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이른 아침. 출근 전 연의 병실 앞에 들른 이든이 큰 소리와 함께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어어, 뭐야!”
“아이고, 깜짝이야!”
식사가 끝난 쟁반을 챙겨 나온 중년 여자가 놀라 몸을 떨었다.
“세상에, 말도 안 돼.”
“아니, 총각! 뒤에서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 어떡해. 이거 다 쏟을 뻔했잖아.”
-무슨 일인데 소란스러워.
이어셋을 낀 채 설우와 통화를 하던 이든은 반이 넘게 남은 음식을 확인하고 입을 벌렸다.
“꼬맹이가 밥을 남겼어, 형.”
-얼마나.
“많이. 세 숟가락 정도 먹은 거 같은데.”
-…애는 뭐해.
“그냥 누워 있어.”
-울진 않고?
이든의 옆에서 거친 콧바람을 내뱉던 중년 여자는 사과를 받긴 글렀음을 느끼고 자리를 떴다.
“그런 거 같아. 연이가 밥을 안 먹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충격을 받은 이든이 작은 창으로 연을 힐끔거렸다.
미동도 없이 누운 그녀를 보고 있으니 손이 저절로 움직여 문고리를 잡았다.
-첸이랑 같이 투자클럽 파티 준비해. 이름값 높은 사람들만 추려서 초대하고, 어린 여자애가 눈 돌아갈 연예인들도 불러. K건설 아들 빼놓지 말고. 장세희 딸을 미끼로 다 끌어들일 거야.
“알았어.”
아차 싶은 이든이 문을 등졌다. 순간 설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병실로 들어갈 뻔한 그였다.
-오후엔 내가 잠깐 들를게.
“봐서 좋을 거 없을걸. 속만 쓰리네.”
-그래도 봐야지.
“그래, 이따가 연락할게.”
착잡한 한숨이 튀어나왔다.
여전히 누워 있는 연을 다시 확인한 이든이 이어셋을 빼고 움직였다.
“어! 이든 맞죠?”
서준과 함께 상담실에서 나온 민준이 알은척을 하며 다가왔다.
저 인간은 매번 붙임성도 좋지.
겨우 세 번 마주친 게 다인 사이가 무색하게 반가움이 넘쳤다.
“네.”
“연이 씨 퇴원한 걸로 아는데. 다시 입원했어요?”
“그렇게 됐습니다.”
“서준이는 통원하면서 상담 받는 중이에요. 보는 눈이 많아서 힘드네요.”
상담이 끝나자 선글라스와 모자, 마스크로 무장하고 병동을 나설 준비를 마친 서준은 이든에게 인사하며 선글라스를 잠시 벗었다.
“오늘은 혼자 계시네요?”
확 트인 시야를 만끽하며 병동을 둘러본 서준이 물었다.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라다니던 남자가 혼자 있는 게 의아했다.
“격리 치료 중입니다.”
“아, 그러셨구나.”
“그럼 이만.”
부연 설명은 붙이지 않고 고개를 까딱인 이든이 널찍한 보폭으로 금세 병동 복도에서 사라졌다.
“격리까지 시킬 정도면 심한가 보다. 대체 어디가 아픈 거지? 간호사들한테 물어볼까? 이름값 좀 보여줘 봐, 한서준.”
“지나친 호기심은 독이야, 형. 여기 전담 간호사들 사인해달라고 안 하는 거 보면 몰라? 이렇게 엄격한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잘도 얘기하겠다. 나중에 친해져서 직접 물어봐.”
“친해질 수나 있고? 네 전화번호 받고도 연락 한 번을 안 하는 대단한 분이신데. 으으, 아무리 봐도 아까워. 완벽한 배우상인데. 아니 그냥 뭘 해도 그림 같을 텐데.”
직업병이 도져 아쉬움을 토로하는 형을 두고 출구로 향하던 서준이 A7호를 흘깃거렸다.
입원은 똑같은 병실에 한 모양이었지만, 병실 호수가 적힌 팻말 아래로 절대안정, 관계자 외 접근금지라는 글씨가 똑똑히 박혀 있었다.
인사를 나누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눈부시게 웃던 그녀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되는 그였다.
오래전부터 예약된 상담을 마치고 나온 은주가 정신의학과 스테이션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머리 큰 전문의들에게 연의 검사를 맡겼다가 의문을 품으면 말짱 도루묵이 될지 모르니 적당한 레지던트를 찾는 중이었다.
“아, 최 선생!”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레지던트 2년 차 최태우가 쪼르르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지도 교수가 부르니 거무죽죽하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혹시 시간 괜찮아요?”
“네, 지금은 괜찮습니다.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논문, 논문. 제발 논문에 필요한 자료 조사를 시켜 주세요!
태우의 속마음이 소리쳤다. 보이지 않는 구석에라도 제 이름 석 자만 욱여넣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텐데.
“VIP 병동 A7호에 가면 선우연이란 환자가 있어요. 이게 그 환자 차트.”
“V, VIP 병동이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키운 태우가 헙, 하고 입을 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문의들만 발을 들일 수 있다고 들었다. 특별한 증상 없는 나일론 환자 하나만 맡아도 평생 먹고살 돈을 벌기도 하고, 재벌가 주치의로 들어가기도 한다는 곳.
레지던트 2년 차는 귀동냥을 해서도 안 되는 장소가 들리자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차트를 건넨다는 건 제게 그 환자를 맡긴다는 뜻이었다.
“응, 그 환자 11시에 브레인 CT 찍어야 하는데 내가 일이 좀 많네. 최 선생이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별거 없어요, 병동 1층 영상 촬영실에 데려다주기만 하면 돼.”
“제가요?”
“왜, 못하겠어요?”
“아닙니다! 잠시 놀라서. 제가 하겠습니다!”
“기면증 환자라 갑자기 잠이 들 수 있으니 주의해요. 아직 각성제 처방 전이거든. 그러면 잘 부탁해요.”
“네, 교수님!”
태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은주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스테이션을 빠져나갔다.
상철과 그의 하수인들은 VIP 병동과 이어지는 주차장에 자리를 잡고 준비를 마쳤다고 했다.
연을 내려보내기만 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한껏 들든 채 룰루랄라 걸어가는 태우가 우스웠다.
자라나는 새싹을 밟은 건 미안했지만, 남의 새싹보단 제 꽃을 피우는 일이 더 중요했다. 백창석의 비호를 받아 만개할 미래를 꿈꾸는 그녀의 발걸음이 한없이 가벼웠다.
똑똑, 하고 경쾌한 노크 소리가 울리자 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움직임엔 힘이 없었다.
“선우연 환자분? 우와…. 어우, 죄송합니다.”
이런 미친. 윤기가 흐르는 금발을 먼저 마주하고 놀란 태우가 감탄을 내뱉었다.
어릴 적 여동생이 가지고 놀던 바비인형이 저렇게 생기지 않았었나? 아니 그보다 예쁜 것 같기도 하다.
“네?”
“아, 아뇨. 아닙니다. 브레인 CT 오더가 내려와서요. 영상 촬영실로 모시겠습니다.”
“브레인 CT요?”
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번 검진 때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났다. 분명 찍었던 거 같은데.
“조영제 없이 간단하게 찍을 거니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난번에 했던 거 같은데요. 지금 말씀하시는 검사.”
“예?”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오자 태우가 그제야 차트를 뒤적였다. CT 촬영이 진행되었던 기록이 분명하게 남아있었다.
근데 일주일 만에 똑같은 검사 오더가 또 내려왔네, 뭐지?
“또 해야 해요?”
“음, 이상 소견은 없었는데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해보시는 거 같네요. 가시죠.”
교수의 오더를 맞고 틀리다, 로 판단할 수 없는 수련의인 그는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연과 함께 1층으로 향했다.
***
펠리체에서 지내는 동안 불안한 적은 없었다. 설우가 없을 땐 이든이, 이든이 없을 땐 첸이. 제가 혼자 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준 덕분에 갇혀있던 병원으로 돌아가게 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다더니. 저를 못살게 굴던 보안팀장 현태가 눈앞에서 비웃음을 짓는 모습을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밝은 눈동자가 거세게 일렁였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도망칠 곳은 없었고 구해 줄 사람도 없었다.
“오랜만이다, 다미야. 내가 그동안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아니? 네가 도망친 날 당한 굴욕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야.”
이든의 긴 다리에 걸려 바닥에 쑤셔 박히던 순간이 여전히 잊히지 않았다.
“여, 여긴 어떻게.”
“왜 평생 못 찾을 줄 알았어? 내가? 너를?”
“당신들 뭡니까! 여기가 어디라고 지금, 커헉!”
현태의 발길질을 맞은 태우가 고꾸라졌다. 구둣발이 태우의 손 위로 드리웠다.
“의사는 손이 그렇게 중요하다지? 아, 정신과 선생은 입을 뭉개야 하나? 손이든, 주둥이든. 어디 하나 병신 되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숨만 쉬고 있어. 우리 용건은 이쪽이니까.”
태우는 곧바로 입을 닫았다.
남자는 백 퍼센트 진심을 얘기하고 있었고, 죽어라 공부해 가진 직업을 처음 본 환자를 위해 버릴 만큼 인정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네 아버지가 너를 애타게 찾고 있어. 소란 피우지 말고 가자, 다미야. 네 집은 여기가 아니잖아.”
“으읏…!”
현태가 주의를 끄는 동안 다가온 또 다른 남자가 주삿바늘을 연의 목 언저리에 찔러 넣었다.
그녀의 입가에 짧은 미소가 맺혔다.
마지막일 줄 알았으면 화내지 말걸. 괜히 마음 아프게 하지 말걸 그랬다.
현기증이 일었다. 희미해진 정신을 부여잡으니 손끝부터 딱딱하게 굳어가는 몸이 선명하게 느껴져 두려웠다.
인사도 못 했는데. 다들 걱정할 텐데, 어쩌지.
‘꼬맹이, 뭐 하고 놀아줄까?’
‘연아, 먹고 싶은 건 없어?’
‘선우연, 젓가락 쓰라고 했지.’
눈이 감기며 이든과 첸, 설우의 얼굴이 차례로 스쳐 지났다. 이 와중에도 잔소리하는 설우가 떠올라서 웃음이 났다.
“보고 싶다.”
짧은 시간 동안 아주 행복한 꿈을 꿨었던 거 같다. 해보지 못할 경험도 했고. 이제 그 기억을 붙잡고 살 수 있겠지.
더 깊은 절망에 빠져 자신을 놓아버리기 전에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이 정도면 됐다고. 한 줄기 빛도 사치였던 제 인생에 이런 사랑을 받았으면 된 거라고, 괜찮은 거라고.
긴 시간을 살아가기 위해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위로가 필요했다.
이거 봐, 나한테 이런 행운이 있을 리가 없잖아.
약 기운을 견디지 못한 연이 힘없이 무너졌다. 지독한 암흑이었다.
달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안전벨트를 맨 서준이 얼굴을 가린 것들을 모조리 걷어냈다.
“촬영 몇 시부터야?”
“저녁부터니까 좀 쉬다 가도 돼.”
“그래, 밥이나 먹으러 가자.”
“뭐 먹을까. 쌈밥… 어? 어어, 어어어어!”
“왜 호들갑이야. 뭐야, 저거!”
차에 시동을 걸려던 민준이 익숙한 금빛을 발견하고 손가락을 들었다.
여기가 촬영장이었나 싶을 정도로 놀라운 장면이었다.
덩치 큰 남자 하나가 연을 어깨에 둘러메고 뚜벅뚜벅 걸어갔고, 그 뒤를 다른 남자들이 따랐다.
주변을 경계하듯 두리번거리는 남자들을 피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인 민준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준을 보았다.
“격리 중이라 하지 않았어?”
자신들의 맞은편에 세워진 스타렉스 안에 연을 집어넣은 남자들이 두 대의 차에 나뉘어 몸을 실었다.
“어, 어떡해?”
상황 파악이 쉽지 않았지만, 정상적이지 않은 장면을 본 것은 확실했다.
“시동 걸어, 형.”
“뭐?”
“일단 따라가면서 생각하게. 출발해, 형. 빨리!”
어쩔 줄 모르는 민준을 밀고 버튼을 누른 서준이 다급히 외쳤다.
동생의 재촉에 엑셀을 밟은 민준이 눈을 크게 뜨고 스타렉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