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작은 항아리들이 줄지어 선 대리석 복도를 지나는 걸음에 기대감이 묻어났다.
단정한 바지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 여자는 상기된 얼굴을 가볍게 쓸며 직원을 따라 가장 깊숙한 방으로 들어섰다.
“손님 도착하셨습니다.”
미닫이문 한 뼘을 열어 먼저 허락을 구한 직원이 조심스럽게 남은 문을 열었다.
좌식 룸으로 들어서기 전 목을 가다듬은 여자는 고상한 미소를 띠며 인사를 시작했다.
“어우, 늦어서 죄송해요. 상담이 길어져서.”
무릎을 꿇고 앉아 술을 따르던 상철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흑임자죽을 비우는 데 집중했던 창석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박 교수 오랜만이야.”
“그러게. 오랜만이에요, 선배. 처음 뵙겠습니다, 어르신. 박은주입니다.”
“아, 반가워요. 송 과장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그쪽 분야에서 유명하다면서.”
“아직 부족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하, 뭘 영광까지야. 이쪽은 내 일 봐주는 친구. 편하게 권 실장이라고 불러요.”
“말씀 낮추세요, 어르신.”
“이 친구 아주 싹싹하고 좋구먼. 어서 들게.”
창석이 흡족하게 입꼬리를 올리자 은주를 소개한 송석기 과장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송석기는 창석의 주치의였다.
“실력 좋은 친굽니다. 야망도 있고요.”
“권 실장 뭐하고 있나. 자네 도와주실 분인데 어서 술 한잔 드리지 않고.”
“예, 죄송합니다.”
타박을 들은 상철이 급히 백자기로 된 술병을 찾았다.
쪼르르, 술이 담기고 창석이 자신을 찾은 이유를 듣지 못해 몸이 닳은 은주는 거침없이 잔을 비웠다.
“제가 도울 일이 있습니까?”
은주의 눈이 반짝였다.
조교수 시절, 순간의 실수로 줄을 잘못 선 그녀는 최근 신경정신과 과장에 낙방한 것으로 모자라 거의 확실시되었던 수면센터장 자리에서도 밀려난 상태였다.
제 1 저자로 실린 논문이 많아 정신의학 분야에서 알아주는 권위자라 불리지만 이룬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었다.
권력 싸움이 극심한 차병원을 떠날까 생각도 해봤지만, 이제 와 다른 병원으로 옮겨 고개를 숙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마땅한 자리를 제안해주는 곳도 없었고.
이 자리는 십여 년 만에 내려온 동아줄이었다. 백창석은 제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권력자였다.
“우리 권 실장이 딸을 잃어버렸는데 말이야.”
“어이구, 이런.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전후 사정을 아는 송 과장이 일부러 추임새를 넣었다.
“애가 많이 아파서 오랫동안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잠시 한 눈판 사이에 사라졌다지 뭔가.”
“병원에 있을 정도면 증상이 심했나 보네요. 병명이 뭐였나요?”
전문분야가 나오자 은주가 허리를 곧게 세웠다.
눈앞에 차려진 진수성찬보다 창석이 하는 이야기에 더 구미가 당겼다.
“조현병 진단받았습니다. 환청도 듣고, 환각도 보고, 심할 땐 자해도 했어요.”
“그런 아이를 잃어버렸으니. 이 친구가 요즘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쫄깃한 숙성 회를 씹은 창석이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에 들어찬 더러운 욕망을 알지 못하는 건 은주뿐이었다.
“그거 정말 위험한 병인데. 큰일이네요.”
“근데 잃어버린 그 아이가 차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구먼.”
“네? 저희 병원에서요?”
“최근에 CH파라다이스 차설우 사장이 여자애를 데려왔을 거야. 금발에 금안을 가진 아이, 본 적 없는가.”
얼마 전 진료를 맡은 연을 이야기하는 게 분명했다.
저를 부른 이유를 대충 눈치챈 은주가 멋대로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 아이가 바로 권 실장 딸이야. 이름이 뭐라 그랬지?”
“다미입니다, 권다미요.”
“하지만 제가 본 환자는 이름이 달랐습니다, 어르신. 조현병 증상도 전혀 없었고요.”
“크흠!”
정직한 대답이 돌아오니 못마땅한 창석이 괜스레 헛기침을 만들었다.
“차설우 사장이 제 딸을 데려간 겁니다. 우리 아이 보셨죠. 세상에 하나뿐일 특별한 아이입니다. 그래서 그놈이 제 딸을….”
아이돌 배우 뺨치는 발연기를 선보인 상철이 고개를 숙였다.
속이기 위한 연기가 아닌 그들만의 명분을 세우기 위한 연기였다.
이건 범죄가 아니라 딸을 찾는 아비를 돕는 일이니 죄책감을 갖지 말라는 의미였다.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서 일주일, 아니 3일만 혼자 두게. 박 교수가 간단히 세팅만 해주면 데리고 나가는 건 우리 쪽에서 알아서 할 게야.”
“하지만 보호자가 차설우 사장인데….”
“백하대병원 수면센터장 자리가 어떤가. 아이만 무사히 내 손에 쥐여주게나.”
창석이 본색을 드러냈다.
매끈한 금니를 혀로 다듬으며 식사를 마친 그는 빛깔 좋은 순금 잔을 은주에게 내밀었다.
“한 잔 주시게, 박 교수.”
고민은 아주 잠깐이었다.
고민이라기보다 차설우 사장에게 들켰을 때 돌아올 후폭풍에 대한 걱정이었다. 하지만 백하대 병원에 제 자리를 마련해준다면 거칠 것은 없었다.
상철에게 술병을 건네받은 은주가 천천히 창석의 잔을 채웠다.
그가 주는 먹이를 받아 물고 꼬리를 흔들 개가 한 마리 더 늘어나는 익숙한 장면이었다.
***
검진 결과를 듣기 위해 온 장은태 박사의 연구실 앞.
오래된 대기용 의자에 앉은 이든은 인상을 구긴 채 연의 두피를 이리저리 살폈다.
이상하게 비어 보이는 건, 그저 기분 탓이겠지.
연은 제 머리를 지분거리는 커다란 손을 제쳐두고, 이든이 준 젤리 봉지를 뜯는 데 집중했다.
“괜찮다니까요.”
“아오, 내가 거기 있었어야 했는데! 다음번에 만나기만 해 봐, 머리카락을 죄다 뜯어줄 거야.”
“안 돼요, 그러다 큰일 나. 이든처럼 큰 사람이 여자 때리면 경찰서에 잡혀갈 거예요.”
“아니, 난 안 잡혀가. 형이랑 결혼하고 나면 더 패악을 부릴 텐데, 초장에 버릇을 고쳐 둬야 해.”
“결혼?”
생소한 단어를 들은 연이 눈을 크게 떴다. 약혼녀라고 소리치던 모습은 얼핏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어, 아직 못 들었구나.”
연이어 떠오른 건 얼마 전에 봤던 드라마였다.
마지막 회에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하정이와 앞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원우가 행복한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 축복과 웃음이 가득하던 공간이었다.
설우 오빠가 그 여자랑 그런 결혼을 한다고?
“네.”
“결혼식까지 두 달 정도 남았으려나.”
“아아, 두 달… 두 달이면 얼마 안 남았구나.”
“푸흡…!”
이든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단순하기도 하지. 어쩜 저렇게 얼굴에 온갖 감정이 다 드러날까.
연은 종알거리던 입을 꾹 닫고 괜스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왜 웃어요.”
“맨날 혼만 나면서 설우 형이 좋아?”
“그,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닌 게 아닌데. 너 지금 얼굴 되게 빨간데.”
연이 흠칫하며 양 볼을 감쌌다. 어젯밤부터 과하게 뛰어대는 심장이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리니 설우의 입술이 닿았던 팔목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연이 잠들었다.’
그저 가벼운 장난이었다.
잠든 척하다가 벌떡 일어나 세 남자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진지한 목소리가 자신의 엄마와 연주를 언급하니 눈을 뜰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아직 세희가 친엄마가 아니었단 사실도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대화에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후로 알아듣지 못할 말들이 오가기 시작하자 장난은 포기하고 이대로 잠드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첸과 이든이 나가고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설우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기 직전 잔잔한 목소리가 심장을 간질였다.
‘아프지.’
다가온 애틋한 손길에 튀어나올 뻔한 한숨을 참고 나니 손목에 닿은 촉촉한 입술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펄떡펄떡 뛰는 심장 소리가 설우에게 닿을까 어찌나 마음을 졸였는지.
그가 인기척을 낼 때마다 솜털이 바짝 서는 쫄깃한 경험을 해야 했다.
결국, 약을 먹고도 한동안 잠들지 못한 그녀였다.
좋아한다, 라는 감정은 모호했지만 설우가 제 머리를 쥐어뜯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싫은 건 확실했다.
좀 전의 다툼을 떠올리며 눈가를 꿈틀거리던 연이 손에 쥐고 있던 젤리 하나를 입에 넣었다.
“결혼은 엄청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하던데.”
“그게 정상이지만, 이쪽은 비정상적인 결혼이거든.”
“그건 뭔데요?”
“너무 깊게 알려고 하지 마. 설우 형 무섭진 않아? 회사에서도 별명이 염라야. 지옥을 맛보게 해준다나. 원래 사나운 사람이거든.”
부지런히 포도 젤리를 집어먹던 연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든도 줄까요?”
“일찍도 물어본다. 됐어, 너 다 먹어. 형이 자꾸 화를 내는 건 다 걱정돼서 그러는 거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알아요, 제가 잘못을 하니까 화를 내는 거죠. 그럴 때 아니면 엄청 잘 해주세요.”
“잘못해서가 아니라 걱정돼서.”
오물거리는 하얀 볼을 살며시 꼬집은 이든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예상대로였다. 설우가 찾던 사람이 저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연은 여전히 눈치를 살폈다.
천진하게 잘 지내다가도 흠칫, 놀라는 일이 많았고 혹시나 밉보여 쫓겨나지 않을까 연신 눈동자를 굴렸다.
분위기가 조금만 달라져도 안절부절못하기 일쑤였다.
볼 때마다 어찌나 가여운지.
“뭐든 괜찮아요. 펠리체에서 지내는 거 엄청 좋거든요. 빨리 집에 가고 싶다. 병원에 그만 있고 싶어요.”
신발을 벗은 연이 무릎을 접어 의자 위로 발을 올렸다.
제가 갇혔던 곳과 다르다고 해도 병원이란 근본적인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지난번 검진을 위해 입원했을 때도 울며 겨자 먹기로 참아 냈었는데.
1분 1초도 보내고 싶지 않은 장소였다.
“조금만 참아, 나올 때 됐어.”
설우와 첸이 안으로 들어간 지 꽤 시간이 지났다.
여전히 굳게 닫힌 문을 흘깃거린 이든은 시무룩한 연의 이마를 툭툭 건드리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째깍, 째깍. 시곗바늘 소리가 유난히 크게 귓가를 울렸다.
다섯이나 모여 앉은 장 박사의 연구실은 그만큼 고요했다.
첸은 끊임없이 마른세수했고 설우는 입을 다문 채 살벌하게 허공을 노려보았다.
“너희가 억지 부린다고 될 일이 아니다.”
거추장스러운 하얀 가운을 벗어 던진 은태가 딱딱한 목소리로 못을 박았다.
“7년 동안 갇혀있던 애를 어떻게 다시 병원에 혼자 둡니까.”
“7년 동안 갇혀있었으니까 보내야 하는 거야. 안 보내면, 감당할 자신은 있고?”
“지금까지 괜찮았다니까요. 검사도 충분히 했잖아요.”
첸이 앞머리를 쥐어뜯었다.
해답을 얻기 위해 병원을 찾은 것이었는데.
즐거운 식사를 끝내고 듣게 된 소식은 눈앞을 캄캄하게 만들었다.
‘정신과 쪽에 입원이 필요하대.’
환한 낯빛으로 들어선 두 남자에게 은태가 내뱉은 첫 마디었다.
“수면 검사를 제외한 다른 정신과 검사는 충분히 하지 못했어요. 꾸준히 상태 보면서 약을 얼마나 어떻게 써야 할지 지켜봐야 합니다. 약물 검사에서 마약성 수면제랑 항우울제 성분도 많이 나왔고, 7년 동안 어떤 약을 먹였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다른 약을 처방하는 것 자체가 리스크가 커요.”
“기간은요.”
“일단 3일에서 일주일까지는 격리가 필요해요. 폐쇄 병동에 있는 동안 투약량이 엄청났다고 들었어요. 금단 현상이 어떻게 나타날지 모를 일이고, 새로운 약을 처방하면 부작용도 걱정입니다.”
“수면제 처방했잖습니까. 그거 먹고도 이상 없었어요.”
“임시로 처방한 약일 뿐이에요. 일반적인 수면장애가 아니기 때문에 복용해야 할 약도 많고, 내성도 생겼을 테니 일단은 입원을 한 후에 약을 먹으면서 경과를 지켜봐야 해요. 그게 아니라면 약 처방은 불가합니다. 본인이 다칠 수도 있어요.”
“그래도 격리는 안 됩니다.”
“정신과 상담 때 굉장히 적대적이었대. 항우울제나 안정제는 부작용이 더 무서운 약이야. 너희랑 지내기 위해서 환시나 환각 같은 정신증을 숨기는 걸 수도 있어.”
은주의 의도를 전혀 알지 못하는 장 박사가 그녀의 소견을 의심하지 않고 거들었다.
“너무 오래 갇혀있어서 병원 자체를 거부하는 걸 수도 있잖아요.”
불안하게 다리를 떨던 첸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장 박사를 보았다.
7년을 갇혀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였다.
길어야 일주일이라지만, 병원이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지내던 연을 다시 혼자 격리 시켜야 한다니.
“병원에서 너희와 함께 있을 땐 한 번도 적대적이지 않았었다. 잠시 혼자 두고 박 교수가 지켜볼 수 있도록 해. 그래야 진단을 하고 약을 처방하지. 오랫동안 갇혀있던 애가 멀쩡한 게 더 이상한 거야.”
CH가와 오래 함께한 주치의가 한마디 덧붙이니 맞잡은 설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연이 아픈 건 사실이니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오늘부터 입원시키겠습니다.”
“야, 인마. 그래도 오늘은!”
“그래야 고칠 수 있다잖아. 나아가는 과정이면 일주일은 참아 봐야지.”
연이도, 그리고 나도.
설우가 거칠게 눈가를 문지르며 마음을 다잡았다.
싫다는 그녀를 억지로 끌어다 넣을 생각에 벌써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그였다.
연과 함께 복도 간이의자에 앉아 기다리던 이든이 진료실 문이 열리자 벌떡 일어났다.
“결과 어때? 꼬맹이 괜찮대?”
“이제 집에 가도 되는 거예요?”
이든의 옷깃을 잡고 있던 연도 일어나 눈을 깜빡였다.
진료실로 들어간 설우와 첸이 꽤 오래 나오지 않아 불안했던 참이었다.
“첸, 펠리체에서 연이 짐 좀 챙겨와.”
“그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단번에 알아챈 이든이 힘없이 답하는 첸에게 눈짓을 했다.
첸은 천천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짐이라니, 왜?”
“일주일 더 입원해야 한대.”
“또요?”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기분 좋게 일어났던 연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웅얼거렸다.
“왜? 어디가 많이 안 좋대? 괜찮아, 꼬맹이. 저번에도 잘 있었잖아. 내가 매일 놀아줄게.”
“이번엔 혼자 해야 돼.”
“뭐?”
“같이 못 있는다고, 우린.”
타이밍이 좋았다.
여전히 연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불안한 설우가 의사의 의견을 따르는 건 지극히 정상이었다.
매사에 신중한 차설우라 할지라도 이 상황이 백창석의 계략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