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18화 (18/96)

18화.

차설우가 집무실에 여자를 데려왔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뻗어 나갔다.

CH와 현진의 압력이 두려운 언론사들은 기사 한 줄 쓰지 못했지만, 재계 여러 모임에선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차 회장과 화진은 물론, 한강일 시장과 주희에게도 소식이 전해졌다.

주희와 사적인 만남과 연의 존재를 맞바꾼 차 회장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만, 한씨 집안은 아니었다.

“차 사장 소문 들었지.”

“네, 들었어요.”

갓 지은 쌀밥을 한술 뜨려던 주희가 숟가락을 도로 내려놓았다.

“이 양반은 애 밥 먹는데, 쓸데없이.”

딸이 좋아하는 소고기미역국을 한가득 퍼오던 정 여사가 남편을 타박했다.

강일도 나름대로 속이 썩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이 남자 때문에 상처받는 꼴을 어떤 아버지가 가만히 두고 볼 수 있을까.

“누구야, 그 여자.”

“몰라요, 저도. 애초에 사생활 간섭은 않기로 했고요.”

“뭐? 이 계집애 미쳤나 봐. 그런 말 같지 않은 약속을 왜 해?”

왜긴, 이 결혼이 미치게 하고 싶어서였지.

저를 애지중지 키워준 부모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그런 바보천치 같은 짓을 해! 네 성격에 다른 여자 품은 남편 견딜 수나 있고?”

욕심 많고 질투 많은 딸의 불같은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똑똑한 딸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면서까지 결혼을 추진했을 줄이야. 어지간히 설우가 좋은 모양이었다.

“아빠도 좋아하셨잖아요. 대선 자금 나올 구멍 생겼다고.”

차 서방, 차 서방. 노래를 부르며 좋아하던 얼굴이 선명했다.

“차설우 사장이 아니어도 차선은 많았다. 차현우 전무나 현진그룹 박원호 상무도 나쁘지 않은 상대였어. 지금이라도 네가 마음을 바꾸면 내가 잘 이야기하마.”

“그래, 주희야. 결혼하면 돌이킬 수 없어. 차 사장 여자 핑계로 파혼 요구하면 CH에서도 조용히 넘어갈 거야.”

“집무실에 왔던 여자가 누군지도 모르잖아요. 저 설우 씨 포기 못 해요, 결혼까지 이제 두 달 조금 넘게 남았다고요. 결혼만 하면 다 괜찮아질 거예요.”

독기 서린 얼굴이었다.

주희가 고집을 부리자 정 여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잘 닦인 꽃길을 두고 왜 가시밭길을 걸으려 하는지.

정략결혼에 사생활 관여 금지는 이해타산적인 재벌가에서나 즐기는 방식이었다.

더군다나 쌍방이 같은 마음도 아닌데.

혼자 죽고 못 사는 딸을 착잡하게 보던 강일이 냉수를 들이켰다.

“남편 사랑도 못 받고 말라죽을 셈이야?”

“사랑받으려고 노력할 거예요. 아빤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봐 주세요.”

제 할 말을 마친 주희가 밥을 한 숟가락 가득 퍼 올려 입에 넣었다.

가난한 정치인의 딸로 사교계에서 온갖 무시를 당한 기억이 선명하게 남았다.

부가 동반되지 않은 명예는 그들의 세계에서 대우받지 못했다.

서울시장이 되고, 차기 대권 주자가 된 지금은 달랐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과 같았다.

처음 설우를 마음에 담았던 이유였다.

재계 1, 2위를 다투는 CH와 현진의 유일한 핏줄, 상류층 모임에서 가장 주목받는 권력자.

외모, 말투, 몸짓. 무엇하나 빠지지 않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무실에 데려왔다는 여자가 연인이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만일 설우에게 여자가 생긴다면 제가 무슨 짓까지 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

블라인드 틈새로 햇빛이 새어들었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있던 설우가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팔은 잔뜩 위로 올리고, 이불은 전부 밀어낸 연이 가장 먼저 시야를 채웠다.

10분만 보겠다는 게, 7시간이 되어 버렸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탓에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우음… 오빠?”

잠이 깬 연이 설우를 보았다.

아직 밤인가, 싶었지만 형광등도 켜지 않은 방안이 꽤 밝았다.

“좋은 아침.”

설우의 가벼운 인사에 연이 배시시 미소 지었다.

햇살을 받으니 그녀가 가진 금빛이 도드라졌다.

“왜 여기 있어요, 나 또 뭐 했나? 아닌데, 묶여있는데.”

“묶여있어도 자꾸 움직이던데. 잡아서 눕혀 줬는데, 이후로 두 번쯤 더 일어나더라고.”

“계속 여기 앉아있었던 거예요?”

“다칠까 걱정돼서. 실제로 다칠 뻔하기도 했지.”

묶어두는 것도 안전한 방법이 아닌 듯싶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짧게 묶어야 해요. 아예 움직일 수 없도록.”

사지가 묶인 채로 지낸 날이 많아 정말 괜찮은데.

설우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무거운 눈가를 문지르던 설우가 검은 천을 풀어주었다.

손목과 발목에 선명한 붉은 띠가 둘렸다.

“이 짓을 계속해야 한다고.”

“수면제를 더 많이 먹어 볼까요? 병원에선 반나절 정도는 잤던 거 같은데.”

“그런 말 좀 아무렇지 않게 하지 마. 약 많이 먹어서 좋은 거 없어.”

설우가 조심스럽게 연의 손목을 감쌌다.

“오빠, 그….”

“무슨 사고 쳤어, 편하게 말해. 안 혼낼게.”

“사고 친 거 아니에요!”

“그럼 뭔데.”

“오늘도 같이 나가면 안 돼요?”

연이 쭈뼛거렸다.

무언가 하고 싶다는 말을 먼저 꺼낸 것은 처음이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거절당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가득했다.

“왜, 또 짜장면 왕창 먹이려고?”

“아뇨! 안 되면 어쩔 수 없고요.”

“같이 나가, 회사 앞에 엄청 맛있는 스테이크 집 있어. 고기 사줄게.”

“와, 진짜요? 빨리 씻고 올게요!”

사소한 일에도 눈에 띄게 즐거워하는 덕분에 칙칙했던 집안의 활력소가 된 그녀였다.

연이 발발거리며 욕실로 들어가자 설우의 낯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방치해 일상생활조차 어렵게 만든 이들에게 향하는 분노가 날이 갈수록 커졌다.

그 어떤 죗값을 치르게 한들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

“이든!”

“잘 잤어?”

이든이 두 팔을 벌려 반기자 연이 거리낌 없이 그의 목에 매달렸다.

키가 큰 그에게 매달리면 꼭 놀이기구를 타는 것 같았다.

“연아, 오빠도.”

주방에서 나온 첸이 차례를 기다리듯 이든의 옆에 섰다.

“첸도 잘 잤어요?”

“응, 오늘 아침은 참치김치찌개야.”

“맛있겠다.”

연이 헤실거리며 첸의 품에 안겼다.

“우리 집 아침 인사가 포옹인 줄은 몰랐는데.”

설우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첸과 이든을 노려보았다.

“오빠도요?”

연의 말간 눈으로 돌아보자 설우가 저도 모르게 두 팔을 벌렸다.

“좋은 아침이에요.”

설우의 허리를 꼭 감아 안겼던 연은 목이 마르다며 다이닝룸으로 사라졌다.

“여기가 미국이야? 스킨십 자제해.”

“적어도 우린 불순한 감정은 없어. 그렇지, 형?”

“그럼. 처음 가져본 여동생이 너무 예뻐서 그런 거지. 누구처럼 흑심 품고 안기는 건 아니니까.”

첸과 이든이 한마음이 되어 설우를 놀렸다.

“그러니까. 열받게 하지 말라고.”

“어차피 형 결혼하면 연이는 우리랑 지낼 거잖아. 인사는 우리 마음이지!”

이든이 얄밉게 혀를 내밀자 설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여잔 펠리체 다른 집으로 들일 거야.”

“와, 대놓고 두 집 살림하시겠다?”

“어.”

태연하고 뻔뻔한 대답을 들은 첸과 이든의 턱이 아래로 떨어졌다.

“형 와이프 될 여자가 가만히 있을까?”

“가만히 안 있으면 좋고. 계약을 위반해야 파혼이든 이혼이든 할 명분이 생기지.”

계약서에 공증까지 되어 있는 사이였다.

머리 좋고 계산적인 설우가 제 입맛대로 얻어낸 결과물.

주희가 설우를 진심으로 원해 더욱 수월했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도 설우는 원하는 것을 얻어냈을 남자였다.

“차설우, 너 설마.”

“한주희와 혼약이 없었다면 할아버진 기를 쓰고 연이를 내 옆에서 치웠겠지, 두 번 다시 찾을 수 없게. 싸워서 지키는 건 한계가 있어. 논란은 되겠지만 이게 가장 안전하게 가는 길이야.”

정략결혼의 진짜 의도를 깨닫고 눈이 커진 첸에게 옅게 웃어준 설우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뭐야, 무슨 뜻이야?”

“연이를 데려오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했다는 뜻이지.”

못 만났으면 어쩌려고.

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줄은 알았지만, 약혼조차 그림 속 한 부분일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랬겠지! 오래전부터 찾았잖아.”

이든의 단순한 결론에 첸이 고개를 저었다.

“들어와, 밥이나 먹게.”

약혼을 방패로 내세워 연을 곁에 두고, 상대가 어길 수밖에 없는 조항으로 파혼의 명분을 챙긴다.

차설우 다운 방식이었다.

나와 나의 사람이 아닌 타인에겐 잔인할 정도로 이득만 취하는 타고난 사업가였다.

“자?”

“응, 깨울까?”

“아냐, 내가 안고 올라갈게.”

오랜만에 한 차를 타고 출근한 아침이었다.

연은 이든과 신나게 장난을 치다 잠들어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뒷좌석 문을 연 설우가 가뿐히 연을 안아 들었다. 그녀가 꽤 신경 써 만졌던 머리가 속절없이 흐트러졌다.

“안고 올라가게? 너 요즘 무지 핫하던데.”

모임에 퍼지는 소문을 전해 들은 첸이 웃었다.

“괜찮아. 이든, 넌 장세희 딸이랑 K건설 아들이 간다는 모임 좀 알아봐, 첸은 오늘 회의 들어가야 하니까.”

“꼬맹이 병원은 몇 시에 갈 거라고?”

“2시까지 들어와.”

“알았어, 올라가.”

가볍게 인사한 이든이 다시 운전석에 오르고, 이내 설우와 첸도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 나 또 잤어요?”

“응, 회의 가기 전에 일어나서 다행이네.”

태블릿을 챙긴 설우가 눈꺼풀을 비비는 연의 옆에 앉았다.

“첸이랑 이든은요?”

“첸은 먼저 회의실, 이든은 외근. 회의 2시간 정도 걸릴 거야, 끝나고 점심 먹자. 과자랑 음료는 미리 가져다 뒀으니까 먹으면서 놀고 있어.”

“네, 얌전히 있을게요.”

설우가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자 연의 눈꼬리가 예쁘게 늘어졌다.

“다른 사람 만나면 그렇게 웃지 마.”

“네?”

“질투나.”

짧게 속삭인 설우가 집무실을 나섰다.

그대로 굳어진 연이 설우의 빈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질투, 내가 아는 그 질투가 맞나? 아니면 다른 의미가 또 있는 걸까.

멍하니 눈을 끔뻑이던 연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설우가 속삭였던 귓가가 뜨거웠다.

그의 말보다 선명히 느껴졌던 숨결 때문에 잔뜩 경직된 것이었다.

진정되지 않는 심장 부근을 지그시 누른 연이 잠시 고개를 숙였다.

-안 됩니다, 아가씨. 사장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셨어요.

-나 누군지 몰라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장님께 미리 연락하고 오셔야 할 것 같아요.

-왜, 안에 누구 있어요?

-네? 아, 그게 그러니까….

-화장실 가느라 자리 비웠다고 해요. 내가 책임질 테니까.

낯선 여자들의 목소리로 문밖이 소란스러워지자 겁을 먹은 연이 벌떡 일어났다.

집무실 안쪽에 있는 방으로 몸을 숨기려는 찰나에 벌컥, 문이 열리고 주희와 여비서가 들이닥쳤다.

주희는 근사하게 찰랑대는 금발을 보자마자 경악했다. 설우가 숨겨줬던 여자가 분명했다.

“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

“네?”

연은 정신없는 상황에서 아주 잠깐 마주쳤던 주희를 기억하지 못했다.

주희를 막지 못한 여비서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나중에 받게 될 문책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선 빠른 보고가 필요했다.

“나 몰라? 차설우 약혼녀, 네가 들어왔던 룸에 설우 씨랑 같이 있었잖아.”

“아, 기억났어요! 그땐 감사했습니다.”

“하! 뭐? 아, 기억났어요?”

황당한 답을 들은 주희가 위협적으로 성큼 가까워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란 연이 두 손을 맞잡고 꼼지락거렸다.

“오빠 회의 들어가셨어요. 2시간 걸린다고 했어요.”

“오빠?”

“그게 말씀을 드리자면 좀 길어서. 설우 오빠한테 직접 들으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저기 음료수라도 드시겠어요?”

철판을 수백 장쯤 깔고 있는 수준의 뻔뻔함이었다.

주희의 입장에선 분노가 치미는 게 정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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