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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14화 (14/96)
  • 14화.

    갑자기 쓰러진 여자를 보고 매우 놀란 건 민준이었다. 연예계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욕심낼 인재였다.

    낯선 여자를 품에 안은 서준이 어쩔 줄 모르고 그녀를 안고 있을 때 소리쳤던 남자가 도착했다.

    잡아 달라고 할 땐 언제고 적대심을 가득 품고 연을 빼앗듯 데려간 이든이 삐딱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어디가 많이 안 좋으신가 봐요?”

    직업 특성상 붙임성이 좋은 민준이 방긋 웃었다.

    건강이 매우 나쁜 게 아니라면 명함을 한 장 건네 볼 작정이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이든!”

    두 눈을 번쩍 뜬 연이 이든을 반겼다.

    “깼어? 놀랐잖아, 말도 없이 나가면 어떡해. 설우 형 알면 넌 죽은 목숨이야.”

    바닥에 내려주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하자 연이 울상을 지었다.

    설우가 이 상황을 안다면 아마 30분 이상 잔소리를 하겠지.

    “말할 거예요? 간호사 언니가 여기 테라스가 엄청 예쁘다고 해서 진짜 잠깐 보기만 하고 오려고 했어요.”

    “너 하는 거 봐서. 인사해, 너 잡아 주셨으니까.”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서준과 민준에게 각각 감사 인사를 전한 연이 구겨진 환자복을 탁탁 털어냈다.

    그사이에 잠이 들다니. 병원에 있을 땐 몰랐던 기면증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저기….”

    “네?”

    “얘 몰라요?”

    서준의 얼굴 앞에 손바닥을 받친 민준이 진심으로 놀라 물었다.

    쓰러졌던 여자가 5분도 지나지 않아 깨어난 것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었다.

    60대 이상이 아니고서야 열이면 열 모두 그를 알 거라 생각했는데.

    키 큰 남자는 물론이고, 한창 잘생긴 배우를 좋아할 나이로 보이는 여자까지 서준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처음 본 사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드라마 ‘다시 만난 날’, 5년 전에 시청률 사십 퍼센트가 넘는 국민 드라마였죠. 영화 ‘제한구역’, 2년 전 칸에서 남우주연상 받았고요. 작년 의학 드라마 ‘신경외과’로 연기 대상 탔습니다. 배우 한서준, 모르세요?”

    “저는 잘 몰라요.”

    가슴을 확 트이게 해주는 한강을 구경하고 들어온 연이 헤실거렸다. 서준이 한참 아래 있는 그녀를 깔아보았다.

    저를 알아보는 시선 때문에 슬럼프가 왔는데, 전혀 모른다는 사람을 만나니 기분이 묘했다.

    “너 아직 덜 유명한가 봐.”

    민준이 킥킥 웃으며 서준을 놀렸다.

    “이든은 알아요?”

    “글쎄, 본 적 있는 거 같기도 하고.”

    “나 병실에 틀어주세요. 드라마 볼래요.”

    “알았어, 일단 들어가자.”

    이든이 연의 어깨를 감쌌다.

    병실로 돌아가기 전 꾸벅 인사하는 연을 뚫어져라, 관찰하던 민준이 결국 명함을 꺼내 연에게 내밀었다.

    “뭡니까.”

    분명 여자에게 건넸던 것을 가로챈 남자가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준 엔터 대표 한민준입니다. 배우, 가수, 모델 가리지 않고 키웁니다. 관심 있으시면 연락 부탁드려요.”

    “그런 거 못 합니다, 할 필요도 없고요. 그럼 이만.”

    손에 들었던 명함을 다시 돌려준 이든이 슬쩍 연을 밀었다.

    “한서준이에요, 내 이름.”

    “아, 전 선우연이요.”

    이젠 제법 입에 붙은 이름이 편하게 흘러나왔다.

    연은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이든은 자꾸 그녀에게 말을 붙이는 두 남자가 거슬렸다.

    “내 드라마 보고 다시 만나요. 날 전혀 모르던 사람이 내 작품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네요. 난 A8호에 있어요.”

    이든의 미간이 한층 더 구겨졌다.

    저 멀대 같고 하얀 놈이 옆방이라니.

    “전 A7호에 있어요. 드라마 꼭 보고 어떤지 말해 줄게요.”

    연은 오늘도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었다.

    따스한 봄 같은 미소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건 이든 뿐만이 아니었다.

    낯선 남자 둘은 신비로운 눈동자를 한동안 떨쳐내지 못했다.

    ***

    -손님 도착하셨습니다.

    화려한 조화가 길을 밝힌 원목 복도를 걸어온 설우가 미닫이문이 열리는 것을 기다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7시 30분이니 8시 30분에 일어나면 되겠군.

    약속 시각보다 30분이나 늦은 상황이었지만 그는 어서 병원으로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스르르, 문이 열리자 아래로 향했던 설우의 시선이 따라 올라갔다.

    “왔니?”

    “왔어요?”

    마주 보고 앉아있던 두 여자 모두 설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설우가 헛웃음을 지었다.

    제 모친인 화진과 주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둘 중 누구의 옆자리도 선택하지 않은 설우는 문 앞에 우뚝 선 채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어머니 옆에 앉아요. 두 분 식사 오랜만이라고 들었어요.”

    주희가 생긋 웃으며 화진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왜 여기 계세요?”

    수트를 옷걸이에 걸어 두고 결국 화진의 옆에 궁둥이를 붙인 설우가 하얗게 빚은 물잔을 들었다.

    “왜긴, 밥 먹으러 왔지.”

    “한가하신가 봐요.”

    “너야말로.”

    설핏 웃은 화진이 샐러드를 휘적거렸다.

    복 샐러드라 했던가. 튀김옷을 입은 새하얀 살덩이가 꽤 입맛을 당겼다.

    주말을 뺀 한 주의 중간, 수요일엔 화진도 피로를 느꼈다.

    오랜만에 이른 퇴근 준비를 마쳤을 무렵 주희의 연락을 받았다.

    성가시게 말을 붙이는 그녀에게 슬슬 짜증이 오를 때 설우와 함께 식사하자는 한 마디가 마음을 가라앉혔다.

    “제가 연락 드렸어요, 괜찮죠?”

    제 모친을 앉혀두고 괜찮죠, 라니.

    화진을 이미 측근으로 끼고 있다고 착각하는 듯했다.

    모자의 대화에 끼어든 주희가 작은 사케 병을 들었다.

    천천히 병을 돌려 바닥에 깔린 금가루를 띄운 그녀는 꽤 먼 거리를 좁히며 화진의 술잔을 채웠다.

    “너는?”

    “안 먹습니다.”

    “그럼 예비 며느리랑 둘이 먹어야겠네.”

    화진이 병을 받아 들자 냉큼 잔을 든 주희가 예의를 차렸다.

    예비 며느리라는 호칭에 함박웃음을 지었지만, 화진은 그저 설우를 놀리기 위해 고른 단어일 뿐이었다.

    “그러지 말고 한 잔만 해요, 설우 씨. 할아버님께서 권하신 자리인데 구색은 갖춰야죠.”

    그럼 그렇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시간을 내줄 리가 없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화진이 짜증이 잔뜩 오른 설우를 확인하고 피식거렸다.

    내장과 살이 잘 발라진 게장이 부드럽게 넘어갔다.

    계기가 무엇이건 아들과 함께 하는 식사가 평범한 일상을 선물 받은 것 같았다.

    현진그룹의 장녀란 타이틀을 달고 나와 꽃길과 먼 인생을 살았다.

    재력은 부족하지 않았지만, 재력을 뺀 모든 것들이 부족했다.

    가족의 정도, 진한 사랑도, 예쁜 우정도 한 번 가져보지 못하고 피폐한 삶을 살았기에 설우에게도 똑같이 그 피폐한 삶이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니, 평범한 삶을 주지 못한 미안함과 돈과 명예에 얽매여 함께하지 못한 날들에 대한 후회가 생겼다.

    “한 잔만 해요, 네?”

    피아니스트라더니, 어쩜 저렇게 센스도 없고 눈치도 없을까. 애가 너무 감상적이어서 그런가.

    “파라다이스 성수기 행사 준비는 잘 되어가니? 한창 바쁠 시기잖아.”

    설우가 싫어하는 짓만 골라 해대는 주희를 비웃은 화진이 화제를 돌렸다.

    대놓고 외면 당한 주희가 쭈뼛거리며 사케 병을 내렸다.

    “작년이랑 비슷해요.”

    “그래, 파라다이스에서 매출을 잘 뽑아야 CH가 그 자리 유지하지. 파라다이스 아니었으면 진작 우리한테 잡혔을 텐데.”

    “머지않아 현진이 1위로 올라설 겁니다.”

    “어머. 지금 칭찬하는 거니?”

    “이게 어떻게 칭찬입니까, 사실이지.”

    설우의 접시에 선홍빛의 두툼한 뱃살 한점을 올려준 화진이 말을 이어갔다.

    “하여튼 그 노인네 고집 알아줘야 해. 후계자는 무조건 장남인 시대가 지난 지가 언젠데. 깜냥도 안 되는 걸 앉혀 놓으니 매출이 계속 떨어지지.”

    “업계 2위로 내려앉으면 마음 바꾸시겠죠.”

    “여유롭네?”

    “결국엔 제가 가질 테니까요.”

    그래, 야망은 날 닮았지.

    “말씀 중에 죄송한데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뭘 그런 거까지. 편하게 다녀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다.

    부모, 자식 간의 정 따윈 없는 집안이라고. 그래서 끼어들었다.

    중재자 역할을 해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보려고 했는데.

    타고난 서늘함을 빼면 둘의 사이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제가 주도한 자리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 주희가 암울한 얼굴로 문을 닫았다.

    “쯧, 딱 네 할아버지 취향이네. 고분고분 순종적이고, 머리 나쁘고.”

    “마음에 든 줄 알았는데요.”

    “누가, 내가? 쟤를? 그럴 리가. 딱 싫어하는 스타일이잖니, 온실 속 화초.”

    “그럼 여긴 왜 오셨어요?”

    “너랑 밥 먹으러 왔지.”

    당연하게 나온 대답에 설우가 실소했다. 화진과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었다.

    “할 말 있으세요?”

    “만들면 있지. 답지 않게 시간 낭비를 하는 건 애인 때문에?”

    “할아버지한테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는 내주어야 하니까요.”

    “조용히 놀아. 왜 내 호텔에서 여자를 안고 다니니? 누가 알아보고 소문 키우면 어쩌려고. 네 약혼녀가 들으면 좋을 거 하나 없는데.”

    “노는 거 아니고, 애인도 아닙니다.”

    딱히 먹은 것도 없이 젓가락을 내려둔 설우가 식사를 마쳤다.

    한층 까칠해진 목소리로 답한 그는 버릇처럼 손목을 털어 시간을 확인했다.

    처음 정했던 시간이 되려면 20분을 더 앉아있어야 했다.

    “뭘 참아, 그냥 가지.”

    “할아버지랑 입씨름하기 싫어요.”

    “오늘은 나 있잖아. 내가 입단속 잘 시켜줄게.”

    지나치게 호의적인 화진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잠시 고민하던 설우가 수트 재킷을 집었다.

    “가볼게요.”

    “그래,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하고.”

    방긋 웃는 화진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설우는 곧바로 방을 나섰다.

    ***

    수려한 외모의 배우들이 브라운관을 가득 채웠다.

    민준이 말한 드라마 ‘다시 만난 날’의 마지막 회차를 앞두고 있었다.

    기억을 잃었던 남자가 곁을 맴돌던 여자를 알아본 장면.

    감정이입이 지나친 탓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던 연은 제 오른쪽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왜 소파에 있어.”

    “드라마 보려고요, 진짜 재미있어요. 지금 원우가 하정일 기억해 냈거든요. 너무 슬퍼요.”

    “저건 뭐야.”

    “이든이요. 지루하다더니 잠들었나 봐요.”

    “옆으로 가, 같이 보게.”

    환자 침대를 차지하고 잠든 이든을 한 번 노려본 설우가 연의 옆에 앉았다.

    “이거 봤어요? 지금 15횐데. 오빠 이게, 저 남자가 여자를 좋아했는데 사고가 나서 기억을 잃었거든요? 근데 3년 후에 마주쳐서 다시 사랑….”

    착각이겠지, 했는데 자꾸 느껴지는 시선에 드라마 줄거리를 늘어놓던 연이 고개를 돌렸다.

    저를 빤히 보는 설우를 따라 금빛 눈동자가 깜빡였다.

    “그렇게 닮았어요?”

    “뭐?”

    “진짜 선우연이랑요.”

    “응, 똑같이 생겼어.”

    “많이 보고 싶으신가 봐요.”

    첫사랑 같은 걸까. 아니면 오늘 본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사랑했던 사이일까.

    열띤 눈길을 받고 있으니 문득 궁금해졌다. 누군가에게 애틋한 존재로 남았다는 게 참 부러웠다.

    “많이 보고 싶었지, 빨리 찾고 싶었고.”

    곧고 서늘한 눈매가 지독하게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설우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눈을 맞추던 연의 볼이 천천히 붉어졌다.

    꼭 저를 향해 말하는 것 같아 절로 답이 튀어나왔다.

    “왜요?”

    “가장 불행하고, 무서웠을 순간에 돌봐주지 못했거든. 친동생 같은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듣던 연이 이상한 포인트에서 말이 끊기자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묘했다. 처음 다시 만난 그때부터 몸을 감싸는 묘한 이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

    아름다운 눈, 앙증맞은 코, 붉은 입술. 만지고 싶다 느낀 순간 이미 동생은 아니었다.

    탐스러운 눈동자를 향해 손을 뻗자 연이 본능적으로 한쪽 눈을 감았다.

    “만지면 돌이킬 수 없겠지.”

    “네?”

    “3년 후에 마주쳐서 어떻게 됐는데.”

    “아, 아아. 다시 만났는데, 기억을 잃고도 똑같은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거예요. 이 드라마 남자 주인공 진짜 이름이 한서준이래요. A8호에 입원했는데 키가 이든이랑 비슷해요.”

    “만났어?”

    설우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다른 사람을 만난 건 그렇다 쳐도 이름을 안다고?

    “아, 그게 아까 테라스 구경하고 오다가 복도에서 잠들었거든요. 저분이 받아 주셨대요.”

    “이든은 뭐하고. 너 설마 혼자 나간 건 아니지.”

    이런저런 설명을 하다 보니 설우에게 전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제 실수를 깨달은 연이 울상을 지었다.

    “아주 잠깐이었어요.”

    “혼자 나가 돌아다니다 잠들었고, 저 남자가 널 받았고, 안면을 텄고, 그 남자가 나온 드라마를 종일 본 거고?”

    짜증스럽게 목덜미를 주무른 설우가 벌떡 일어나 침대로 다가갔다.

    “일어나, 이든.”

    “아, 왜에… 언제 왔어?”

    “애 잘 보라고 휴가 줬더니 남의 손을 태워? 이게 죽을라고.”

    이든을 툭툭 건드리던 설우는 그가 끌어안은 이불을 우악스럽게 걷어냈다.

    “형, 그게 잠깐 펠리체에 다녀왔더니… 아니, 아니다. 그래, 이건 내 죄야.”

    연이 멋대로 나가 돌아다녔다고 변명하려던 이든이 눈꼬리를 늘어뜨린 그녀를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혼나기 싫다고 저 여린 강아지를 던질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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