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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15화 (15/96)
  • 15화.

    입구 바로 옆, 외부 세면대 앞에 선 설우가 자연스럽게 넥타이를 둘렀다.

    전날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연은 침대 위에 앉아 출근 준비로 분주한 설우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굶는 거 잘한다더니 왜 이렇게 힘이 없으실까.”

    곁으로 다가가 앉은 설우가 복숭앗빛으로 물든 연의 볼을 문질렀다.

    “꿈을 꿨는데요.”

    연의 시선이 설우의 입술에 닿았다.

    부풀어 오른 아랫입술 끝쪽엔 본연의 색보다 붉은 상처가 도드라졌다.

    아니길 빌었는데.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에 눈을 질끈 감은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꿈.”

    복숭아에서 딸기로 접어드는 연을 보던 설우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담아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워졌다.

    “알, 알고 계시잖아요.”

    “모르겠는데. 아, 이건 자고 일어나니 생겼더군. 아직도 따끔해.”

    연이 숨을 들이쉬며 꿈속을 돌이켰다.

    분명 자기 전에 보았던 드라마의 한 부분이었다.

    드라마 ‘다시 만난 날’의 원우와 하정이 키스하는 장면.

    서로에게 안달하던 두 남녀가 자신과 설우로 바뀐 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를 봤고, 날렵한 턱선에 일자로 떨어지는 목을 감싸 안았고, 막무가내로 입술을 들이밀었지.

    분명, 내가.

    ‘네가 먼저 만지는 건 반칙이지.’

    야릇한 설우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윙윙 울려댔다. 그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드라마를 괜히 봤나 봐요.”

    “나도 한 번 봐야겠어. 물고 빨고, 지나치던데.”

    설우가 톡톡, 제 입가를 두드렸다.

    “죄송합니다. 약이라도 발라 드릴게요.”

    “아니, 만지지 마. 이미 인내심의 한계를 맛봤거든.”

    연의 목에 걸린 천사를 바로잡은 설우가 멀찍이 물러났다.

    태연하게 굴고 있었지만 착 가라앉은 목소리와 졸음이 담긴 눈이 그가 깊이 잠들지 못했음을 알려주었다.

    이든과 첸이라면 단번에 알아챘을 텐데.

    그들이 어제 펠리체로 간 것은 천만다행이지만 연의 수면상태를 체크하던 의사가 전부 지켜봤을 가능성이 컸다.

    만일 장 박사가 봤다면 두고두고 놀려 먹기 충분했다, 어제 일은.

    “오래… 는 안 했죠?”

    “네 꿈속에선 어땠는데.”

    “기억 안 나요. 내가 오빠한테 입술 음, 그거 빼고. 아! 네가 먼저 만지는 건 반칙이지, 이 말도 기억나요.”

    첸과 이든을 펠리체로 보낸 설우는 연이 잠들 무렵 침대 옆 간이 의자에 앉았다.

    제법 편안한 표정으로 잠든 그녀를 지켜볼 때의 일이었다.

    반쯤 풀린 눈으로 상체를 일으킨 연은 저를 발견하자마자 입술을 부딪혔다.

    놀라 굳었던 설우는 머지않아 그녀의 허리로 손을 뻗었다.

    예상만큼이나 달고, 맛있었다.

    제정신이 아님을 알면서도 부드럽고 말캉한 입술을 끝내 거부하지 못했다.

    제대로 된 방법을 알지 못해 물고 빨고를 반복하는 연을 대신해 진한 키스를 이어가던 설우는 발정 난 개처럼 달아오른 몸을 깨닫고 나서야 그녀를 놓았다.

    꿈이든, 잠꼬대든. 시작은 너였지만, 탐한 건 나였다.

    “반칙은 서로 하나씩 한 걸로 하자.”

    “전 안 했는데.”

    “그래, 넌 무의식이었으니 예외. 경고는 나만 받을게.”

    “오빤 무슨 반칙했는데요?”

    잠든 널 집어삼킬 뻔했지.

    “그건 비밀. 곧 이든 올 거야, 검사 잘 받고. 의사 선생님 말씀 잘 들어. 이든 말은 잘 안 들어도 돼.”

    “푸흡, 알았어요.”

    “저녁엔 밥 먹을 수 있으니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머리 위로 다정한 손길이 내려앉았다.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연의 머리카락을 두어 번 정리해 준 설우는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도 괜찮은데.”

    “안 돼.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안 먹어서 힘없어 못 걸어, 너. 검사 얼추 끝났으니까 빨리 상담 끝내고 뭐 좀 먹자.”

    “설우 오빠가 저녁에 맛있는 거 먹자고 했어요.”

    “형 언제 올 줄 알고. 간단한 거라도 먹어.”

    “오빠 오면 먹을게요.”

    “고집은. 알았어, 그러자.”

    정신의학과 상담실로 가기 위해 휠체어에 앉은 연이 고집을 부렸다.

    한동안 무서워하더니만. 이젠 꽤 친해진 모양이었다.

    “어! 원우다.”

    “응? 원우가 누구야. 네가 여기 아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와, 오늘은 알아보네요? 맞아요, 얘가 그 원우예요.”

    VIP 병동의 정신의학과 상담실 앞에서 다시 마주친 서준과 민준이었다.

    이든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구겼다. 설우의 잔소리가 여전히 귀를 맴돌았다.

    “봤어요?”

    “네, 이틀 동안 엄청 재미있게 봤어요. 다른 거 또 없어요? 추천해주세요.”

    “나 어땠어요. 연기 잘하는 거 같아요?”

    “제가 그런 건 잘 모르고요. 근데 눈앞에 원우가 서 있는 거 같아요.”

    휠체어에 앉은 탓에 한참 아래 있는 연을 위해 서준이 쪼그려 앉아 눈을 맞췄다.

    “즐겁게 봐줘서 고마워요. 번호 알려 줄래요? 나 재미있는 드라마 줄줄이 꿰고 있어요. 추천해줄게요.”

    “번호요?”

    “네, 전화번호.”

    서준이 자연스럽게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

    “이든 번호 알려줘요.”

    “싫어. 재미있는 드라마 내가 알아 올게.”

    “어쩌죠, 제가 휴대 전화가 없어서.”

    “휴대 전화가 없다고요?”

    뒤에선 민준이 한껏 놀라며 다가왔다.

    “네.”

    5G 시대에 스마트폰이 없다니.

    한참 휴대 전화를 끼고 살 나이로 보였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예쁜 카페에 간 것을 카메라에 담아 SNS에 자랑하기 좋아할 나이.

    수백만 원짜리 병실에 입원한 여자가 휴대 전화가 없다는 것이 의아한 서준이 이든을 올려봤다.

    “뭐요, 왜 그렇게 봅니까?”

    “아닙니다. 그쪽 번호라도 주시죠.”

    서준은 연과의 인연을 놓고 싶지 않았다.

    저를 보는 수만 개의 시선과 닮지 않는 말간 눈동자를 계속 마주하고 싶었다.

    “비켜 주시죠, 상담 시간이 지나서.”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듯 서준을 깔아본 이든이 휠체어를 다시 밀기 시작했다.

    “형, 명함 좀 줘.”

    “명함? 뭐 하게. 엊그제 못 봤어? 저 키 큰 싸가지가 뺏어가는 거.”

    “내 드라마 봤다잖아. 그럼 받을 거야.”

    민준에게 받은 명함 뒷부분에 제 번호를 적어 넣은 서준이 이제 막 상담실로 들어서는 연을 불러 세웠다.

    “내 번호예요.”

    “아니, 이봐요.”

    “이든, 그만요. 나 이거 받으면 안 돼요?”

    “뭐 하려고, 설우 형이 싫어할 거야.”

    설우가 싫어할 거란 말에 조금 망설였지만, 연이 눈치를 보며 서준이 내민 명함을 받았다.

    “오빠들 말고 처음 만난 사람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드라마가 정말 재미있었어요. 원우도 멋있었고, 하정이도 예뻤고요. 그래서 그냥 받고 싶어요.”

    “그래, 알았어.”

    연의 보호자를 자청하고 있었지만, 끝까지 말릴 권리는 갖고 있지 않았다.

    새 친구를 사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온 세상에 얼굴이 팔린 배우니 다른 의도를 가질 리도 없고.

    “심심하면 연락해요.”

    “네, 그럴게요.”

    연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사라지자 어느새 서준을 따라온 민준이 고개를 내저었다.

    “홀린다, 홀려. 사람을 완전히 홀리네, 저 애.”

    “이쪽으로 끌어들일 생각 마, 안 어울려.”

    “본인이 나서지도 않는데 내가 무슨 수로 끌어들이냐. 그리고 여기 있는 거 하며, 옆에 붙은 가드 하며. 데뷔하자고 못 꼬셔, 저런 애들은. 어디가 아픈지는 좀 궁금하네.”

    민준이 서준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서준의 상담 결과는 무난한 편이었다. 관심을 먹고 사는 연예인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문제였다. 관리만 잘하면 우울증으로 나아갈 일은 없을 것이었다.

    ***

    처음 가진 예쁜 방의 높은 천장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진짜 선우연이 나타나면 난 어떻게 되는 걸까.

    첸도, 이든도, 설우 오빠도. 선우연이란 여자를 대신해 그녀를 닮은 제게 정을 주는 것일 텐데.

    그 여자를 찾으면 갈 곳을 잃게 될 것이 두려웠다.

    욕심인 걸 알지만 이 집에서, 내 방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녀 혼자만의 쓸모없는 불안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드러났다.

    “없어?”

    “없어.”

    “나도 못 찾았어. 어딜 간 거야, 새벽에 밖에 나간 거 아냐?”

    “보안팀에 감시 카메라 확인하라고 했어.”

    초조함이 감춰지지 않았다. 지나치게 넓은 펠리체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퇴원 후 집으로 돌아온 지 3일째.

    별다른 증상 없이 평온했던 날들은 폭풍전야일 뿐이었다는 듯, 연이 감쪽같이 사라진 아침이었다.

    2층 방과 지하, 차고까지 전부 뒤지고 돌아온 이든과 첸 역시 설우와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가끔 다른 방에서 나타날 때가 있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찾지 못한 것은 처음이었다.

    “네.”

    -1호 출입은 전혀 없었습니다.

    “하아. 네, 알겠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설우가 이마를 여러 번 문질렀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니 천만다행이었다.

    “집 안에 있어. 다시 한번 찾아보자.”

    차가운 생수를 들이킨 설우가 연의 방으로 돌아가려다 우뚝, 제자리에 멈췄다.

    덩달아 길이 막힌 첸과 이든도 연이어 걸음을 세웠다.

    “왜?”

    “서랍, 옷장, 이불장. 연이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공간은 전부 열어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드레스룸으로 달려간 설우가 양쪽 벽을 가득 채운 옷장의 문을 전부 열어젖혔다.

    “젠장,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드레스룸의 옷장은 연이 충분히 들어갈 법할 크기였지만 정작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집 안에 있음을 알면서도 눈으로 보지 못한 탓에 거칠게 요동치는 심장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방과 연의 방, 이불장까지 모조리 뒤집어엎은 설우가 서재로 향했다.

    아직 조용한 것을 보니 첸과 이든 역시 허탕을 치고 있는 듯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책이 꽂힌 책장을 지나 나타난 벽장을 열자 꽃향기를 품은 백금발이 눈앞으로 흩어져 내렸다.

    문에 기대어있던 머리가 제자리를 잃고 설우의 복부로 힘없이 떨어졌다.

    도저히 잠들 수 없는 구겨진 자세로 꿈속을 헤매는 연을 발견한 설우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아직 이 집에 적응하지 못한 건가.

    설우는 연이 이런 잠자리를 찾는 이유가 궁금했다.

    넓은 곳이 싫어 좁은 곳을 찾는 건지, 푹신한 매트리스가 낯설어 바닥에서 자는 건지.

    안아 옮기려 움직인 기척에 연이 눈을 깜빡였다. 제대로 자지 못해 잔뜩 부은 눈꺼풀이 안쓰러웠다.

    “오빠?”

    ‘오빠?’

    아주 오래 묻어둔 기억과 함께 어릴 적 그녀의 모습이 스쳤다.

    넘치는 사랑을 받아 늘 빛나는 얼굴로 날 부르곤 했었지.

    ‘오빠, 설우 오빠!’

    “응.”

    “여긴 옷장일까요?”

    “심지어 서재 옷장이지. 쓰지도 않는 거라고.”

    몸집이 작은 저도 간신히 몸을 집어넣을 만큼 협소한 공간이었다.

    칸막이에 머리를 수십 번쯤 박아도 이상하지 않을 공간.

    연의 앙상한 무릎엔 이미 보랏빛 멍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역시 묶여있는 게 좋겠어요.”

    “뭐?”

    “처음엔 왜 이렇게까지 하나 궁금했어요. 병원 들어가기 전에 엄마도 절 묶어뒀었거든요. 그래서 잘 몰랐어요, 그냥 묶여 있어야 한다는 거밖엔. 자유가 생기고 막상 제 모습을 직접 보니 조금 무서워요.”

    어두운 공간을 슥, 둘러본 연이 설우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잠들기 전에 했던 생각 때문일까. 이런 곳으로 기어 들어온 건.

    “아침 먹어야지. 첸이 된장찌개 끓였어.”

    “기다란 끈 같은 게 어떨까요? 내 방에서 거실까지 갈 수 있게. 그럼 의미 없으려나.”

    “소시지도 구웠대.”

    “병원에선 엄청 빡빡한 걸로 묶여 있었어요. 영화에서 자주 나온다던데. 쇠사슬도 달그락, 달그락.”

    “손 먼저 씻어야겠다. 먼지투성이야.”

    “아니면 화장실만 편히 갈 수 있게….”

    “그만 못해? 너한테 목줄이라도 채우라는 거야?”

    계속해서 딴소리만 하던 설우가 버럭, 화를 내자 화들짝 놀란 연이 입을 벌렸다.

    “왜 화를 내요? 이런 식으로 폐 끼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거죠. 난 진짜 선우연도 아닌데.”

    “진짜야.”

    “네?”

    “네가 진짜 선우연이라고. 나와, 애들 걱정해.”

    연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아니면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만일 둘 다 아니라면, 저 비정상적인 대답은 대체 뭐지?

    연이 멈칫한 사이 설우는 이미 서재를 나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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