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19화 (19/96)
  • 19화.

    레드립을 곱게 바른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더러워.”

    설우의 집무실을 차지한 여자가 얼마 전 바에서 마주쳤던 그 여자란 사실이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

    그때 숨겨 주었던 여자와 왜 지금까지 함께인 걸까. 아니, 왜 보는 눈이 많은 회사까지 드나들게 하는 걸까.

    의문을 지난 의심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니 미칠 지경이었다.

    “네? 저요?”

    악의 가득한 시선을 마주한 연이 제 몸을 훑어보았다.

    조금 더 예쁜 옷을 입고 올 걸 그랬나.

    만화책을 보며 종일 뒹굴 작정으로 선택한 반소매 티와 편한 슬랙스가 후줄근해 보이나 싶었다.

    “설우 씨랑 잤니?”

    “아아, 그 뜻이었구나.”

    하얀 티셔츠에 오렌지 주스라도 튀었는지 확인하던 연이 더럽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고 옷자락을 내려 두었다.

    “몸 팔아서 여기까지 기어들어 온 거야?”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가 원한다면 내어줄 결심을 하긴 했었지.

    짧은 시간 동안 설우가 보여준 세상은 그만큼 욕심이 났었다.

    “다 들킨 마당에 솔직해지자. 너 그날 일부러 설우 씨 찾아온 거지? 작정하고!”

    “앉아서 기다리세요. 같이 있으면 불편하실 테니까 전 안쪽 방으로 들어갈게요.”

    이름 모를 설우의 약혼녀가 골목길 구석에 흩뿌려진 오물이라도 본 듯 깔아 보아도 큰 눈을 도르르, 굴리며 친절을 베푼 연이 소파에 두었던 만화책을 챙겼다.

    “방이라니?”

    “네, 저쪽이요.”

    우습게도, 주희가 설우의 집무실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설우가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처음 발을 들인 그녀는 또 다른 방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하! 설마 회사에서도 그 짓거리 하니?”

    주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자존심이 상했다. 분을 못 이겨 소리를 꽥꽥 질러대는 여자의 콧구멍이 벌렁거리자 연이 웃음을 참느라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안 해요, 그런 거.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대답도 안 하고 어딜 가! 작정하고 찾아온 거 맞지, 너!”

    여자를 찢어 죽일 기세로 노려보다 보니 눈자위가 욱신거렸다.

    그날, 억지를 부려서라도 쫓아냈어야 했다.

    작고, 여리고, 하얗고. 남다른 금빛을 품은 여자는 누구라도 욕심낼 인형과 같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에 열등감이 차올랐다.

    “작정하고 찾아간 거 아니에요, 됐죠? 자세한 건 설우 오빠랑 이야기 나누세요.”

    주희가 모욕적인 말을 골라 시비를 걸어도 작게 미소를 지어준 연이 걸음을 옮겼다.

    주먹 쥔 손이 부들거렸다.

    상류 사회에 찌들어 속물이 된 저와 다르게 더럽고 나쁜 것은 모른다는 듯, 세상 순한 얼굴로 웃는 여자를 곱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오빠 회의 끝나고 오면 물어보시는 게….”

    최선의 대답이었다.

    제 이름을 찾아준 건 설우였고, 설우의 약혼녀란 사람 앞에서 멋대로 떠들 만큼 아는 게 많지도 않았다.

    “그 오빠 소리 좀 집어치워!”

    주희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연의 금발을 잡아챈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악!”

    설우의 집무실을 차지한 여자의 특별함을 견딜 수 없었다.

    반짝이는 눈알을 뽑을 순 없으니 머리털이라도 쥐어뜯자는 마음이었다.

    “야! 놔, 안 놔?”

    무방비하게 머리카락을 잡힌 연도 지지 않고 주희의 곱슬머리를 말아 쥐었다.

    저보다 큰 키가 버거웠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갑자기 머리채를 잡는 여자에게 순순히 당해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쪽이 먼저 잡았잖아요! 먼저 놔요.”

    가는 팔목이 부들부들 떨려왔지만, 놓치지 않으려 악을 썼다.

    여비서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회의실로 몰려간 탓에 둘을 중재할 사람이 없었다.

    주인 없는 집무실에서 육탄전이 펼쳐졌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에 당황한 주희가 머리카락을 쥔 양손을 마구 흔들었다.

    “설우 씨 옆에서 떨어져, 떨어지라고!”

    순간 다리가 풀린 연이 풀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때다 싶어 힘을 주는 주희를 따라 연의 고개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으, 잠깐…!”

    바닥을 구르던 연이 일어나려 노력했지만, 한쪽 다리로 시작해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어머, 웬일이야. 뭐 하시는 거예요!”

    설우와 동행한 비서실장에게 보고를 마친 여비서가 집무실로 돌아와 경악했다.

    처음에는 쌍방 폭행이었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주희가 일방적으로 연을 때리는 꼴이었다.

    갑자기 굳은 다리에 놀란 연은 이내 딸꾹질을 시작했다.

    “대답 안 해?”

    “이것 좀 놓으세요!”

    주희는 이미 눈이 멀어있었다. 이곳이 CH파라다이스의 사장실이란 사실도 잊은 듯했다.

    보다 못한 여비서가 끼어들며 주희의 팔을 잡았지만, 질투에 눈먼 여자를 이길 수 없었다.

    “대답하라고!”

    “놓으시라고요!”

    “…끅!”

    도떼기시장도 울고 갈 난장판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사, 사장님!”

    여비서가 가장 먼저 벌떡 일어났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을 마주한 설우가 실소를 뱉으며 가까워졌다.

    주희는 그제야 정신줄을 잡고 연을 놓아 주었다.

    “연아!”

    “엄마야!”

    허겁지겁 달려온 첸이 주희를 거세게 밀쳤다.

    뭐야, 설우 씨 여자가 아니었나?

    짐짝처럼 바닥으로 내던져진 것보다 연을 챙기는 첸이 더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친한 척 엉겨 붙어도 말대답 한 번 해주는 법이 없던 사람이 여자를 챙기니 혼란이 찾아왔다.

    “연아, 연아 왜 그래. 괜찮아?”

    연신 딸꾹질을 하는 연에게 달려간 첸이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첸, 이상해요.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끅!”

    “설우 씨, 일단 내 얘기 좀 들어봐요.”

    주희에게도 민망한 상황이었다.

    미친년처럼 머리가 쥐어뜯긴 건 저 또한 마찬가지인데.

    왜소한 여자는 일방적인 구타라도 당한 양 움직이지 못하고 딸꾹질을 해댔다.

    첸이 연신 연의 다리를 주물렀다.

    기면증 환자의 가장 위험한 증상 중 하나였다.

    감정적으로 심하게 동요되는 상황에서 근력손실이 발생하거나 짧은 마비가 올 수 있으니 주의 깊게 살피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우수수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빗어낸 연이 설우의 눈을 피했다.

    괜히 오겠다고 해서 말썽을 피운 거 같아 미안했다.

    “첸, 이든 들어오라고 해서 연이랑 병원 가.”

    “병원 가기 싫은데….”

    “밥부터 먹어야지. 배 안 고파?”

    한 움큼 모인 머리카락을 안타깝게 바라본 첸이 연을 일으켜 세웠다.

    “어? 이제 괜찮아졌어요!”

    발목부터 서서히 힘이 들어가자 기분이 좋아진 연이 바닥에 탁, 탁 발을 구르며 방글거렸다.

    이대로 움직이지 못하면 어쩌나 한껏 겁을 먹었었다.

    “아쉽다. 합법적으로 업고 나가려고 했는데.”

    첸이 짓궂게 웃으며 찰떡같은 연의 볼을 잡아당겼다.

    첸이 연을 위로할 동안 잠시 떨어져 화를 삭이던 설우가 정리가 덜 된 금발로 손을 뻗었다.

    “스테이크 먹기로 했었지. 첸이랑 먼저 가 있어. 병원은 먹고 나서 가자.”

    주희는 넋을 놓고 그들을 지켜봤다.

    연을 가운데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설우와 첸이 낯설었다.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한 주희가 곱게 발린 매니큐어를 잡아 뜯으며 손톱을 딱딱거렸다.

    설우의 여자라고 확신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가 모호했다.

    하도 붙어 다녀서 여자 취향도 같아진 건가?

    아니, 그것보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가 저렇게 가까울 수 있는 거야?

    “용건이 뭐야.”

    “네?”

    이방인이 되어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홀로 서 있던 주희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동안 첸과 연이 떠났다.

    상황이 모두 정리되자 답답한 숨을 뱉은 설우가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을 치켜떴다.

    “여기까지 찾아온 용건이 뭐냐고.”

    설우는 흔들림이 없었다. 집무실에서 벌어진 해괴망측한 싸움에 관해 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평소처럼 용건을 찾았다.

    네가 뭘 하든, 누굴 만나든, 어디에 있든, 전혀 관심 없다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제 여자를 건드렸다고 역정을 내는 것보다 더 비참했다.

    “당신이 집무실에 애인을 데리고 왔단 소문이 돌아서요. 신혼집 문제도 상의할 겸 들렀어요.”

    “오늘이 지나면 그쪽이 내 집무실에서 여자 머리채를 잡았단 소문이 돌겠군.”

    피식, 웃은 설우가 눈가를 긁적였다.

    주희는 거하게 불어닥칠 폭풍이 두려운지 어깨를 잘게 떨었다.

    다른 이슈가 터질 때까지 치욕스러운 관심을 받게 될 것이었다.

    “마, 막아주세요.”

    “싫은데.”

    “설우 씨, 내가 실수했어요. 당신 공간에 여자가 있다는 게 화가 났어요. 그것도 제이에서 봤던 여자잖아요! 날 보고도 뻔뻔하게 오빠, 오빠 거리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요?”

    예상만큼이나 불같은 성격이다.

    뒷일은 감당도 하지 못하면서 사고부터 치는 행동파. 사랑만 받고 자란 막내딸다웠다.

    연을 위해 세운 임시방패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상대하기 성가실 뿐.

    “계약서 잃어버렸나. 사본 만들어 줘? 어디서 그런 같잖은 핑계를 대. 한주희 씨는 내 사생활에 대해 화내고 따질 권리 따위 없잖아.”

    조롱기가 가득 담긴 말이었다.

    맞받아칠 대답을 찾지 못한 주희가 입을 다물었다.

    차설우와 결혼한다는 것은, 차설우에 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일이었다.

    지독한 모순이었다.

    “이만 가볼게요.”

    잔뜩 붉어진 눈시울이 애처로웠지만, 설우에겐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아, 잠깐.”

    설우를 등지고 멈춰선 주희가 두눈을 꼭 감았다. 배알 없이 굳어진 두 발이 원망스러웠다.

    “말해요.”

    “신혼집은 펠리체 8동이야. 짐을 옮기든, 마음대로 하라고.”

    “당신 집 1동 아니었어요?”

    홱, 뒤돌아 따지는 얼굴에 절망이 담겼다.

    “설마 같이 살길 바란 거야?”

    설우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치가 떨리도록 잔인했다.

    잔정도 없고, 피도 눈물도 없는 남자를 마음에 품은 제가 죄인이었다.

    시야가 흐려질 정도로 고인 눈물이 흐를세라, 핸드백을 구겨 잡은 주희가 집무실을 다급히 나섰다.

    “이걸 다 먹을 거야?”

    “네! 다 먹을 수 있어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 연이 포크와 나이프를 집었다. 4인용 테이블이 이미 음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안심으로 시작해 포터하우스까지.

    메뉴판에 적인 스테이크 종류를 모두 고른 연은 파스타에 수제버거, 피자까지 곁들어 주문을 마쳤다.

    먹고 싶은 건 전부 시키라고 했지만, 빼곡히 놓인 음식들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양이었다.

    “설우 오면 혼나겠는데.”

    연의 폭식 습관을 고쳐야 한다고 난리인 놈인데. 오자마자 잔소리를 하겠군.

    “오기 전에 몇 접시 비우면 돼요. 잘 먹겠습니… 우앗!”

    “오기 전에 뭘해?”

    소리 없이 다가온 설우가 황홀한 얼굴로 앉은 연의 이마를 툭, 건드리고 옆자리를 차지했다.

    “하하하, 빨리 오셨네요.”

    “영영 안 오길 바란 건가?”

    “그럴 리가요! 얼른 드세요, 식겠다.”

    “내가 사는 건데 왜 네가 생색을 내.”

    장난기 가득한 말에 입을 삐죽거린 연이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칼질이 제법 능숙해진 모양이었다.

    “적당히 먹어, 너. 폭식하면 내가 어떻게 한댔지?”

    “맛있는 거 안 사준다고요.”

    맞은편에 앉은 첸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뾰로통한 얼굴로 잔소리를 듣는 연은 지나치게 귀여웠다.

    “머리는 괜찮아?”

    “괜찮아요. 그리고 저도 뜯었어요, 이만큼.”

    “쪼끄만 게 어딜 덤벼. 다음번엔 그냥 도망쳐서 나한테 일러, 알았어?”

    “그럴게요.”

    어느새 볼을 가득 채운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정신병원 생활 때문에 생긴듯한 폭식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도토리를 저장한 다람쥐 같은 모습을 볼 때면 연신 웃음이 터졌다.

    “야, 근데 네 약혼녀 뭐냐. 거기서 애 머리채를 잡을 줄은 몰랐는데.”

    “미친 거지.”

    “나도 순간 열 받더라. 이든 있었으면 그 여자 한 대 맞았을지도 몰라.”

    “연아, 혼내 줄까?”

    “아뇨, 저도 같이 잡았다니까요. 많이 뽑았어요.”

    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생판 모르는 여자에게 머리채를 잡히고도 싫은 소리 한마디 없이 앞에 펼쳐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흥얼거리기 바빴다.

    이번엔 이걸 먹을까, 저걸 먹을까, 신이 난 연을 두고 눈이 마주친 두 남자는 잔잔한 아빠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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