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연이 종종걸음으로 설우의 뒤를 쫓았다.
‘진짜야.’ 단 세 글자가 주는 파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진짜라뇨?”
“뭐야, 찾았어? 야, 꼬맹이! 또 어디서 잔 거야,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어디 부딪혔나 봐, 무릎에 멍들었네.”
“대답 안 해주실 거예요?”
몰려드는 두 남자를 비집고 나아간 연이 설우의 옷깃을 잡았다.
“안 아파? 이거 봐, 집을 싹 다 뜯어고치면 뭐해. 위험한 건 똑같은데.”
“연아, 일단 아침부터 먹자. 오빠가 맛있는 거 많이 해놨어.”
첸과 이든의 정신없는 아침 인사가 이어졌지만,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네 이름 선우연 맞아. 우리 셋, 닮았단 이유로 생판 모르는 남한테 잘해줄 만큼 착하지 않고, 종일 곁에 붙어 있을 만큼 한가한 사람들 아니야.”
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란 건 이든과 첸이었다.
“이, 이해가 잘 안 가는데요.”
“이해할 필요 없어. 단순하게 생각해. 다른 건 천천히 알아 가면 돼.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네가 아침 먹을 시간이란 거야. 데리고 들어가, 이든.”
“자, 갑시다.”
이든이 넋 나간 얼굴로 선 연을 다이닝룸으로 밀었다.
충격적인 발언에 눈의 깜빡임이 현저히 줄어든 그녀는 힘없이 이든에게 딸려 들어갔다.
“갑자기 왜. 괜한 충격 받을까 봐 숨긴다더니.”
“눈칫밥 먹이는 게 더 나쁜 거 같아. 매번 밉보일까 전전긍긍하는 꼴 못 보겠어.”
“그건 연이 데리고 있던 사람들 탓이잖아. 자기가 선우연이란 걸 알게 되더라도 눈치 보는 건 똑같을걸?”
“우리가 주는 마음이 온전히 제 것이란 걸 느끼면 저 위험한 병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검사 결과 곧 나올 거야. 연이뿐 아니라 너도 천천히 할 필요 있어. 걱정되는 마음은 알겠는데, 너무 예민해. 사실을 털어놨으면 애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은 해줘야지.”
힘껏 쥐고 있던 주먹 안에 땀이 흥건했다.
이런 식으로 말할 생각도 없었고, 몰아붙여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는데. 경솔했다.
“화냈어, 놀랐을 거야.”
“이든이 알아서 잘 풀어 주겠지.”
“먼저 들어가 있어. 사진을 보여 주는 게 제일 빠를 거 같아.”
설우가 뒤를 돌자 첸은 다이닝룸으로 들어섰다.
“얘가 누군 줄 알아?”
“몰라요.”
“제주도에서 온 은갈치라는 앤데, 살이 포동포동하게 잘 올랐어.”
노릇하게 구워진 갈치 한 조각을 덜어온 이든은 턱을 한껏 치켜들어 연에게 눈짓했다.
다이닝룸으로 쫓겨나 뚱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연의 관심이 점차 이든의 젓가락으로 향했다.
스윽, 슥. 단 네 번의 젓가락질로 갈치 양옆의 뼈를 전부 말끔히 발라낸 이든은 등뼈 위로 붙은 커다란 살덩이를 연의 하얀 쌀밥에 얹어 주었다.
춤을 추듯 부드럽게 움직이는 쇠막대는 자신이 든 교정 젓가락과 차원이 달라 보였다.
“와.”
한결 풀어진 얼굴을 확인한 이든이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입에 다 먹어.”
내가 이렇게까지 단순했나.
먹음직스러운 생선을 앞에 두고 혼란스러운 감정들은 잠시 치워둔 연은 갈치 살에 묻힌 숟가락을 흔쾌히 입에 넣었다.
“맛있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 연이 엄지를 추켜세웠다.
고소함이 입안을 가득 채우며 살들이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맛있는 음식을 입에 물려주니 금세 기분이 풀리는 그녀가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이건 고등어, 이건 삼치. 발라줄 테니까 된장찌개도 먹어봐. 첸 형이 너 먹으라고 새벽에 일어나서 끓였어.”
장난기 많은 막내 오빠처럼 연을 돌보던 이든과 어울리지 않는 다정함이었다.
“맛있다.”
“이렇게 맛있는 거 먹으니까 좋지.”
“네.”
“펠리체에서 우리랑 지내는 것도 좋고.”
“네, 좋아요.”
“그럼 된 거야, 혼란스러워하지 마. 설명은 설우 형이 차근차근해줄 거고.”
“모르겠어요. 선우연이었으면 좋겠다고 느낀 순간들이 많았는데…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거든요.”
이든이 올려주는 반찬과 함께 밥공기를 비우는 데 집중하던 그녀가 감춰두었던 마음을 꺼냈다.
“어때, 맛있지?”
“네, 맛있어요.”
“많이 먹어.”
첸이 뿌듯하게 웃었다.
연은 뒤이어 다이닝룸으로 들어오는 설우를 살폈다. 첸의 고갯짓을 본 이든이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었다.
설우는 연이 밥공기를 다 비울 때까지 별말 없이 생선 살을 발랐다.
“죄송해요.”
“네가 왜.”
“자꾸 걱정하게 만들어서요.”
“아픈 거잖아. 사과할 일 아니야. 더 먹을래?”
“아니, 배불러요.”
깨끗이 비운 밥공기를 보고 설핏 웃은 설우가 챙겨온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나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설우의 목에 매달린 사진이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함박웃음을 짓는 아이는 분명 저였지만 뿜어내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너희 아빠는 선우재호, 할아버지의 비서실장이었어. 이쪽은 선우준, 네 오빠야.”
“내가 오빠한테 안겨있네요.”
전혀 기억나지 않는 얼굴들보다 저를 안아 든 설우가 가장 눈에 익었다.
“나만 졸졸 따라다녔었거든.”
“기억이 안 나요. 아빠도, 오빠도, 어린 시절도, 전부. 나 지금도 이렇게 웃어요?”
사진 속 자신을 한참 보던 연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예쁘고 사랑스러웠지만, 과거와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불행 속에 갇혀있던 탓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지금도 충분히 예뻐, 다른 건 천천히 하자.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나 더요. 잘 때 묶어주세요. 점점 더 심해지는 거 같아요. 오빠도 알고 있잖아요.”
알고 있다. 연이 자는 내내 붙어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녀가 다치지 않기 위해선 묶어두는 것이 최선이었다.
감금되어있던 아픔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연 때문에 잠시 화가 났었다.
“최대한 부드러운 끈으로 구해볼게. 불편해서 어떡하나.”
설우가 연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벌써 걱정이 앞섰다.
“낮에 회사 들어와 있을래? 심심하잖아.”
“그래도 돼요?”
“응, 와서 놀아.”
“그럼 빨리 씻고 올게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씻어. 욕실에서 넘어지면 큰일 나.”
“네.”
외출할 생각에 신이 난 연이 잠옷을 나풀거리며 달려나갔다.
“얘기 잘했어?”
거실에서 기다리던 이든과 첸이 곧바로 다이닝룸으로 들어왔다.
미뤄둔 아침 식사를 위해 첸이 밥을 퍼담았다.
“애가 워낙 순하잖아. 기억이 없어서 그런지 크게 충격받거나 하진 않네.”
“뭐라고 했길래 신나서 뛰어나가?”
“회사 와서 놀라고 했어.”
“진짜? 앗싸!”
밥을 떠먹던 이든이 환호성을 질렀다.
“괜찮겠어? 펠리체는 워낙 폐쇄적인 집단이니 밖으로 새지 않는다고 해도 회사에 데려가면 뒷말 많이 생길 텐데.”
“상관없어.”
“뭐 하고 놀지, 젠가를 챙겨가야겠다.”
“넌 오늘 외근이야.”
“말도 안 돼.”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이든이 숟가락을 내렸다. 한껏 들뜬 마음에 찬물이 쏟아 부어졌다.
“넌 일주일 동안 연이랑 놀았잖아, 일 좀 해.”
“뭐 해야 하는데? 빨리 끝내고 들어오게.”
“작업 들어갈 거야, 권상철 좀 만나.”
“만나서?”
“연이 내어줄 생각 없으니 필요한 거 전부 말하라고 해.”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 그들을 극한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뭘까.
둘을 어떤 식으로 처리할지 꽤 오래 고민했다.
“어쩌려고?”
“연이 새엄마, 주식에 도박까지 즐긴다며. 그 덕에 재산 탕진한 거고. 돈 생기면 다시 들이붓겠지. 첸은 VIP 투자클럽 하나 만들어둬. 이쪽으로 끌어들일 거야.”
“파라다이스 회원권도 챙겨주고. 그 여자 허영심 채울만한 것들도 준비해.”
미리 내려둔 커피로 입가심을 하는 세 남자의 곧은 시선에 비장함이 담겼다.
연을 고립시킨 이들을 단죄하는 데 자비 따윈 없을 것이다.
전용 엘리베이터로 올라오긴 했지만 설우의 집무실엔 드나드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덕분에 낯선 여자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깜짝 등장으로 회사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든 금발의 여자는 푹신한 흔들의자에 파묻혀 만화책에 온정신을 빼앗겼다.
-사장님 홍보팀 팀장들 올라왔습니다.
“들여보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들어와 책상 앞에 가로로 늘어선 이들은 번갈아 가며 연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연은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꼬박꼬박 고개 숙여 인사했다.
“1팀부터 간단히 보고하고 나가세요. 어지간하면 한 문장으로 끝내고.”
“내일 아침 파라다이스 여름 행사 홍보용으로 나갈 기사입니다. 읽어보시고 최종 컨펌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아요, 다음.”
“파라다이스 리조트 홍보모델을 배우 지하연에서 한서준으로 교체 예정입니다.”
“한서준?”
“예, 요즘 가장 이미지 좋은 배우 중 하나입니다.”
아는 이름이 나오자 연이 설우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것조차 거슬리는 설우는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내가 원래 이렇게 속이 좁은 놈이었던가.
연을 두고는 무작정 감정을 앞세우는 제가 우스웠다.
마지막 팀까지 보고를 마치고 집무실을 떠나자 설우가 연의 앞으로 다가왔다.
“재밌어?”
“네, 재미있어요.”
“혼자 잘 노네.”
“오빠 일하는 데 방해 안 되려고 조용히 있는 거예요.”
“점심 먹어야지. 먹고 싶은 거 있어?”
아침에 버럭 화를 냈던 게 미안한 설우는 평소보다 더 다정했다.
잠시 고민한 연은 보던 만화책을 돌려 그에게 내밀었다.
주인공이 윤기 나는 짜장면을 흡입하는 부분이었다.
“짜장면?”
“탕수육도.”
“알았어.”
자리로 돌아간 설우가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네, 사장님.
“짜장면 하나, 짬뽕 하나, 탕수육 하나. 바로 주문해요.”
-예? 그게 무슨….
“난 안에서 식사할 거니까, 주문하고 점심 식사하러 가고.”
-알겠습니다.
인터폰 너머의 목소리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비서실에서 가끔 나는 음식 냄새에도 역정을 내던 양반이 집무실에서 중화요리를 먹겠다니. 기겁할 일이었다.
“오전 업무는 전부 끝났으니까 이제 소파에서 봐.”
“네.”
으쌰, 하는 작은 기합과 함께 연이 일어났다.
흔들의자 아래에 쌓여있던 만화책들을 소파 테이블로 옮겨준 설우가 흐트러진 제 업무 책상을 대강 정리했다.
-저, 사장님.
“음식이 벌써 왔나.”
-아뇨, 로비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일정 없었잖아, 약속 잡고 다시 오라고 하세요.”
-백창석 의원이랍니다.
“귀찮게. 들여보내세요.”
-알겠습니다.
백사 같은 노인이 약속도 없이 찾아오다니.
손님이 온다는 연락을 들은 연이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흔들의자로 돌아갔다.
-사장님, 백창석 대표 도착했습니다.
가벼운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개량한복을 차려입은 노인의 사람 좋은 미소는 집무실 왼편에 앉은 여자를 보자 서서히 사그라졌다.
저는 겨우 사진 한 장뿐인데. 운 좋게 특별한 아이를 차지한 설우가 얄미웠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로.”
교묘히 뒷말을 자른 설우가 소파 상석에 앉아 손짓했다.
건방진 자식.
“차 사장이랑 점심이나 할까 했는데, 손님이 계시네.”
“아, 안녕하세요.”
게슴츠레 뜬 눈이 연에게 닿자 설우가 슬며시 시야를 가렸다.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식사 오기 전까지 10분 정도 여유가 있겠네요.”
“자네 손님 말이야….”
“연아, 방으로 들어가.”
창석이 대놓고 이야기를 꺼내자 설우가 손가락을 튕겨 연을 불렀다.
만화책 한 권을 든 연은 순순히 책장 옆의 문으로 들어갔다.
창석이 품에 끼고 있던 사진을 테이블로 올렸다.
팔이 묶인 채 병원 침대에 멍하니 앉은 모습이었다.
설우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나도 널 이렇게 묶어둬야 하는 건가.
“내가 먼저였네, 차 사장이 양보하지. 저 애 아비가 내 수족이야, 나한테 주기로 약속했고.”
그 자식이 연이를 이 더러운 노인네한테 팔아넘기려 했던 거였군, 감히.
“어쩌죠. 저는 제 손에 쥔 걸 놓아본 적이 없습니다.”
“허허, 이것 참 곤란하게 되었구먼.”
거짓 웃음이었다.
사진 속의 아이를 실물로 마주하니 한동안 잠잠했던 소유욕이 차올랐다. 희소성의 가치는 설우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욕심 버리세요.”
“몇 주 사이에 아주 푹 빠졌나 보군. 하긴, 금안을 가진 동양인은 사람을 홀리긴 충분하지.”
“충분하죠.”
굳이 과거의 인연을 털어놓지 않은 설우가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깊게 빨아들인 숨이 뿌연 연기가 되어 창석에게 흩어졌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눈엣가시였던 노인네를 치워낼 수 있다면 언제든 환영인데. 과연 명분을 만들어 줄는지.
“무슨 뜻인지 잘 알겠네. 차성태 회장님 시절부터 이어져 온 좋은 관계를 고작 여자 하나에 깨뜨릴 순 없지.”
창석이 한 수 물렀다.
욕망이 덕지덕지 붙은 채로 하는 말이 진심은 아니었다. 설우는 그의 비열함을 잘 알고 있었다.
-사장님, 식사 도착했습니다.
“현명한 선택하셨네요. 담배 한 대 피우고 가시겠어요?”
설우는 이미 제 담배를 다 태운 후였다.
짧아진 연초를 재떨이에 가볍게 비빈 설우가 담뱃갑을 내밀었다.
작정하고 덤비는 설우에게 말려 자존심을 구긴 창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럼 다음 모임에서 보지.”
“그러죠.”
철가방을 든 배달원이 들어오고 창석은 턱이 얼얼할 정도로 이를 악문 채 설우의 집무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