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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21화 (21/96)
  • 21화.

    “우리랑 있을 때랑 상담받을 때 행동이 다르대. 다른 병이나 약 부작용 가능성도 체크 해야 하고.”

    “아, 아니에요! 나 그런 적 없어요. 상담할 땐 그냥, 그냥 싫어서 말을 안 예쁘게 했는데 다른 건 안 했어요.”

    당황한 연이 다급하게 설우의 팔을 붙잡았다.

    이들과 함께 있을 때와 다르게 상담실에서 퉁명스럽게 말한 건 사실이었다.

    의사와 일대일로 마주 보고 있으니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다칠까 봐 미리 조심하는 거니까 일주일만 참아 봐.”

    “싫어요, 혼자 병원에 있는 거 싫어요. 입원은 할 테니까 저번처럼 같이 있으면 안 돼요?”

    연이 매달리기 시작하자 설우의 미간이 잔뜩 찌그러들었다.

    간신히 굳힌 마음이 녹아내린다. 집에 가자, 라는 말이 멋대로 튀어나올 뻔했다.

    “안 돼.”

    “오빠, 제발요.”

    연은 필사적이었다. 처음 병원에서 도망쳐 나와 설우의 가게로 숨어들었을 때와 같은 간절함이었다.

    “어리광 부린다고 될 일 아니야.”

    “…이든.”

    설우를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연이 뒤에 선 이든을 보았다.

    구원을 바라는 간절한 눈빛이 닿았지만, 그 역시 고개를 저었다.

    설우가 결정했다면 돌이킬 수 없었다.

    “잘 때만 혼자 두면 되잖아.”

    “다른 정신증이 있는 건 아닌지 확인이 필요하대. 우리 앞에서 숨기는 걸 수 있다고.”

    “아니에요. 나 멀쩡해요. 잘 때 움직이는 건 어쩔 수가 없어서 그런 건데. 더 세게 묶으면 되잖아요, 차라리 수면제를 더 많이 먹을게요. 네?”

    “네가 갇혀있는 동안 어떤 약을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알 수 없잖아. 약을 처방했을 때 부작용이 심하고 몸에서 거부 반응을 일으킬 수 없으니 일주일만 지켜보자는 거야. 가자.”

    “나 정말 멀쩡하다고요! 오빠도 내가 정신병자로 보여요? 그래서 가두려는 거예요?”

    감정이 격해진 연이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복도에서 진료를 기다리던 환자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다.

    “선우연.”

    “이든, 나랑 제일 오래 같이 있었잖아요. 나 아무렇지 않은 거 알잖아요.”

    “진정해, 연아. 네가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너한테 맞는 약이랑 치료 방법을 찾으려면 잠시 지켜봐야 한다는 거야. 그렇지, 형?”

    “길어야 일주일이라고 했잖아. 고작 그 정도도 못 참아? 여긴 네가 있던 곳이랑 달라. 갇히는 게 아니라고. 일곱 살짜리 애처럼 굴지 마.”

    “형!”

    이든이 앞으로 나섰다.

    천천히 설득해도 모자랄 판에 창백하게 질려 애원하는 연을 두고 기어이 독설을 뱉는 설우를 말려야 했다.

    첸을 두고 제가 연의 짐을 챙기러 갈 걸 그랬다. 이런 상황을 유연하게 대처하는 건 첸이 전문인데.

    “일곱 살짜리 애랑 다를 거 없어요. 아무것도 못 배우고, 아무것도 못 보고 그냥 자라기만 해서 멍청하고 쓸모없는 거 안다고요, 나도!”

    입술을 꾹 깨문 연이 제 처지를 비관하자 순간 숨이 턱 막힌 설우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교통사고 후 연은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했다. 읽고, 쓰고, 말하는 덴 큰 문제가 없었지만, 맞춤법이나 뜻이 어려운 단어를 종종 착각하곤 했다. 이름뿐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 자체를 잊고 산 것이었다.

    세희의 손에 이끌려 간 인적 드문 달동네에서도 낯설기만 한 타국에서도 거의 집안에 갇혀 있던 연은 그렇게 많은 걸 잊었고, 잃었다.

    제대로 살고 싶단 의지 하나로 정신병원에서 7년을 버텼다.

    그녀의 희망은 약에 취하지 않은 반나절뿐이었고, 죽고 싶단 충동을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정 많던 간호사를 졸라 책과 잡지를 조금씩 읽으며 바깥 생활을 꿈꿨던 시간이었다.

    도망쳐 나와 천국을 맛보고 나니 그동안 미치지 않은 자신이 대견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억울했다. 아픈 건 내 탓이 아닌데. 왜 매번 아프다는 이유로 지옥보다 싫은 병원에 끌려가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겐 고작 일주일일지 몰라도 제겐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문밖이 점점 소란스러워지자 연구실에 있던 은태가 밖으로 나왔다.

    연을 마주한 은주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차설우를 설득했으니 그녀를 빼돌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니에요, 교수님. 입원은 어디에 하는 건가요?”

    이든이 재빨리 물었다.

    숨 막히는 분위기를 깨 준 은태가 반가웠다.

    “원래 입원했던 VIP 병동이 편하지 않겠어?”

    “저희 과 건물로 갈게요, 교수님. 제가 지켜보기엔 그쪽이 좀 더….”

    “아뇨. 입원은 VIP 병동에 합니다. 다른 곳은 외부인이 너무 쉽게 드나들잖습니까.”

    “아, 네. 그렇게 해요, 그럼.”

    이번엔 은주가 한발 물러섰다. 서슬 퍼런 설우의 시선이 닿으니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괜히 의심 살 행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꼭 혼자 있어야 하는 거예요?”

    의사들까지 우르르 몰려나오니 결국 체념한 연이 고개를 숙이며 웅얼거렸다.

    “네, 선우연 양은 혼자 치료받는 시간이 꼭 필요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24시간 케어할 거고,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금방 퇴원할 수 있어요.”

    “오빠, 정말 안 돼요?”

    설우의 옷깃을 잡는 작은 손에 절박함이 담겼다.

    마지막 애원이었다.

    “안 돼.”

    단호한 답을 남긴 설우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그녀와 함께할 긴 세월 중 고작 일주일이라고 생각했다.

    부작용을 줄이고 위험 요소를 없앨 일주일이니 연의 위태로운 수면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필요하다 여겼다.

    그 순간의 선택이 초래할 절망은 그가 받아야 할 대가였다.

    지긋지긋한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연이 조용히 침대 위로 올라 무릎을 감싸 안았다.

    “약을 먹은 후에 수면 상태를 검사하는 거예요. 이 센서들은 저번에 봤었죠? 불편하겠지만, 조금만 참아요.”

    고개를 끄덕인 연이 약을 삼키자 은주가 숙련된 손길로 센서들을 달아 주었다.

    “매일 하고 있어야 돼요?”

    “한동안은요. 낮에는 각성제를 먹고 난 후에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야 하거든요.”

    “알겠어요.”

    검은 속내를 숨기고 다정한 미소를 지어준 은주가 병실을 나섰다.

    혼자 남게 된 연은 제게 붙은 수많은 센서를 치우고 천천히 몸을 누였다.

    새우잠을 자듯 몸을 잔뜩 웅크린 연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렁그렁 고인 눈물 때문에 코앞의 벽조차 흐릿했다.

    치료를 위한 입원인 것을 알지만 어두운 병실에 혼자 남게 되니 자꾸만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하루 이틀 겪은 일도 아니면서 뭐가 그렇게 서럽다고.

    행복에 겨워 나약해진 마음을 채찍질해봤지만, 한 번 북받쳐 오른 감정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숨을 죽인 채 한참을 훌쩍이던 연이 긴 소매로 연신 눈가를 문질렀다.

    팔을 한 번 올릴 때마다 거추장스럽게 달랑거리던 센서 하나가 결국 떨어져 나갔다.

    어제까진 분명 웃고 떠들기 바쁜 밤이었는데.

    누구의 목소리도 남지 않은 병실엔 거슬리는 기계음만이 가득했다.

    “어휴. 딱해 죽겠네, 진짜.”

    “그러니까. 어르고 달래면 될 걸 애를 왜 쥐잡듯이 잡냐고.”

    “이렇게 안 하면 마음 약해지니까.”

    혼자 남아 훌쩍이는 연을 보기 힘든 이든이 가장 먼저 모니터에서 고개를 돌렸다.

    수면 상태 체크를 위해 담당 의사가 상주하는 제어실로 쳐들어온 세 남자는 연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래서 저렇게 울리고 나면 마음이 좋냐?”

    “그만해, 이든.”

    “답답해서 그래! 쟤는 왜 또 벽에 처박혀서 울어. 마음 아프게!”

    성질을 죽이지 못한 이든이 씩씩거렸다.

    매일 같이 방글거리기만 하던 연이 이불에 파묻혀 한참을 우니 가슴 한구석이 아려와 견디기 힘들었다.

    설우는 묵묵히 연을 보았다. 이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를 이해하고 달랬으면 좋았을 것을. 이렇게 생겨 먹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상태는요?”

    “불안정하죠. 울고 있기도 하고. 약효가 돌면 안정될 거예요. 그럼 수면 상태로 들어갈 거고.”

    “절대 다치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이죠. 수면 상태에서 움직이면, 전문의들이 바로 들어갈 거예요. 선우연 양은 비렘수면상태(*깊이 잠든 수면 상태)가 거의 없어요.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거죠. 얕은 잠을 자면서 뇌는 깨어있다고 보면 돼요. 밤에 잠을 못 자니 기면증은 심해지고, 낮에 잠을 자니 밤엔 다시 깊은 잠을 못 자는 거죠. 악순환이 계속되는 거예요.”

    구석 자리에 앉은 은주는 제어실을 차지한 불청객들에게 정성 들여 연의 상태를 브리핑했다.

    이 남자들이 틈을 보이고 자리를 비우게 하려면 어느 정도 신뢰를 쌓아야 했다.

    “약으로 잡을 수 있습니까?”

    “확인해 봐야죠. 오늘은 약을 독하게 처방했으니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많은 양을 먹을 순 없어요. 부작용이 극심할 테니까. 최소한의 양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끌어내야 해요. 선우연 양은 평생 약을 먹어야 하거든요.”

    “평생이요?”

    첸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심상치 않은 병을 가졌단 건 알았지만, 평생 약으로 제어해야 한다니.

    “선우연 양이 가진 복합적 수면 장애는 불치병과 다를 게 없어요. 보통 기면증 환자들도 평생 약을 먹거든요. 증상이 좋아졌다고 생각해 약을 먹지 않고 운전을 했다가 사고가 나는 경우도 종종 있죠.”

    “끔찍하네, 진짜.”

    “사실 호르몬을 약으로 조절한다는 게 쉽지 않아요. 사람의 정신을 파괴하곤 하니까. 그래서 선우연 양이 저렇게 맑아 보이는 게 더 의심스러운 거고요.”

    “7년을 갇혀 있었다면 난 아마 미쳤을 거야.”

    분을 삭이고 돌아온 이든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을 닦는 움직임이 사라진 것을 보니 연은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한 정신상태를 확인할 동안 선우연 양과 마주치지 말아 주세요. 판단이 빠를수록 환자한테 좋을 테니까.”

    이든이 동조하자 은주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직업 특성상 말로 사람을 동요하게 만드는 재주는 탁월했다.

    백하대병원 수면 센터장을 꿈꾸며 신이 난 그녀와 다르게 제어실의 분위기는 숙연하게 가라앉았다.

    저 조그만 어깨가 짊어졌을 아픔이 심장을 쿡쿡 찔러댔다.

    “죽여 버릴까.”

    설우는 근본적인 원인에 화가 났다.

    처음엔 교통사고를 낸 누군가에게, 두 번째는 돈에 눈이 멀어 연을 빼돌린 장세희에게, 그리고 세 번째는 그녀를 정신병원에 방치한 권상철에게.

    제 눈을 가리려 사고를 숨긴 조부와 더 빨리 연을 찾지 못한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난 찬성이야. 줬다 뺏기도 아까워, 그냥 죽이자.”

    “그래, 이번엔 나도 찬성.”

    이든에 이어 언제나 이성적인 첸까지 설우의 말에 동조했다.

    흠칫 놀란 은주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누구를 향한 말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모두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

    백창석의 집 별채엔 끝없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연을 데려올 생각에 잔뜩 들뜬 창석이 상철과 석기를 불러 미리 샴페인을 터뜨리는 중이었다.

    화려한 한복을 차려입은 여자가 옆에 앉아 시중을 들었지만, 창석의 눈앞엔 금빛으로 가득한 아이가 아른거렸다.

    “박 교수한테 연락이 왔었습니다. 내일 오전 중에 펠로우 하나 붙여서 1층까지 내려갈 테니 그때 데려가는 게 좋겠답니다.”

    “하하하! 자네가 아주 괜찮은 인재를 소개했어. 일 처리가 시원시원하구먼.”

    “감사합니다, 송 박사님. 덕분에 다미를 찾았습니다.”

    상철이 술을 따르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밤새도록 설우를 쫓아다닌 보람이 있었다.

    차병원에 들어가는 그들을 확인하고 창석에게 보고했을 뿐인데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차설우는 이렇게 상대해야 해. 얄팍하고 단순하게. 어린놈이 건방지게 말이야.”

    설우의 집무실에서 받았던 치욕을 대갚음해 줄 날이 머지않았다.

    보란 듯이 그 아이를 끼고 나타나면 어떻게 반응할는지.

    “병원에서 바로 이리로 데려올까요?”

    “아니, 바로 오는 건 위험해. 분명 나부터 의심할 게야. 중간에 뺏기면 아무 의미가 없지.”

    “그럼….”

    “자네가 데리고 있게. 약 좀 잘 써서 이번엔 놓치지 말고.”

    “예, 어르신. 그럼 일단 원래 있던 곳에 가둬 두겠습니다.”

    “내 직접 데리러 가지. 드디어 그 탐스러운 아이를 제대로 볼 수 있겠구먼.”

    상상만으로 잃었던 정기를 되찾는 기분이 들었다. 백창석의 늙은 혀가 말라붙은 입술을 축였다.

    나이가 들수록 빠르게 흐르는 시간이 허망했는데. 오늘만큼은 하루가 한 시간처럼 느껴지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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