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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17화 (17/96)

17화.

파라다이스 본사 앞 식당가. 점심시간엔 파라다이스 직원들로 가득 차는 거리에서 답을 찾을 수 없는 스무고개가 시작되었다.

“그럼 외국인이란 거야?”

“아니! 한국인인데, 눈동자 색이 엄청 특이했어. 머리카락도 염색한 거 같진 않았고.”

“혼혈이라 하기도 좀. 색 빼곤 외국인 느낌이 전혀 없었거든.”

“나이는 어려 보인다고?”

“응, 20대 초반. 많아도 중반.”

“렌즈 끼고 염색했나 보네.”

연을 본 비서실 직원들이 모여 앉아 그녀의 정체를 추측해 나갔다.

먹음직스러운 돈가스가 식는 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누는 데 집중했다.

“김 비서님 뭐 아는 거 없어?”

“네, 사장님이 엄청 챙기신다는 것밖엔.”

“왜? 뭘 그렇게 챙기는데?”

“한 시간에 한 번씩 주스, 우유, 초콜릿, 과자까지 챙기시고 점심 땐 집무실로 짜장면을 시키셨어요.”

“헐, 대박.”

“숨겨둔 애인인가?”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머리를 옹기종기 모은 이들은 목소리 볼륨을 잔뜩 낮췄다.

“숨겨둔 애인을 회사에 데려온다고? 에이, 그건 아니지.”

“이미 애인이라고 소문 쫙 나긴 했어.”

“그나저나 차설우와 짜장면이라니. 소름 끼치게 안 어울려.”

파라다이스 직원들이 아는 설우는 귀족 그 자체였다.

타고난 핏줄과 더불어 곧은 걸음걸이에서 마저 귀티가 흐르는 그가 짜장면을 먹는 모습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같은 시간,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설우는 짜장면을 왕창 밀어 넣은 연을 혼내기 일보 직전이었다.

삼분의 일 그릇을 포크에 돌돌 말아 입에 넣으니 하얀 볼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면을 열심히 씹던 연이 아차 싶어 설우의 눈치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잘생긴 얼굴엔 불만이 가득 담겨있었다.

천천히, 조금씩, 꼭꼭 씹어 먹으라는 잔소리를 꼬박꼬박 들으면서도 고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죄송해요, 버릇이라.”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오빠 지금 눈으로 욕하고 있어요.”

“그렇게 먹으면 얹혀. 몸에 안 좋다고.”

탕수육을 집어먹은 설우가 짜장 소스가 잔뜩 묻은 입가를 손수 닦아 주었다.

“이렇게 먹으면 더 맛있어요. 오빠도 한 번 먹어보세요.”

제 입에 들어갔던 면만큼 그대로 포크에 감은 연이 그릇을 잘 받쳐 설우에게 내밀었다.

“이걸 다?”

“나도 먹었잖아요.”

“넌 먹보잖아.”

“그래서 안 먹을 거예요? 아, 팔 아파.”

“너 7년 동안 갇혀 있었던 거 거짓말이지. 하는 짓 보면 속세에 찌들었어.”

“밖에 나와서 배운 건데, 이든한테.”

“맛 없으면 가만 안 둬.”

기대로 반짝이는 눈을 이기지 못한 설우가 턱을 한번 주억거린 후 입을 크게 벌렸다.

“맛있죠, 맛있죠?”

그럴 리가.

씹어 넘기기도 버거운 양의 맛을 온전히 느끼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부정한 설우는 거대한 밀가루를 삼킨 후 물 한 컵을 전부 들이켜야 했다.

***

현태가 운전한 차에서 내린 상철이 마른침을 삼켰다.

뜬금없이 이든에게 걸려온 전화에 긴장한 그였다. 이든은 세희의 와인바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권상철입니다.”

“이든입니다. 스치듯 몇 번 봤겠죠?”

“네, 그랬을 겁니다.”

이든과 상철이 명함을 주고받았다.

별다른 직함이 없는 상철의 명함을 훑던 이든이 피식거렸다.

사람 일은 모른다더니. 이 남자와 마주 앉아 말을 섞을 날이 올 줄이야.

“다미 때문에 연락 주신 거죠?”

“맞아요, 원하는 거 말해보시죠.”

“무슨 뜻입니까?”

“사장님께서 권다미 양을 곁에 두시겠다네요.”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제 딸입니다. 병원이 싫어 도망친 거뿐이라고요. 당장 돌려 보내주세요.”

연을 딸이라 주장하는 뻔뻔한 상철의 턱을 한 대 갈기고 싶은 충동을 꾹 눌러낸 이든이 은쟁반을 들고 온 세희의 얼굴까지 확인했다.

설우가 계획한 일과 별개로 한 대씩 쥐어박아 줘야지.

“딸은 무슨, 친딸 아닌 거 알아요. 당신들이 정신병원에 강제입원 시킨 것도 알고, 다 늙은 노인한테 팔려고 했던 것도 압니다. 제값 쳐준다고 할 때 받으세요.”

“우, 우리 딸 금치산자예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장애가 심각해서 심신상실 판정받았다고요. 정신병원 입원, 법적으로도 문제없었어요.”

“평창동에 팔려고 했던 거 안다고요. 다미는 우리 사장님이랑 살고 싶다니까 그쪽 갖고 싶은 거 말하고 끝냅시다.”

“정말 다 들어주시는 거예요?”

“역시. 여사장님 계산이 빠르시네.”

“여보, 이게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상철은 창석 밑에서 일하는 입장이니 다미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지만, 세희는 달랐다.

누구에게 보내든 다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돈을 모조리 받아먹고 눈앞에서 치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쪽에서 안 보내겠다잖아. 우리도 잘한 거 없는데 경찰에 신고라도 해?”

“당신이 어르신 무서운 줄을 몰라서 그래.”

“다미는 어차피 평창동엔 못 갑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상의해보고 연락 드려도 괜찮을까요?”

가격을 고민하며 입술을 달싹이는 세희를 저지한 상철이 결정을 뒤로 미뤘다.

“엄마, 뭐해?”

엄마?

연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여자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권상철의 호적엔 분명 세희와 연, 둘뿐이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다음 수업 휴강이라. 이분은 누구셔?”

용건을 끝내고 선 이든을 새초롬하게 보던 여자가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연신 쓰다듬었다.

잘생긴 남자 앞에 서면 이상하게 몸이 베베 꼬였다.

“아저씨 손님, 이제 가실 거야.”

“이든입니다.”

“안녕하세요, 서연주예요.”

권상철의 딸이 아니군.

여자는 세희를 닮아 예쁘장한 편이었다.

걸친 건 전부 고가의 명품이었고 이곳저곳 관리도 충분히 받은 것 같았다.

“따님이 하나인 줄 알았는데요.”

“맞아요, 저 외동딸이거든요.”

“다미까지 둘이죠.”

이든이 빙긋 웃었다. 호의적으로 대해주면 멍청하게 나불거릴 타입의 여자였다.

“걘 아저씨 딸이고요. 그리고 정신병원에 있어요, 다미를 아세요?”

연에게 남겨진 돈으로 제 속으로 낳은 딸만 입히고 먹인 게 분명했다.

“연락드릴 테니 그만 가세요.”

“그러죠.”

연주에게 답을 주지 않은 이든이 계단으로 향했다.

“엄마, 나 카드 좀.”

“또 뭐 하게?”

“남자친구가 좋은 모임 소개해준다는데 입고 갈 옷이 없어.”

“얼마나 좋은 모임이길래 옷을 또 사?”

“K건설 아들이라고 했잖아. 그쪽 애들끼리 골프도 치고, 파티도 하면서 이런저런 고급 정보도 많이 교환한대. 엄마 좋아하는 주식도 물어볼게.”

“어머, 잘됐네. 그런 모임은 무조건 가야지.”

허영심 가득한 모녀의 대화를 듣기 위해 이든은 아주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장세희의 친딸 서연주, K건설.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작업의 시작이 꽤 재미있을 것 같았다.

***

위이잉, 전동 칫솔 소리가 욕실을 가득 채웠다.

네 대가 한꺼번에 돌아가니 소리가 클 수밖에.

익숙하게 움직이는 셋과 다르게 오늘 처음 전동 칫솔을 사용한 연은 스위치를 계속해서 다시 눌렀다.

“뭐해.”

“이를 닦는데 자꾸 머리가 울려요. 느낌도 이상하고. 이거 정상이에요?”

“원래 처음엔 그래.”

각자 방에 개인 욕실이 있었지만, 식사를 마친 이들은 모두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거실에 딸린 욕실은 세면대만 세 개가 달려 있을 정도로 컸지만 다 함께 이를 닦은 적은 처음이었다.

“우앗!”

“어우, 이거 뭐야!”

“야, 꼬맹이. 입에 넣고 전원을 켜야지.”

“눈, 나 눈 좀 봐봐.”

“어떡해. 첸, 설우 오빠 눈에 치약 들어갔어요!”

“너는 이제 큰일 났다.”

다시 치약을 올린 연이 생각 없이 전원 버튼을 누르자 강력한 음파에 치약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이를 헹구며 연을 보던 설우는 눈에 치약이 들어가 참혹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거울이랑 세면대도 닦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일 아주머니들 오시잖아.”

“그래, 치운다고 사고 치지 말고 나와라.”

헤어밴드에 달린 토끼 귀를 잡은 이든이 그녀를 욕실 밖으로 당겼다.

“귀 잡지 말라니까요!”

“잡고 싶게 생겼잖아.”

두 귀를 잡아 흔들자 힘없이 딸려가던 연이 이든의 팔에 매달렸다.

“으쌰.”

그녀를 가뿐히 안아 올린 이든은 그대로 연의 방으로 들어갔다.

설우와 첸 역시 뒤를 따랐다. 연을 처음 묶어두는 날이었다.

“로션 바르고 누워.”

부드러운 천을 대충 침대 위로 던진 설우가 연의 팔목을 슬쩍 주물렀다.

이제야 희미해진 자국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니.

“준비 다 됐어요.”

“정말 괜찮겠어?”

“괜찮아요.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것보다 낫잖아요.”

이불을 폭 덮은 연이 오른손과 발을 밖으로 꺼냈다.

착잡한 숨을 내쉰 설우가 기둥에 단단히 감은 천을 연의 팔목과 발목에 묶었다.

약간의 탄성이 있는 천을 몇 번 당겨본 연이 몸을 오른쪽으로 틀어 누웠다.

“됐어요, 다들 가서 자요.”

“너 잠들면.”

“너무 부담스러운데요.”

연의 분홍 소파에 앉은 세 남자는 각자 할 일을 하며 연을 힐끔거렸다.

“신경 쓰지 말고 눈 감아.”

“정말 괜찮은데.”

“이건 안 괜찮은 거야. 빨리 눈 감아.”

설우는 단호했다. 무엇이든 괜찮다고 하는 버릇부터 뜯어고쳐야 할 것 같았다.

“아, 맞다!”

곱게 누운 그녀가 벌떡 일어나 소리치자 여섯 개의 눈이 한곳에 모였다.

“왜.”

“약 안 먹었어요.”

“양치하기 전에 먹으라고 했을 텐데.”

“저럴 줄 알았다니까. 내려오지 말고 기다려, 가져다줄게.”

들쑥날쑥한 수면 시간부터 바로잡기 위해 처방받은 수면제를 잊은 것이었다.

연이 추천한 만화책을 보던 이든이 곧바로 방을 나섰다.

“약은 서랍에 넣어 둘게.”

“네!”

“왜 이렇게 해맑아.”

답답하게 묶인 손발 따윈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에 앉은 연은 연신 방글방글 웃었다.

정말 내가 선우연인 걸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도 돌덩이가 짓누르던 마음이 가벼워진 건 사실이었다.

설우가 애타게 찾던 이가 저라는데.

덩그러니 버려진 아이가 아니었다는 게 기뻤다. 그래서 즐거운 하루였다.

집에 혼자 있지도 않았고, 맛있는 짜장면도 먹었다. 설우의 집무실에서 놀다 보니 금세 해가 저물었다.

매일이 오늘과 같다면, 정말 행복하겠지.

“오빠도 좀 웃어요.”

설우는 검은 천으로 감싸진 연의 손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널 이렇게 재워야 하는데 웃음이 나겠어?”

“누가 보면 오빠가 묶인 줄 알겠어요.”

“그러니까. 너 온 뒤로 이 자식 완전 말랑해졌어.”

“말랑해진 게 뭔데요?”

“원래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거든. 근데 요즘 네 걱정 하느라 정신 못 차리잖아.”

태블릿으로 남은 업무를 보던 첸이 한마디 거들었다.

“자, 여기. 약하고 물.”

“고마워요, 이든.”

구겨진 설우의 미간이 펴질 줄을 몰랐다.

알약을 삼키는 일이 자연스러운 것조차 불만인 모양이었다.

“다시 누워.”

“다들 잘 자요.”

“잘 자.”

푹신한 솜이불을 끌어안은 연이 눈을 감자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고개를 젖힌 설우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돌아가면서 당직이라도 서?”

신경이 잔뜩 곤두선 설우를 대신해 형광등을 끈 이든도 자리로 돌아왔다.

첸이 준비한 향초 두 개가 작은 불빛을 내었다.

“내일 검진 결과 나온다니까 일단 들어 보고.”

“퇴근하고 갈 거지? 같이 가자.”

“그래, 내가 꼬맹이랑 있을게. 그나저나 회사에 데프콘 발령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누구든 잘못 걸리면 박살 나겠는데.”

이든이 눈을 감은 설우를 힐긋거렸다.

“그게 너일 거란 생각은 안 하나 봐.”

“푸흡…!”

킥킥 웃으며 물을 마시던 이든이 살벌한 말에 사레가 들려 옷을 적셨다.

이든은 진담 같은 농담, 설우는 농담 같은 진담이었다.

“연이 잠들었다.”

“다행이네, 약이 들어서.”

“얼마나 오래 잘 수 있냐가 문제인 거지.”

이든과 설우를 피해 일어난 첸이 고른 숨을 내쉬는 연의 잔머리를 슬쩍 넘겨주었다.

움직임이 전혀 없는 것을 보니 꽤 깊게 잠든 모양이었다.

“이든, 권 실장 만난 건 어떻게 됐어?”

“연락 주겠대. 근데 재미있는 걸 하나 발견했어. 연이 새엄마한테 친딸이 하나 있더라, 이름은 서연주. 나이는 연이랑 비슷해 보였어.”

“권 실장 딸은 아니고?”

“응, 하고 다니는 꼴이 엄마를 쏙 빼닮았던데. K건설 아들이랑 만나고 있고, 조만간 무슨 모임에 간다더라고.”

“그쪽에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자세한 건 나가서 얘기하자. 먼저 나가, 10분만 더 보고 갈게.”

이든과 첸을 먼저 보낸 설우가 침대 아래에 앉았다.

이곳에 자주 앉을 것 같으니 방석이라도 하나 사둘까, 하는 시답지 않은 생각을 관둔 그가 끈으로 조여든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풀리지 않고, 풀 수 없게 묶어야 했다.

그래도 최대한 노력했는데. 끈에 쓸려 여린 살이 붉어지는 중이었다.

“아프지.”

천사의 날개를 꺾어 묶어둔다면 이런 모습일까.

천천히 고개를 숙인 설우가 연의 팔목에 입을 대었다.

부드러운 살결이 닿자 저를 덮쳤던 말캉한 입술이 떠올라 목덜미가 후끈거렸다.

기분 좋게 간질이는 심장을 느낀 설우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역시, 동생은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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