
-환자가 없다고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확인해보세요.”
수화기 건너편이 조금씩 어수선해졌다. 확인을 위해 다른 간호사를 보낸 모양이었다.
-어떡해요, 윤 쌤! 환자 진짜 없어요!
-없다고? 그 환자 박 교수님이 직접 케어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격리 대상이라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데!
-어? 나 아까 그 환자 봤는데.
-언제?
-2시간쯤 됐을걸? 못 보던 의사 쌤이랑 움직이던데.
-그걸 그냥 보냈다고?
-검사하러 가는 줄 알았지.
-그 환자 저번 주에 종합 검진 전부 끝냈단 말이야! 특별 관리 대상인데 어떡해. 우린 다 죽었어.
다급한 간호사들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중요한 환자를 잃어버린 간호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패닉 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봐요!”
-예! 예?
“그 환자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빨리 보호자 연락처 불러요. 정말 급하다고요.”
-하, 하지만….
“어서요!”
윤 간호사는 결국 보호자 연락처를 읊기 시작했다. 전화를 끊은 정원은 데스크에 맥없이 엎드렸다.
‘혼자 가게 두면 어떡합니까. 병명 뭔지 몰라요? 테라스에서 쓰러지면 당신들이 책임질 거야?’
환자가 잠시 테라스에 갔을 때도 도끼눈을 뜨고 역정을 내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주치의인 정신과 교수가 직접 전담한다는 핑계를 대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얼마 전 명품 가방을 3개나 사들인 탓에 한동안 카드값이 어마어마할 텐데.
일반 병동 간호사로 돌아가면 그 돈을 다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막막했다.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CH그룹 본사에서는 계열사 총괄 회의가 이어졌다.
수십여 명의 임원을 양쪽에 두고 상석을 차지한 차성태 회장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3분기 매출 하락이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한 수준이었다.
파라다이스와 자동차, 건설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계열사가 적자였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깊은 한숨을 내쉰 차 회장이 우측 가장 앞자리에 앉은 차현수 총괄 사장을 쳐다보았다.
제 경영 능력 부족이 지표로 나타나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현수는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다음은 4분기 매출 예상그래프 입니다. CH파라다이스는 4분기에도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일 전망입니다. 현재 업계 1위를 유지 중인 계열사 중 디스플레이, 반도체, 유통의 매출이 다음 분기 현진그룹에게 따라 잡힐 것으로 예상됩니다.”
“대책은.”
현수를 비롯한 계열사 사장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확신을 줄 명확한 대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강 건너 불구경을 하듯 관망하던 설우는 잘게 떨리는 휴대 전화를 뒤집어 보았다.
본 적 없는 낯선 번호였다.
액정을 내려보며 받을까 말까 고민을 하던 설우가 초록색 통화 버튼을 밀었다.
-여보세요, 이든?
이든? 설우의 눈썹이 들썩였다.
제게 전화를 걸어 이든을 찾는 사람이 있다니.
“누구야, 당신.”
-이든이 아닙니까?
설우가 단번에 날을 세우니 상대방이 당황한 것이 느껴졌다.
“전화 예절이 엉망이군.”
-아, 전 한서준이라고 합니다.
“한서준? 배우 한서준?”
-네, 맞아요. 죄송합니다, 선우연 양의 보호자가 이든이라고 생각했어요.
“차설우입니다. 내가 보호자예요. 연이 보호자는 왜 찾습니까.”
목소리를 낮춘 설우가 뒤쪽 의자에 앉은 첸을 보았다.
흔들리는 설우의 시선을 마주한 첸이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까이에 앉은 임원들이 목소리가 커지는 설우를 흘깃거렸다.
-덩치 큰 남자들이 선우연 양을 데려가는 걸 목격하고 쫓는 중입니다. 지금 막 대부도로 들어왔어요.
“무슨 소립니까. 연이는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
-병원 지하주차장에서 목격했어요. 보호자께서 전혀 모르시는 걸 보니 납치가 맞네요. 차종은 스타렉스고 62가 3846이에요.
툭. 팔을 아래로 떨어뜨린 설우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회의장 안에 있던 임직원의 시선이 설우에게 집중되었다.
“뭡니까, 차설우 사장.”
부친인 차현준 CH자동차 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지만, 설우는 곧바로 첸에게 향했다.
“연이, 누가 연이를 데려갔대. 이든 불러.”
“권상철인가? 아니면 백창석? 하지만 아직 연이가 갇혀 있던 정신병원을 못 찾았어, 어쩌지?”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일단 가자.”
“야, 인마. 차설우. 총괄 회의 중에 이게 무슨 짓이야. 회장님도 계신 자리에서.”
인상을 찌푸린 현준이 아들의 어깨를 잡았다.
임원들은 수군거렸고 차성태 회장은 어서 앉으라는 뜻을 담아 설우를 노려보았다.
“중요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현준을 밀어낸 설우가 그대로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얼빠진 얼굴로 선 현준에게 고개를 숙인 첸도 설우를 따랐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차설우 사장의 이상행동에 장내가 술렁였다.
“크흠…! 계속 진행하지.”
차 회장의 헛기침 한 번에 금세 침묵이 흘렀다. 그만큼 입김이 강력한 권력자였다.
손자의 경솔한 행동보다는 그룹의 수익을 끌어올릴 대책을 세우는 것이 먼저였다.
“뭐, 뭐라고? 연이 씨 보호자가 CH파라다이스 차설우 사장이었다고?”
“응, 흔한 이름 아니니까 아마도.”
“세상에.”
“전화 예절은 자기가 더 엉망이네, 뭘.”
일방적으로 끊긴 휴대 전화를 황망하게 바라보던 서준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와, 근데 차설우가 데리고 있는 여자를 납치한다고? 미친 건가? 아니면 돈을 뜯어내려고?”
해안 도로를 지난 스타렉스는 이제 외진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날이 좋은 탓인지 다른 차들도 간간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어딜 가는 거지.”
“더 외진 길로 들어가면 거리를 둬야겠어. 갈림길도 없으니 천천히 올라가자.”
“이러니까 형사라도 된 거 같네.”
“형사는 무슨. 형은 겁이 많아서 안 돼.”
길이 점점 좁아지는 것을 보니 도착지가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긴장감을 떨치기 위해 서준이 피식, 웃으며 장난을 쳤다.
그렇게 구부러진 길을 따라 오른 지 10분. 앞에 스타렉스가 보이지 않을 만큼 천천히 뒤를 쫓던 형제는 낡은 건물 발견하고 멀찍이 차를 세웠다.
남자들이 연을 끌어 내렸다. 건물만큼이나 오래된 간판엔 새희망 정신병원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서준은 사진과 함께 병원 이름을 설우에게 보내주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차 번호판 하나로 찾아오긴 힘들겠지.
“야, 연이 씨 정신 차린 거 같은데?”
연은 비틀거렸지만,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남자들을 물고, 밀고, 달걀로 바위를 치듯 반항하던 그녀는 제 얼굴보다 큰 남자의 손바닥에 맞아 바닥으로 넘어졌다.
“저, 미친!”
놀란 서준이 문을 열려고 하자 민준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안 돼, 너무 위험해!”
“그럼 저걸 보고만 있어?”
“우리 둘이 지금 나서봐야 아무것도 못해. 괜히 우리 보고 다른 데로 빼돌리면 그게 더 큰일이야.”
“알았어, 안 내릴 테니까 이거 놔.”
서준이 눈가를 비비며 고개를 숙였다.
그저 본능적으로 차를 쫓았을 뿐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던 그였다.
정말로 범죄 현장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작은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현태가 한 번 더 그녀의 뺨을 내려쳤다.
그동안 저를 고생시킨 연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결국 연은 그들에게 질질 끌려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무력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초조하게 설우를 기다린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두 대의 차가 연이어 들어왔다.
병원 가까이 세운 검은색 차에서 이든이 내리자 서준과 민준이 그에게 다가갔다.
“이야기 들었습니다. 고마워요, 덕분에 빨리 찾았어요.”
진심이 담겨 있었지만, 말의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차분한 행동에서 한기가 돌았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숨기지 못한 이든은 이를 악물고 트렁크를 열었다.
이든의 손가락 마디마다 감긴 하얀색 테이핑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서준이 입을 크게 벌렸다.
트렁크를 채운 살벌한 무기들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던 그가 얼마 전 구입한 진압봉을 집어 들었다.
“근데 셋 밖에 안 왔습니까? 경찰도 없이? 병원에 왔던 남자들만 10명에 가까웠어요.”
“괜찮습니다.”
“들어가자, 이든.”
넥타이를 헐겁게 풀며 다가온 설우가 처음 보는 두 남자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감사 인사보다 연을 데리고 나오는 게 먼저인 설우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이든을 재촉했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서준아, 너 다치면 안 돼.”
“안 다쳐.”
“좋으실 대로.”
이든이 삐딱한 미소를 짓고 팔을 거칠게 흔들었다.
주문 제작한 진압봉이 세 단계에 걸쳐 길게 뻗어 나갔다.
“어디까지 해.”
“죽이지는 마.”
살벌한 대화가 오갔다. 이 순간이 익숙하지 않은 서준과 민준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뒤를 따랐다.
이든은 당연하다는 듯 가장 앞서 걸었고, 병원의 문을 열었다.
입구를 지키던 남자들이 위협적으로 길을 막았다.
“뭐야, 너희들!”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간 이든은 망설임 없이 팔을 휘둘렀다.
“크헉…!”
예고 없는 공격을 받은 남자는 곧바로 땅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쇠막대에 얻어맞아 머리가 깨지고 뼈가 나가는 소리가 선명히 울렸다.
좁은 복도를 달려 나온 남자 중 누구도 이든 하나를 막아 내지 못했다.
문지기들이 전부 나가떨어질 무렵 현태와 함께 다른 하수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혼자 해. 나랑 첸은 연이 찾으러 올라갈 테니까.”
“꼭 찾아와.”
“당연하지.”
설우와 첸은 곧바로 계단을 찾아 뛰었다.
서준과 민준은 이든과 함께 남았지만, 그들이 할 일은 없었다.
피가 터지든 말든 붕붕 날아다니며 남자들을 두드려 패는 이든의 실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큰 키와 다부진 체격을 가져 힘이 좋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이든은 덤벼드는 남자들을 차례로 내려치며 전진했다.
손가락 테이핑의 이유가 손에 든 것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함임을 뒤늦게 깨달은 서준이 혀를 내둘렀다.
“또 저 자식이네.”
뻐억, 먼저 달려온 남자의 머리를 내려친 이든이 현태에게 한발 가까워졌다.
연을 우악스럽게 다루던 현태를 알아본 민준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말했다.
“저 남자가 연이 씨를 때렸어요.”
“Fuck. I'll break every bone in your body.”
얼굴에 튄 핏방울을 대충 문지른 이든이 살기를 띠며 으르렁거렸다.
눈이 돌 정도로 열이 받으니 절로 모국어가 튀어나왔다.
쓰러져 꿈틀거리는 남자를 짓밟고 지나간 그가 들고 있던 쇠막대를 옆으로 던졌다.
“뭐라는 거야?”
“몸에 있는 뼈를 전부 부러뜨리겠대.”
“…와우.”
우린 지금 뭘 보고 있는 걸까.
살면서 두 번은 보기 힘들 장면이었다.
손가락에 감았던 테이핑을 차례로 떼어내며 혼자 남은 현태에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든은 함께 온 사람도 두려움을 느낄 만큼 사나워 보였다.
이든이 한 걸음 다가서자 현태는 한 걸음 물러섰다.
뒤돌아 도망치고 싶었지만, 오금이 저려 그마저도 쉽지 않은 그였다.
2층, 3층, 4층. 낡은 주제에 넓은 병동을 모조리 뒤지고 다니는 설우의 이마엔 어느새 땀이 흥건했다.
분명 이리로 데려왔다고 했는데.
연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으니 마음이 불안해 손끝이 잘게 떨렸다. 다른 곳을 뒤지는 첸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상황이 급박하다 보니 생각을 잘못했다. 만만한 놈을 데려다 위치를 알아냈어야 하는데.
“대체 어디 있는 거야.”
4층을 한 바퀴 돌고 3층으로 돌아온 설우가 우뚝 멈춰 섰다.
다급히 움직이는 의사 하나가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휠체어 가져와, 얼른!”
“무슨 일이에요?”
“밑에 난리도 아니야. 곧 다미를 데려갈 사람이 도착한다니까 일단 뒷문으로 나가 숨어야… 아악!”
연을 빼돌리려 병실로 올라온 의사의 목이 뒤로 꺾였다.
두피가 통째로 뜯겨 나가는 고통을 느낀 남자가 연신 소리를 질렀다.
“…연아.”
볼품없는 침대에 누운 연을 발견하자 남자의 머리카락을 쥔 설우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틈을 놓치지 않은 남자는 재빨리 도망쳤고 눈치를 살피던 간호사도 슬금슬금 빠져나갔다.
일자로 뻗은 손목과 발목엔 뻣뻣한 가죽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정신을 차린 설우가 연에게 달린 주삿바늘을 빼냈다. 크기를 알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자책이 설우를 짓눌렀다.
“연아, 연아. 일어나 봐.”
어쩔 줄 모르는 손길이 연의 목 아래로 향했다.
하얀 살결에 고스란히 남은 눈물 자국을 보니 가슴이 답답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무섭고 아팠을까.
“윽….”
“연아!”
반쯤 눈을 뜬 연이 작게 신음했다.
그녀의 발목에 매인 마지막 족쇄를 풀어낸 설우가 바르작거리는 손을 잡았다.
천천히 눈을 돌려 제가 있는 곳을 확인한 연이 하염없이 흔들리는 설우의 눈동자를 찾아냈다.
“오빠?”
내가 다시 꿈을 꾸는 건가. 연의 눈꺼풀이 몽롱하게 움직였다.
“나 알아보겠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연에게 가까이 다가간 설우가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진짜 오빠예요?”
“응, 나야. 이제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집에 가자.”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자 연의 눈시울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일으킨 설우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작은 몸을 감싸 안았다.
“으, 우흑… 으윽, 다신 못 보는 줄 알았어요. 으흑….”
꾹꾹 참고 있던 서러운 눈물이 터져 나왔다.
품 안에서 목 놓아 우는 연을 조금 더 깊숙이 끌어안은 설우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미안해, 혼자 둬서 미안해. 오빠가 잘못했어.”
상황을 정리한 이든과 첸이 올라올 때까지 연의 울음소리가 멎지 않았다.
심장이 나락을 뒹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가 절대 잊지 못할 과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